[9월베스트선정-독서후기] 복거일의 '보이지 않는 손'  
병장 허기민   2008-09-19 11:27:04, 조회: 348, 추천:1 

  일본의 유명한 불륜(?!) 소설이라는 ‘실낙원’을 빌리기 위해 도서관을 갔다가 어찌어찌 일이 꼬여 복거일 씨의 최신작(나름 2006년 출판) '보이지 않는 손'을 빌렸습니다. 아담 스미스가 제게 남긴 밈(meme)이 반응해서 일까요. 그것보다는 제가 좋아하는 노란색 표지와 착한 페이지 수(270여 페이지 정도), 그 다음에 책 제목(보이지 않는 손)이 저를 끌었던 것 같습니다. 걸출한 지식인과 아직 배우는 입장인 학생의 간극은 메우지 못했습니다만, 착한 페이지 수 덕택에 생각보다 빨리(그저 빨리) 읽었습니다. 

  복거일이라는 작가는「비명(碑銘)을 찾아서(이하 ‘비명을 찾아서’)」라는 작품으로 유명한 소설가입니다.「비명을 찾아서」라는 작품은 제가 2년 전에 읽은 책입니다. 설정이 상당히 과격해서(우리나라가 해방이 되지 못하고 일본의 제2영토가 되어 있는 설정), 읽었을 때 울컥 했던 순간들이 많았습니다. 저자 소개를 보니, 시인·사회평론가 등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 이분의 작품 편력 중 ‘영어공용화론’에 대한 책은 밖에서도 많은 논쟁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 작품(보이지 않는 손)에 대해 저자는 ‘어떤 점에서 자신의 자서전’이라 일컬을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헌데 작품 속에는 저자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주인공도 소설가이며, 나이도 같지요). 물론 약간의 허구가 섞였겠지만, 그 허구도 결국엔 저자의 삶과 자신의 사상을 표현하기 위한 매개체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 작품은 1부(법)와 2부(정의)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헌데 1부와 2부가 서로 연관되어 있고, 1부의 큰 틀이 2부에도 계속 등장한다는 점에서 크게 구분되어지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1부와 2부를 관통하는 어떤 큰 틀은 제가 봤을 땐 다음과 같습니다. 유전자의 관점, 자유주의 관점에서 본 복거일이 생각하는 우리나라, 그리고 과학·예술·종교(이기적 유전자의 관점에서 통섭해서 설명하려고 합니다)를 이야기하려는 것이죠. 참고할 사항으로 복거일은 스스로 자신을 ‘실천적 자유주의자, 주변부 지식인’이라 규정합니다. 작가는 유전자의 관점(도킨스가 바라보는 것과 거의 일치합니다)과 자유주의의 관점을 ‘경쟁’ 이라는 공통점으로 묶어서 보는데요. 이를 통해 객관성이 전무한 우리나라의 ‘법’과 복거일이 생각하는 ‘정의’가 없어진 우리 사회를 우회적으로 비판합니다. 

  1부는 주인공이 타 영화사와 부딪힌 소송이 주된 내용을 이룹니다. 요는 주인공이 구축해 낸 시나리오(‘비명을 찾아서’의 기본 설정과 비슷합니다)를 다른 이가 저자의 확실한 동의 없이 차용해낸 거죠. 작품을 보면(책 p.20), ‘준비서면’ 초안에(아마 법정 공방하기 전에 제출하는 간단한 기안문 같네요) 차용한 영화 제목이 ‘한국 최초의 대체역사 SF 영화, Lost History' 라고 나옵니다. 1998년 여름에 만들어서 2002년에 개봉했다고 설정이 되어있는데, 저는 여기서 모 영화를 떠올렸습니다. 많이 묵었다, 고마 해라라고 말하던 모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한 배우도 생각이 나더군요. 실제로 그 영화가 관련이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판사는 주인공(원고)의 지적재산권 보장보다는, 그의 지적재산을 차용한 피고의 손을 들어주려고 하죠. 이유는 판사가 피고 측 여변호사에게 마음이 끌렸다는 것입니다. 사실 작품 내에선 봤을 땐 상당한 비약입니다. 어떤 암시조차도 없었지요. 다짜고짜 “판사는 여변호사에게 마음을 빼앗겼다”라는 감정적인 서술은, 작품을 읽을 때 아쉬웠던 부분이었습니다. 작품에선 주된 내용이라고 할 수 있는 소송보다 곁가지라 할 수 있는 주변 사람들과의 대화 혹은 저자의 독백 부분이 작품에선 더 큰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뒤에서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2부의 제목은 ‘정의’입니다.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첫째는 주인공(저자 자신으로도 볼 수가 있겠죠) 자신의 동료들과 이야기하며 지금 시대를 비판하고, 자신들(전쟁을 겪은 세대)의 정의를 짓밟은 지금 세대에 대한 분노를 토로합니다. 또한 갖가지 조그마한 에피소드(택시 승강장에서 줄을 안 서고 기다리는 사람들의 행태, 놀이터에서 개를 묶어놓지 않고 풀어놓아 개가 어린이를 물려고 해서 개를 발로 걷어차 버린 사건) 등을 통해 자유의지나 인간의 행동양식에 대해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가 보는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리처드 도킨스 등과 학문의 맥이 유사한 생물학 지식이 있으면 글을 이해하는 데 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막바지에는 잡지에 기고할 글을 쓰기 위해 주인공은 자신이 복무한 전방 전선에 들어갔다가 지난날을 회상합니다. 주인공은 같이 복무했던 전우의 말을 떠올립니다. ‘우리 죽음을 그렇게 헛된 것으로 만든 세상이 어떻게 정의로울 수 있습니까?’ 이 말을 통해 복거일은 그가 생각하는 정의(보이지 않는 손으로 대표되는 시장의 정의, 자유주의의 정의 등)와 사상이 전달되지 못하는 사회에 대해 한탄하고, 자신들의 생각과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현 세대를 질타하고 싶어 하죠. 마지막에 주인공은 소송에서 패한 뒤에 어떤 옛 노랫말을 읊조립니다(p.273). 

“알들이 작고 귀한 곳, 척박한 땅에서
더 험한 돌길을 따라 더 척박한 땅으로 오르면서,
모두 바닥이 났을 때, 우리는 듣는다
어긋난 시절에 걸맞은 노래를.”

  결국 본인의 뜻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현 세태에 대한 한탄을 끝까지 놓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는 손’은 뜨뜻미지근하게 마무리되는데요. 자신을 주변부 지식인이라 자처하고, 실천적 자유주의자라고 주창하는 이 분은 무슨 이유로 현 시절을 한탄했을까요. 저자의 독백 부분과 작품 속의 주인공(소설가이죠)이 작중에서 몇몇 잡지사에 기고한 글들, 주변 인물들과의 대화를 살펴보아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 p.230에 나온 주인공의 주변 인물들과의 대화를 축약했습니다.
“나이 든 세대는 이 사회의 건설에 평균보다 훨씬 많이 공헌했어. 우리가 40대였을 때(저자 나이를 추정컨대 80년대 중반으로 볼 수 있습니다), ‘40대 사망률 세계 1위’ 라는 얄궂은 명예를 누렸어.(중략……)”
“반면에, 지금 젊은 세대는 사회에 대한 공헌에서 평균보다 훨씬 떨어져. 당연히 나이 든 세대는 젊은 세대를 아주 낮게 평가하지.”
“나이 든 세대는 자신들이 우리 사회에 대해서 재산권을 지녔다고 여긴다는 점이야. 우리가 세우고 지켰으니 우리 것이다, 그런 얘기지. 아, 그런데, 부모 덕분에 편하게 자랐고 배고픔 대신 비만을 걱정하는 세대가 부모의 재산을 갑자기 빼앗아가서 멋대로 고치려는 거야. 그것이 우리 세대의 정의감에 어긋나는 거라.”
“정의는 가장 근본적 원칙이야. 정의감이 모든 도덕적 감정의 근원이거든. 나이 든 세대의 정의감이 이번 선거(02년도 선거)에서 깊은 상처를 입은 거야. 그러니…….”

※ p.143 의 주인공이 자신의 작품 구상에 대해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그는 자본주의가 심각한 위기를 맞았음을 절실하게 느꼈다. 이 사회의 다수는 자본주의에 대해 반감을 품었고, 그런 반감의 밑엔 자본주의가 정의롭지 못하다는 인식이 있었다. 중략(……) 그는 무거운 마음으로 밤늦도록 방 안을 서성였다. 그리고 시장경제가 본질적으로 정의롭고 깨끗하다는 점을 밝히는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복거일은 도덕적 감정의 시초는 정의감이며, 정의감은 진화생물학적 관점에서 봤을 때 살아가면서 사람이 경험으로 체득했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이 정의감은 왜 나왔을까 라는 의문에 복거일은 ‘재산권’을 지키기 위해 나왔다고 이야기합니다. 생물학에서는 ‘영역성’이라고 부른다고 하는데요. ‘재산권’을 왜 지켜야하냐는 의문에는 그건 설명할 수 없는 정당한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당연히 그래야 된다는 것이죠. 정리하자면 복거일식 ‘정의(진리에 맞는 올바른 도리,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올바른 도리가 아닌)’는 자신의 재산권을 지키기 위해 생긴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헌데 지금의 젊은 세대 등 많은 사람들이 복거일식의 생각들을 거부하니까(실제로 그런지는 의문입니다만, 복거일 씨는 그렇게 생각하는 듯 합니다.) 이 분이 열 받은 겁니다. ‘불의’를 보고 있자니, ‘정의감’을 숨기지 못하는 것이죠. 본인이 생각하는 자유주의, 자본주의, 경쟁의 논리들을 거부하려고 하는 움직임에 강한 반감을 드러냅니다. 
(복거일은 이 세 논리를 합리화하고 널리 퍼뜨리는 것이 ‘주변부 지식인’인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반감은 ‘주변부 지식인의 한계’를 통감하는 것으로도 이어집니다. 앞서 말했듯이 복거일은 자신을 ‘주변부 지식인’이라 말합니다. 자신은 언어적으로도, 학문의 주류에도 편입되지 못했기 때문에 ‘주변부’에 머물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작품 속 주인공의 집은 충청남도 대전 외곽으로 설정되어 있는데요. 이것도 우리나라 주류라 볼 수 있는 ‘서울’과는 동떨어지게 작가가 의도적으로 설정해 놓은 것이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주변부’는 서구 문명을 뒤늦게 받아들인 우리나라나 다른 나라 문화권이라 볼 수 있습니다. 복거일은 ‘주변부’의 한계를 정해놓는 데요. 2등은 결코 1등이 되거나 1등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우리나라에서 핀란드 다음으로 최신 휴대폰 기술을 개발했어도 그것은 주류가 될 수 없으며, 주류 뒤에 나온 이류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로 개발한 것도 대단한건데, 그것은 어차피 아류일 뿐이라고 규정짓는 거죠. 또한 ‘주류’에 의해 영향을 받았기에 ‘주류’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고 봅니다. ‘주류’에 편입되면 결코 ‘주류’의 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고, ‘주변부’에서 ‘주류’에 대한 도전장을 내밀어도, ‘주류’가 그동안 심어놓은 밈(meme)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한계를 지적합니다. 이는 복거일 스스로, 생각하는 사유의 구조 자체가 이미 다른 문명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복거일의 관점을 보충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손’의 한 부분을 인용하겠습니다. 
  “지식은 물과 다릅니다. 물은 합쳐서 하나가 되지만, 지식은 합쳐서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지식이 뇌에 자리 잡으려면, 그것은 비슷한 지식을 밀어내야 되거든요. 중략(……), 우세한 문명의 지식은 열세한 문명의 지식을 밀어내고 자리 잡아요. 지금 우리 뇌엔 서양 문명이 낳은 지식이 자리 잡았어요. 전통적 지식들을 모조리 밀어내고. 우리가 전통적 지식이라고 아는 것들도 거의 모두 변용된 서양 지식입니다. 중략(……) 이제 우리는 서양 문명의 후예입니다.”

  복거일은 결국 자신을 둘러싼 ‘주변부’에 대한 한계를 극복해내는 모습을 보이지 못합니다. 설령 작품 속에서 본인이 ‘개념적 돌파’를 통해 극복해냈다고 서술했을지라도, 결국엔 ‘주변부’가 ‘주류’가 되는(설령 주류가 되는 게 궁극적인 해결책은 아닐지라도) 것보다는 그가 생각한 ‘정의’를 널리 퍼뜨리는 것이 그 한계를 극복했다고 볼 수 없다고 보니까요. 그가 생각한 ‘정의’는 앞서 말한 자유주의, 자본주의, 경쟁 등의 논리이죠. 그런데 복거일이 봤을 때, 자신이 아무리 이야기해도 세상이 받아주지 않는다고 생각하기에 그는 ‘불의’를 느끼고 반감을 가지게 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나는 알기를 열망했던 자다; 그러면 그대는?”

  작품을 처음 펴기 전에 등장했던 문구입니다. 복거일 자신은 ‘주변부 지식인’ 등의 한계를 딛고 올바른 ‘정의’ 혹은 ‘진리’를 갈파하는데 노력했던 사람인데, 당신들은 무엇을 했냐는 질문을 던집니다. 이 사람, 처음부터 끝까지 어떤 화해의 제스처(꼭 그래야할 필요는 없지만)나 해피 엔딩을 위한 손짓은 보여주지 않네요. 
  지금의 모습이 우리 사회의 최선이라고는 저 역시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바뀌어야 하고, 고쳐야 될 부분들이 많지요. 우리 세대는 또 우리 나름대로의 답을 찾아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88만원 세대’가 지금 20대의 공동체 붕괴 현상을 지적하며 앞으로를 걱정하지만 하지만 그래도 저는 낙관적인 판단을 내려보고 싶네요(논리적인 근거를 대지 못했네요, 계속 공부해야 되겠습니다). 어쨌든 결국 저는 저자가 던진 질문에는 답하지 못 했습니다.

  그의 생각을 읽기에는 제 수준이 함량 미달인 부분도 있었고, 우리나라 대다수 이들이 보기에 과격한 사상(작가의 상상이지만 일본과 우리나라의 주종 관계를 논한 점) 등에 대해선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도 있었습니다. 또한 작품 전체에 드문드문 등장하는 복거일식 ‘주변부 지식인’의 패배주의와 열등감을 이해하기는 힘들더군요. 허나 작가가 공을 들여 서술한 ‘종교, 과학, 예술’의 통섭 시도(이기적 유전자적 관점이라든지, 자유주의적 관점의 정당성을 논외로)는 한번쯤 눈여겨봐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 분야를 퍼즐 맞추듯이 설명해 놓은 부분들은 다시 한 번 읽어봐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언제나 그렇듯, 다시 읽을지는 미지수입니다).


※ 복거일 씨 작품은 아직「비명을 찾아서」, 「보이지 않는 손」밖에 못 읽었지만, 작품마다 밀애를 다루고 있더라고요. 「비명을 찾아서」에서는 주인공이 결혼을 했기에 회사 내 하급자와 이룰 수 없는 사랑을,「보이지 않는 손」에서도 비슷한 설정이지만 이 작품 주인공이 같은 소속 연구원과 사랑에 빠졌을 때 결혼을 했는지는 미지수이네요. 이 분, 은근히 그 쪽을 선호하시는 듯. 음, 같은 작가의 다른 작품을 섭렵했으면 좀 그럴싸한 공통점을 찾아야 되는데, 겨우 찾은 게 이거네요(웃음).




* 책마을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8-10-10 21:58)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8-12-08
20:27:02 

 

상병 이우중 
  저도 영화 '2009 로스트 메모리즈'를 본 직후 도서관을 뒤져가며'비명을 찾아서' 를 찾아내어 읽었는데 재밌더군요. 저 때가 2001년 겨울이었나요... 전 영화에서 오프닝의 광화문 동상 씬이 제일 기억에 남았습니다. 하하. 

'보이지 않는 손'도 읽어 봐야겠네요. 근데 복거일씨도 왜 그렇게 밖에서 사람들한테 욕을 많이 드시는지 모르겠어요. 나름대로 근거를 내세워서 자기 의견을 논리적으로 주장하는 건데 말이죠. 차근차근, 차근차근이 아니라 좀 격렬하다 할지라도 역시 이쪽도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거라면 몰라도 덮어놓고 욕부터 하는 사람들이 밖에는 꽤 많은 것 같아요. 신문기사 정도의 정보만 가지고 말이죠. 하기야 어디 이것뿐이겠습니까만. 2008-09-19
12:42:34
  

 

병장 주해성 
  잘 읽었습니다. 이 책은 물론 작가의 어떤책도 읽어보지 않았지만 충분히 어떤 느낌일지 알 것 같습니다. 다이제스트 작가(?)로 일하셔도 손색이 없으실듯! 우중씨가 말하는 '욕하는 사람들' 이 왜 욕하는지도 알 것 같아요. 그들이 하는 욕이 정당하다거나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들의 기분을 알 것 같다는 겁니다. 우리 주변에서 쉽게 느낄 수 있는 감정을 고스란히 이 작가에서 (독서후기를 읽은 것 뿐이지만)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태면 나간지 얼마 안된 예비역들에서 느껴지는,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한 아집과 단정적 말투(패배주의) 같은 것들 말이죠. 2008-09-19
15:47:26
  

 

이병 홍명교 
  아무래도 제가 그 '욕하는 사람들'중에 한 명일 것 같네요. 
예술작품은 원하든 원치않든간에 동시대성을 어쩔 수 없이 갖게 된다고 생각하는데요, 복거일이 '현대'에 (엄밀히 말해서 복거일은 19세기에 태어났다면 적절했을지도 모르는 사유를 갖고 있죠.) 주류 소설가로 인정받긴 좀 어렵지 않을까요? 개인적인 경험에 의거해 그 사람의 소설을 읽고싶어지는 마음이 생기지 않았던 이유를 생각해보면요, 그가 정치적으로 극우주의적인 발언을 종종 할때 이미 그의 문학적 기질이나 그의 작품들은 그 자신에 의해 스스로 손상당하기 시작해서 결국 스스로 독자들을 팽개친 효과를 유발했다는 점 떄문인 것 같아요. 많은 작가들이 이 함정을 피하기 위해 아주 종종 침묵하죠. 때문에 작가가 현실에 대해 발언하고 참여하는 긴장감을 유지하려면 현실을 바라보는 날카로움과 우직한 시선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데 이 오락가락 방황하는 극우주의자는 도무지 자기 자신에게는 관대하면서 대다수의 민중들에겐 지독하게도 날카롭고 패권적인 입장을 유지합니다. 정치적인 견지에서 말이죠. 
현대문학에 필요한 '새로운 작가'가 복거일처럼 학습이 편협하고 민족주의나 국가주의의 한계 안에 갇힌 보수작가일까요? 노동자나 빈민들의 파업, 시위들은 비난하면서 독재 정치와 패권주의에 대해서는 옹호하는 이 모순적인 작가를요? 물론 읽어서 나쁠 건 없겠지만, 복거일까지 시간내서 읽어주기에는 세상에 좋은 책이 너무 많네요. 
제가 편협한건가요. 그럴지도 모르겠지만요. 아무튼 그래요. 제 짧은 생각에는, 지금 세상이 필요로하는, 굶주림과 무의식 속에서 더 생명력을 얻는 어떤 예술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2008-09-19
17:07:08
  

 

상병 이우중 
  네. 저도 개인적으로 복거일씨 좋아하지는 않지만(그래도 이분보다 욕 더 먹는 이문열씨는 좋아해요. 그의 글만. 이 이야기는 다음에) 왜 거 그런 사람들 있잖아요. 자기가 뭘 욕하는지도 모르면서 컴퓨터 앞에만 앉으면 논리의 화신이면서 애국청년으로 변신하는 사람들. 키보드워리어라고 하나요 아가리파이터라고 하나요. 
에이~ 제가 지금 무슨 말 하는 건지 아시죠 다들? 
표현력이 짧아서 설명을 못하는 것 뿐이에요. 이해해 주세요. 

그나저나 '굶주림과 무의식 속에서 더 생명력을 얻는 어떤 예술'이라. 정말 멋진 말이에요. 지금 세상은 정말 저런 걸 필요로 하나봐요. 그런 게 바로 예술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목적 아닐까요? 하하. 2008-09-19
19:20:49
  

 

병장 이동석 
  와우, 복거일의 책을 정식으로 읽은 적은 없는데, 
복거일의 책을 요약해서 읽은 듯한 기분입니다. 

그리고 이 요약본만 가지고도 
복거일에게 가운뎃 손가락을 펴고 싶군요. 2008-10-02
11:22: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