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베스트선정-내글내생각] 2003년의 보스턴 레드삭스를 추억하며  
상병 홍석기   2008-09-23 09:08:04, 조회: 550, 추천:4 

2003년, 봄. 부러졌던 팔이 완전히 회복될 즈음, 내가 말을 하기 시작했을 무렵. ‘친구’라는 놈들이 하나 둘 달라붙기 시작하던 시절. ‘친구’라고 믿었던 녀석들이 하나 둘 떠나갈 무렵. 허무하게 깨져버린 첫 사랑의 기억이 흐릿해지기 시작하던 때. 처음으로 <군주론>과 <사회계약론>을 읽기 시작하던 그 시절, 그래서 슬슬 거만해지기 시작하던 그 즈음. 누구나 있을 법한 흔하디 흔한 사춘기 시절의 한 조각. 나의 인생에도 하이라이트가 있다면, 누군가 말했듯 ‘인생 베스트 텐’ 이 있다면, ‘훈련소에서의 첫 궁대리아’ 같은 것들에 밀려 버릴 듯한, 언급도 되지 않을 법한, 소소한 연애담 하나 없던 시절.

이건 그런 시절의 이야기이다. 

1. 
내가 다니던 학교는 미국 북동부의 한 시골 구석에 있었다. 시골이라 할 일이 없어서 더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유난히 스포츠를 (스포츠만)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스키, 아이스하키, 농구, 풋볼, 등등 갖가지 스포츠가 인기를 자랑했지만, 최고의 연례행사는 단연 야구였다. 그리고 사람들의 대부분은 (학교 학생들을 포함해서) 보스턴 레드삭스의 팬이었다. 가장 가까운 도시가 보스턴이니까. 하아, 어떻게 재수가 없어도 하필 보스턴이라니. 보스턴 레드삭스. 보스턴 레드삭스. 메이저 최고의 명문구단 중 하나이며,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고 있고, 베이브 루스, 지미 팍스, 칼 야스트라젬스키, 테드 윌리엄스 등등 전설적인 플레이어들의 보고이며, 유니폼도 나름 이쁘고, 왼쪽 담장이 높게 막혀 있어 우타자에게는 ‘좌절의 벽’ 이라 불리는 ‘그린 몬스터’를 보유한 작고 전통있는 펜웨이 파크를 홈구장으로 하며, 양키스 다음으로 많은 팬을 거느리며, 수많은 플레이오프 진출과 아메리칸 리그 동부지구 2위를 꾸준히 마크하는 팀. 자. 여기까지 설명을 들었으면, ‘꽤나 괜찮은 팀이네.’ 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그래, 설명 자체는 모두 사실이다.....만, 가장 중요한 부분은 맨 마지막에 언급한 ‘수많은 플레이오프 진출과 아메리칸 리그 동부지구 2위를 꾸준히 마크하는 팀.’에 있다. 여기서 왜 ‘수많은 우승 경력과 아메리칸 리그 선두를 다투는’ 이라고 쓰지 않았을까. 다시 말하지만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하다.  보스턴 레드삭스가 위와 같은 수식어를 얻을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이 뉴욕 양키스와 같은 조에 속한다는 태생적 비극 때문이다. 

뉴욕 양키스. 너무나 유명한 핀 스트라이프 유니폼과 N자와 Y자가 겹쳐진 로고를 사용하는, 그야말로 메이저 최강의 팀. 현대 야구사에서 이들의 입지는 <슬램덩크>의 산왕이나 축구의 레알 마드리드, 농구의 시카고 불스와도 비교가 안 될 정도고, 팬 보유수에서 압도적 1위를 달리며 (세계로 넓힌다면 더욱 차이가 벌어질 것이다), 너무 유명하여 MLB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양키스는 아는 사람이 많다. 미키 맨틀이나 조 디마지오 같은 예전 인물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운동 선수로는 최다 연봉을 받는 알렉스 로드리게스나 ‘고질라’ 마쓰이, ‘로켓맨’ 로저 클레멘스, 야구에서 9회말의 존재를 없애버린 마리아노 리베라 등등, 사기성 짙은 라인업을 거느리며 90년대 후반에는 그야말로 한국선수 태권도 금메달 따가듯 우승을 해 먹었던 팀이다. 영화 <캐치 미 이프 유 캔>에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말을 빌리자면, “핀 스트라이프 유니폼만 봐도 상대 투수들은 제대로 공을 던지지 못한다.” 는 팀이 바로 뉴욕 양키스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팀과 보스턴 레드삭스는 같은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에 속했고, 따라서 한 시즌에 가장 많은 경기를 해야 했다. 이런 이유로 레드삭스가 지구 1위가 되는 것은 예전 삼미 슈퍼스타즈가 꼴찌에서 탈출하는 확률이랑 거의 맞아떨어질 정도였고, 승률이나 다승에 관계 없이 각 지구 1위에게만 우선으로 플레이오프 진출 티켓을 주고 나머지 각 지구 2위 3팀중 승률이 높은 팀에게 와일드카드 1장을 주는 제도가 있는 이상, 정말 피눈물나는 노력을 해서 최고 승률을 올려야만 (1위는 뺏겼으니까) 가을 잔치에 초대 받을수 있을 까 말까였다. 또 가을 잔치에 초대된다 해도, NL과 AL의 승자가 가장 나중에 붙는 특성상, 같은 AL에 속한 양키스와 레드삭스는 준결승에서 맞붙는 경우가 허다했고, 승리는 (역시 삼미 슈퍼스타즈가 꼴찌에서 탈출하는 확률 정도의 예외는 있었지만) 항상 양키스의 것이었다.

이런 사정이 있으니, 레드삭스 팬이 된다는 것은 분명 굉장히 피곤한 일일 것이지...만, 뭐, 어차피 나는 팬도 아니고, 될 생각도 없으니, 그냥 가끔 동정의 눈길로 그 ‘2등 팬’들을 바라봐주기만 하면 될 것이다. 설마 내가 그 저주받은 운명을 짊어질 리가 없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그날도 여유있게 소파에 앉은 채 모닝 커피를 마시며 (옆에서 떠드는 레드삭스 팬들을 무시한 채) <사회계약론> 을 피려는 차였다. 아 그런데 또 어떤 놈이 신문을 어질러 놓고 간거야....모처럼 분위기 잡고 책좀 보려니만...역시 친절한 내가 치워 줘야겠군. 그렇게 살포시 신문을 소파 옆으로 밀어내려는 순간, 신문 스포츠면의 굵은 활자 한 줄이 내 눈에 들어왔다. 
                  
             “For Sox, BK In, Shay Out"
           (김병현, 보스턴으로 트레이드)

........김병현. 21세라는 약관의 나이에 메이저에 진출, 까다로운 잠수함 투구폼으로도 150km는 너끈하게 넘어주는 직구와 고속 슬라이더를 구사하는 메이저 유일의 투수이며, 동양인 최초로 월드시리즈 우승을 맛보았고, 랜디 존슨과 커트 실링이라는 사상 최고의 원투펀치에 버금가는 활약상을 선보이며 메이저 최고의 괴물타자 중 하나인 블라디미르 게레로는 스윙 도중 낭심에 공을 맞는 굴욕을 맛보며 김병현이 닌텐도 게임에나 나오는 공을 던진다는 명언을 남겼고, 2001 월드시리즈에서는 2경기 연속 역전 홈런을 허용하며 관중에게 최고의 드라마를 제공하는 센스와 다음 시즌에서는 무슨 일 있었냐는 듯 팀의 세이브 기록을 갈아치우며 메이저 데뷔 3년만에 이름 석 자를 역사에 남겨버린, 만화 속에나 나올 법한 인간, 등등 화려한 수식어와 수많은 이야기를 달고 다니는 그는 나에게 거의 신과 같은 존재였다. 잠수함 투구폼으로만 연습을 하고 야구팀에 지원했다가 10번 타자로 기용되었고, 컴퓨터 메인화면도 지현누나에서 공을 뿌리기 전 김병현의 사진으로 바꿀 정도였으니까.
그리고 그가 보스턴 레드삭스로 이적했다. 누가 그랬었지. 불행은 항상 느닷없이 찾아온다고.

그렇게 나는 보스턴 레드삭스의 팬이 되었다. 


2. 
그해, 보스턴 시내에는  “YANKEES SUCK” 문구가 새겨진 티셔츠가 불티나게 팔려나가고 있었고, 펜웨이파크는 야구가 시작할 무렵인 오후 5시부터는 보스턴 시내 전역에 교통체증을 유발하며 연일 매진을 기록했으며, 양키스 모자를 쓰고 보스턴 공항에 갔던 고등학교 선배는 항공사 직원-역시 레드삭스 팬이었던- 의 농간에 의해 비행기를 놓치고 말았다. (그 후 그 선배는 레드삭스 모자를 구입했다) 모두가 “REVERSE THE CURSE (저주를 되돌리자- 어디로? 양키스로!)” 를 외치며 85년 묵은 저주 퇴치를 염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22살에 불과한, 야구 경험조차 없는 젊은 단장과, 그가 끌어들인 새 선수(김병현?), 그리고 그 새 선수가 끌어들인 새로운 팬 (나)- 물론 이건 좀 비약이 있지만- 이 있었다.
김병현은 잘 던졌다. 선발, 중간계투, 마무리를 오가며 8승과 16세이브에 방어율 3.16. 선발로 나와서는 5,6이닝을 던지며 3실점 이상 허용하지 않으며 AL 동부의 강타자들에게 수많은 삼진을 뺏어내고 (5,6이닝밖에 못 던진다는게 문제긴 했지만), 8,9회의 위기상황, 그것이 1사 1,2루든 2사 2루든, 펜웨이 파크든 양키 스타디움이든 절체절명의 순간에 마구를 뿌리며 팀 승리를 지켰다. 뭐, 물론 팬들의 반응은 왠지 모르게 냉소적이었지만.
그리고 나. 나는 군중 속으로 뛰어들었다. 모든 일과가 끝나는 5시가 되면 TV 앞으로 모여서, ESPN을 켜고, 패리스 힐튼이 나오는 자동차 광고에 대한 감상을 나누며, 우유와 쿠키를 축내고, 아무런 근거도 없는 승리팀 예측을 시도하거나, 소파에 누워 멍하니 4번타자가 3루쪽 파울 타구를 날려보내는 광경을 지켜보는 그런, 하루 하루를 보냈다. 어느새 나는 페드로 마르티네스의 이름과 백넘버가 새겨진 레드삭스 T셔츠를 샀고, 레드삭스의 스타팅 라인업과 5인 로테이션을 모두 외울 수 있게 되었으며, 점심시간에는 캐치볼을 했다.
그와 함께 <사회계약론> 은 책장 속으로, SAT(미국 수능시험) 문제집은 서랍 안으로, 폴로 셔츠는 옷장 속으로 들어갔다만, 85년짜리 저주가 풀리느냐 마느냐 하는 이 역사적인 순간에 그런 것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건 성전(聖戰)이었다. -자아, 모두의 기를 모아줄테니, 전사여, 저 무거운 운명을 굴복시키고 진정한 자신의 길을 나아가게. 
아니, 어쩌면 사실 이건 나의 이야기이고, 나에게 내려진 저주일지도 몰랐다. 이팔 청춘의 나이에 이국의 한 산골에 쳐박혀 야구 보는 것을 낙으로 만들어버린- 이렇게 인생을 꼬이게 해준 운명이란 놈에게 저항 한번 해보지 못하고 살아왔던 나에게, 85년된 저주에 도전하는 나의 영웅이 이끄는 팀의 도전은 꽤나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나의 인생을 건 일생일대의 결전이라고나 할까. 과연 나는 그 보이지도 않는, 거대한 힘에게 분노의 똥침 한 방을 날릴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9월. 
김병현은 9월 통산 0.00의 방어율을 기록했고, 나는 응원가인 ‘Sweet Caroline'을 다 부를 수 있게 되었다.
9월 25일, 레드삭스는 홈구장인 펜웨이 파크에서 볼티모어 오리올스에게 승리를 거두며 와일드 카드를 확정, 가을 잔치에 합류했다.
펜웨이파크의 홈 관중 수는 나날이 기록을 경신했고, 플레이오프 티켓은 개시 이틀만에 매진을 기록했다.

그렇게, 운명의 날은 다가오고 있었다. 



3.
2003 ALDS 1차전, 보스턴 레드삭스 vs. 오클랜드 어슬레틱스, 10월 1일. 네트워크 어소시에이트 콜로세움 구장(오클랜드). 관중 수: 50,606명.
드디어 1차전. 첫 상대는 아메리칸 리그 승률 1위 오클랜드. 
9회 말, 4-3 보스턴 리드, 그리고 투수는 김병현.
첫 타자. 볼카운트 1-1에서 3구째. 타자는 스윙. 공은 유격수 쪽으로...가볍게 땅볼 아웃.
원아웃.
두 번째 타자. 볼카운트 2-1. 4구째. 스윙 삼진.
투아웃.
아웃 하나만 잡으면 보스턴 이적 후 첫 포스트 시즌 세이브를 기록 할 수 있는 상황.
세 번째 타자. 볼카운트 1-3. 높은 공. 볼넷 출루. 투아웃 주자 1루.
네 번째 타자. 볼카운트 1-2. 몸쪽....우익수쪽 라인...에 떨어지는, 안타. 주자 1,3루. 
투수는 아직도 김병현. 
다섯 번째 타자. 볼카운트 2-2. 제 5구. 공은 가운데로...가운데로...타자는 스윙...공은 우익수 앞으로....우익수....생각해보니 우익수인 매니 라미레스는 발이 느렸다.
우익수 앞에 떨어지는 동점 적시타.
4-4 동점. 투수코치와 포수는 마운드로 올라오고. 김병현은 쓸쓸히 덕아웃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영웅은 패했다.

4.
연장 12회까지 가는 접전 끝에 1차전을 내준 레드삭스는 설욕을 해야 했을 2차전에서도 초반에 대량 실점을 하며 5-1로 무너졌다. 한 게임만 더 지면 탈락인 상황. 그리고 운명의 3차전은 레드삭스의 홈구장인 펜웨이파크에서 벌어졌다.

2003 ALDS 3차전, 보스턴 레드삭스 vs. 오클랜드 어슬레틱스, 10월 4일. 펜웨이 파크(보스턴). 관중 수: 35,460명.
경기는 연장 11회 끝에 보스턴의 3-1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경기가 아니었다.

나는 경기 후에나 TV로 알게 되었지만, 이런 사건이 있었던 모양이다. 
한 동양인 투수가 있었다.
그는 4월 초에 배트 파편이 다리에 박히는 큰 부상을 입었다. 그에겐 휴식이 필요했고, 그의 트레이너와 팀 닥터 모두 수 개월 간의 휴식 처방을 내렸다. 그도 잠시 쉬고 싶어했다.
하지만, 그가 가장 뛰고 싶었던, 꼭 한번 뛰어 보고 싶었던 팀에서 트레이드를 해왔고, 결국 그는 부상을 간과한 채 팀을 위해 역투했다. 언제든, 어디에서든 그는 잘 던졌고, 그의 활약은 결국 팀을 플레이오프에 올려 놓았다. 라고 그는 생각했고,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의 난조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다음 경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팬들은 1차전에서의 그의 실수에 분노하고 있었고, 야유를 받아야 마땅한 놈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팬들은 야유를 보내고, 그는 그 야유에 가운데 손가락과 멋진 썩소로 화답했다.
아아, 참으로 아름다운 광경이로구나.

훗날 두고두고 화자될 이 사건 이후, 김병현이 경기에 나서는 일은 없었다. 팀에서는 어깨 부상이라고 발표했다.

레드삭스는 3,4,5게임을 파죽의 3연승으로 마무리하며 챔피언쉽 시리즈로 진출, 양키스와 격돌하게 되었다. 하지만 결과 따윈 어찌되어도 좋다. 영웅은 이미 사라져 버렸다. 

5.
‘영웅’이 불명예스럽게 퇴장한 가운데, 다음 상대는 디비전 시리즈에서 미네소타 트윈즈를 상대로 3연승을 거두고 가볍게 올라온 양키스. 더 이상 명분이 남아있지 않은 나는 이제 본래의 생활로 복귀해야될 시점이었다. 그래, 야구따위 본다고 돈이 나오냐, 밥이 나오냐. 내 밥그릇 챙기려면 오늘도 도서관으로 향하는 저들에게 뒤처지지 않을 생각이나 해야지.
그러나, 아까 말했듯이, 이건 나의 이야기이고, 나에게 내려진 저주이고, 똥침 한 방이 달려있는 문제였다. 그리고 나는, 아직 패하지도, 사라지지도 않았다. 제대로 덤비지도 않고 백기를 들기엔 네놈의 청춘이 아깝다, 란 생각이 들었다면 거짓말이고, 딱히 다른 할 일도 없었기에,  결국 나는 몸소 쿠키를 사들고 매일같이 티비 앞으로 향했고, 7회 초가 되면 ‘Sweet Caroline'을 열창하고 (스윗~ 캐롤 라인~ 워 어 어.) 무너진 김병현 대신 마이크 팀린이 경기를 마무리하고 내려오면 환호성을 보냈다. 그렇게 세 번의 환호성과 세 번의 탄식이 이어지고, 마지막 경기인 7차전으로 이어졌다.

2003 ALCS 7차전, 보스턴 레드삭스(3승 3패) vs. 뉴욕 양키스(3승 3패), 10월 x일. 양키 스타디움(뉴욕). 관중 수: 6,000,000,000명.

최후의 결전.

8회 말. 점수는 5-3. 투수는 이제껏 양키스를 2점으로 틀어막은 ‘외계인’ 페드로 마르티네스. 상대는 지암비-마쓰이-포사다로 이어지는 중심 타선. 이것만 막는다면 왠지 이길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150km의 직구가 포수의 미트에 꽃히고, 헛스윙. 또 헛스윙. 그리고 빗맞은 타구.
중견수 앞에 걸치는 행운의 안타.
다음 타자 마쓰이. 갑자기 공이 슬로우 모션처럼 느릿느릿 다가오고, 죽 뻗어나가는 배트.
안타.
주자는 1,2루. 타석에는 오늘 3타수 1안타의 포사다. 엄습하는 불안감. 페드로는 전에 없이 지친 모습이었고, 감독이 마운드에 올라왔다. 8회 말이다, 바꿀 때가 되었다. 빨리 투수를 교체해서 이 흐름을 끊어야 하는데......
그러나 페드로는 마운드로 돌아왔고, 깔끔한 폼에서 뻗어나간 제 1구. 보통 순간이라면 나가자 마자 스트라이크를 확신할수 있는 그런 볼이었다. 그런데 그 날은 유난히 투수와 포수 사이의 공기 층이 두꺼웠는지, 점점 느려지며 가운데로 공이 몰리고, 배트에 살포시 안착하더니. 우익수 뒤로, 우익수 뒤로, 우익수 뒤에 떨어지는 안타.

5-5. 그렇게 승부는 연장으로 이어졌다.

연장 12회. 양키스의 “수호신” 마리아노 리베라에게 무안타로 막힌 보스턴은 삼자 범퇴.
양키스의 12회말 공격. 보스턴은 투수를 너클볼의 달인 팀 웨이크필드로 교체.
...이 상황에서 너클볼 투수라니.
그리고 제 1구.
좌우로 요란한 춤을 춰야 했을 너클볼은 얌전했다.
9번 타자의 스윙은, 켄신의 발도(發刀)만큼이나 시원하게 허공을 가르고,
공은 아름다운 궤적을 그리며, 밤하늘의 별처럼 뉴욕의 밤하늘을 빛내고 있었다.
그리곤 이내 한 줄기 혜성처럼 긴 꼬리를 내리며 좌측 스탠드로 낙하하기 시작했다.        
나는 평생 그 공을 잊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TV를 껐다.
그렇게 보스턴 레드삭스의 2003 시즌은 끝이 났다. 

6.
혈투 끝에 월드 시리즈에 오른 양키스는 에너지를 너무 소모한 탓인지, 영건들이 중심이 된 플로리다 말린즈에게 우승을 내주었고, 그렇게 새로운 영웅의 탄생으로 2003 시즌은 막을 내렸다. 

레드삭스는 2003년 멤버들을 대거 지킨 채 특급 마무리와 에이스를 영입했다. 그리고 2004년, 3연패 뒤 4연승으로 뉴욕 양키스를 격파하고 월드 시리즈에 진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즈를 가볍게 누르고 86년만에 저주를 풀었다. 다음날, 대부분의 술집은 값을 받지 않았고, 학교에는 휴교령이 내렸다. 시민들은 모두 거리로 뛰어 나와 카 퍼레이드를 하는 선수들과 응원가를 부르며 시내 곳곳을 누볐다. 사실 이 이야기에 대해서는 더 길게, 더 드라마틱하게 써야 마땅하겠지만 모 영화를 비롯하여 많은 자료가 남아있으니 굳이 따로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김병현은 ‘부상’ 으로 인해 1승 1패 방어율 6.17의 초라한 성적을 남기고 마이너리그로 내려갔고, 9월에나 복귀했지만, 어쨌든 우승 반지를 손에 넣었다. 그는 동양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양대 리그 우승을 경험한 장본인이 되지만, 다음 해에 팀에서 방출된다.

그리고 나. 누누이 말하지만 이건 나의 이야기이며, 나에게 내린 저주에 관한 것이고, 운명에 도전하는 강인한 인간에 대한 오마쥬를 담고 있다. 결과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나는 패했다. 어찌되었든 2003년의 레드삭스는 저주를 풀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나’는 패하거나 사라지지 않았다. 레드삭스는 떨어졌지만, 나의 야구는 끝나지 않았다. 그것도 Game 5나 7이 아닌, Game 1에서 2회 초 수비가 진행 중일 거다. 실점은 좀 했지만.  아니, 사실 내가 하고 싶어 했던 말은 이런 것이 아니다. 결과는 중요하지 않으니까. 정말 중요한 것은, 12회 말에 떠오른 그 별, 나는 그 별을 보았고 지금도 이유 없이 그 별이 문득 보고 싶어진다. 세상과 싸우려면, 운명에 맞서려면, 그리고 똥침 한 방을 날린다는 것은,  분명 어두운 하늘에 별 하나를 쏘아올리는, 7차전 연장 12회말의 끝내기 홈런 같은 느낌일 것이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감정은, 결과 따위와는 상관 없다.

아마도 레드삭스의 팬들은, 이런 이유로 86년간 우승 한번 못해본, 운 지지리도 없는 팀에게도 응원을 보내주고 있는 것일 거다.

7.
2005년, 봄. 부러졌던 팔은 회복 된지 오래고, 말 하는데는 여전히 별 취미가 없으며, 더 이상 ‘친구’라는 놈들이 하나 둘 달라붙지도 않게 되고. ‘친구’라고 믿었던 녀석들이 하나 둘 떠나간지는 오래 되었다. 첫 사랑의 기억은 아득한데 여전히 여자친구 하나 없고, <군주론>과 <사회계약론>은 책장 안에서 나올 생각도 하지 않았다. 거만 떨었다간 정 맞은 모난 돌 신세되기 딱 좋다는 것을 깨닫고, 별 소득없이 사춘기마저 끝나버렸지만, 여전히 인생의 하이라이트 운운하기도 창피한 지경이지만, 좀 있으면 학교도 개학하고 뭐 여전히 달라진 것 하나 없지만,  나는 레드삭스의 개막전 티켓 한 장을 구입했다. 비록 암표였지만, ‘훈련소에서의 첫 궁대리아’ 따위는 한방에 날려버릴 만한 그 무엇의 가능성이 숨쉬고 있었다. 분명히 언젠가는, 또다시 나는 긴 꼬리를 끌며 스탠드로 비상하는 그 별을 볼 수 있겠지. 언젠가 오겠지, 세상을 엎어버릴 그 날이. 

9월의 밤하늘은, 반짝이는 별들로 가득하다. 

나는 3루측 관중석으로 향했다. 그 날도 펜웨이 파크에서는 The Strandells의 <Down by the River> 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Oh~ Oh. Boston, you're my home.



----The End------------

BGM (셋 다 보스턴 레드삭스의 응원가군요)
Down by the river- The Strandells
Sweet Caroline- Neil Diamond
Tessie- Dropkick Murph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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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만에 글 남기고 갑니다. 좀 더 길게 쓰고 싶었고, 더게 써야 했을 글이지만...지금도 충분한 스크롤의 압박과, 업무의 압박 그리고 귀차니즘...등등 때문에 군데군데 빼먹은 듯한 느낌이 없잖아 드네요. 
그래서 더욱 완성도가 떨어지는 글이지만, 너무도 쓰고 싶었던 이야기 였기에 이렇게 남겨봅니다.

요즘 쏟아지는 업무량 때문에 글 남기기가 쉽지 않았다는 말을 변명으로 남기며,
다음 번에는 꼭 칼럼을 들고- 그래봤자 또 시시한 이야기 겠지만-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 책마을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8-10-10 21:55)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8-12-08
20:24:30 

 

병장 조현식 
  2003년의 보스턴, 그리고 2004년의 보스턴.. 모두 고등학생 때 지켜봤군요. 특히 04년의 ALCS는 정말 안 본 사람이 없을 정도였죠..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던 그때. 

하지만, 저는 괴물들이 야구하는 메이저리그보다 한국야구가 더 좋았기 때문에, 고등학교 1학년때 나의 팀 'LG 트윈스' 가 만신창이가 되서 쌤씅에게 무릎꿇었던 순간이 더 기억에 남네요. 2008-09-23
09:16:44
  

 

병장 어영조 
  김병현. 정말 좋아했었는데 말이죠. 이대로 미국야구역사에 길이 남을 
괴물 투수로 영원하길 바랬는데, 이모저모 유감스럽습니다. 2008-09-23
09:19:35
  

 

상병 홍석기 
  현식// 저는 유년시절 해태 타이거즈의 독주에 정민태+정명원의 원투펀치가 버티던 유일한 희망 태평양마저 무너지는 장면을 보고는 더 이상 한국야구를 볼 수가 없었죠. 그나마 집 근처로 이사온 팀도 홈팬들에게 버림받았던 현대 유니콘스였구요. 

레드삭스도 전혀 좋아하지 않다가 뜻하지 않게 좋아져 버린 케이스였죠. 10년만에 야구팬으로 복귀했는데, 하필 그 팀이 85년짜리 저주가 걸린 팀이라니, 그 당시에는 신이 정말 얄미울 정도였어요. 

영조// 저도 같은 기대를 했었습니다. 김병현이 통산 300세이브였나를 올리는 꿈도 꿨었던 것 같은데. 조만간 김병현에 대한 글도 올려보고 싶네요. 저에겐 정말 여러 의미를 지닌 선수였어요. 2008-09-23
09:35:09
  

 

상병 박영교 
  밤비노의 저-주ㅡ 2008-09-23
10:36:52
  

 

병장 주해성 
  현식// 이승엽과 마해영의 홈런으로 끝났던 그 경기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삼성의 한을 푼것이 이만수(형님)이 아니라 김감독이라는게 참 묘했던 감정이 생각나는군요. 그 시절엔 정말 LG가 싫었는데 말이죠(웃음) 2008-09-23
10:42:18
  

 

병장 강문석 
  김병현은 요새 뭐 하나요? 야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반 분위기였지만 그 결승전만은 학교 TV로 다 지켜보았던. 그 적시타를 맞았을 때의 분위기란.. 2008-09-23
10:45:54
  

 

상병 홍석기 
  문석// 김병현은 시즌 초반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에서 방출된 이후 여행중이라는 소문이 있습니다. 다음 시즌 행보에 대해서는 아직 나온 얘기가 없구요. 2008-09-23
11:13:55
  

 

상병 박장욱 
  미국 드라마 Lost 에서 보스턴에 대한 얘기가 잠깐 나오죠... 

뭐 양보하는 의식이 있어서 이런식으로 얘기 나오니 갑자기 하는말 그래서 레드 삭스가 우승을 못하는거다 이런식으로 2008-09-23
11:55:23
  

 

상병 이동열 
  읽으면서 저의 팀인(?) 롯데가 떠올랐습니다 
유년시절 준우승을 마지막으로 꼴찌를 밥먹는듯 했는데... 
과연 올해는 어떨지 내심 기대중입니다(땀) 
2004년 보스턴처럼 될 수있을련지 아아... 2008-09-23
12:17:24
  

 

상병 박찬걸 
  아뇨 아무리 롯데가 날아다녀도 우주에 있는 와이번스는 못 당할겁니다. 흐흐. 2008-09-23
13:35:27
  

 

병장 황인준 
  꼭 칼럼이 아니더라도 이런 글은 얼마든지 환영이에요(웃음). 
그러니 부담 갖지 마시고 마구마구 써주세요. 흐흐. 2008-09-23
15:52:53
  

 

상병 이우중 
  네. 인준님 의견에 백배공감! 

이상 양키스랑 롯데가 붙으면 롯데가 이길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뭐 어차피 붙을 일도 없으니) 2008-09-23
21:07:25
  

 

상병 박장욱 
  롯데의 팬은 만들어지는게 아니라 태어나는것 ! 2008-09-24
00:05:58
  

 

병장 신지훈 
  글 즐겁게 잘 봤습니다..(웃음) 2008-09-25
13:59:16
  

 

병장 이현세 
  애런 분의 타구가 날아가고, 웨이크필드가 쓰러지고, 
양키들이 뛰어나오고, 쓰러진 웨이크필드가 오열하고,,하던 순간에, 
새 세기 들어 사라진 롯데의 희망을 보스턴에서 찾고 있던 
제 입에서 흘러나온 끊일 줄 모르던 탄성이, 

이듬해 가을, 부산의 모 재수학원에서 기쁨의 환호로 바뀌어 
영문 모르는 급우들을 향해(!) 내질러지고 있던 순간이 다시금 떠오르는군요. 

올해부터는 그때보다 딱 세 배 더 큰 환호 소리를 
주변 전우들 귀에 팍팍 박아넣고 있는 중입니다. 헛헛. 

롯데여, 영원하라! 2008-09-29
11:37:32
  

 

병장 이동석 
  음, 석기님의 글은 상큼해요. 역시. 2008-10-01
20:53:02
 

 

상병 김동욱 
  이거이거, 근처에 보스턴 골수팬들이 너무 많은데요 크크크 2008-10-09
00:41:21
  

 

병장 허학종 
  왠지 모르게 양키스 보다는 보스턴, 맨유보다는 리버풀이....(웃음) 2008-11-09
00:36: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