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베스트선정-내글내생각]서른네 번째 남자-1  
상병 이우중  [Homepage]  2008-09-24 21:06:11, 조회: 550, 추천: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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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뜬다. 습관처럼 컴퓨터를 켜고 미니홈피에 접속한다. 오랜만이야. 우리 못 본지 너무 오래 됐다. 조만간 술 한 잔 해야지 운운. 간밤에 쌓인 쓰레기들이다. 꼭 그만큼 분량의 쓰레기를 더 만들어내고 그는 한 달에 이십삼만원, 가격도 위치도 어중간한 ‘잠자는 방’을 나선다.
강을 따라 죽 올라가는 출근길은 오늘도 다를 게 없다. 언제나처럼 땅을 보고 걷다가 언제나처럼 편의점에 들러 아침 겸 점심을 해결하는 것이다. 퍽퍽하게 씹히는 천원짜리 김밥만큼이나 인생이란 무미건조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며 담뱃불을 붙이고 다시 걸음을 옮기려는데 저쪽 강가 천막 밑에 앉아 공허한 시선으로 강을 보고 있는, 머리와 수염이 덥수룩한 사내가 눈에 들어온다.
얼핏 수행중인 구도자나 현자의 모습으로도 보일 수 있겠으나 저 앞에 흐르는 것은 갠지스 강이 아니며 남자가 깔고 앉아 있는 것은 누가 버린 것을 주워왔음이 틀림없는 다 해어진 홑이불이다. 사내는, 그냥, 강변의 노숙자. 일 뿐이다. 어쨌거나 강변에서의 노숙이라니, 그나마 그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 중에서는 조금 덜 재미없는 것이 아닌가 하며 늦은 발걸음을 재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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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직장은 시내 중심가 끝자락에 위치한 그리 작지도 크지도 않은 학원이다. 사 층짜리 건물 중에서 삼층을 사용하고 있어 강이 내려다보이는, 여름이면 창을 활짝 열어 놓고 강바람을 맞는 것도 괜찮을 듯한 곳이지만 수학 선생이자 건물주이기도 한 학원 원장은 면학분위기를 조성한답시고 밖이 보이는 모든 창문을 플라스틱 단열재로 막아 버렸다. 아니 그럴 거면 대체 왜 일, 이층은 술집과 당구장을 입점시켰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고용주에 대한 그의 불만들을, 절대 면전에서는 내뱉지 못할 그런 말들을 마음속으로나마 실컷 뿜어대며 학원 건물에 도착하여 한 걸음에 두 칸씩, 항상 하던 대로 약간 빠르게 계단을 올라간다. 호프집 문 앞에 매일 똑같이 바보 같은 포즈로 서 있는 플라스틱 엘비스 프레슬리와 마릴린 먼로를 지나치고 당구장 앞에 쌓여 있는 자장면 그릇들을 피해 드디어 3층으로 올라간 그의 눈에 들어온 간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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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려 정신건강의원
이었다.
그러니까, 학원이,
없어졌다.
어안이 벙벙하여 멀뚱멀뚱 서 있는 그를 옆으로 살짝 밀치며 간호원인 듯한 아가씨가 그쪽을 흘끗 보고는 안으로 들어간다.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마치 자신의 수업 시간에 어린 것들이 끝도 없이 조잘조잘댈 때처럼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다. 두통 때문에 잠시 뭔가 착각이 일어난 것이라 애써 자위하며 육교를 건너 약국으로 향한다.
육교에서 왼쪽으로 가다가 오른쪽 골목으로 들어가 다시 왼쪽에서 세 번째에 있는 집이 그가 찾는
중앙철물점.
일 리가 없다. 이건 아니다. 고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보지만 매일 보던 건물들이요, 매일 지나다니던 특색 없는 사람들이다. 아무것도 바뀐 건 없다. 방금 자신이 가려고 했던 직장과 약국을 빼고는. 그 때, 표정 없이 길을 걷는 사람들 속에서 그는 낯익은 얼굴을 발견하고는 소리쳐 이름을 부른다. 그리 친하지는 않았지만 고등학교 때 같은 반이었고, 그로서는 드물게 가끔씩 만나 이야기도 나누었던 친구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기억한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친구는 계속 걸음을 옮길 뿐이다. 급한 마음에 달려가서 소매를 붙잡고 자기를 모르겠느냐고 말하려는데, 갑자기 잡힌 소매를 홱 뿌리치고 웬 놈이냐는 듯 사납게 그를 노려본다. 순간 당황하여 무어라고 말을 해야 할지 생각하는 동안 친구는 다시 방향을 틀어 종종걸음으로 인파 속에 묻혀서 사라져 버린다.
그는 매우 혼란스럽다. 혹 모든 사람들이 짜고 자기를 놀리기로 한 것은 아닌가. 아니다. 그럴 가능성은 없다. 이십 몇 년 동안 꼭 남들 하는 만큼만 하고 살았다. 누구에게 딱히 원망 살 일을 한 것도, 기억에 남을 만한 일도 없었다. 그러면 대체 지금 이건 어떻게 된 상황인가. 일단 돌아가서 차분하게 생각을 해 보리라 생각하고 낮에는 좀처럼 찾는 일이 없었던 집-이라고 해봐야 한 달에 이십삼만원, 잠자는 방-을 향해 가다가 덜컥 겁이 났다. 만약에 집마저 없어져 버리면 자신은 정말로 아무 데도 갈 곳이 없어지는 것이다. 막막하고 답답한 마음을 숨길 수 없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터덜터덜 강변을 거닐고 있는데 출근길에 보았던 사내는 여전히 그 자세 그대로 강을 바라보고 있다.
호기심이 동하기도 했고 어차피 갈 곳 없는 신세는 저나 나나 마찬가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해서 그는 사내 옆의 벤치에 가서 털썩 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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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 넘게 여기 있는 동안 저한테 말을 거신 분은 선생이 처음입니다. 로 시작된 노숙자의 말은 시작부터 뭔가 이상했지만 딱히 다른 할 일도 없었기 때문에 그는 간간히 맞장구를 쳐 가며 이야기를 듣고 있었는데 사내의 사연은 이랬다.
사내는 이 도시에서 가장 규모가 큰 제지공장에 다니고 있었다. 그 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출입증을 찍고 작업장으로 들어가려는데 경보음만 울리고 차단기는 올라가지 않았다. 참 별 경우도 다 있다고 생각하고 경비원이 오면 출입증 재발급을 신청해 놓고 빨리 들어가야겠다며 정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저 쪽에서 어슬렁어슬렁 다가오는 경비원은 낯선 얼굴이었다. 사정 설명을 채 다 마치기도 전에 쫓겨난 그는 기가 막히고 화가 나서 일과가 끝나고 동료 직원들이 퇴근해서 오해를 풀어 줄 저녁까지 기다렸다. 하지만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때가 되어서야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나오는 사람들은 못 보던 사람들이었다. 마지막 한 사람이 건물 밖으로 나오고 완전히 캄캄해지고 난 다음에야 그는 자리를 떴다. 그 날이 시작이었다. 그 후로 그는 자신을 찾기 위해, 무언가 잘못돼 있는 세상을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을 기울였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단다.

결국 다 포기하고 마음을 비웠는데 어느 샌가 여기 이러고 앉아 있더군요. 근데 이것도 처음에 좀 당황스럽고 그래서 그렇지 적응된다 싶으면 나름대로 괜찮은 것 같습니다. 언젠가 제가 이 사회의 구성원이라고 생각했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도 보이구요. 아, 물론 뭐 귀신이나 그런 게 보인다는 건 아니고... 저기 다리 보이시죠. 저 다리 밑에 오리가 몇 마리나 사는지 알고 계십니까 혹시? 서른두 마립니다. 말하자면 이런 것들이죠.

글쎄요. 뭔지도 모르겠고 별 관심도 없지만 그쪽은 확실히 약간 이상한 것 같네요. 그럼 계속 수고하십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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쳇. 그래도 자기 다니던 직장은 저기 떡하니 있으니 나보다 낫다면 낫겠구만. 맞은편 강가에 구름처럼 뿌연 연기를 내뿜으며 오늘도 어김없이 가동하는 제지공장을 보며 그는 생각한다.
그런데 이제 어디로 간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는 다시 한 번 어제까지 분명 자신의 일터였을 그 곳으로 발길을 향한다. 그나저나 강변에 메리골드가 이렇게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줄은 몰랐는데.
또다시 학원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며 그는 문득 휴대폰을 두고 왔다는 생각을 한다. 결근할 때 외에는 거의 연락도 오지 않아 알람시계 대용으로만 써 왔던 것이지만 항상 주머니에 있던 게 없으니 조금 허전하기는 하다.
학원-분명 어제까지는-이었던 병원 앞에 도착하여 크게 두어 번 심호흡을 한 뒤 조심스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다. 접수창구와 대기용으로 보이는 의자, 가운을 입은 간호사, 분명 여기는 병원이 맞다. 문 앞에 서서 쭈뼛쭈뼛 두리번거리고만 있으니 간호사 하나가 와서는 진료실로 안내한다. 정신과 전문의 박명호. 그러고 보니 원래 그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어야 했던, 수학 선생이자 그가 출근하던 학원의 원장은 이름이 뭐였는지 갑자기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니, 갑자기 기억나지 않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이름을 모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의사가 자기 맞은편의 소파를 권하고 그는 조심스레 앉아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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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혹시 사회 유기체설이라고 들어본 적 있으십니까?

아, 네, 뭐... 말씀드렸다시피 제 직업이 사회 선생이고 하니...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사회는 마치 유기체와 같이 작용한다는 건데, 실은 우리가 사는 이 사회는 진짜로 유기체인 겁니다. 너무 뜬구름 잡는 소리 같나요? 그러니까 다시 한 번 설명하자면 사회 계약이고 뭐고 간에 이 사회는 자신의 의지, 뭐 거대하다면 거대한 의지겠죠. 아무튼 스스로가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겁니다. 환자분 같은 경우는 이 사회 구조 내부에서 존재할 의미가 없다. 정도의 판단 하에 사회에서... 말하자면 지워져 가는 겁니다. 네, 요새 그런 분들 좀 있는 것 같던데 말이죠. 이해가 되시나요 이제?

아니,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내가 그래도 애들 가르치면서 먹고사는 선생이다. 배울 만큼 배웠고 알 만큼 아는 사람이다. 어린 애한테 해도 씨도 안 먹힐 소리를 지금 내게 하는 이유가 뭐냐. 정도의 의미를 가진 말을 논리정연하게 하려고 했는데 그의 입에서 나오는 거라곤 나, 참, 아니, 허, 그게, 지금, 말도, 아니, 진짜, 하...
진짜 이건 말도 아니고 뭣도 아니다. 어쨌거나 그는 여기까지 내뱉고는 어디 반박할 수 있으면 해 보라는 식으로 의사를 쳐다본다.

그걸 논리적으로 납득을 못 하기 때문에 지워지고 있는 거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정 그러시다면 그렇게 한동안 지내 보시다가 다시 한 번 방문해 주시죠. 혹 이게 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고 뭔가 잘못된 거라면 다시 오셨을 때는 환자분께서 말씀하신 대로 여기는 다시 학원일 지도 모르죠. 근데... 아주 오래 전 일이라든가, 어렸을 때 어떤 특별한 경험을 했다거나 기억에 남을 만한 일은 없습니까?

지금 이것보다 더 특별한 일이 있을까요.

혹시나 해서 여쭤보는 겁니다. 가령, 여기가 전혀 낯선 공간이 아니라든가 언젠가 한 번 와 본 적이 있다거나, 제 얼굴을 어디서 본 것 같다거나, 그것도 아니면 어렸을 때 3층에서 떨어진 적이 있다거나.

아까도 말했잖습니까. 정말 평범하게 살아 왔다고. 특별한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지금 일어나는 이 말도 안 되는 현상만 빼고는. 아, 하나 있네요. 원래 저는 지금이면 이 옆방에서 고등학교 2학년 사회 수업을 했어야 합니다. 그게 다에요.

네. 그럼 됐습니다. 진료비는 됐고, 그냥 나가 보셔도 좋습니다. 궁금하다거나 하는 것이 생기면 언제든지 다시 와도 좋습니다. 그럼. 다음 환자.

멀쩡하게 생긴 젊은 놈이 튀어들어와서 정말 숨 한 번 쉴 틈도 없이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정말 큰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어제는 제 동생 손 크기가 2밀리나 줄었다니까요. 허리도 조금 더 구부정해진 것 같구요. 이대로 가다간... 네, 바로 그겁니다. 선생님께서도 짐작하시겠지만... 동생은 결국 1년 내에 고등어가 될 겁니다. 아시다시피 여기는 고등어가 살 만한 환경이 못 되기 때문에 바다가 있는 곳으로 이사도 가야 되고... 네? 부모님이요? 아버지는 너무 무거워서 못 모셔 왔고 여기 어머니요. 그 때 한번 말씀드렸나 모르겠네요. 2년 전인가... 포도나무에 계속 매달려 계시더니 이렇게 돼 버렸어요. 아니, 그 송이 전체가 아니고 거기 들고 계신 엄지손가락 아래쪽 세 번째 알이요. 아뇨. 아뇨. 그 오른쪽 거요. 예. 그거에요. 어?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안돼! 악! 이 개X끼가 우리 엄마를 따먹었어. 죽어라, 죽어버려. 죽어!!
밖에서 사람들이 들어와서 놈을 말린 다음 데리고 끌고가다시피 연신 의사에게 굽실거리며 밖으로 나간다. 그 중에는 포돈지 고등언지 하는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는 것 같다.
아니, 그럼 내가 저 미친X보다도 사회에 필요가 없어서 사라져야 되는 거야? 그는 이제 당황스럽기보다도 억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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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으로 나오니 벌써 어둑어둑하다. 허기는 둘째치더라도 도저히 제정신으로 있을 수는 없을 것 같아서 술집으로 들어가 두루치기 한 접시와 평소에는 입에 잘 대지 않던 술을 홀짝거리기 시작한다.
옆 테이블에는 많이 봐 줘도 고등학생 정도밖에 안 됐을 남자애들 한 무리가 모여서 왁자지껄 떠들고 있다. 부러 들으려고 귀를 기울인 건 아니지만 하도 시끄러워서 자연히 그 쪽으로 시선이 가게 되었는데 요즘 들어 자꾸 패거리의 눈에 나는 행동을 하는 몇 놈의 처분을 둘러싸고 열띤 논쟁을 벌이고 있는 것 같다. 대충 듣자하니 그런 좆같은 새끼들은 좆나게 맞아 봐야 정신을 차린다는 쪽과, 그따위 좆만한 새끼들 건드려 봐야 얻을 것도 없고 그냥 냅둬도 자연히 어디서 줘터진 다음 흩어질 것이라는 쪽으로 갈라져 대립하는데, 대장격인 듯한 녀석이 좌중을 진정시키고는 물론 우리가 손을 쓸 필요는 없을 수도 있겠으나 우리의 활동상을 대외적으로 널리 알리기 위해서는 가끔씩 이렇게 시끄러운 놈들을 처리해 주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는 논조로 주전파 쪽 손을 들어준 다음, 우리가 손을 쓸 필요가 없는 하찮은 일은 바로 이런 것 정도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듯 그때까지도 멍하니 자기들 편을 보고 있던 그를 향해 나지막이 “뭘 봐, 좆만한 새끼가.”라고 한 마디 남기고는 무리를 이끌고 밖으로 나간다.
그는 어린 학생들에게조차 자신이 좆같은 타도의 대상도 못 되는 좆만한 무시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설령 아까 들은 말이 아랫것들 앞에서 강해 보이기 위해 떨리는 마음을 다잡고 내뱉은 알맹이 없는 기표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할지라도-아마도 그랬을 가능성이 높지만- 이미 불안감에 사로잡힌 그에게는 그렇게 간단히 혀 한 번 차고 넘겨버릴 성질의 것으로 와 닿지 않는다. 떨리는 손으로 술값을 치르고 비척비척 걸어 나가며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한 마디 내뱉는다.
좆같네, 씨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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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다. 벌개진 얼굴로 비틀거리며 아무렇게나 걷다 보니 그는 어느 새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앞까지 와 있다. 그 때, 그의 시선이 다리 중간 부분을 향한다. 거기 난간에 누군가 서 있다. 오후의 그 노숙자다. 비장한 표정으로 강을 보며, 첫 비행을 앞둔 독수리 새끼가 낭떠러지 끝에 서 있는 것처럼 그렇게 난간에 올라가 있다. 몸을 한 번 부르르 떨고 정말 날아오르려, 아니 날아내리려 한다. 발을 앞으로 한 걸음 내딛는다. 잠시 주춤하는 듯하나 다시 내딛는다. 그리고는 이제 정말 난다. 난다. 날아라.
털썩
사내가 난간에서 떨어진 건 사실이나 원래 의도와는 반대쪽으로 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는 다리 위 인도에 쓰러져 있다. 약 1미터 높이에서 자유낙하운동을 한 사내는 고개를 슬쩍 들더니 사태를 파악한 것 같다. 잠깐을 그렇게 앉아 있다가 돌연 다리 난간을 붙잡고 흐느끼기 시작한다. 흐느낌 소리는 점점 소리를 더해 가 나중에는 숫제 통곡이 되더니 결국 제풀에 지쳤는지 끄윽끄윽 숨을 고르고는 일어난다. 일어나서는 마치 조금 전에 술집에서 나오던 그의 걸음걸이처럼 비척비척 다리 저 쪽을 향해 사라진다.
저도 언젠가 저 사내처럼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일까. 그의 눈에도 금세 눈물이 고인다.
비와 눈물 때문에 한 치 앞도 뿌옇게 잘 보이지 않는 눈과 취기 때문에 제대로 못 가누는 몸을 이끌고, 그는 사내가 살던 강변 천막 쪽으로 간다. 혹 사내가 거기 있다면 위로의 말을 건네기 위함인지, 동병상련의 정을 나누기 위함인지, 아니면 아까 낮에 그 자신 역시 같은 처지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애써 사내의 말을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치부하고 허투루 들어 넘기는 척 한 것 또한 방금 자살 시도의 원인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하는 까닭인지 어쨌든 지친 몸과 마음을 이끌고 그리로 간다. 앞뒤 안 맞는 말인가 노랜가를 중얼거리면서 가다가 어느 새 차도 쪽으로 내려와 걷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다시 인도 쪽으로 올라가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검은색 BMW 한 대가 그의 곁을 주먹 하나 통과할 만큼의 간격으로 아슬아슬하게 쌩 지나간다. 술이 확 깨는 것 같다. 깜짝 놀라서 사라지는 차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다가 문득 이제 저런 돈 많은 놈들 눈에는 내가 아예 안 보이는 것 아닌가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다시 눈물이 날 것만 같다. 강가의 천막과 벤치가 보이는 곳까지 와서야 그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한 마디 한다. 좆같은 새끼들. 사내는 보이지 않는다. 그는 벤치에 앉아서 사내를 기다린다. 기다리다 저도 모르게 깜빡 잠이 든다.

...........................


젠장, 정말 젠장이다.
여기까지 쓰고 김영하의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를 읽은 건 실수였다.
읽지 말았거나, 쓰기 전부터 읽어서 이걸 쓰겠다는 생각을 못했으면 좋았으련만.
복합적이었지만 크게는 두 가지 감정이 생겼다.
우선, 비슷한 생각을 한 것까진 좋은데 왜 그의 글은 그렇게 흥미있는데 내 것은 이다지도 형편없는가 하는 자괴감이 하나이며, 그럼에도 기왕 시작한 거 끝은 내야 되지 않겠느냐며 말도 되지 않는 내용으로 최대한 김영하의 글과 달라 보이게 위장하며 처음에 의도했던 주제도 제대로 내세우지 못한 채 글을 끝맺게 된 데서 오는, 정말이지 몸 전체를 스물스물 휘감는 것 같은 부끄러움이 또 하나이다.
하지만 괜찮다. 이미 날 때부터 죽어 있었을망정 제 새끼라고 아직까지 써 놓은 글을 보관하고 있지만 그래도 괜찮다. 왜냐고? 뭐가 괜찮냐고? 그건 나한테 물을 게 아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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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8-12-08
20:24:56 

 

상병 이우중 
  어따대고 반말이냐고? 죄송합니다... 2008-09-24
21:40:47
  

 

상병 고동기 
  잘 쓰시네요. 흥미있게 읽었습니다. 
저는 중간에 나오는 노숙자가 미래의 '그' 일거라 생각했었는데, 아니었군요. 
김영하씨의 소설은 아직 안읽어봤으니, 우중님 계속 연재해주셔도 됩니다. 하하 2008-09-25
08:52:43
  

 

병장 어영조 
  재밌게 잙있었습니다. 
사회가 자신을 지워간다는 거, 정말 무섭네요. 2008-09-25
10:04:45
  

 

병장 황인준 
  필요없는 존재를 지워가는 사회라, 끔찍하네요. 
더 끔찍한 건 우리가 사는 사회가 점점 더 그렇게 변해가는 느낌이 든다는 거.. 

재밌게 잘 읽었어요. 
자신감을 가지셔도 좋은 글이라고 생각해요(웃음). 2008-09-25
10:54:19
  

 

상병 홍석기 
  비현실적인 사건으로 가장한 엄청나게 사실적인 글이네요. 더 무서운 건 현실에서는 '나의 세계' 가 몰락하는 것을 꼼짝없이 지켜봐야 한다는 것이죠.... 

궁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기억 저 편으로 묻어 버렸던 것을 오랫만에 다시 끄집어 내 주셨군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궁금한 것. 서른 네번째 남자라는 것은 말 그대로 그가 서른 네번째 '낙오자' 라는 것인가요, 아님 다른 뜻이 있는 건가요. 그리고 -1 이라는 것은 2부의 존재를 암시하고 계시는 것인지... 2008-09-25
13:42:26
  

 

상병 이우중 
  2부...가 실은 있습니다...만, 
내용이 좀 이상해서 전면적으로 수정을 가할 계획입니다. 

제목은 다 쓰고 나서 붙인 건데요, 결국은 그가 서른 네번째 '낙오자'가 되어 버려서 그렇게 된 거에요. 원래는 그럴 생각이 없었는데 말이죠(웃음) 

언젠간 제대로 된 2부를 쓰겠습니다. 제목도 바꿔야 하겠네요. 허허... 2008-09-25
18:20:23
  

 

병장 이동석 
  허허, 
이거 좋은데요? 

그리고 아프군요. 이걸 잊어먹고 있었다니. 2008-10-01
21:03:51
 

 

병장 이동석 
  우중님, 이정도면 해트트릭인데 
아쉽게도 경기가 아직 안끝났군요! 
이대로 끝나기만 해도 되요. 
그런데 이렇게 멈추면 무효게임! 2008-10-01
21:06:17
 

 

일병 강태우 
  수박 겉핥기식으로 읽었는지 이해가 잘 안됩니다.. 땀땀; 

이영하씨 소설먼저 읽고와야겠습니다. 

어쨌든 이우중 상병님 멋지십니다! 다른글도 찾아 읽어봐야겠습니다~ 2008-10-26
16:25: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