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베스트선정-독서후기] 박상익, <번역은 반역인가>  
상병 홍석기   2008-07-23 15:47:50, 조회: 362, 추천:4 

독서후기를 가장한 잡설입니다.
읽으신 뒤 "이게 뭐야? 나는 책 내용이 알고싶다고 이 강태공자쉭아!" 라는 생각이 드실 경우,
역시 이 책을 다룬 영목님의 후기 <척박한 땅 일구기> 의 일독을 권합니다 (명예의 전당에 있습니다).
훠얼~씬 깔끔한 정리와 알찬 편집으로 작가의 진의를 명확히 알 수 있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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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잠시 내 고등학교 시절 얘기를 해 보자.
나는 미국의 한 변태적 교육기관(이 곳에 대해서는 상당히 할 말이 많으나, 주제와 어긋날 가능성이 농후하므로 차후에 언급하겠다)에서 고등학교를 보냈고, 이런 연유로 그들이 강권하는 온갖 해괴한 문체와 단어들이 난무하는 책을 강제적으로 읽곤 했었다.
1학년 때, 내가 영어 수업을 들으며 첫 번째로 읽어야 했던 책은 존 스타인벡의 <Of Mice and Men> 이란 책이었다. 1920-30년대 미국의 농촌을 바탕으로, 농촌 특유의 구수한 말투가 녹아들어 있는 문체가 난무한다. 미국에서의 학교 생활이라면 주말마다 펼쳐지는 광란의 파티와 어여쁜 여학우들과의 만남 이외에는 생각지도 않고, 합격 통보를 받은 후에는 학원 땡땡이치며 열심히 카운터 스트라이크를 즐기는 안일한 자세로 태평양을 건넜던 나에게, 그 스타인벡의 소설은 <순수이성비판> 만큼의 포스를 자랑하고 있었다. 룸메이트놈은 30분만에 그날의 독서 분량을 끝내고 딴 놈이랑 히히덕거리다 영화 켜놓고 있는 마당에, 나는 꼬박 3시간을 투자하고도 10쪽 남짓 읽은 상태였고, 그 10쪽마저도 무슨 내용이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은 채 ‘다,다,다’만 머릿 속에서 공명하고 있었다. 내일 수업은 입 다물고 있으면 어떻게 넘어가겠다만, 이대로라면 이 주일 후 작성해야 될 에세이는 도무지 대책이 서지 않았다. 결국, 나같이 무지한 유학생들이 흔히 쓰던 수법인, ‘번역본 읽기’ 신공을 시전하기로 하고, 교보문고 사이트를 찾았다. 스타인벡...스타인벡...스타인벡...얼래, 이상하다.
번역본 제목으로 나올 법 한<쥐와 인간에 대하여> 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고, <두 친구> 라는 제목의 책만이 <분노의 포도>외에 존재할 뿐이다. <두 친구> 를 클릭하여 내용을 보니 얼추 들어 맞는 것으로 보아, 이게 맞긴 한 것 같은데, 변질된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쥐’라는 메타포에 감춰진 인간 본성에 대한 과감한 백태클, 같은 본연의 주제는 사라진 채 두 친구의 우정과 비극, 으로 완전히 왜곡된 주제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런 젠장, 이제 망했구나, 라는 허탈함과 함께, 한 가지 의문점이 들었다. 고등학교 첫 영어수업의 첫 독서과제로 선정될 만큼 미국 문학사에 상당한 임팩트를 가진 이 책의 제대로 된 번역본이 없다면, 우리나라에서 영미문학을 배우는 사람들은 이 책을 배우지 않는 다는 건가? 아님 자기들은 원어로 읽으니까 상관 없는 건가? 그러면 한국 독자들은 스타인벡의 소설은 <분노의 포도>밖에 모를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좀 비약이 있지만, 이런 상황에서, 영미문학에 대한 제대로 된 토론이 될 수 있을까?

2.
<Of Mice and Men>사건 이후, 다행히 나는 같은 좌절과 실망을 하게 되지는 않았다. 뒤이어 읽은 <로미오와 줄리엣>, <앵무새 죽이기>, <호밀밭의 파수꾼>은 모두 그 번역본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름 ‘영미문학 최고의 명작’ 반열에 올라 있다는 이 책들이, 나에게는 참, 지지리도 재미없었다. 나는 항상 죽지 못해 읽는 심정으로 이 책들을 읽었다. 결국 나는 내 이해력이 딸려서, 내 지적 수준이 낮아서, 여태까지 책이라곤 PC챔프랑 만화책만 봤던 놈이 오죽 하겠냐, 역시 나는 문학에 재능이 없나봐, 등등의 결론으로 마무리를 지었고, 마음 한 켠에는 같이 어울릴 수 없었던 자의 소외감이 발전하여 약간의 증오심도 싹트고 있었다. 그렇게 어느덧 1학년의 마지막 날이 되었고, 나는 우연히도 기숙사 바닥에 버려진 <호밀밭의 파수꾼> 원본을 주웠다. 마침 다음날 15시간의 지루한 비행을 해야 하는 나는 잘됐다 싶어 냉큼 주워들고 공항으로 향했다. 그리고 서울로 향하는 그 비행기 속에서, 나는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는 그 순간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탁, 하고 책을 덮는 순간, 형언할 수 없는 전율을 느꼈다. 그때야 나는 왜 이 책이 최고의 반열에 올라와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제는 나의 이해력이나 문학 재능 같은 것이 아니고, ‘~다’ 체 속에 주인공 홀든의 막말이 중화되어 버린 데 있었다. 문학은 ‘그들만의 놀이’ 가 아니었다. 번역이 그러할 뿐이었던 것이다.

3. 
영어에도 어느덧 적응을 하고 나름 순탄한 생활을 하던 차에, 또 하나의 암초가 나타났던 건 3학년 1학기 때의 일이었다. 조셉 콘래드의 <Heart of Darkness>를 읽어야 했던 것이다. 특유의 길고 복잡한 문장 구조와 발음조차 할 수 없는 단어, 거기에 이놈이 지 어릴적에 배 좀 탔었다고 특유의 뱃놀이 용어까지 겹쳐서 (이런 듣보잡 단어에 메타포까지 집어넣는다) 극강의 난해함을 자랑하는 그 책. 앗차 하는 순간 어느 새인가 같은 줄을 반복해서 읽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그 책. 고민 끝에 마침내 친구놈이 가지고 있다는 번역본을 보기로 했다. 그런데, 제목부터 가관이다. <암흑의 핵심> 이라니, 이것만 봐도 약 5배는 어려워 보인다. 게다가, 뉘앙스가 판이하게 다르다. 암흑과 핵심이라는 두 단어의 조합도 부자연스럽다. 책을 열어 1페이지를 읽어보았다. 원본은 스토리라도 따라갔는데, 이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도저히 모르겠다. 온갖 한자어가 판치고, 문장은 더 길어졌으며, 한 문단이 넘어가면 이전 문단은 해석 불능이다. 결국 나는 그러면 그렇지, 라는 생각으로 그 책을 그냥 친구에게 돌려주었고, 밤샘 끝에 결국 혼자 힘으로 그 책을 해치웠다. 두 번다시 하기 싫을 만큼 끔찍한 경험이었지만, 형편없는 번역 덕분에 나의 영어 실력이 한단계 발전한 느낌이 들었다. 이거 그들에게 감사해야하나.

4.
잡설이 길었다. 심심하다고 후임한테 땡깡부리다 얻어 본 이 <번역은 반역인가>에서, 저자는 이 나라 번역의 현주소를 낱낱이 밝히며 나의 슬픈 과거를 달래 주었다. 이 책에서 한국에서 저질 번역이 이루어질 수 밖에 없는 이유- ‘번역’을 연구 업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세태, 몇몇 ‘미국에서 학위 받아오신 박사님’ 들과 대학 교수들의 지나친 자만과 안일한 태도, 번역가를 싸게 부려 먹으려는 악덕 출판사, 번역을 경시하는 사회 풍조 등등은, 본인이 상당히 무지한 분야에다가, 여기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명에의 전당에 있는 영목님의 독서후기 ‘척박한 땅 일구기’ 에 걸쭉한 김용옥의 입담과 함께 너무나 잘 소개되어 있으므로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기로 하고 (본의 아니게 무단 인용을 하게 되었네요. 사과드립니다), 내가 느낀 어떤 점에 대하여 논의하기로 하겠다.

얼마 전인가, ‘세계 100위권 대학’ 열풍이 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타임’ 같은 앞뒤 꽉 막히고 재미대가리 하나 없는 내용만 담긴 잡지에서 ‘세계대학랭킹’ 좀 발표했다고, 그리고 그 객관적이지도 않고, 객관적일 수도 없는 랭킹에 서울대가 150위엔가 들었다면서, 세계 13위의 경제대국이 100위권 대학 하나 없는 게 왠말이냐 등등의 논의가 일었었다. 그 후, S대니 Y대니 K대니 이놈이고 저놈이고 ‘세계 100위권 대학으로 도약하겠습니다’ 따위의 슬로건을 내걸었고, S모그룹의 후원을 받는 어디는 신문에 광고까지 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해서 100위권 대학에 진입할것인지 (영,미 자본주의적 척도로 만들어진 랭킹 100위에 드는 것이 발전이냐 아니냐에 대한 논의는 잠시 잊자) 궁금하다. 설마, S그룹의 머니파워로 하겠다는 것은 아니겠지?

‘100위권 대학’에 진입 되려면, 당연히, 훌륭한 연구 성과가 진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동서양의 주요 고전 중 상당수가 아직도 번역이 되지 않은 채 소개조차 되지 않았으며, 그나마 되어 있는 것도 오역이 판치는것은 기본이고, 일본, 미국에서 번역된 것을 중역하여 우리말이 아닌 각종 한자어와 영문 용어가 도배되어 있는 현실에, 과연 훌륭한 연구가 나올 수 있을까? 개판 5분전으로 번역된 <Heart Of Darkness>를 읽고 미국 문학에 상당한 족적을 남겼던 조셉 콘래드에 대한 좋은 논문이 나올 수 있을까? 홉스의 <리바이어던>을 날림으로 읽은 사람이 <리바이어던>을 중심축의 하나로 놓고 공부한 미국의 사회과학도 (실제로, 우리 학교의 사회과학 커리큘럼에는 홉스가 큰 영향력을 차지하고 있다) 보다 우수한 연구를 할 수 있을까? 대답은 당연히 ‘No'다.

또 한 가지, 한국 문화에 대해서 외국 학자들의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 얘네가 한국에도 상당히 쓸만한 사상이 있네? 라는 생각 정도는 해 줘야, 랭킹을 올려 주든 말든 할 것 아니냐는 거다. 그런데, 도대체 뭐가 제대로 번역되어 있는가? 내가 좋아하는 <금오신화> 나 <구운몽> 역시 외국엔 아직 듣보잡이고, <춘향전>도 미미한 상태인데, 수많은 한시들이나 성리학 관련 저작들은 아예 찾아 볼수도 없을 것이다. 하긴, 아직 우리말 번역도 안된 것들이 많은데 뭘 바라겠나. 그런데, 이런 상황 개선시킬 궁리는 안하고, <반크> 같은데서 외국 학자들이나 출판사들한테 왜 한국 역사 왜곡시키냐고, 축소시키냐고, 좀 중요하게 다뤄 달라고 요구해봤자 헛짓거리다. 우리가 아무리 ‘우리도 한 간지 했다’ 해봤자, 자료가 없는걸 어쩌란 말인가. 무작정 따지기 전에, 걔들한테 감동의 도가니탕 좀 먹여주고 따지자는 거다.  그러니까, 그래, 제발 번역 지원 좀 해줬으면 한다. 적어도 타워 팰리스 한 동에 해당하는 금액 정도는 달라. 타워팰리스 한 채 값이 왠말이냐. 그래서 <요츠바랑!>에 나오는 아빠처럼, 단독주택도 갖고 애도 좀 먹여살릴 수 있게 해달라. 번역가들을 단칸방에서 쫓아내고, 인간적인 환경에서 번역에 매달릴 수 있게 해달라. 번역은 반역이 아니라, 국력이다.

결론
타임 보다는 디플이지.



* 책마을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8-08-27 13:39)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8-12-08
20:16:29 

 

병장 이동석 
  전 그냥 쌩 디스 
싸고 좋아요. 
요즘 같은 고유가 시대에 만원이면 다섯갑. 훗후후. 

(본문 안읽고 결론만 보고 댓글다는 몰지각) 

근무 끝나고 제대로 읽어보겠습니다. 후다다닥 2008-07-23
15:53:16
 

 

상병 공태훈 
  음음음.. 역시 그렇지 말입니다. 

일본이 오늘날의 산업대국으로 성장한 밑바탕에는, 메이지 유신이후로 일본정부가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번역을 국가차원에서 추진, 장려한것도 있지요. 

..실제로 오늘날 우리가 쓰는 '역사' '경제' '국민' '민족'등의 개념은 모두 일본인들이 만든거라고 합니다. 2008-07-23
16:32:20
  

 

일병 이동열 
  일본문학을 즐기던 저로선 일본문학번역엔 만족하는 편이랍니다. 
양억관씨나 양윤옥씨등 전문 번역가가 있어서 그런지 제 수준이 낮아서 그런지(땀) 

한국의 한 대학을 다니면서 부끄러울때도 많습니다. 
건물이 아무리 좋아도 기업이름이 붙은건 좀 그렇잖아요?(울음) 
바깥 치장도 좋지만 내실을 다져야할텐데... 
그러고 보니 이번에 세계 언어학대회가 열린다는 소식도 들었는데 
한국의 언어학이 한층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네요(웃음) 2008-07-23
16:37:43
  

 

병장 이동석 
  일단 말머리를 바꾸시는게, (농담) 

뉴타입 독서후기로군요. 
하기사 독서후기라고 맨 책에 대한 내용만 써야하는건 아니니까요. 
책 읽는게 책의 고갱이만 빼먹으려고 읽는것도 아니니 
새로운 독법이랄수도 있겠어요. 

그건 그렇고 그렇게까지 엉망인 번역들을 보면서 
제 자신의 저열한 지적능력을 한탄해오곤 했었는데 
차라리 외국어를 배워야겠어요. (음?) 2008-07-23
16:41:42
 

 

상병 홍석기 
  태훈// 맞습니다. 이 책에서도 메이지 시대 이후 일본이'번역국' 까지 설치해 가면서 번역에 공을 들인 결과 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또한 박노자씨의 <나를 배반한 역사> 에도 이 대목이 나옵니다. '사회' 같은 경우 문화적 차이로 인하여 도저히 번역이 불가능했던 'society' 의 번역에서 등장한 말이고, '국민,' '민족'의 경우 'nation'에서 파생되었다고 하는군요. 원래는 '인민'이라는 콩사람스러운 단어가 쓰이기도 했다,(그래서 일제시대에 쓰여진 많은 글에 이 말이 쓰여지기도 했습니다)고 그 책에서 언급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동열// 저도 일본 문학, 특히 흔히 얘기하는 <상업문학> 을 많이 읽는 편인데, 이 경우에는 일본어의 영향을 워낙 많이 받은 한국의 특성 때문인지, 상업문학에서 묘사하는 현대 사회는 국가간 '문화'의 영향을 조금 덜 받아서인지는 몰라도, 확실히 원문의 느낌이 어느정도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러나, 영미문학 쪽으로 넘어가면 오역은 기본이고 원문의 훼손이 심하더군요. 예전에 돈 좀 아낄려고 <피버 피치> 를 번역본으로 보았었는데, 혼비 특유의 경쾌한 문체와 유머 감각이 많이 죽었더라구요. 

동석// 후후. 역시 바꿔야 하나요. 학창시절 '논리적이고 깔끔한' 독후감을 지나치게 강요받아서인지 그렇게 쓸려고 해도 항상 삼천포로 빠져버립니다. 이거 안 고치면 대학 돌아가서 고생 좀 할텐데 말이죠. 그래도 이런 형식의 글은 책마을에서나 쓸 수 있는거 아니겠습니까. (결국 변명에 급급) 

번역 현실만이 이유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김용옥은 <대화>에서 자기만의 혁신적인 대학을 만든다면 그 커리큘럼의 하나로 외국어 속성 코스를 넣기도 했죠. 시험/입신양명 위주의 외국어 공부는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지만, 확실히 필요성을 느끼고 있습니다. 2008-07-23
17:12:59
  

 

병장 허기민 
  잘 읽었습니다.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에 도전했다가 다 읽지 못하고 그저께 도서관에 반납한 저에게 많은 위안이 되었습니다(웃음). 2008-07-24
07:22:16
  

 

병장 김준호 
  앗. 스타인벡의 <두 친구> 이 책 여기 굴러다니길래 한 번 보려고 했는데. 
살짝 펼쳐봤을 땐 글씨도 크고, 이상한 삽화가 많아서 원래 짧은 글인가하고 생각했었는데, 그 책은 그럼 완역도 아닌 주제에 오역까지 있는 건가요...(땀) 2008-07-24
08:32:56
  

 

병장 윤형주 
  적어도 소설에서만큼은 원본을 읽어야만한다는 기존의 강박관념을 강화해주시니 고맙습니다~ 

그나저나 듣보잡은 듣도 보도못한 잡동사니란 뜻인가요? 2008-07-24
09:22:07
  

 

상병 김태형 
  형주// 듣도 보도 못한 잡것.. 이라고 들었었는데, 
아마 맞을겁니다. (으흠) 2008-07-25
09:33:08
  

 

일병 김호균 
  호밀밭의 파수꾼은 정말 번역본으로 읽으면 안되는 소설이죠.... 

p.s. 그나저나 이책 다 봤으면 빌려줘요 2008-07-28
08:39:55
  

 

상병 홍석기 
  준호// 원래 짧은 글인 것은 맞습니다. 'Novel'이 아닌 'Novella'의 범주에 속하는 글이죠. 그렇다고 글씨가 크고 삽화까지 곁들이다니 멀쩡한 책을 어린이용 교훈서로 만든 모양이군요. 

형주// 듣도 보도 못한 잡늠, 잡것, 잡생각...등등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책마을 스타일에는 좀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는 단어인데, 어떤 선임이 이 단어를 밥먹듯이 남용하는것을 보고는 저도 이 단어에 중독되어 버렸습니다. 

호균// 얼마 전부터 출판사 사장이 샐린저의 팬인지는 몰라도 갑자기 <아홉가지 이야기>, <프래니와 주이>, <목수들아, 대들보를 높이 올려라> 와 같은 국내에는 거의 소개되지도 않았던 샐린저의 다른 작품들의 번역본이 출판되었던데, 이것들도 살짝 걱정이 됩니다. 
물론 이 소설들은 구어체가 그렇게 두드러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중간중간에 터져나오는 샐린저 특유의 문체도 그렇고, 이 소설들은 50년대 미국 부유층의 문화에 대해서도 상당한 지식이 필요합니다. 더 얘기를 하고 싶으나, 이 책들은 사실 저도 아직까지 이해를 못하겠는 고로 여기서 이만. 

p.s. 내 책이 아니란 말이요. 나도 이런 멋드러진 책들 좀 사 놓을껄... 2008-07-29
11:33:03
  

 

병장 박종석 
  원서의 맥락을 이해할 수 있는 어학 실력이 있어야겠지요. 그리고 한편으로는, 상이한 두 언어가 갖는 차이를 감안하면서, 효과적으로 저자의 문맥을 전달할 수 있는 모국어 구사력이 있어야겠지요. 

결국 원어와 번역어, 두 언어가 갖는 간극을 부정할 수는 없는데…… 그렇다면 어떤 번역이 원서에 가장 부합하는 것인지, 그 방법론에 대해 번역가 각각의 입장이 생길 수밖에 없지 않은가 생각이 듭니다. 직역-의역의 단순한 구분이 아니라, 무엇을 강조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 말입니다. 

요컨대 지금 한국의 번역이 갖는 문제는 "번역인가 반역인가"의 문제라기보다는 차라리, 반역도 아니고 이도저도 아닌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물적으로 A=B를 대입하고, 구색을 갖춘 문장을 만드는 것에 그치는 것 같습니다. 그런 경우는 저자에 대한 공감이나 애정을 찾기 어렵고, 그렇지 않더라도 자신의 번역본이 원서를 매개하지 않고서 읽어도 이해 가능한 것인지 따져볼 생각을 하질 않아요. 

지젝의 저서《How To Read-라캉》을 번역한 수유 연구소의 박정수는 사실 라캉-지젝에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책의 역자 서문은 마치 지젝에 대한 반론처럼 읽힙니다. 요컨대 반역자인 셈이지요. 하지만 그 반역은 참 일관되어서, 책을 읽기에는 무리가 없더군요. 2008-08-08
12:29:54
  

 

병장 이태형 
  하아.. 번역본도 소화해낼 수 없는 실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원서는 이뭐. 
잘 읽었습니다. 
추천. 2008-08-09
15:25:04
  

 

일병 김예찬 
  05년인가, 교수신문 주관으로 최고의 고전 번역본을 뽑는 기획이 있었는데.. 그때 영미문학 부분에서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에 대한 한글 번역판 8개 모두 함량 미달이라는 판정이 나와서 상당히 놀랐던 기억이 나네요. 근데 저 같은 경우 콘래드의 <<암흑의 핵심>>은 번역본으로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원문의 재미를 못느껴 봐서 그런가 봅니다. 

그래도 06년부터 번역에 대한 학계의 관심이 커져서 번역 비평 세미나나 번역 비평 계간지도 만들어졌고.. 무엇보다도 학술 서적 번역에 대한 학자들 사이의 논쟁이 활발해졌다는게 긍정적으로 보이더군요. 학계의 이러한 변화도 그렇지만, 개인적으로는 번역가들의 개인 홈페이지나 알라디너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번역 논쟁을 통해 점점 양질의 번역이 나타나고 있는 것 같아서 한국 번역의 미래를 어둡게 보고만 있지는 않습니다. 

(...물론 <<감성과 분할>>과 알라디너 고소 사건과 같은 일도 벌어지고 있긴 합니다만...) 2008-08-11
09:0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