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베스트선정-내글내생각] 독일인의 사랑  
병장 박준연   2008-07-08 10:22:10, 조회: 516, 추천:3 

초등학교 시절이었다. 학교가 집에서 꽤나 멀었다. 베란다로 나와 아파트 11층 창문으로 내다보면 운동장이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지만, 그것은 다만 직선상의 거리일 뿐이었다. 당시엔 동백꽃 피는 내고향 여수라는 동네가 워낙 촌동네라 도로가 잘 나있지 않았었고 집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모양인지라 골목골목을 미로처럼 돌아가는 길이 적잖게 멀었다. 그런데 멀게만 느껴지던 학굣길이 어느 순간부터 그저 쓸쓸하지만은 않았다. 마음에 담아둔 사람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전에는 그저 그날 점찍은 나의 돌멩이를 교문 앞까지 줄곧 걷어차며 걷거나, 점퍼 호주머니의 뜨거운 핫팩(혹은 차가운 아이스팩)을 만지작거리며 걷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이었는데, 갑자기 그 모든 것이 하찮게 느껴졌다.


그 아이는 학교 가는 길목에 있는 솜씨 좋은 미용실집의 딸 환영이었다. 서환영. 우리 학교 전교 부회장. 환영이는 늘 단정하게 손질한 긴머리를 하고 있었다. 가만히 앞서 가는 그 아이를 뒤 쫓으며 보면, 단정한 머리칼이 언제나 매끄럽게 찰랑거렸다. 유난히 키가 크고 다리가 길어 달리기 선수였는데, 운동장 트랙의 가장자리를 머리를, 몸을 기울여 달리는 모습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물론 그 아이는 나의 존재를 알 턱이 없었다. 300명도 넘는 아이들이 한 학년에 바글거렸고, 나는 여전히 말없이 교실 한편을 지키던, 특색도 재능도 없는 어린아이일 뿐이었다.


그 즈음 나는 도서부원으로 학교 도서관을 지키고 있었다. 아무도 오지 않는 도서관에 남아 청소하고, 하교시간이 되면 도서관에 자물쇠를 채우는 것이 내 일이었다. 플라타너스 그림자가 길어질때쯤, 저녁 어스름이 잔뜩 스며들어 더이상 읽을 수 없을때까지 책을 읽거나 책장 사이를 서성거리는 것이 내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하교 무렵 아무도 찾지 않던 도서관의 뻑뻑한 미닫이문이 천천히 열리는 것이었다. 나는 머리칼이 쭈뼛 섰다. 귀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조금 있다가 누군가 삐죽 머리를 들이밀었다. 나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서환영이었다. 아니 환영이 혼자가 아니었다. 친구 두엇이 뒤이어 들어왔다.



"책 빌려 갈 수 있니?"

나는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책 못 빌려가?"

환영이가 재차 묻는 말에 나는 꿈에서 깨어나듯 머리만 크게 가로저었다.



여자아이들은 소곤거리며 서가를 헤집고 다녔고, 이윽고 저마다 책을 한 권씩 들고 나왔다. 나는 책을 건네받았다. 환영이가 내민 책은 동화책이 아니었다. 막스 뮐러(F. Max Muller)의 <독일인의 사랑>이었다. 나는 그 책을 그때까지 읽지 않은 것이 후회스러웠다. 먼저 읽고 한마디라도 할 수 있었으면 하고 생각했다. 나는 책에서 대출카드를 꺼내 아이들의 이름을 확인하며 적어나갔다. 그리고 <독일인의 사랑>이라는 제목 아래 누구의 이름도 기록되지 않은 대출카드에 그 아이의 이름을 써 넣었다. 또박또박. 서환영. 나는 그 이름이 텅빈 내 마음에 또렷하게 새겨지기를 바랐다.


"너, 내 이름 아는구나?"

환영이가 말했다.

'그럼. 이름만 아나. 미용실집 딸이라는 것도 알아'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응, 부회장이잖아."

그렇게 말하고 말았다. 환영이는 자랑스럽게 환히 웃었다.


아이들이 몰려 나간 뒤, 나는 창문으로 달려가 환영이의 뒷모습을 까닭 모를 설렘으로 오래오래 지켜보았다. 큰 키가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고, 노을이 서편에 내려앉고 있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나는 그렇게 그 아이의 뒷모습만 지켜보다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그것도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까? 나의 첫사랑, 서환영.


* 책마을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8-08-27 13:37)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8-12-08
10:37:40 

 

병장 어영조 
  [응, 부회장이잖아.] 왜 이 부분에서 안타까움이 쓰나미 물결치듯 몰려드는 걸까요 2008-07-08
10:44:47
  

 

병장 이동석 
  여자 이름이 환영이라니 
의미심장합니다? 2008-07-08
11:16:37
 

 

병장 이동석 
  어쨌거나 전 여수에 있는 아파트 하나를 지은고로 
여수에서 꽤 오래지냈는데, 
구불구불한 골목들이 꽤나 인상적이던데요. 
더불어 제가 공구리 치던 아파트 주위로 싸그리 밀린 집터의 앙상함 하며 
해양엑스포를 위해 도시정비 사업을 한다고 하던 소장의 말에 
돈좀 만지겠다는 도급업자의 만면에 가득한 미소하며 
저거 싹 밀어버려야 되겠다는 용역업자의 의미심장한 대답하며 
참, 2008-07-08
11:20:38
 

 

병장 김원택 
  그러게요. 부회장이기 때문에 아는 이름은 아닌 인데. 과연 그 사람은 어떻게 살고 있을지 제가 궁금해지네요. 2008-07-08
11:47:06
  

 

병장 김은호 
  크.. 참 맛깔스럽네요. 글이. 정말로. 2008-07-08
13:02:55
  

 

일병 이동열 
  역시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뭔가 유기농 채소로 만든 담백한 요리같은 느낌이랄까(웃음) 

그나저나, 독일인의 사랑이라길래 브람스와 클라라를 생각한 저는 뭔지(땀) 2008-07-08
13:35:48
  

 

상병 이광근 
  실환가요? 그 책과 겹쳐져서 재미있네요. 2008-07-08
14:03:43
  

 

병장 장윤호 
  크... <러브레터>의 도서관 신이 생각나네요. 
"후지이 이츠키 스트레이트 플러시"에 버금가는 명대삽니다. 

"응, 부회장이잖아." 2008-07-08
16:21:44
  

 

병장 황인준 
  안타까울 따름이라는(땀땀). 
잘 읽었습니다. 2008-07-08
16:36:17
  

 

상병 홍석기 
  "나는 그렇게 그 아이의 뒷모습만 지켜보다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라니...거의 360초 급이로군요. 

설마 이랬다고 또 삐지시는건... 2008-07-08
16:59:14
  

 

일병 김지훈 
  글이 참..미묘함을 남기시는게... 2008-07-09
05:54:06
  

 

병장 이태형 
  360초는 뭔가요? 
초등학교 때의 첫사랑? 
나도 있었나? 2008-07-09
10:16:53
  

 

병장 이동석 
  명예의 전당 360초 글 말씀하시는것 같은데요. 

준연님은 참 좋은 선임이신가봐요. 히히. 2008-07-09
10:59:51
 

 

병장 허기민 
  늦었지만, 잘 읽었습니다. 2008-07-23
14:47:31
  

 

상병 서윤석 
  마무리가 참 깔끔하고 인상에 많이 남습니다. 
윗분보다 한달정도 더 늦었지만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2008-09-18
10:25: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