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베스트-일상이야기] 의녀의 커피.  
병장 엄태산   2009-06-24 143437, 조회 228, 추천0 

어느새 나는 이 지긋지긋한 신분사회의 꼭대기에 올라가 있다. 평민의 끝. 이곳에 서는 날을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렸던가. 은은한 커피향기가 나는 '치료실' 이곳에서 쏟아버린 무수하게 많은 커피와 그 쏟아버린 커피보다 최소 10배 이상은 더 많이 마셔버린 커피. 그리고, 어느샌가 내 몸과 이곳은 동체가 되어 그윽한 커피향을 풍기고 있었다. 더이상 내가 이곳에서 배울것은 없으리라. 나는 이제 이곳에서 모든것을 깨달은 전지전능한 '의녀' 이니라.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했다.

의녀의 하루는 언제나 같다. 깔끔한 복장. 누구보다 청결해야 하는 '의녀' 에게는 가장 중요한 덕목이 아닐까 싶다. 수많은 '환자'들이 들락날락 거리는 곳이므로 자신의 얼굴을 보고서 불쾌감을 표시하는 그런일이 없도록 최대한 단정하게 그리고 '궁인' 답게 용모를 정리한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위생상태. 이것이 얼마나 스트레스를 주는 과중한 청소작업인지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느끼고 있다. 어느샌가 이곳은 나의 집같은 곳이 되어버렸고, 나의 물품이 나의 물품이 아닌것보다 많아졌으며, 선배들의 흔적을 천천히 지워 나갔다. 그리고 지금은 깨끗하게 예전형태를 잃고 나의 구성대로 가장 편리하며 우아한 동선을 그리며 '치료실' 이라는 느낌을 나에게 주고 있다. 

그리고 남아있는 것은, 이 궁전 의녀에게 대대로 전해지는 커피 제조 기술이다. 환자에게 따스한 커피한잔 건내자. 그런 의도로 까마득한 조상 어의에 의해 만들어졌고, 그것은 지금 나에게 까지 이어졌다. 치료실 이라는 공간은 순식간에 삭막해지기 좋은 곳이다. '피' 를 보는 것은 일상사요. 사람들의 고통에 차있는 비명소리. 온갖 고통이 산재해 있는 이장소에 커피라니. 처음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환자들의 고통을 이해하며, 스스로도 통감하고 있다. 이제 의녀로서 수련이 끝나고 누구를 가르칠때, 가장 먼저 가르친것이 바로 '커피 제조 기술' 인 만큼 이 궁전 의녀에게는 가장 중요한것일수도 있다. 그리고, 가장 만족감을 얻을수 있는 일이기도 하고.

나는 이제 이 궁전에 없어서는 안될 존재가 되어있었다. 처음 왔을때의 그 이루말할수 없던 이질적인 감각은 없어져버렸고, 그 자리를 다시 추억으로 채우고 있었다. 그리워진다. 혼날때도, 웃을때도 같이 있었던 사람은 이미 다 떠나가버렸고, 나만이 홀로 남겨져 있다. 그리고... 또한 새로운 얼굴들을 볼때마다 동병상련이라는 느낌보다는, 더욱 강한 동질감이 느껴진다. 우리는 하나다. 라는 감각. 

어느새 커피가 식어버렸다. 이런, 너무 집중해서 생각을 했었나. 커피는 식으면 참 맛이 없는데.
아랫것이 들어와 내 커피를 살짝 바라본다. 그리곤 말한다.
이제, 저희들이 탈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그런가. 벌써 너희들이 나에게 커피를 타줄때가 된건가. 어느새 말이다. 예전에 나의 윗분들이 그리고 어의님께서 커피를 처음으로 타서 바쳤을때, 그때 인정받았다는 느낌이 들었었는데... 

타봅니까 최고의녀님 하하하... 헛웃음이 나와버렸다. 그리고, 머그잔에 담겨있던 커피를 다 마셔버렸다. 허탈해 하는 아랫것들을 보면서, 나는 작게 말했다. 그래. 이제 나도 역사의 뒷길로 물러날때가 되었구나... 너희들이 타주는 첫번째 커피. 잘 마시마. 

커피는 곧 준비됐다. '치료실' 에는 보통의 스틱식의 커피믹스는 존재하지 않는다. 진짜 커피. 프림, 그리고 설탕. 한구석에 준비되어 있는 카페와도 같은 분위기. 그 분위기는 아직도 어색하다. 마치, 성당에 들어가서 느끼는 경건한 마음으로 언제나 커피를 타게 된다. 즐겨 마시는 커피, 어느정도 달콤하면서도, 커피의 뒷맛이 느껴지는 그런 커피를 난 좋아한다. 그리고 워낙 커피를 탈수 있는 신분은 적당히 아래를 바라볼수 있으면서도, 위에를 챙길줄 아는 위치여야 한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내가 커피를 타는 것을 가르치고 이 아이들에게 얻어먹질 않았구나. 이런것에 욕심낼 이유가 없었는데...

아랫것이 즐거운 마음으로 타온 커피를 마셨다. 맛이 좋다. 뭐랄까, 잔잔한 맛이다. 어느새 이곳에서 1년9개월을 있으며 커피만을 즐겨마셨더니 이제 대충이나마 커피맛을 볼줄 아는 위치가 되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맛있습니까 아랫것의 물음에 슬쩍 웃으며 말했다.

이제부터 너가 타라. 훌륭하네.

 책마을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9-07-14 1140)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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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병 고재형 
  아.. 아파본 적이 없다보니 의녀님들께 커피 얻어 먹어본 일이 없네요. 
저도 커피 참 좋아하는데 핫핫. 2009-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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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병 김현우 
  시간은 흐르고 나면 참 빨리 흐른 것 같죠. 
막상 앞에 있는 시간은 참 더딘데 말이에요. 

이놈의 이면성 때문에 시간을 그냥 덫없이 날리는 것 같아요. 2009-06-25
050808
  

 

일병 이선목 
  글에서 커피향이 나네요. 마치 치료실에 찾아간 것처럼 2009-06-25
073538
  

 

일병 송단아 
  저희 치료실은... 조그맣한 치료실이라 삭막한 분위기가 개선이 어렵습니다.(울음) 

구조도 많이 바꿔보고 청소도 죽어라 해봤지만......... 

커피 제도를 도입해 봐야겠습니다. (웃음) 2009-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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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병 오효섭 
  저희는.. 믹스를 이용하고 있어서,. 하하 2009-06-25
145550
  

 

상병 권홍목 
  오오, 저희도 믹스를 사용하는데 말이죠 2009-06-25
162031
  

 

병장 김범수 
  커피 믹스 만큼, 커피의 맛을 싸구려 저질로 일반화 시킨 것은 없네요. 개인적으로 커피 예찬론자라, 커피 믹스를 혐오할 정도로 싫어하는데... 엄태산 씨 처럼 커피를 타서 먹는것 좋네요. 2009-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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