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베스트-독서후기] 난외각주, 『사람의 아들』 (1)  
일병 오학준  [Homepage]  2009-06-10 134935, 조회 92, 추천0 

참 오래간만에 한 자리에 진득하니 앉아서 책을 읽었습니다. 정신이 산만해 그동안 책과 글을 제대로 읽을 수 없었는데, 모처럼 집중을 할 수 있게 되니 기쁩니다. 물론 정제된 글을 쓰기에는 여전히 정신이 산만합니다. 조금은 산만하고 난삽한 글이어도 이해해 주세요. (제가 다시 읽어도 뭐라고 썼는지 모르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겠군요...) 사실 이 글은 『사람의 아들』에 대한 독서감상문이나 서평이라기보다는, 책을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들을 모은 '난외각주' 정도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1_ 원죄

계율이 없는 곳에 어찌 죄만 홀로 있겠소
─ 이문열, 『사람의 아들』, 244쪽

  인간의 원죄를 규정하는 굴레는 속죄와 유죄의 무한한 순환이다. 계율은 현실의 삶이 언제나 위반할 수밖에 없는, 도달할 수 없는 이상으로서, 인간에게 도래하는 순간부터 인간을 죄인으로 만든다. 흔히 말하는 '무죄 추정의 원칙'은 지켜지지 않는다. 말하는 입을 먹는 입으로부터 분할하는 순간, 말하는 입이 이상적인 삶의 원칙으로 승격되는 동시에 먹는 입은 은폐되어야 하고 배제되어야 하는 추악한 삶이 된다. 질서와 체계, 인간의 원죄는 거대한 노모스 그 자체인 종교에서 반드시 전제되어야 하는 무엇이 된다. 불교에서 말하는 '괴로움'과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는 종교 자체를 유지하는, 핵심적인 무엇이다. 동시에 종교는 체계 내에서 '속죄'의 체제를 갖추고 있다. 그러나 속죄한다는 것은 유죄인 자가 자신의 죄를 시인하고 용서를 받는 것, '회개'한다는 것이지 '죄 없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분리될 수 없는 말하는 입과 먹는 입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인간의 삶, 그리고 말하는 입이 세우는 질서로서의 종교는 끊임없이 인간을 유죄로 기소할 수 있으며, 속죄하도록 강제할 수 있다.

여전히 되풀이되는 것은 다만 책임없는 죄와 분별없는 처벌의 악순환일 뿐이었다.
─ 이문열, 『사람의 아들』, 288쪽

  그러나 『사람의 아들』에서 위대한 지혜가 구원도 용서도 땅 위에서 구하라고 말하여도, 그것이 이 유죄와 속죄의 굴레를 벗어던지는 해결책은 아니다. 우리의 '법'은 항상 잠재적으로 모든 이를 기소할 권한을 가지고 있고, 우리는 법 앞에서 '분할될 수 없는 자연적 삶'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항상 유죄로 추정될 여지를 떨칠 수 없다. 


2_ 주권

다시 말하거니와 너희는 지음받는 그 순간에 이미 완성되었다. 우리는 몸소 분별해야 하는 번거로움 대신에 너희에게 선을 불어넣었고, 간섭하는 수고 대신에 지혜를 내렸다.
─ 이문열, 『사람의 아들』, 296쪽

  동시에 분할될 수 없는 자연적 삶이라는 조건은 그러한 법이 가장 강력하게 작용할 수 있는 취약점이자, 법 자체의 취약점이기도 하다. 체계는 언제나 비체계에 빚을 진다. 근대성의 원리가 그러하듯, 질서라는 말에는 항상 비질서라는 말이 은폐된 채 따라다닌다. '주체'라는 구성적인 개념이 개념을 통해 대상들을 질적으로 평준화시키고 수량적으로(시공간적으로) 재배치하는 것, 그렇게 하려는 무한한 의지가 근대성의 원리에 대한 단순한 설명이라면, 그것은 나누기 위한 대상을 언제나 필요로 한다. 아도르노가 요청한 개념적 '자연'이 바로 그것이 될 수 있다. 동시에 인간의 자연성 자체 - 인간의 원죄로 '추정'되는 - 가 바로 그러한 대상이 된다. 근대성의 원리를 이끌어가는 주체 자체가, 근대성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역설.

  주권은 바로 거기에 있다. 질서는 언제나 질서 바깥의 무언가에 의해 기초가 세워진다. 수학은 증명될 수 없는 자명한 공리에서 연역해 나가며, 사회적 질서는 질서 자체로는 창출될 수 없는 추동력, 즉 주권에 의해 세워진다. 주권이 '예외상태'라는 말은 사회적 질서를 창출하는 힘이면서도 질서 자체에는 귀속되지 않는 꼭지점이기 때문에 나타난다. 동시에 그 꼭지점이기 때문에 주권은 질서를 파괴할 권능을 가진다. 신이 신의 권능을 드러내는 방법이, 신이 창조한 질서의 파괴에 있다는 것 - 주권은, 슈미트에 의하면 세속화된 신의 권력이다. '세속화', 신의 권능이 인간에게로 옮겨지는 것은 완전하지 못하다. 인간은 스스로 주권을 발휘하는 동시에 그 주권에 의해 다스림을 받아야 하는 자연적-정치적 인간이기 때문이다.


3_ 구원

  구원은 '더 나은 삶을 위한 질서의 창출'이 아니라 '현재 삶을 이끌어가는 질서의 효력 상실'이다. 모든 사물들이 '강요된' 의미망에서 벗어나는 순간, 새로운 의미는 가능성으로 주어진다. 하나님의 나라, 천국 - 문제는 기독교의 종교적 구원이 '현세'라는 질서를 파괴하기보다는, 그 질서를 '죽음'으로서 도피한 이후의 인간들에게 부여된다는 점이다. 구원도 용서도 땅 위에서 구하라는 것은 이러한 도피에 대한 세속화된 인간들의 반항이다. 분리될 수 없는 모순적인 '삶'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해탈'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구원이란 종교적으로 불가능한 것인가 민요섭은 신으로 회귀하고, 조동팔은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다. 정치적인 메시아 - 발터 벤야민은 유대교의 메시아를 모든 이들의 메시아로 변화시키며, 종교 대신 정치를 문제삼는다. '정지'는 그러나 가능한 것인가 사실 소설에서 이러한 대안을 발견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아니, '정지'라는 말 자체가, 그 이후의 어떤 계산 가능한 것들을 남겨두지 않는 말이다. 아도르노 식으로 말하자면 '열려있는 미래'를 열기 위해서는, 꾸준히 타락해가는 질서정연한 현재를 '정지'시켜야 한다는 역설. 그것이 사건이 되었든, 불화의 결과물이든, 메시아적인 혁명이든, 가상적 예술에의 희망이든, 아도르노로부터 현대의 해체 혹은 포스트모던한 학자들의 공통점은 구원의 순간 이후에 대해서 말을 아낀다는 점이다. 


4_ 화해

  구원에 대해 말을 아끼는 것. '비동일자'라는 것이 바로 그러한 질서정연한 구원에 대한 의문의 근거가 될 것이다. 예수와 아하스 페르츠, 위대한 선과 위대한 지혜라는 환원될 수 없는 '쌍' - 그럼에도 『사람의 아들』에서 이문열은 이 둘을 근본적으로 하나였고, 앞으로도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으로 그린다. 이것들이 분리불가능한 동전의 양면같은 것이자, 하나될 수 없는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지양이 아닌 구도(Konstellation), 환원될 수 없는 자연과 역사, 그리고 그것을 이어주는 가상으로서의 예술 - 아도르노의 경우 구원의 계기에 대해서 여기까지만 말했다 - 처럼, 화해는 통합될 수 없는 것들의 소통, 타자에 대한 이해이지 모든 것을 보편적으로 환원시키는 것, 최후의 동일자로 환원시키는 것이 아니다. 배제되어야 하고 버려져야 하는 특성의 집합으로서의 타자를, 보편자로 여기는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스스로의 동일성 신화에 의한 폭력임을 인정하는 것 자체에서 화해의 계기는 시작된다. 이문열의 콤플렉스가 사실은 여기 이 민요섭의 쿠아란티아서에서 유래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게 된다면, 이문열의 '단절'은 사실상 '없는 것'이다. 지금처럼, 그때에도 그에게는 화해에 대한 '몰지각'이 유지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책마을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9-07-14 1236)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7-20
081707 

 

상병 진수유 
  잘 읽었습니다. 사람의 아들을 읽은지 꽤 오래되었지만 오랜만에 당시에 느꼈던 감정과 생각들을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3_구원' 부분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이 있었는데, 지금은 '2_주권'에 대해 좀 더 관심이 가게 되네요. 

주권은 바로 거기에 있다. 질서는 언제나 질서 바깥의 무언가에 의해 기초가 세워진다. 수학은 증명될 수 없는 자명한 공리에서 연역해 나가며, 사회적 질서는 질서 자체로는 창출될 수 없는 추동력, 즉 주권에 의해 세워진다. 주권이 '예외상태'라는 말은 사회적 질서를 창출하는 힘이면서도 질서 자체에는 귀속되지 않는 꼭지점이기 때문에 나타난다. 동시에 그 꼭지점이기 때문에 주권은 질서를 파괴할 권능을 가진다. 신이 신의 권능을 드러내는 방법이, 신이 창조한 질서의 파괴에 있다는 것 - 주권은, 슈미트에 의하면 세속화된 신의 권력이다. '세속화', 신의 권능이 인간에게로 옮겨지는 것은 완전하지 못하다. 인간은 스스로 주권을 발휘하는 동시에 그 주권에 의해 다스림을 받아야 하는 자연적-정치적 인간이기 때문이다. 

지난 달에 읽었던 에코의 푸코의 진자를 보면 1권 도입부에 에코가 말하고자 하는 '진자'의 의미가 얼추 나옵니다. 그것이 책 전체의 줄거리를 가장 근본에서부터 지배하고 있는 생각이기도 합니다만, 어쨌든 상당 부분이 맞닿아 있어 보이네요. 현재 수중에 텍스트가 없어서 인용을 못하고 있습니다. 기회가 되면 그 부분을 올려 드리겠습니다. 2009-06-12
093321
  

 

일병 오학준 
  항상 읽어보려고 목록에 올려놓는 텍스트인데, 아직 읽어보지를 못했네요. 올려주실 부분과 함께 한번 전체를 다 읽어보겠습니다. 흥미로울 것 같네요. 2009-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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