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베스트-내글내생각] 받아쓰기  
6급 하지연   2009-06-15 140901, 조회 310, 추천0 

아무래도 난 옛날 사람인가보다.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강아지가 보고 싶다고 졸라서 박물관은 살아있다 2 를 보러갔다.
1편을 워낙 재미있게 봤던 터라 그래도 기본은 있겠지 했고 영화가 나쁘지는 않았다.
영화를 보다가 내가 거슬렸던 건 자막이었다. 뭐 맥락이야 그렇다손 치더라도 그 해석이 원문에 충실하지 않고 개그콘서트나 인터넷용어란 사실들이 영 나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강아지야 자기에게 친숙한 단어라 그런지 무척 재미있어 했는데 나는 중간 중간 영 몰입을 할 수가 없었다.
뭐 내가 진지한 인간이라 그런 건 절대로 아니다. 버라이어티를 무척 사랑하고 주말에 개콘이나 웃찾사를 보는 낙으로 사는 사람으로서 고급스런 취향의 소유자는 절대로 아니란 것이다.
그렇지만 아시아인도 아닌 외모의 친화력마저 부족한 아메리카나 유럽의 외국인이 태연하게 우리의 유행어를 남발하는 건 신기하지도 않고 미국드라마를 열심히 파다가 어쩌다 한 두 마디는 알아들을 정도의 귀가 뚫린 수준으로도 그 엉터리 자막은 그 영화를 번역한 사람의 자질마저 의심하게 만든다. 그 정도의 조크를 못알아 들을 거라 생각하는지 본인의 유머감각을 뽐내는 건지 오만하다는 생각도 든다.
적어도 그런 영화는 아이들만 보는 게 아니라 그 아이를 대동한 부모 한 둘이 동행한다고 생각한다면 그러지 말았어야지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단 말이다.

내가 어렸을 때는 놀 수 있는 장난감이 별로 없었다. 아버지를 따라 시골에서 잠시 살 때 나의 유일한 장난감이자 위안거리는 누군가 버리려고 내 놓았던 세권짜리 식물도감과 어류도감, 곤충도감이었고 걸어서 20분쯤 떨어진 친구 집 계몽사 100권짜리 소년소녀 세계명작동화였다. 아버지가 화장실에 쓴다고 학교에서 압수해온 해적판의 질 나쁜 종이의 무협지나 간호사 시리즈나 옆집 누나 같은 불온서적도 나의 소소한 위안거리였다. 내가 너무 어려서인지 아니면 딸이 한글을 잘 읽는지 아닌지 그래서 그림하나 없는 책은 별로 안 좋아할 거란 믿음 때문이었는지 다행스럽게도 집에는 그런 종류의 책들이 화장실에 걸릴 순간을 기다리며 별다른 제약 없이 굴러다녔다.
확실히 초등학생이 읽기에는 어려운 구절도 많았는데 제법 호기심이 많았던 나는 국어선생님이었던 아버지의 증거물 같은 한글사전을 놀이 책 삼아 펼쳐보기도 했다. 물론 그 중에는 찾아보다 화들짝 놀랐던 단어들도 있음을 숨기지는 않겠다. 그때는 조신한 초등학생답게 그 페이지를 찢어서 잘 접어서 담벼락에 숨겨놓았다.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그런걸 봐서는 안되는 데 혹시라도 내가 봤다는 걸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 말아야지 하는 완벽범죄의 원초적 증거 은닉 행위였는지도 모르겠다.
초등학교 때 내가 남들과 다른 어휘력이 있었다면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 우리는 원고지 쓰는 법을 줄기차게 배웠고 독후감을 쓰거나 시도 원고지에 써서 제출했다. 선생님은 띄어쓰기가 맞는지 틀린 단어나 글자들은 돼지꼬리를 써서 정정을 해 주셨다. 

나는 이상한데 집착한다.
핸드폰으로 문자를 보낼 때도 꼭 띄어쓰기를 한다. 혹시 띄어쓰기가 틀렸으면 아무리 길게 썼더라도 다 지우고 다시 쓴다. 메신저를 주고받다가 후배가 틀린 단어를 쓰면 꼭 지적한다.
누구와 대화를 하다가도 댓 구가 맞지 않는 내용을 쓰면 고쳐준다. 
아버지가 국어선생이어서 그런 건 절대 아니다. 그냥 내가 그런 걸 못 참는 것이다. 후배와 누구입장에서는 참 재수 없는 성격일 것이다.
강아지가 받아쓰기를 10점 받아오거나 일기장에 소리 나는 대로 말을 써서 나를 웃겨도 빨간 펜으로 수정을 해 줬다. 내가 모든 것에 관대해도 내 딸이 적어도 맞춤법에 무심한 딸인 것은 용납이 안 됐었는지 모르겠다. 

그게 뭐가 대수라고..

내가 중고등학교 학원물이 대부분인 대사위주의 인터넷 소설에 대한 거부감은 아마도 단어선택이나 가벼운 어휘 위주가 싫은 개인적 취향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틀린 단어나 잘못된 어휘선택은 안해야 된다는 게 나의 지론이다. 
글을 쓰는 사람은 언어를 다루는 사람이다.
생활영어는 단어 800개만 알아도 웬만한 회화가 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나 영문학이나 영시문학은 일상생활에서 쓰지 않는 단어도 알아야 한다. 한글역시 마찬가지다. 고대의 가사문학을 연구하고 더 이상 쓰이지 않는 어휘의 시조문학 또한 그러지 않나 말이다.
우리 역시 태어나서 소설책 하나 읽지 않아도 생활하는데 아무 지장 없다. 이제는 더 이상 쓰이지도 않는 말이고 광복이후 소설책에나 쓰였던 단어정도는 몰라도 아무렇지 않을 것이다. 물론 남들은 모르는데 내가 그 단어를 안다고 해서 더 똑똑한 사람도 아니고 더 훌륭한 사람도 아니다.

칼럼이나 내 글은 자기 사유에서 나오는 글이다.
아무리 생각이 깊다하더라도 잘못된 단어를 쓴다면 몰입에 방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무언가 전하고 싶은 말은 입안에서 맴 도는데 어휘력의 한계를 느낀다면 그 또한 비통한 일이 될 것이다. 
나는 작가들을 존경한다.
그들은 언어유희를 즐기는 사람들이다. 실용주의를 선호하는 사람들은 이런 사실로  비생산적이라 비판 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자신의 생각을 아무런 막힘없이 풀어낸다는 사실이나 한글을 비옥하게 한다는 사실에 입각해 경이로운 능력임에는 틀림없다.
그러기에 앞서 그들은 많은 단어들을 연마하고 자신과 치열한 싸움을 했을 것이다. 화가나 음악가 같은 예술가에 비해 시인이나 작가들의 수명이 짧다는 연구결과를 본 적 이 있다. 아마도 그 치열한 삶의 산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초등학교 3학년이 지나면 받아쓰기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요즘 아이들은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에 한글을 모두 깨우친다고 하는데 참 똑똑한 아이들임에 틀림없다.
우리 때는 수학이나 과학, 영어 이런 게 어려웠다. 
강아지와 친구들은 도덕과 사회 가정 가사를 맨 날 헤맨다. 암기과목을 못하는 건 게을러서 안 외워서 그렇다고 들 하는데 내가 알아낸 충격적인 사실은 문제의 내용을 이해 못한다는 것이다.
어려서 책을 좋아해서 사람들이 예뻐했던 강아지의 엄마로 참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실이다.
책을 많이 읽으면 어휘력이 좋아진다고 한다. 
그건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적어도 찾아보는 부지런함이 있을 때 말이다. 
아이가 처음에 말을 배우기 시작하고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귀찮을 정도로 물어본다.
‘엄마 이게 뭐야’
‘엄마 이게 무슨 말이야’
몇 번 대꾸해주다 화를 낸다. 
‘몰라. 아빠한테 물어봐’
‘네이버에 물어봐’

참 미안한 생각이 든다. 내가 국어사전이 되었어야 했는데...

아무렇게나 내팽개친 강아지 일기를 읽으며 울컥하는 건 내용이 어때서가 아니라 아직도 받침이 틀렸다거나 전혀 엉뚱한 속담을 써놓았다는 사실에 빨간 펜으로 돼지 꼬리치고 싶은 나의 충동을 눌러야 한다는 것이다. 

가끔 강아지와 문자를 주고받을 때 꼬박 꼬박 띄어쓰기를 한다.
강아지는 짧은 단어와 이모티 콘으로 응수한다. 정말 대략난감이다.




 책마을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9-07-14 1236)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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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병 권홍목 
  우와우우우우우!! 
얼마만에 뵙는 이름인가요! 
선리플 후감상은 이럴때 하라고 있는거지요!! 2009-06-15
141241
  

 

병장 김범수 
  비슷한 생각이네요. 꼭, 맞춤법과 띄어쓰기를 고수한다는 점에서. 틀이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그만큼 상대에게 잘 전달된다고 생각하니깐요. 

요즘은, 참 마음에 안드는 점이지만, 영어니 뭐니 다른 것에만 집착한 나머지, 한글도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게 문제죠. 더 문제는, 그들이 심각성을 모른다는 것. 
되지도 않을 사람에게 어설픈 영어를 가르치는것 보다는 차라리 한글교육이나 더 시키고 싶은 생각이네요. 

개인적으로 영문 번역 중 최악이라고 생각한것은 
Dead poem society 죽은 시인의 사회, society 를 사회라고 번역한 센스는,, 2009-06-15
143343
  

 

상병 신재호 
  정말 오랜만입니다. 그 전설의 여자의 종족 나눔을 쓰신분 아니신가요! 

글을 정말 맛깔나게 잘 쓰시는 것 같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2009-06-15
145640
  

 

병장 김형태 
  인터넷 소설들을 싫어하면서도 왜 싫어했는지 모르고 있었는데, 문득 깨달았습니다. 그렇다고 보수적이라고 얘기하기엔 딱히 그렇지도 않군요. 얼마전 드래곤볼을 보던중에도 그런 현상이 자주 있더군요. 정말 인상을 찌푸리게 되는 경우가 있었는데, 놀랍게도 같이 간 친구들은 그냥 웃기다며 웃었습니다. '강아지'보다 나이가 한참이나 많은데 말이죠. 그래도 대한민국의 좌석점유율 1위를 차지한다는 영화관에서 그런 자막을 썼다는 사실은 안타까울뿐 아니라 제 자신을 다시 살피게 된답니다. '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걸까, 시대에 따라가지 못하는 걸까' 라고요. 

다른사람들에게 뭐라 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니, 제 주변사람들부터 살펴야 겠습니다. 

오랫만에 뵈니 더 반갑습니다. 2009-06-15
164427
  

 

상병 김태완 
  네이버에 물어봐. 
좀 심했다. 2009-06-15
174926
  

 

상병 이재원 
  어렷을때 책을 많이 읽으면 어휘력이 좋아진다는데, 흑흑. 읽다가 말아서 저는 어휘력이 부족한것일까요. 흑 
그나저나 이거이거, 글이 너무 휙휙 읽혀요 눈에 착 들어오네.옆에서 읽어주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2009-06-15
221723
  

 

상병 이신호 
  하하. 마지막에 보면서 갑자기 떠오른 예전 생각이 하나 있네요. 

예전에 심리학개론 수업 도중에 교수님께서 자기 딸에게 어렸을 때부터 확실하게 단어 교육을 했답니다. 
그랬더니 교수님이랑 후배가 아이랑 같이 차를 타고 가는데 유치원도 안간 아이가 교수님 후배에게 그 나이 또래에서 쓸 단어가 아닌 단어들을 써서 후배가 놀랬다는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아이들에게 유아어를 쓰는 것은 교육에 별로 좋지 않다는군요. 정확한 단어들을 가르쳐 주는 것이 언어를 익히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하하. 2009-06-15
224509
  

 

일병 이선목 
  대화하듯이 글이 흘러가는 느낌이라 읽기 편안하네요. 이것도 능력이겠죠 2009-06-16
074036
  

 

상병 이종보 
  요즘 사회가 한글에 파괴에 점점 관대해지고 있는것 같아요. 세월이 갈수록 그러한 추세가 
점점 심해지겠지만, 어쩌겠나요. 정확한 어휘를 지키는 것은 저 조차도 힘든 일인데 말이죠.(웃음) 2009-06-16
075111
  

 

일병 심현주 
  예전엔 모르는 단어 있으면 국어사전을 펴들었는데 요즘은 네이버가 있으니 (웃음) 
갑자기 5살 터울의 동생이 국어사전 쓰는 법을 알지 궁금해지네요. 

아마 못쓸겁니다. 엉엉 2009-06-16
104516
  

 

병장 김태원 
  저도 본문에 찬동하는 쪽입니다. 자기 생각을 뜻대로 표현하고 싶어서 글을 쓰는데, 단어를 올바르게 고르고 맞춤법을 지키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지요. 공식적인 축구 경기에서 선수가 축구화 대신에 스니커즈를 신고 나와서 나 축구하러 왔소하는 건 말이 안 되듯이요. 그런데 요즘엔 인터넷이 많이 발달해서 그런지, 글을 가볍게 섭취하고 가볍게 배설하는 행태가 너무 자연스러워져서 아쉽습니다. 

그런데 본문 중, 띄워 쓰기는 띄어쓰기가 맞지 않은지... 2009-06-17
022215
  

 

6급 하지연 
  띄어쓰기가 맞아요.. 
생각해보니 여태껏 띄어쓰기를 뛰워쓰기로 알고 살았군요 
맞춤법과 띄어쓰기에 대한 내용으로 쓴 글에 부끄러운 지적이네요. 
태원님 감사합니다. 제 평생의 오류를 지적해주셨네요. 호호. 2009-06-17
104349
  

 

상병 김소망 
  한글파괴니 뭐니 하는 문제를 떠나서, 글이 충분히 진지한 문제제기와 사유를 통해 이루어져있다면 인터넷 용어가 글 속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인터넷 용어를 쓰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지만 그만큼 진지한 사유와 그것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도가 떨어지고 있는 세태를 반영하는 것 같아서 많이 안타깝네요. 좋은 지적해 주셨습니다. 

인터넷 용어의 남발 반대 논리는 한글파괴, 우리말의 순수성 지키기 등과 같은 소아병적 민족주의에 입각해서 전개되기보다는(사실 일상적이고, 가벼운 대화에서조차 인터넷 용어나 이모티콘을 사용하지 말라는 법은 없고, 때때로 그것이 순작용을 한다는 측면에서는 마냥 금지하는 것도 좋지 않겠죠. 그런 의미에서 저는 굳이 편지나 이메일에 이모티콘을 섞어쓰는 친구들을 나쁘게 보지 않습니다) 사유의 진지성에 대한 고민을 바탕으로 한 논리가 되어야겠습니다. 2009-06-20
041540
  

 

상병 이석재 
  잘 봤습니다. 허허. 가끔씩 저도 주위 사람들의 문장을 듣다 보면 이걸 고쳐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할 때도 있지요. 하지만 이모티콘 조차도 어찌보면 바디랭귀지중에 하나가 아닐까 생각하면서 주위 환기용으로 받아들일때도 있습니다. 저도 그렇고요. 2009-06-21
195721
  

 

병장 박정현 
  하지연님 글 오랜만이네요. 
잘 일고갑니다. 
네이버는 충격이네요... 
맞춤법공부 열심히 할게요 2009-06-25
0145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