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베스트선정-내글내생각] T.A.X.I  
상병 조현식   2008-06-12 15:58:12, 조회: 1,216, 추천:2 

청년은 택시에 몸을 실었다.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택시 기사에게 xx로 가달라는 말과 함께, 푹신한 뒷좌석에 천천히 기댔다. 기사는 뒷 자석에서 멍하니 창문 밖을 바라보고 있는 청년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에서 약하게 나는 술 냄새와 살짝 초점 없는 눈동자가 그가 분명히 취했음을 알려주고, 원래는 고급스러운 원단으로 만들어 진 것이 분명한 수트는 어디서 넘어지기라도 했는지 흙으로 더럽혀져 있다. 그 옷차림만 제외하자면 그는 남들에게 기억되기 힘든 사람의 종류에 속했다. 얇은 눈썹과, 커 보이지 않는 쌍꺼풀 없는 눈, 약간 뭉뚝한 코와 아랫입술이 약간 두꺼운 그의 얼굴은 앞에 있는 택시 기사에게는 매일 다섯 번 정도는 만나게 되는 전형적인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런 얼굴에 비해 유난히 하얀 피부색은 어딘지 이질적인 모습을 연출했다. 근육이라고는 전혀 붙어있지 않은 가녀른 팔뚝이나, 곱게 뻗은 손마디는 그가 아무런 걱정 없이 자라 온 부자 집 청년임을 알려주는 하나의 징표였다. 기사는 술에 취한 그에게 말을 걸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이런 부류의 술 취한 사람들은 자신이 살갑게 말을 걸면 기다렸다는 듯이 인생론부터 시작해서 비관적인 남자 주인공을 연출하다가, 종내에는 다른 20대 청년과 다름없이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여자 이야기로 끝을 맺기 마련이었다. 술 냄새 나는 입으로 자신에게 신세 한탄을 하는 사람들을 기사는 제일 싫어했다. 팔자가 좋아 술에 취해, 술기운에 어딘가에서 진탕 뒹굴다가 자신이 돌아갈 위치를 잃어버려 택시를 잡아타는 청년들. 기사 자신에게는 그런 시절이 없었기 때문인가.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하루에 7만원씩 회사에 갖다 바치고, 그 반절도 안 되는 월급으로 생계를 꾸려나가야 하는 자신이 더욱 초라해지기만 했다. 기사는 자신이 손님들에게 마구 화내는 장면을 생각하다가 웃어버리고는 액셀을 지그시 밟았다. 화를 냈다가, 고객 불만 편지라도 접수된다면 큰일이지.

청년은 창문을 바라보며 빠르게 명멸하는 가로등 불빛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술만 마시면 세상은 아름다워졌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고, 흔들린다. 불빛은 비현실적으로 타오른다. 손 댈 수 없는 뜨거움이 아니라, 그저 환하다. 세상의 불꽃들은 지금으로부터 불과 50년 전의 불꽃과는 다르다. 몇 천 년 전에 어느 정신 나간 그리스 신이 인간들에게 불꽃을 전해주었다고 그는 알고 있었다. 나무와 나무가 부딪혀 불이 일어났고,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불을 만들었다……. 라는 말을 그는 믿지 않았다.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건 매우 희박한 경우였고, 그 이전에 신이 인간에게 불꽃을 전해주고 신 자신의 전능함을 포기해버리는 이야기가 매우 마음에 들었다. 얼마나 유치한 이유인가. 청년은 피식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어지럽게 흩날리는 야경에서 눈을 떼고 택시 기사를 쳐다보았다. 백미러를 통해 자신을 힐끔 힐끔 곁눈질 하고 있는 저 기사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어쩌면, 술에 취한 채 택시를 탄 저 청년이 요금을 제대로 낼 수 있을지 걱정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더군다나 할증까지 붙어 이젠 잘 쓰이지도 않는 10원 단위까지 붙여가며 악착같이, 끊임없이 올라가고 있는 택시 요금은 비현실적이기 까지 했다. 비 현 실 적 이 다. 라고 그는 말하려고 했으나 순간 입을 다물었다. 저 택시미터기 안의 생명체를 본 것이다. 그것은 매우 힘차게, 끊임없이 달리고 있었다. 택시가 빨라지면 빨리 뛰었고, 반면 택시가 멈춰 있어도 멈추는 법이 없었다. 혹사당하고 있는 말 한 마리. 말은 신나게 돈을 차 올렸다. 그는 자신이 내야 하는 택시 요금의 대가가, 자신을 목적지까지 이동시켜서가 아니라 저 신비한 생명체를 겁도 없이 움직이게 한 대가로 내는 것이 아닐까 확신했다. 더군다나, 저 말은 빛까지 내고 있었다. 
거칠게 투레질을 하고 있다…. 그는 중얼거렸다.

택시 기사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요즘 불황인지라 정말 안 그래도 힘든 시간들인데. 염병…. 택시 기사의 입에서 저절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주가가 2000을 넘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네 마네 하는 작금의 이 시점에서, 택시 기사들은 대리운전 8000원에 밀리고 밀리는 이 시대에. 뒷자리에서 태평하게 코를 골던 저 청년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인가. 그리 큰 잘못은 아니었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5년의 택시 경력에서도 이런 일은 없었음을 미루어 볼 때, 이 것은 어쩐지 자신의 직업에 대한 도전인 것 같았다. 동시에 순간, 택시 기사는 자신이 이 일을 직업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에 대해 당황했다. 직업이라고? 좋아서 시작한 일도 아니고, 영원히 택시 하면서 끝낼 생각도 없었다. 처음 이 일을 시작 할 때만 해도, 딱 3년이면 자신은 원래의 잘나갔던 샐러리- 맨 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샐러리맨의 시대는 돌아오지 않았고, 창의성과 신선함, 기발함을 중시 여기는 사회 풍조가 자신이 응당 돌아갔어야 할 부장의 자리를 팀장으로 바꾸어 버렸다. 아주 크게, 그가 좋아하는 말인 ‘거국적으로 볼 때’ 그러한 시스템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에게는 부장의 능력은 있으되 팀장으로써의 능력은 없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기에 그는 회사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고급 영어 회화와 수준급의 컴퓨터 실력을 갖추기에는 그의 나이가 너무 늦었다. 갖추려고만 하면 갖출 수 있었겠지만, 변명이 아니라, 이 나이에 고급 영어 회화와 수준급의 컴퓨터 실력을 갖추고 있는 45세 이상의 전직 대기업 부장을 평사원으로 채용할 만한 회사는 적어도 이 나라에는 없었다.
택시 기사라는 일을 선택한 후, 방송국에서는 언제나 서민 경제가 어렵다고 할 때면 어김없이 택시기사들을 찾아왔다. 자신도 인터뷰를 해 본적이 있었지만, 그 때마다 뭣 같았다. 서민의 발이 되는 대중교통에 택시만 쏙 빼놓고서는, 이럴 때만 와서 택시 기사들이 어렵다고 생색내는 건가. 그는 화를 냈지만, 그래도 인터뷰를 거절한 일은 없었다. 어릴 적 자주 불렀던 동요처럼, 텔레비전에 자신이 나오면 그는 다시금 자신이 뭔가 중요한 위치로 돌아간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그는 자신의 현재 위치를 잠깐이나마 잊고, 예전의 잘 나갔던 자신의 모습을 회상했다.

저 놈의 말을 죽여 버려야겠어. 청년은 다짐했다. 사람의 기분이야 아랑곳하지 않을 저 망아지자식를 죽여 버리겠어. 그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청년은 그 일이 자신에게 신이 내린 어떠한 사명이며, 신탁이라고 느꼈다. 이 어두운 밤에 홀로 미친 듯이 날뛰며 돈을 갈취하는 빌어먹을 적토마. 저것은 여포나 관우도 감당치 못할 괴물이었다. 하루에 천리가 아니라 만 리, 백만 리라도 돈만 주면 뛰어가는 괴물. 청년은 이윽고 그의 신성한 일을 행해버렸다. 그는 천천히 자신의 오른 발을 들어올렸다. 택시기사가 자신의 행동에 뒤를 돌아보고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이봐요, 아저씨. 당신도 저 놈한테 속고 있는 겁니다. 그런 표정 지으실 필요 없어요. 제가 편하게 해드리죠. 자신의 말이 정말 멋있다고 느꼈다. 잘나가는 느와르 영화에서도 이런 극적인 장면은 연출하지 못하리라. 청년이 싱긋 웃으며 들어올린 오른쪽 발을 빠르게 뻗어 택시의 미터기 부분을 정확하게 가격했다. 그리고 세상이 흔들리고, 청년은 쓰러졌다. 말은, 그 말은 어떻게 됐지? 청년은 극적으로 말하고 싶었으나, 입에서는 실상 신음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택시 기사가 자신을 황당하게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이봐요! 청년은 자신이 굉장히 난감한 상황에 직면했음을 알았다. 자신이 미지의 능력자이거나, 아니면 현실적으로 돈을 마음대로 다루는 능력자가 아니라면 분명 이 택시의 행선지는 청년이 원했던 xx가 아니라 경찰서의 차가운 유치장 바닥이 될 가능성이 높다. 어쩐다. 그는 자신의 원흉, 불공대천의 원수인 말을 바라보았다. 분명 자신의 발에 무참히 짓밟혔어야 할 말을 여전히 뛰고 있었다. 어느 새 말의 몸값은 10000원이 훌쩍 넘었다. 저 말을 이기기란 힘들겠어. 청년은 자신의 거룩한 성전이 불과 1분도 안되는 시간 만에 실패로 돌아갔음을 직감했다. 이 상황에서,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것을 생각해냈다. 술을 마신 20대 청년은, 취한 척 잠들 수 있었다. 이 관대한 나라에서 이 필살의 전법을 쓴다면 자신에게 어떤 큰 피해를 끼치지는 않을 것이다. 술을 먹고 취했다고 하면 끝날 일이다. 청년은 그 생각과 동시에 죽은 듯이 잠에 빠져들었다. 

빌어먹을 자식이……. 저 영악한 녀석은 잠들어 버렸다. 택시 기사는 고장 나 미친 듯이 돌아가는 자신의 미터기를 바라보았다. 심야할증에 시외요금까지 붙은 요금이어서, 요금은 이전처럼 살금살금 올라가지 않았다. 잠깐 사이에 1000원 단위로 마구 올라가버리는 요금을 보고 기사는 이 청년을 경찰서로 인도하는 것 보다는, 가족에게 택시비만 받아내도 일이 원만하게 해결 될 것 같다는 생각에 더 이상 아까의 돌발 행동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저 정도의 수트를 입고 있는 청년의 집안이라면, 몇 십 만원 정도는 흔쾌히 내주리라는 견적이 섰다. 경찰서라니 말도 안 되지. 괜히 자신에게 뭔가 캐물을지도 모를 일이지 않는가. 가난한 사람들은 스스로 대범하게 나서지 못하는 법이다. 뭘 해도 어딘가에 걸려버리고, 가난에 얽매여 버리니까 사랑도 힘들다. 사랑보다 당장 내 앞에서 비수를 들이미는 가난이란 녀석이 힘들다. 내 여자에게 14K 반지라도 선물할까 싶어도 내일 끓여먹을 너구리 생각에 다시 지갑을 닫고 마는 소심한 종족이 바로 가난한 사람들이다. 그는 이 직업을 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많이 봐왔다. 그들은, 자기가 택시에 달린 네비게이션대로 가지 않으면 빙- 돌아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매번 자신에게 항의해왔다. 아니, 그들 모두는 아니지. 가난한 사람 중에서도 좀 잘산다고 착각하고 있는 어정쩡한 사람들이 매번 그랬다. 이 바보 같은 사람들은 이 바닥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전문가인 자신을 믿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이 가장 빠르고 정확한 길로 그들의 목적지에 도달했을 때, 그제야 멋쩍은 웃음을 지으면서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돈을 꺼내 자신에게 내밀었다. 팁 같은 게 있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팁을 줄만한 사람들은 자기 차가 있거나, 아니면 나이트에 쳐 박혀 둘리라는 멍청한 이름의 웨이터에게 만원 씩 주고 있지 택시에 타지는 않았다. 하지만, 저 청년은, 자신이 판단하기에 그런 부류이면서도 택시를 탔다. 청년이 입고 있는 옷은 I사의 꽤 값나가는 수트. 집에서는 고주망태가 된 그를 집에 데려다 놓은 이 드라이브 전문가에게 응당 보상을 치룰 것이다. 그 순간에도 미터기의 돈이 마구 올라가고 있는 점이 그를 기분 좋게 했다. 어쩌면 오늘이 자신의 택시 기사 인생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벌 순간일지도 몰랐다. 그야말로, 운수 좋은 날이었다.

청년은 잠에서 깨어났다. 택시 기사는 말의 형상으로 아주 천천히 택시를 XX방향으로 몰고 있었다. 오래된 차에 비해 유난히 돋보이는 최신식의 카 오디오에서는 최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저급 트로트 음악이 흐르고 있다. 남자와 여자가 어떻게든 하고 싶어서 몸을 배배 꼬고 있다는 내용을 연이은 뽕짝 리듬에 실어서 내보내고 있는 이 상황에서 청년은 저 카 오디오가 불쌍해졌다. 도대체가 이 택시 안은 불쌍하고 불합리하지 않은 공간이 없어……. 청년은 부정에 부정으로 긍정의 의미를 더했지만, 그런다고 자신의 말을 강조하려거나 그런 의도는 아니었다. 애초에 생각만으로 끝나버렸으니까. 청년은 지끈거리는 머리 때문에 잠시 신음하다가 왼쪽 팔목에 족쇄처럼 휘감겨 있는 자신의 오토매틱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벌써 시간은 1시가 넘어 오는데, 놀랍게도 택시는 1시간 째 XX에 도착하지 못했다. 청년이 고통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목도 마르고 술 때문에 괴롭기도 했지만, 그것보다 이 답답한 택시는 너무 더웠다. 멍청한 운전기사가 에어컨이 아니라 히터를 틀어놓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하면 이 택시가 자연스럽게 보도블록 옆에 매끄럽게 정차할 수 있을까 그가 고민하고 있는데, 자신이 잠에 빠지기 전과 택시가 뭔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좌석에 사람이 있었다. 흰 소복에 긴 생머리를 가진 창백한 피부의 여자였다면 놀랬겠지만, 요새 유행하는 스타일의 반 쯤 벗은 옷을 입고 있는 20대 초반의 아가씨였다. 술에 취했지만, 여자가 굉장한 미인이라는 것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보일 듯 말 듯 - 가린 듯 만 듯 한 복장이 술에 취한 청년의 이성을 마비시킨다. 청년은 마른 입술을 혀로 살짝 핥았다. 목이 마르다. 뭔가 말해볼까? 운전석의 기사는 여자에게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저기요… 청년은 말을 걸었다. 듣기 좋은 중저음의 목소리는 자신의 남자다움을 강조하는데 아주 좋은 무기가 된다. 이어서 순수해 보이는 웃음. 여자는 무심한 표정으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는 여자들의 저런 표정에 아주 익숙했다. 클럽에서, 나이트에서 저런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여자가 많았다. 그러나 다들 돈에 넘어오곤 했었지. 옷이나, 고급 양주나, 뭐 어떻게든 여유로운 생활을 보여주면 그만이었다. 그리고는 다들 말했었다.
오빠 너무 멋있다.

그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청년은 이상한 얼굴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술에 취한 모양이군. 아니면 자신이 생애 처음으로 택시기사의 윤리를 저버리고 온갖 샛길로 빙빙 돌고 있는 지금의 현실을 알아챘던가. 택시 기사의 윤리라는 말이 이상하긴 하다. 도대체 어디다 써먹는 윤리가 택시 기사의 윤리냔 말야. 하지만 저 청년은 그런 심각하고 중대한 일까지 생각할 여유는 없는 모양인지, 풀린 눈으로 조수석을 바라보고 있다. 술주정이로구만. 기사는 정신적으로 완벽하게 위험해 보이는 이 20대의 풋내기 청년을 집 근처까지 바래다주고 얼른 다음 손님을 찾아 나서는 것이 현명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청년이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기사 아저씨, 저게 보입니까?? 뭐가 보인다는 거야 하고 기사는 청년의 눈이 닿아있는 방향으로 눈을 돌렸다. 일방통행 표지판. 저것을 보고 말하는 것일까. 기사는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얼른 이 넋 나간 인간이 차라리 아까처럼 조용히 입 다물고 뒷좌석에서 코를 골며 자 주길 바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쁘네요… 청년은 중얼거렸다. 일방통행 표지판이 예쁘다는 건가? 저런 멋대가리 없는 표지판을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처음이구만. 기사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농담 식으로 한마디 했지만 청년은 듣지 않았다.

밝은 불빛과, 달리는 말 속에 여자가 있다.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아. 청년은 손을 뻗어 여자의 얼굴로 손을 뻗어… 
잡지 못했다.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마치 홀로그램처럼, 하지만 어릴 적 과학박물관에서 본 홀로그램보다는 훨씬 더 현실적으로,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여자는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남자는 왠지 이 상황이 꿈이 아니라 믿고 싶어진다.
『예쁘다…』
만질 수 없어서 아름다운 것일까. 보통 사람들은 다들 그러니까. 그러니까 보통사람이지. 남자는 웃었다. 조수석의 그녀는 예뻤다.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뚜렷한 이목구비와 은은한 웃음은 아까의 약간은 천박해 보였던 그녀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다. 여자는 아주 기품 있게, 무엇보다 품위 있게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감사의 표시를 청년에게 했다. 그것만으로 청년은 심장이 막혀 옴을 느꼈다. 알코올의 힘은 이 여자 앞에서 그저 23도의, 혹은 70도의 사랑의 수치로 환산되었다. 도수가 높을수록, 취할수록 세상이 흔들리고 여자가 또렷해진다. 청년은 안타까움을 느낀다. 조금만 술이 더 있었으면 싶다.
『세상을 구해주나요?』
여자가 이상한 말을 한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청년의 얼굴에서 읽어낸 여자가 아주 천천히 택시의 미터기를 가리킨다. 말. 청년은 깨달았다. 여자는, 말에게 잡혀있는 것이다. 직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저 여자를 위해 선택된 일종의 영웅이 된 것이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신이 아까 이뤘어야 할 그 위대한 반항의 실패에 대해 탄식했다. 위대한 기사는 실패에 좌절하지 않는다. 청년은 위대하다. 그러므로 청년은 실패에 좌절하지 않는다. 멋진 논리다. 대뇌에서 수많은 뇌 세포들이 박수를 쳐댄다. 기가 막힌 논리야.
『난 할 수 있었어요. 지금도 할 수 있구요. 당신을 위해서라면 다시 할 수 있어요.』
『그럼 해 보세요.』
여자는 다시 이전의 세속적인 여자로 돌아가 있다. 걷잡기가 어려워. 그래서 매력적인 걸. 청년은 만족한 미소를 띤다. 어렵지 않다. 옛날 이야기에서도 많이 나왔었던 이야기. 영웅이 된다.

도대체 저 뒷좌석에 앉아서 아까부터 정신 놓고 있는 저 녀석은 아까부터 뭘 할 수 있다고 중얼대는 거지? 택시기사는 이제 저 청년이 마땅치 않았다. 청년은 게슴츠레한 눈으로 기사를 바라보고. 씩 웃었다. 빨갛게 상기된 얼굴에 하얀 이빨이 어울리지 않게 반짝인다. 그러다가 갑자기 청년의 오른쪽 어깨가 들썩였다. 그가 반응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청년의 주먹이 자신의 얼굴로 날아 들어왔다. 이런 미친XX! 기사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요동치는 자신의 택시를 어떻게든 바로 잡으려고 애썼다. 이래서 술 취한 놈들은 태우기가 싫더라니! 기사는 입에서 나오는 거친 발음의 욕들을 계속 외쳐대며 길가로 차를 세웠다. 지금이 한 밤중이었기에 망정이지 조금만 이른 시각이었어도 큰 사고가 날 뻔했다. 호리호리한 몸매에 비해 과격한 놈이다. 기사가 생각을 끝내기도 전 청년은 연이어 다시 한 번 미터기를 발로 세게 걷어찼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청년의 발은 미터기가 아니라 그 위의 카 오디오에 날아가 박혔다. 이 세련되어 보이는 카 오디오는 기사가 이 연식 오래 된 택시에서 가장 애지중지하는 부분이었다. 이 자식이? 기사는 화를 참지 못하고 운전석에서 내렸다. 못 참겠군. 기사는 돈 몇 푼에 길을 빙빙 돌아버린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그 까짓 돈 몇 푼 때문에 기분만 잡쳤어. 불과 10분전까지만 해도 그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물질이었던 돈이 지금은 가장 쓸모없고 비현실적인 물건으로 둔갑해 버린다. 기사는 뒷좌석의 문을 열고, 청년을 끄집어냈다. 기운이 빠진 청년이 맥없이 끌려나온다. 멋지게 멱살을 잡고 욕지거리를 하고 싶었으나, 온 몸에 아무 힘도 주고 있지 않은 청년은 의외로 무거워서 그의 생각대로 한 번에 순순히 딸려 올라오지는 않았다. 갑자기 그는, 그의 의지나 신념이 모두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조용한 밤에 술 취한 청년을 폭행한 택시 기사. 어떻게 될 지는 뻔하다. 힘이 좀 더 좋아서, 청년을 한 큐에 들어올렸다면 아마 그는 자신의 심장과 머리 가운데의 어떤 울컥대는 의지로 지금쯤 청년의 얼굴을 사정없이 가격하고 있었을 것이다. 한 번에 들어올리지 못한 순간, 기사는 자신이 다시 현실의 세계로 돌아왔음을 알았다. 사람을 때리는 것에도 리듬이 필요한데, 결정적인 순간 흥이 깨져버렸다. 40대의 그에게 아까와 같은 분노는 낯선 종류의 감정이어서, 이미 깊숙한 곳으로 틀어박힌 그 감정이란 녀석을 다시 찾아 낼 자신이 없었다. 사람을 죽이는 사람들은 종자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순간적인 악마가 활개 칠 때 옆에 싸우게 만들어 줄 도구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택시 기사는 생각했다. 만약 자신의 두 팔에 강인한 근육이란 놈들이 붙어있었다면 그 근육은 흉기로 바뀌어 이 청년을 사정없이 두들겨 패고 있었을 테니까. 이젠 그런 마음도 다 없어졌다. 카 오디오 하나 때문에 이러는 것도 우스웠다.
이런 병신 같은 놈이… 기사는 중얼거린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가 없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기분에 청년은 정신이 멍했다. 욱신거리는 몸이 낯설다. 고등학교 때로 돌아간 착각이 든다. 학생의 싸움은, 사회인의 돈과 같았다. 돈이 많으면 인정받고, 학생은 싸움을 잘하면 인정받는다. 절대 다수에게 손가락질 당하는 것은 똑같지만, 그 손가락질 하는 사람들도 돈 많고 싸움 잘하는 놈들을 부러워한다. 청년은, 돈도 많았고 싸움도 잘했다. 싸움을 하기 전에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고 침이 나오지 않는 그 상태가 청년을 미치도록 흥분시켰다. 때리려고 하는 사람과, 맞게 될 사람. 극도의 긴장상태가 남자의 호르몬을 분비시키는 그 순간을 청년은 사랑했다. 그 상황에서는, 치고받아도 모든 것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지나간다. 맞아도 아프지 않고, 때려도 감각이 없다. 상대편이 겁에 질려 있는지, 과연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청년을 알 길이 없었지만, 그 쪽도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기를 바랐다. 안 그러면, 무지하게 아플 테니까. 나를 순식간에 제압한 이 기사 아저씨는 어떤지 궁금했다. 눈에서 분노가 이글이글 타오르다가, 이내 그 안의 분노가 사라져 버린 것을 청년은 눈치 챘다. 눈이 죽었어, 죽었다고. 청년은 중얼거렸다. 내가 해주겠어. 청년은 기사를 꽉 움켜잡는다. 자신의 얇은 팔뚝에 방심하고 있던 고등학교 시절 자신이 보기에 별 것 아니었던 기분 나빴던 양아치들도, 이렇게 하나하나 처치했었다. 아저씨, 난 의외로 힘이 세거든요. 새파랗게 질린 기사에게 청년은 말했다. 불규칙한 호흡이 계속된다. 내뱉는 숨은 많은데 들여 마실 수가 없어 기사가 바동거린다. 꺽꺽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밤이라 소리는 더 멀리 울려 퍼져 청년의 마음에 든다. 아저씨가 왜 중간에 멈췄는지 모르겠는데요. 실수하셨네요. 청년은 더 힘을 준다. 그 자신은 어디까지 목을 조르면 사람이 기절하고 마는지 알고 있다. 벌써 수십 번도 더 해본 놀이가 아닌가. 드라마 보니까, 이러다 가끔 죽기도 하지만. 청년은 프로페셔-널하기 때문에 알고 있다. 청년이 사랑하는 건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니라, 싸울 때의 쾌감이다. 얇은 차이를 간과하고 넘어가 버리면, 돌이킬 수 없어진다. 돌이킬 수 없어진다고! 청년은 서서히 손을 놓았다. 기사에게서는 움직임이 없었다. 청년은 기사의 목에서 손을 떼고 나서야 자신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음을 느꼈다. 

여자가 청년의 목을 부드럽게 감싸 안는다. 고마워. 청년은 정신이 반짝 드는 느낌을 받았다. 여자는 청년이 보는 앞에서 말로 변한다. 반짝이다가, 점점 작아지다가, 기계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신기한 일이야. 말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시 기계 안으로 돌아갔고, 다른 점이라면 더 이상 말이 뛰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요금은 11만원 정도에서 멈춰있었고, 차도 멈춰있었고, 기사도 더 이상은 움직이지 않았다. 시간마저 멎어버린 듯. 청년은 거대한 말에게 뭔가 당했다고 생각했다. 거대한 말은 인간보다 영리하였고, 자신은 이용당했다. 억울해. 나는 아니야. 청년은 여자가 말에게 잡혀 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여자는 말과 같은 종족이었다니. 청년은 배신감을 느꼈다. 저 인간의 돈을 빨아먹는 괴물이, 그렇게 아름다운 여자와 동족이라니 믿기질 않아. 동족이라? 동족이 대체 뭐야. 말이 되묻는데, 청년은 대답하기가 힘들다. 말이 말하는 건지, 청년의 머릿속에서 꽝꽝 울려대는 목소리에 넋이 나갈 지경이다. 청년은 간신히 택시에 있던 생수를 벌컥 벌컥 들이마신다. 정신이 약간 드는 것 같아. 자 이제.
어떡하지어쩌면좋지.
정말이지, 날개가 있다면 날아 도망가고 싶다. 청년은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려 애썼다. 가장 좋은 방법이라면 저 기사 양반이 깨어 있는 거야. 청년은 조심스럽게 기사의 왼쪽 가슴에 귀를 가져다 댄다. 내 앞으로는 절대로 택시를 타지 않을 거라고 맹세한다. 대리 운전이라도 불러야겠어. 이왕이면 여자가 좋을까? 그래... 앞으로는 여자 대리운전을 불러야겠어. 그런데, 이 아저씬 어떻게 해야 되는 걸까. 그는 가녀린 손으로 다시 팔 부분을 만져본다.

청년은 웃었다.


“8300원인데요, 8000원만 주세요.”
기사가 청년에게 말했다. 어째 영 반응이 없다. 뒤돌아 본 뒷좌석의 청년은 인사불성으로,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목적지까지는 다 도착했는데 어쩐다? 기사는 약간의 고민을 하다가, 청년의 핸드폰 1번으로 전화를 걸기로 마음먹었다. 기사는 몰래 핸드폰을 꺼내보았다. L사의 P핸드폰. 명품이다. 아니야. 그는 핸드폰을 자신이 가져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 녀석은 완전 취했다고. 맛이 갔어. 기사는 살며시 운전석에서 내려, 뒷좌석의 문을 열고, 청년을 보도블록으로 끌어내렸다. 질질 끌려나오는 청년이 좀 불쌍하긴 했지만, 이건 뭐 전적으로 청년의 탓이라 택시 기사는 생각했다. 밤늦게 택시에 혼자 올라탄 니 녀석 잘못이라구. 기사는 혼자서 그렇게 위안을 삼고는 청년을 내버려 둔 채 빠르게 택시를 몰고 사라졌다. 테일 램프가 어지럽게 흔들리다 - 멈췄다가. 이내 사거리의 오른쪽으로 붉은 불빛만을 남긴 채 흩어졌다.

어딘가에서 속삭이는 듯한 소리에 청년은 눈을 뜬다. 여자의 목소리인지, 누구의 목소리인지. 희미한 소리에 귀를 기울여 봤지만, 이내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차가운 겨울밤의 향기가 청년을 뒤흔들었다. 천천히 온 몸에서 느껴지는 욱신거림 때문에 청년은 얼굴을 찌푸렸다. 간단하게 스트레칭을 끝내고, 좁은 골목길로 발을 옮겼다.
“아아…. 집에 도착하면 따뜻한 물이 나왔으면 좋겠는데….”
청년은 중얼거렸다. 골목길은 왠지 모르게 어두워 보인다.
* 병장 박준연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8-07-14 10:24)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8-12-08
10:36:34 

 

병장 어영조 
  대학교1학년 때, 친구가 제게 넌센스퀴즈를 내줬습니다. 
절대 멈추지 않는 말이 뭔지 알아? 
뭔데? 
택시미터기에 있는 말이야. 
.... 

미터기를 발로 차더라도, 전국을 달리는 말은 멈추지 않을 겁니다. 2008-06-12
16:44:40
  

 

병장 이동석 
  여자 대리운전 업체중에 
아이들이 봐서는 안될 영업까지 겸하는 곳도 있다던데 

RIDE 
제대로 하니 술깨겠어요. 

(전 어째 책마을에서 음지를 담당하는듯?) 2008-06-12
19:34:55
 

 

병장 주해성 
  책마을에서 한번 봤었던 글 같은데, 도통 기억이 안나네요(웃음) 2008-06-13
09:14:31
  

 

상병 조현식 
  제가 썼던 글인데, 지워져서 올려봤습니다... 요새 시간이 없어서 예전글만 올리게 되네요 2008-06-13
09:43:22
  

 

병장 장재혁 
  잘보고 갑니다~! 
복기하는 중인데.. 
넘기고 못봤던 글도 많네요..허허.. 

동석//음지에 있더군요. 아니 많던데요... 2008-06-23
15:36:48
  

 

병장 이동석 
  재혁// 저도 재혁님 따라(?) 
는 아니고 예전에 봤던글 제목이 기억나지 않아 복기중입니다. 
허허. 2008-06-23
16:34:57
 

 

병장 이태형 
  재밌는데요 이거. 
잘 읽었습니다. 2008-07-04
15:48:47
  

 

상병 임광훈 
  택시를 타면 은연중에 사람들은 택시미터기에 있는 
말과 선풍기를 보곤 하죠 .. 2008-07-28
11:3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