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베스트선정-내글내생각] 하루살이  
상병 홍성기   2008-06-18 07:52:56, 조회: 665, 추천:3 

하루살이

그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스스로 그렇다고 생각했다. 내 삶을 다큐멘터리로 찍는다면 시청률이 1%라도 나올까? 아니, 한 명이라도 봐 줄까. 피식,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볼트를 조였다. 그는 철이 들 무렵부터 일을 했다. 보일러를 고치고, 막노동판에서 모래 짐을 지고, 터널 막장에서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했다. 그는 지금 싱크대를 고치고 있다.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렸다. 그는 오수에 절은 시큼한 목장갑을 까내고 전화를 받았다. 은수 아빠, 일 하지요. 아내의 목소리다.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데 오늘 외식을 나가자며 자꾸 아내가 보챈다. 회는 무슨, 한 끼 얼마나 호사스럽게 먹으려고 그러나. 고기를 먹을 거면 사서 집에서 구워 먹는 게 더 싸. 뭐, 맛있는 거 사 갈까? 그러자 아내는 까라지는 목소리로 그래도 오늘 은수 생일인데 밖에서 한 번 사 먹읍시다, 한다. 아 이게 아닌데, 그는 버럭 화를 내고 전화를 끊었다. 그는 돈이 없다. 그 놈의 야마토 게임이 뭔지, 성인용 오락실에 월급을 죄다 부었다. 그는 착한 아내에게 외식한번 못 시키는 무능한 남자다.

저녁. 친구와의 술 한 잔을 마다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는 포장마차에 들러 어묵 한 개와 국물을 들이켜고 딱딱한 꼬치구이 세 개와 기름이 번들거리는 튀김 몇 개를 샀다. 검은 비닐봉지는 그것들을 꿀꺽꿀꺽 먹어치우고 더 줘, 더 줘, 그 큰 입을 벌름거린다. 차비가 없는 그는 강 둔치를 걸었다. 여름이었다. 불빛에 하루살이들이 꼬여 가로등을 지나칠 때마다 그의 얼굴을 간질였다. 에이, 이놈의 하루살이들. 그는 괜스레 신경질을 내며 허공에 손을 휘휘 내저었다. 선생님, 말씀 좀 합시다.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 웬 노인이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머리는 언제 감았는지 파뿌리 같고, 옷 입은 꼴은 몹시 남루해 흡사 거지꼴이었다. 그는 누군지 알 길이 없어 위아래로 노인을 살피다 잔뜩 경계하고 돌아서는데 노인이 이제는 옷자락을 잡고 다시 여보, 말씀 좀 합시다. 했다. 거칠게 손을 뿌리치고 왜 그러십니까, 노려보니 노인이 선생님, 선생님은 오늘 죽소. 하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안 그래도 아내의 일로 부아가 치민 상태였다. 이런 미친 노인네가! 그는 거칠게 노인의 어깨를 밀쳤다. 노인은 금방이라도 바스러질듯했다. 앙상한 어깨가 만져지자 그는 핫, 하며 손을 뗐다. 할아버지, 장난이라도 그러지 마십시오. 내 돈이 없어서 돈은 못 줍니다. 그가 좋은 말로 달래도 노인은 굽히지 않고 다시 말했다. 선생님, 선생님은 오늘 틀림없이 죽소. 순간 그의 목덜미에서 오금까지 소름이 올랐다. 할아버지, 내가 왜 죽습니까. 노인이 되물었다. 죽는다면, 지금 당신은 뭘 하겠소? 그는 대답대신 도망치듯 뒷걸음치며 그 자리를 떠났다.

그가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자정에 가까운 시각이었다.
은수야, 은욱아. 아이들 이름을 불러도 방안에서는 불빛 한 올 새어나오지 않았다. 그가 문을 열어젖히니 싸늘한 방 가운데 아내가 쪼그리고 있었다. 너 왜 보일러 안 때고 이러고 있냐. 물으니 아내가 울먹이며 말했다. 자지도 않을 방, 불 때서 뭐해. 그가 무슨 소리냐고 되물으니 아내는, 두 집 살림하는 게 아니면 당신 버는 돈 다 어디에 쓰는데, 하며 소리쳤다. 그가 어안이 벙벙하게 서 있으니 아내가 말을 이었다. 차라리 그러면 그 여자 집에 가서 살어. 거지같은 생활비 받아서 살기 지쳤어. 그리고 아내는 아이들과 친정에 가 있겠다며 상처만큼 커다란 옷가방을 들고 현관을 나섰다. 죽는다면, 나는 뭘 해야 할까. 지금이라도 아내를 따라가야 될까. 그는 텅 빈 냉방에서 홀로 철지난 쇼프로 재방송을 보며 꼬치구이를 씹어 삼켰다. 속이 아팠다. 딱딱한 꼬치구이 때문인지, 아니면 아내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노인 때문인지, 그는 자꾸만 속이 아팠다.

지구가 사라졌다. 세상이 불바다가 되고, 물바다가 되고, 흩어져 가루가 되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고막을 찢는 소리에 놀라 그가 잠에서 깼을 땐, 세상은 이미 녹아 곤죽이 되어 있었다. 그의 몸은 차즘차즘 떠올라 우주 속을 부유했다. 이유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는 지구가 박살나는 광경을 지독히도 선명하게 목격했다. 그가 생을 자각할 때쯤, 그는 어떤 초월적인 존재들이 그를 구원했음을 깨달았다. 노인의 말이 떠올랐다. 죽는다면, 지금 당신은 뭘 하겠소. 그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살아있는데, 지금 나는 뭘 해야 합니까. 그는 한참동안 통곡했다.

오랜 세월동안 그는 초월자들과 함께 우주를 돌아다녔다. 많은 별들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생명들이 죽어나갔다. 수많은 초월자들과 조우하고, 수많은 항성계를 여행했지만 그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나는 이제 어떡해야 합니까. 그가 물었다. 초월자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곰삭아버린 그는 애원하듯 말했다. 다시 내 삶을 돌려 줘, 내 가족을 돌려 줘. 초월자들은 그에게 어떤 상(象)을 아로새겨 주었다. 그것은 평행우주의 모습이었다. 무한대로 팽창하는 우주 저편에, 경우의 수를 모두 뚫고 만들어진 또 하나의 지구가 있었다. 나를 저기로 데려다 줘. 그가 절규했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저녁 무렵이었다. 그는 강 둔치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그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돼 있었다. 가까스로 일어난 그는 수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시간이 없다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의 뒤로 익숙한 뒷모습을 한 남자가 지나갔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남자를 불러 세우고 말했다.

선생님, 말씀 좀 합시다.
* 병장 박준연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8-07-14 10:23)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8-12-08
10:35:40 

 

병장 허기민 
  연결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마지막에 '오랜 세월동안 그는 초월자들과 우주를 돌아다녔다..' 을 읽을 때에는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의 보우마 선장이 시공간을 넘나들던 마지막 부분이 떠올랐습니다.(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2008-06-18
10:22:49
  

 

병장 임정훈 
  글이 정말 쫄깃쫄깃한데요. (갑자기 제목이 안 떠오르는 떠돌이 상인이 우연히 같은 왼손잡이인 아들을 재회하는 교과서에 실린 소설)같은 문체를 주는 느낌인데요. 잘봤어요. 2008-06-18
11:09:52
  

 

이병 양승주 
  ↑메밀꽃 필 무렵 -이효석 아닌가요? 
07년 수능에 나왔던 것 같은데.. 2008-06-18
12:44:51
  

 

상병 이태형 
  선생님, 말씀 좀 합시다. 2008-06-19
06:57:59
  

 

일병 이동열 
  저는 문득 '운수 좋은 날'도 떠오르네요. 잘 읽었습니다. 2008-06-19
09:40:04
  

 

병장 이동석 
  홍성기님, 말씀 좀 합시다. 
바쁘신가요. 원체 말이 없으신가요. (웃음) 2008-06-19
13:23:14
 

 

상병 홍성기 
  하하. 바쁘기는 한데 저 말 많습니다. 
말씀이야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그리고 댓글 적어 주신 분들 너무 고맙습니다. 2008-06-19
16:51:10
  

 

병장 황인준 
  좀 늦었군요. 잘 읽었어요. 
정말 이런 단편을 써 내려가는 게 신기해요(웃음). 2008-06-20
09:01:46
  

 

병장 이동석 
  홍성기님, 정체가 뭡니까? (하하) 
뭔데 이렇게 딱 떨어지는 글을 써요? (흐흐) 

배아파서 하는 소리입니다. (웃음) 
앞으로도 좋은글 많이 보여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웃음) 2008-06-20
15:40:08
 

 

병장 장재혁 
  우와!! 멋지다.. 이걸 이제야 읽다니... 
추천한방 날리고 갑니다!!! 2008-06-23
15:20:50
  

 

병장 강석희 
  살아있는데, 지금 나는 무엇을 해야합니까... 2008-06-26
13:36:23
  

 

상병 조현식 
  가지로. 2008-07-07
11:22:33
  

 

병장 이현승 
  읽을수록 곱씹는 맛이 있네요. 탁월합니다! 2008-08-08
20:26: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