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월 통합 월베-내글내생각] 무모한 데이트
상병 기명균 2009-05-26 14:26:59, 조회: 363, 추천:4
안쓰럽다는 생각을 합니다, 정작 안쓰러운 건 안쓰러운 사람조차 없는 너야, 라고 하겠지만. 봄날의 주말에 굳이 유효하지 않은 주말 속으로 들어와 방금 전까지 유효하던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이제 막 당신을 기억할 짬이 난 남자친구를 기다리는 당신의 모습은 이제 부러움이 아닌 안쓰러움입니다.
평소와 달리 당신은 오늘따라 무모합니다. 주말에 늦잠자고 싶은 당신은 엊그제 받은 전화 속의 은근하고 절박한 협박에 못 이겨 늦잠을 미뤄두고 무모한 아침을 일어납니다. 친구가 보자고 조르는 영화도 저녁식사 후로 미뤄두고, 자격증 시험공부도 무모하게 미뤄둡니다. 인터넷 쇼핑몰에 쏟아 부은 돈은 카드의 품을 떠나간 지 오래이지만, 무모하게도 당신은 엄마에게 카드를 뺏다시피 빌려, 아니 빌리다시피 빼앗아 정지된 카드의 공백을 메웁니다. 남자친구를 만나기 위한 교통수단의 가짓수도, 미뤄놓은 다이어트에 대응하지 못하는 성급한 치마길이도, 평소답지 않은 화장의 두께도 무모합니다.
그를 기다립니다. 모든 게 귀찮아 보이는 한 남자 앞에서 남자친구의 소속을 밝힙니다. 외우기 참 힘든 무슨 무슨 무슨 무슨 무슨 무슨 무슨 곳의 무슨 무슨병 김 남 친이요. 기다렸다는 듯이 그 남자는 전화기를 들고, 남자친구의 몇 다리를 건넌 사람과 연결되는 듯 합니다. 저쪽에 앉아서 조금만 기다리시면 됩니다. 쉽네. 기다리는 시간은 항상 지루하고 짜증나기 마련이지만, 오늘은 좀 평소와 다릅니다. 핸드폰 게임을 하기도 좀 뭣하고,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있기도 좀 뭣하고, 친구와 전화로 수다를 떨기도 좀 뭣한 이상한 상황이 당혹스럽습니다. 너는 이렇게 뭘 하기도 좀 뭣한 곳에서 앞으로 2년을 살아야 하는구나. 불쌍해.
‘불쌍해.’는 어색하고 이상한 옷을 입고 추하게 깎은 머리로 나타난 남자친구가 나타났을 때 ‘사랑해.’를 밀어내고 자신의 입지를 굳힙니다. 옆에 서 보면 여전히 나보다 저만큼 키가 큰데도 왠지 조금 작아진 듯한 너. 분명히 눈, 코, 입은 그대로인데 조금 못생겨진 듯한 너. 목소리는 커진 것 같은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비슷비슷한 말만 반복하는 너. 보고 싶었다고 말하면서도 자꾸 한숨만 쉬는 너. 그런 너 앞에서 ‘사랑’, ‘설렘’, ‘떨림’과 같이 눈부신 단어들은 흐려지고 ‘안쓰러움’, ‘어색함’, ‘불편함’같은 단어의 농도가 점점 짙어집니다.
당신과 남자친구는 치킨 한 마리에 피자 한 판을 시켜놓고 집 앞 가게에서 사온 도너츠를 먹입니다. 잘 먹는다. 나 많이 보고 싶었지? 그럼. 잘 먹는다. 다음엔 언제 나와? 다음 달이야. 잘 먹는다. 아, 나 시험 망했어 유유. 잘하지 그랬어. 잘 먹는다. 치킨이 나오고 피자가 나오고, 여전히 잘 먹습니다. 입에 묻힌 설탕가루가 예전엔 참 귀여웠는데, 왜 지금은 그때랑 느낌이 다를까요. 그래도 내 남자라 귀엽기는 한데, 아 뭔가 말로 표현하기 힘든 찝찝함이 구두에 흘러내린 포도잼처럼 잘 안 닦입니다.
그래도 당신과 남자친구는 행복한 시간을 보냅니다. 남자친구는 여전히 잘 먹고, 당신은 오랜만에 보는 남자친구의 얼굴,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 오랜만에 잡은 손에 편지나 사진 속에서는 느낄 수 없던 편안함을 느낍니다. 나 들어가야겠다. 편안함을 느낄 새도 없이 벌써 시간이 다 지나버렸습니다. 막 꿈속으로 들어서자마자 밝아오는 아침처럼 왠지 당신은 피곤하고 우울합니다. 분명히 남자친구를 만나고 오는 길인데 어제보다 훨씬 피곤하고 우울합니다. 마냥 신날 줄 알았는데 이래저래 심란하기만 합니다. 다음에 또 남자친구를 보러 오겠지만 그때 오늘보다 덜 피곤하고 덜 우울할 거라 자신할 수가 없습니다. 잘 먹고, 귀여운 남자친구와의 데이트는 무모합니다.
먼 곳으로 오랫동안 소중한 사람을 보내야 하는 이는 보내진 사람만큼 힘들 거라고, 조금 바보같지만 여전히 믿고 있습니다. 그 기다림 속에서 만난 두 사람은 그 자체로 아름답고, 만남의 시간은 어느 순간보다 소중합니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갖기 위해서는 너무 많은 시간과 너무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만남을 위한 시간과 노력은 생각보다 훨씬 무모합니다. 무모하단 걸 알면서도 피곤한 데이트를 하는 사람들, 무모하고 피곤한 데이트에 지쳐 서로를 놓아 버린 사람들, 무모한 데이트라도 절실한 사람들, 모두 힘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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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1.3.89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10
09:34:16
상병 이기범
18.35.34.252 '무모함'을 시도해 줄 친구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괜히 가슴이 따듯해지는 것 같네요.
잘 읽었습니다 (웃음) 2009-05-27
09:32:45
상병 황호상
48.2.128.33 따지고보면 그리 대단하고 장황한 이야기도 아니건만
묘사된 사소한 감정의 조각들에 자꾸만 제 자신을, 그리고 무모할 뻔 했던 사람을 이입하게 됩니다.
눈뗄 틈 없이 읽었습니다. 2009-05-28
07:56:20
상병 박진식
54.2.5.228 감정이 몰입되는 글이네요.
섬세한 심리묘사가 인상적. 2009-05-28
13:09:33
상병 김예찬
48.9.2.115 허, 정말 잘 읽었습니다. 정말, 안쓰럽지요.. 2009-05-28
14:33:21
상병 김태완
16.48.6.22 여성적 감성을 가지신 분. 2009-05-28
15:35:33
병장 박문희
32.1.5.96 처음엔 잘 읽혀지지 않았지만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이거 남자분이 이렇게 여성스런 감성을 표현했다는것이 놀랍네요.
중간에 이모티콘도 흘려버릴 정도로 매끄럽게 잘 읽었습니다. 2009-05-28
15:36:06
병장 김형태
54.4.11.94 진행하는 라디오에 사연으로 쓰고 싶군요 2009-05-28
16:16:20
상병 기명균
8.151.3.28 앗, 용기내서 처음 올린 글인데 이렇게 잘 읽었다고 해주시니 참 좋네요.
여성스런 감성이라고 해주시는데, 제가 원래 아기자기한 말장난으로 어딘가 표현하기 힘든 느낌을 따라잡는 데 좀 집착하는 편이라 그런 부분이 그렇게들 느껴지신 것 같습니다. 잘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2009-05-28
18:42:44
상병 박원익
54.1.21.55 웹툰으로 유명한 기안84님이 생각나네요. 정말 재미있게 봤는데, 비슷한 감수성으로 쓰여진 글인 듯 합니다. 심리나 상황묘사가 정말 리얼하네요. 2009-05-29
03:01:44
병장 곽상민
27.2.11.199 가볍게 읽히면서도 묘한 흡입력이 있네요.
역시나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부분이 각 부분에 배치가 되어있어서 일까요.
공감하는 것만큼 끌리는 건 없나보네요. 잘 보았습니다. 2009-05-29
23:15:54
병장 김신흥
20.3.8.23 빠져드는 글인데요. 잘 읽고 기대합니다. 2009-05-30
17:08:01
상병 정승호
24.21.1.156 여자친구가 있는 1人으로.. 여자친구 맘이 이해가 가네요.. 2009-05-31
05:05:24
박정민
54.11.13.147 얼마전에 이별을 통보받은 1人으로..
이런 맘이었을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어느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보니, 새삼 씁쓸해집니다. 잘 읽었습니다. 2009-06-01
11:0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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