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월 통합 월베-내글내생각] 모래알 웹에서 파도소리를 듣다  
병장 김민규  [Homepage]  2009-04-05 02:27:10, 조회: 220, 추천:0 

  시작하며

  고등학교 졸업생의 80% 이상이 대학에 진학하는 지금, 대학사회란 어떤 곳일까. 학생증만으로 학교 주변 어느 곳에서나 외상이 가능하던 소부르주아 시대가 가고 인문학과 순수과학의 위기가 도래해온 지금에, 우리의 젊음의 모습은 어떻게 모양지어지고 흘러가고 있는가. 오늘 이곳에서, 나는 젊음의 형이상학적 가치를 다시한번 옹호하고, 지금은 잊혀져 기억조차 나지 않는 인문학적 상상력을 꿈꾸고자 한다. 애타는 목소리로 이 땅에 자유를 불러왔던 역사적 힘, 바로 그 힘으로서 ‘현실이 초현실보다 더 허구같고 죽음이 삶보다 더 삶같은 미친 현실의 초현실속에서, 우리의 언어로 시대를 경청하고 그것에 맞서며 그것을 뛰어넘기 위하여 리듬을 타고 달리고자 하는 것’이다.1)


  잊혀진 인문학적 상상력

  전통적으로 대학은 두가지 관점에서 이해되었다. 일찍이 유럽에서 대학은 학자를 양성하는 상아탑으로서, 지식 그 자체의 고결함을 숭상하는 전문교육을 위한 제도적 장치로 설립되었다. 이는 학문 그 자체에 충실한 내적 관점에서의 접근으로, 배움 이외의 어떤 다른 목적성을 내포하지 않았으며 그러한 전통은 오늘날에도 상당부분 남아, 소르본에는 입학식도, 졸업식도 따로 없을 정도로 건조한 문화가 형성되어 있다고 한다. 곧 엘리티즘의 정점으로서, 대중 교양의 정 반대편에 서서 특유의 논리체계와 고도의 사유를 발전시켜왔다고 할 수 있다. 68혁명 이후 대학이 평준화되고 간판간에 큰 차별점이 없어진 프랑스가 여전히 grand ecole 등의 상위 교육제도를 별도로 유지함으로서 수직적 가치지향을 인정하는 것에 착안하면 이러한 경향성은 분명해진다.

  반면 미국적 환경에서의 대학은 ‘대학 사회’로서의 기능에 더욱 충실해왔다. 단지 지식을 전수하기 위한 전문교육의 장으로서가 아닌, 건전한 시민을 양성하고 그에 걸맞는 합당한 교양과 사회성을 배양하기 위한 하나의 ‘사회’로서, 대중적 가치를 접목하고 동아리활동이나 학교 축제 등의 행사를 테두리 안에 포함하며 보다 적극적인 형태로 교육의 범위를 확장시켜온 것이다. 특히나 학부제의 광풍속에서 대학교육은 진중한 학문을 논하는 것의 책임을 대학원으로 일부 전가하고 인성교육에 보다 많은 중점을 두어왔으며, 이것은 앞서의 유럽의 경우와 정면으로 상반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국의 초기 대학문화에는 이 두가지 경향성이 모두 영향을 미쳤다. 기본적으로 학제의 대부분을 미국으로부터 따와 교육제도를 정립한 우리이기에, 후자의 관점이 중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동시에 극소수의 선택받은 이들만 대학에 진학하여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시대적 상황에 따라, 대학생은 그 이름만으로 소부르주아의 지위를 인정받았으며, 때문에 필연적으로 엘리트적 성향을 가지게 되었다. 최고 교육기관의 구성원들로서 그들은 스스로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사회적으로도 그들을 인정하는 암묵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현실적 상황론 이전에 학문적 이상과 꿈을 동경할 수 있는 여유가 90년대까지의 대학사회에는 확보되어 있었다. 더구나 그들은 현실적 모순을 들추어낼 수 있는 유일한 세대적 주체였으며, 또한 그것을 감지하여 밝혀내야 할 시대적 사명을 지니고 있었다. 사회의 정신적 고양과 성숙에는 이들의 역할이 매우 중대하였으며, 실질적인 발성의 주인공으로서, 대학생은 시대를 주도하고 앞서갈 수 있는 충분한 역량과 에너지를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2009년의 현재에 386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어, 여전히 한국사회의 담론들을 제시하고 주도적으로 분위기를 형성해가는 역할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이러한 대학생의 모습은 무색해졌다. 보다 사실적인 의미에서 대학의 기능은 발달된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새로운 질의 노동(흔히 사무, 기술, 전문직 노동이라 불리는)을 수행할 노동력을 재생산하고 동시에 사회적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는 것이다. 대학은 과거의 대학이 지니고 있던 학문과 진리탐구의 상아탑이라는 위상을 잃고 자본이 요구하는 새로운 노동의 유형, 즉 사회적 노동으로의 편입이 발생하는 출발점이 되었다.2) 현실론적 관점에서 대학은, 이제 신분유지와 상승을 위해 거쳐가는 하나의 필연적 과정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더 이상 대학생들은 시대를 주도하거나 앞서가지 못한다. 그들은 사고의 능력을 기성에 빼앗겼으며, 기성이 주장하는 기술적 가치에 의해 - 즉 토익과, 컴퓨터 자격증과, 한자에 묶여 - 평가받기를 바라고 정해진 틀 안에 편입하여 형체없는 ‘안정’에 집착하는 형국이 되어버렸다. 인문학적 상상력은 파괴되었다. 젊음은 더 이상 헤게모니를 흔들 엄두를 내지 않는다. 타자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어리석은 것으로 취급받기 일쑤고, 어떻게든 형성된 역학 안에 들어가 한 칸을 확보하는 것이 지혜롭고 현명한 것으로 여겨지는 시대가, 마침내 오고야 말았다. 


  20대는 외롭다?

  지금의 ‘20대’는 1981년에서 1990년 사이에 태어난 이들을 지칭하는 포괄적 개념으로, 그 넓은 시기적 특성만큼이나 모두를 아우르는 특정한 성격을 지적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그리 광활한 나라가 아니라서, 전국민이 전국적 이슈를 공유하고 비슷한 사건들속 같은 기억을 갖고 있다는 점에 의지한다면 조금의 일반화가 가능할 것이다.

  우리(필자는 86년생으로, 20대의 중간적 입장에 있으므로 양쪽 모두에게 접근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치고, 감히 ‘우리’라는 용어로서 그대와 나 간의 동질감을 표현하겠다)는 도시화를 몸으로 겪으며 자라왔다. 올림픽 이후 부양된 경기속 전국토에 빼곡한 아파트가 들어서고, 서울로의 급격한 인구집중을 분산시키기 위한 인위적 신도시가 개발되는 것을 몸으로 겪으면서, 저 문 너머에는 누가 사는것인지 궁금해하며 벌집 속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 부모님은 일에 바빴고, 우리 자신 역시도 어려서부터 이미 이런저런 학원을 전전하기에 급급했으며, 또한 핵가족화의 정점에서 대가족적 교류의 온기를 느끼지 못한터라, 미분화된 개인주의에 더욱 익숙하게 지내왔는지 모른다.

  입시제도는 우정을 갈라놓았다. 미시적 참여자들이 어떻게 노력하는지와는 무관하게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절대수치의 석차는, 곧 내가 다른 누군가를 압도해야만 우위를 확보할 수 있다는 냉정한 가르침을 주었을 뿐이다. 진솔한 내면을 드러내며 인간대 인간으로 협력할 수 있는 폭은 너무도 좁았다. 게다가 그러한 경쟁속 몇등분으로 쪼개져버린 친구들의 모습이란 - 이 쪽은 저 쪽을 이해하지 못하고, 저 쪽은 이 쪽을 시샘하며 질시하는 것의 구조적 고착화, 곧 그것이 스무살이 넘은 현재의 ‘소득수준’을 결정해버리는 이상에, 서로간에 마땅한 화해의 지점을 찾는것이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웹은 얼핏 소통의 폭을 확대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것에서마저, 우리들의 이야기는 분산되고 흩어져 철저히 미분적 양상을 보이게 되었을 뿐이다. 내가 너의 사이좋은 세상에 찾아가지 않는 이상 너의 이야기를 들을 방법은 없다. 그나마도, 네가 호의로운 마음으로 나의 일촌신청을 수락하지 않는다면 요원하기만 할 일이다. 블로그 세상에는 길이 없어서 어느 실마리를 타고 가야 너에게 닿을 수 있을지 도무지 알 방법이란 없다. 개인주의는 감성적인 형태로 더욱 고착화되고 있다. 누구나 마이너리티의 정서를 꿈꾸며 대중으로부터 벗어나기를 바라나, 실상은 비슷해 보이는 군락 속에서 자신만의 차별점을 확보하여 주목을 받고자 하는 본능적 욕구를 돌려 말한것에 불과할지 모른다.

  결국 모두는, 외로운 것이다. 누군가 내게 다가와 말 한마디 걸어주기를 기다리지만, 그것을 있는 그대로 말할 용기가 나지 않는 것이다. 왜곡된 우회적 표현의 방식으로서 오늘날 싸이월드의 관음증과 노출증은 말그대로 ‘대박’을 쳤다. 이것은 순전히 정신분석학적 ‘결여’로부터 비롯된 불만족과 다름아니나, 여전히 우리는 그것을 충족할 마땅한 방안을 찾지 못하고, 오히려 동굴 안으로 스스로 기어들어가고 있다.


  20대는 괴롭다?

  우리가 사춘기를 보내던 시절 한국사회에는 IMF가 들이닥쳤다. 어린날의 우상이던 아버지는 사회적 지위를 잃고 방황했다. 너무도 여리던 당시의 격정으로 그런 현실의 변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우리는 보이스카웃을 동경했지만 비싼 단복과 회비 앞에서 좌절해야 했으며, 정도의 차이는 있었을지언정 모두가 특정한 형태의 박탈 즉, 가정경제의 해체를 눈으로 목격해야만 했다.

  게다가 이해찬 세대의 실패를 경험하며 교육제도는 철저히 시장논리를 수용하기에 이른다. 무한경쟁적 체제 아래에서 ‘좋은 대학’에 진학하는 것은 개인의 노력에 의한 것이며, 지금 나의 원서가 거절되어 재수를 해야 하는 까닭은 다른 것이 아닌, 오로지 나의 지성과 감천이 부족했기 때문임을 자각하며 내면화해야 했다. 그것에 여타의 변수가 개입할 수 있다는 생각은 불손한 것으로서 애초부터 배제당해야만 했다. 또한 누군가 1등의 자리를 확보한다면 다른 모두는 그 다음의 자리로부터 순차적으로 배열되어야 한다는 당연한 진리는, 너무도 우습게도 아무렇지 않게 잊혀져버렸다. 사회에 의한 석차의 부여는 곧 누군가의 실패를 필연적으로 전제하고 동반하는것인데, 개인주의에 익숙해진 우리들은 미시적 노력을 통해 ‘나’의 석차를 끌어올리는 것에만 초점을 두었지, 누군가 반드시 ‘꼴지’의 호칭을 받아야만 한다는 사실에는 관심이 없었다.

  당연한 것으로 제도를 수용해온 태도는 현재의 취업대란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평가과목수가 늘어나기는 했으되 거기서 거기인 유사한 모양의 기준들을 만족시키고자, 젊은이들은 대학 1학년의 3월마저 내던지고 도서관으로 향한다. 여전히 초점은 ‘나’에게로 국한되어 있다. 세대 전체가 사회에 의해서 유린되고 사육되며 길들여지고 있다는 비판적 현실인식이 부재한 채로, 모두가 썩어가는 팔을 흔들며 좀비영화의 한 장면에 참여하는데에 여념이 없는 것이다. 초봉은 평가결과에 따라 천차만별로 벌어졌다. 비교적 월급이 관대한 편인 금융계의 대졸초임 연봉이 4500여만원에 이르는 반면, 모 대형 건설사의 을지로 사옥 비정규직 사무보조는 한달에 130만원의 월급을 받으며 그나마 4대보험이 적용된다는 것에 감사해야 할 처지다. ‘사’자로 끝나는 전문직과 일반 사무직의 차이가 아니라, 대기업의 같은 사무직군 내에서도 이만큼이나 큰 격차가 벌어져버렸다는 것은,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사회적 질투를 극대화하는 폭력적 결과를 불러온다. 하물며 중소기업의 현장을 생각해 보자 - 그것은 어마어마한 사회적 갈등을 발생시킬 수 있는 거대한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20대는 이러한 구조적 모순에 대해 언급하기를 꺼리며, ‘나’ 스스로의 미시적 노력을 통해서 현실을 개척해 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시선을 모두 빼앗기고 있다. 너무도 철저히 강요된 목소리를 내면화해온 결과로, 개인들은 박탈감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며 인생을 비관하는 지경에까지 나아가고 있다. 말은 바로 하자. 이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설령 무능력하고 불성실한 개인의 삶의 태도가 사회적으로 권장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결론은 같다. 왜냐하면, 기성에 의해 기획된 테두리 안에 편입되지 않는 이상, 개인의 창조적 역량과 노력에 대한 댓가가 주어질 기회란 현재 한국사회 안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20대는 미심쩍다?

  지금의 20대는 냉전의 해체와 탈이념의 추세속에서 사고의 다원성과 탈가치를 절대적인 것으로 배우며 자라왔다. 절대성을 부정하는 것을 절대적으로 받아들이며 살아온 세대다. 그것에 어떤 비판적 수용이 있었을 리 만무하다. ‘상대주의’는 그 자체로 주관식 단골 답안이었고, 진정한 의의를 따져볼 새도 없이, 일단 깐깐하고 고집스러워 보이는 것은 부정부터 하고 보는 것이 정석이었으니까.

  학생운동은 몰락했다. 편향된 이념성과 애매한 말레(이시아)주의를 답습한 교조주의가 그 마음에 들었을 리 없다. 게다가 앞서 설명한 현실적 풍파속에서, ‘나’와 멀어보이는 이야기를 위해서 연행과 구속을 감행할 정도의 여유는 이미 그들에게 없는 것이었다. 심지어는 몇 안되는 팔뚝질조차 기성의 이해와 의도속에서 유도되고 전략적으로 이용되곤 했으니, 이제와서는 그 어떤 흐름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기 불안하다는 냉소주의가 뿌리깊게 자리잡은 탓이다. 그저 주어진 틀 안에서 열과 성을 다해서 다음 계단으로 올라서는 것이 더욱 실리적인 선택으로 생각되고 있다.

  사회에 존경할만한 어른이 없다는 것은 큰 낭패이자 손해다. 역대 지도자들은 하나같이 비참한 최후를 맞았고, 과학자는 표절과 조작시비로 한순간에 몰락했으며, 경제인들은 정경유착과 외환위기 끝에 파산을 선고받았고, 교육현장의 선생님들은 폭력과 촌지로 얼룩졌다. 종교인들은 교세의 확장에 집착하고, 타짜는 카드를 바꿔치며, 리니지의 성주는 돈으로 게임을 하고, 심지어는 부모마저 이혼을 한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어른이 어른답지 못한 시대다. 이러니 누구를 믿고 모델로 삼으며 자기발전의 지향점으로 신임하겠는가. 더구나 기성이 구축해온 현재의 발전상은 세계적 금융위기속에 흔들리고 있다. 역사를 돌아봐 현재의 문제를 해결할 힌트를 얻고 해답을 발견해야 하는데, 하루키 이후의 시대에서 그것은 이미 불가능한 일이 되고 말았다.

  본질적으로 20대는 실천적 참여에 의한 사회 발전을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세대다. 4월이나 5월에 그들은 태어나지도 않았으며, 6월에는 너무 어렸다. 오히려 촛불소녀의 교복 앞에서 20대의 참여는 외면받기에 이르렀다. 어차피 사회적으로 주목받지도 못하는데, 운동한답시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결국은 취업도 못하고 백수가 된 선배의 전철을 밟느니, 도서관에서 책 한자 더 보는 것이 차라리 바람직한 일로 여겨지는 것이다.




  이러한 20대의 경향성은 곧 웹에서의 모습으로 구체화되고 있다. 미분된 양상의 논의들, 개인적이고 감성적인 감정의 편린들의 나열, 현실 앞에서의 무력감과 소극적 수용, 탈이념에 대한 강박성에 이르기까지, 그 하나하나는 곧 담론의 해체, 목소리의 미형성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젊음의 활동성이 죽었다고 단언하기에는 이르다. 여전히 20대는 아프리카에서 개인방송을 꾸리며, UCC를 만들고, 박지성 골장면을 실시간으로 녹화해 인터넷으로 실어나른다. 비록 체제비판적 거시논의는 부재할지언정, 자신들의 이해나 관심과 부합하는 미시적 주제에 대한 토론은 사방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다음과 네이버의 카페문화, 싸이월드 클럽, DC 등으로 세분되고 분산된 현재의 논의의 양상이 곧 그것을 증명한다.


  우리의 목소리를 담기 위하여

  이러한 환경과 분위기속에서 우리가 우리의 목소리를 다시 찾아야 할 필요는 명백하다. 그것은 사회가 우리의 입을 닫기를 강요하고 있으나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자발적으로 침묵하기를 택하고 있기 때문이며, 앞서가는 첨병의 가치를 옹호할 수 있는 사회 발전의 근본 동력으로서 스스로의 의무와 책임을 놓치지 말아야 할 역사적 사명이 20대에게 부과되기 때문이고, 또한 인문학적 상상력을 잊지 않고 주변부의 가치들에 관심을 기울일 주체로 부각될 수 있는 유일한 집단이 우리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스스로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투박한 도전임과 동시에, 이 사회가 제자리를 찾고 다시금 상생과 협력의 방향을 찾아가도록 촉구하는 당위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낼 수 없는 단순 당위의 나열이나, 강압적 강요에 의한 참여의 재생산의 구조가 되어서는, 현재는 실패와 침체의 길을 걷고 있는 대학 학생회 이상의 가능성을 확보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에는 우리 스스로에 대한 철저한 분석이 필요하고, 그에 맞춘 전략적이고 취향적인 공감대의 형성이 필수적이며, 또한 웹의 가능성을 더욱 확장시키고 정보접근에서의 편의를 증진시키기 위한 기술적 대안의 모색이 요청되는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그간 구상해온 하나의 모델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것은 기존에 제시된 페이지들을 벤치마킹하여 전향적으로 수용한 확장적 교집합이자, 우리만의 창조적 가치들을 더욱 보조할 수 있는 창작에의 의지일 것이므로, 다소간의 보완과 수정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언제라도 감안되어야 할 것이며, 또한 불필요한 관성에 의존하지 않고자 애쓰는 의식적 노력 역시도 함께 용납되어야 할 것이다.


  “이성의 업무에 속하는, 인식들을 취급하는 일이 학문의 안전한 길을 걷고 있는가의 여부는 그 성과로 곧 판정이 나게 된다. 만약 그 취급이 많은 시설과 장치를 한 후에 목표에 당도하자마자 곤경에 빠진다거나, 이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자주 다시 되돌아가서 다른 길을 걸어야 한다면, 또한 만약 함께 일하는 여러 사람들이 공동의 의도를 어떻게 성취할 것이냐의 방식에서 일치를 이룬다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면, 그러한 연구는 학문의 안전한 길을 걷는것과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한낱 주변을 맴돌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성찰없이 미리 취해져 목표 안에 포함되어 있던 많은 것이 헛된 것으로 포기되어야만 할지라도 어디에선가 이런 안전한 길을 발견한다는 것은 이미 이성을 위한 공적이다.” 3)



  1. 매체지향 : 기본적으로 우리의 모델은 하나의 ‘매체’를 이루어 문제의식을 전달하고 목소리에 힘을 싣는 파급력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특정한 이념에의 교조적 집착으로 변질하고 마는 것 역시 용납할 수 없는 바이다. 또한 매체의 진중함과 근원적 정체성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초기단계에서는 특정 주체에 의한 성격의 규정과 주도적 구성이 필요함을 부정할 수 없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우리가 가진 인적 네트워크를 최대한 활용할 것이다. 현재까지 확보된 열 일곱명의 필진은 각자의 다양한 관점을 투영하며 시사문화교양을 아우르게 될 것이고, 이것은 포괄적 세대 소통을 이끄는 하나의 문화적 돌파구가 될 것이다. 또한 필진의 글은 집결되어 하나의 ‘판’edition이 되어 월간, 혹은 계간의 매체를 형성할 것이며, 이것의 비근한 예로서 우리는 딴지일보의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2. Blog-based : 그러나 필진들이 사私적으로 부가적 노력과 희생을 해서야만 매체가 유지된다면 그것의 지속성을 장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즉 순전한 창작욕구에서가 아닌, 매체를 위한 글을 쓰기 시작한다면, 글쓰기는 더 이상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닌 하나의 과업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라는 위험성을 지적하고 싶다. 때문에 우리의 공간은 블로그에 기반한 연합체의 성격을 갖는 것이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각 필진은 어차피 웹 어딘가에 나름의 공간을 가지고 있을 것이며, 꾸준히 그곳에 무언가를 남기며 가꾸어가고 있고, 혹은 최소한 그러할 예정으로 전역을 기다리고 있다. 이것을 우리 모두의 연합사이트로 전환할 수 있다면 어떨까. 필진들에게 개별적인 블로그를 부여하고, 그것에 2차도메인(ex:minkiw.*******.net)을 주어 접근의 편의성을 주며, 최대한의 시스템적 지원으로 ‘꾸밀 맛 나는’ 공간을 제공한다면, 자연스러운 창작의 순환이 가능하지 않겠냐는 말이다.

  이렇게 각 블로그에 쓰여진 글은 곧 ‘판’을 형성하는 기본 근거가 될 것이다. 또한 단순히 우리들의 매체에 종속된 모양을 벗어남으로서 독립적 발전을 여전히 꿈꿀수 있다. 다만 블로그 환경에서의 미분화된 양상을 극복하고 논의를 집결시킬 수 있는 대안이 필요한 시점이다


  3. 논의의 통합 : 그 대안으로서 나는 ‘게시판’ 형태의 ‘리스트’를 함께 존속시키는 것을 생각하고 있다. 즉, 각 필진이 자신의 블로그에 글을 쓰더라도 어차피 그것이 중앙의 DB에 저장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으니, 중앙적 목록을 만들어 생산되는 텍스트들을 연결할 고리를 만들자는 이야기다. 이것은 미로와 같은 블로그 세상에서 길을 찾아줄 하나의 ‘지식지도’가 될 것이다.

  무엇으로 글들을 연결할 것인가, 여러 가지 기준이 함께 접목될 수 있다. 우선 작성시간순으로 모든 글을 단순나열하는 형태로부터, 그것에 세세한 필터들을 도입해 주제별, 태그별로 상세히 검색할 수 있는 장치들을 함께 마련하자는 것이다. 주제로서 사회/경제/문화/예술/정치/인물/삶/풍류와 같이 세분된 기준들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태그별 정렬이라 함은, 주요 태그들을 등록하고 ‘지식지도’로 삼아 그 위에 우리의 논의들을 얹으며 하나의 지식체계를 구축하는 방안으로 이야기할 수 있겠다.


  4. 광장 : 그러나 이것이 우리끼리의 내부적 소통에 그쳐서는 안될 일이다. 우리 주위의 20대들이 관심을 갖고 들어올 수 있도록 유인하는 것은 물론 필진들의 깊이있는 글이 해줄 역할이겠지만, 그들이 나름의 의견을 개진하며 현실을 지적하고 자신의 글로서 생각을 풀어갈 수 있도록 참여를 유도하는 것에는 시스템적 지원이 필요하다. 이것을 위하여 하나의 ‘광장’ 건립을 함께 구상하고 있다. 즉, 역시나 주제별로 분류된 ‘게시판’을 통해서 논의들을 전개할 수 있도록 배려하며, 이렇게 작성된 글중 일부는 저자의 동의를 거쳐 ‘판’에 반영하기도 하고, 혹은 필진으로 영입하기도 하는 등의 방법으로 더욱 논의를 깊고 넓게 만들기를 의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곧 프로슈머 경제를 정면으로 지향하고 있다.

  비필진이 작성한 글의 위상을 어느 정도로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다소의 조율이 필요하다. 즉 필진의 글과 동일선상에서 ‘리스트’에 출력되어야 할 것인지, 혹은 완전히 분리된 ‘광장’안에서 이루어지도록 공간적 구분선을 두어야 할 것인지에는 고민이 남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20대가 모여 자신들의 세대적 정체성에 기반해 논의를 진행해갈 수 있는 공간이 인터넷에 부재함을 살펴볼 때에, 이러한 공간의 건립 자체는 더 이상 선택이 아닌 당위의 문제라 할 수 있다.


  이것에 따르는 기술적 필요는 물론 섬세하게 따져봐야겠지만, textcube5)의 소스를 변형하고 추가로 필요한 ‘판’과 ‘리스트’를 생성하는 정도에서 마무리될 수 있다. 즉 구현가능한 수준에서의 일이라는 것이다. 지금의 <시즌2>가 역동적 동력을 얻지 못하고 답보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은 인적 네트워크의 취약도, 공감의 부족도 아닌, 단지 기술적 역량의 부재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나는 감히 제작을 자청하며 대안적 공간 마련의 전면으로 뛰어들게 되었다.

  우리에게 많은 것이 필요하지는 않다. 다만 지금의 의지를 지속해갈 수 있는 끈기와 의지, 열정이 요구될 뿐이다. 지금까지 내가 알고 보아온 우리의 모습이라면 그것은 이미 증명된 바 어떤 망설임조차 과다한 것이라고 확언할 수 있다.

  그러나 한가지만큼은 명확히 해야 한다. 군인 신분을 벗고 다시금 사회로 나아갔을 때, 비로소 자유로운 선택권을 가지게 되었을 때에 모든 일이 저절로 해결되리라는 낙관적 기대만큼은 위험하다는 것이다. 18세기의 언어로서 그것을 대신하며 줄이고자 한다.

  “경쾌한 비둘기는 공중에서 자유롭게 공기를 헤치고 날면서 공기의 저항을 느낄 때, 공기가 없는 공간에서는 훨씬 더 잘 날줄로 생각할 수도 있겠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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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청년문학상 시 부문 심사평에서, 김승희, 서강대학교 국문과 교수, 2009
2) 학생운동의 성격과 존재양태, <학회-마주침과 어울림의 공간>, 1998
3, 4) 순수이성비판, 제 2판 머릿말에서, Immanuel Kant, 1787
5) Textcube : Tetter Network Foundation에서 개발한 설치형 블로그 프로그램. 이미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Tetter Tools의 후속작으로서, ‘개인에게 저작물을 돌려주자’라는 모토아래 Linux에 기반을 둔 공개형 프리웨어로 꾸준한 업데이트가 이루어지고 있다. 현재 Google과의 협력관계에 있으며, Daum을 통해서 입주형 블로그 서비스를 함께 진행하고 있다.
* 책마을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9-06-10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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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10
09:34:26 

 

병장 송민관 
20.33.1.210   요즈음 들어서 저 역시 미래를 향하여 많은 고민과 계획을 세워오면서 

많은 부분을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가지로- 2009-04-05
02:42:01
 

 

상병 박원익 
54.1.19.46   제가 20대에게 위화감을 느끼는 부분이 있다면, 자신이 처한 상황을 '상대화'하는 그 탁월한 능력이 아닌가 싶습니다. 가령 제가 봤을 때, 가령 한국의 20대가 처한 특수한 상황은 우석훈 씨가 말한대로, 제3부문의 발전이 더딘 한국형 자본주의에서 세대경쟁을 해 나가야하는 사회경제죽 구조입니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들은 이를 고민하지 않고, 20대는 젊다, 나름의 순수함이 있다, 소통 지향적이다 등등의 '문화'를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가령 운동권의 경직된 문화를 비판하는 저 수많은 아름다운 영혼들의 태도에서도 감지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민규 님의 글에서도 동일한 문제성을 발견합니다. 말하자면 그 지점에서부터 20대들은 이미 현실에서뿐만 아니라 의식에서도 패배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2009-04-05
07:46:25
 

 

병장 김민규 
22.34.42.100   패배를 이야기하려면 대안적 방향성을 함께 제시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현재의 문제는 '결코 취약하지 않은' 인적 인프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다 수용하지 못하는 소심한 내수와 소비의 규모가 다수를 패배의 길로 내몰고 있으며, 이것이 과연 세대경쟁적인 방법으로서 해소될 수 있는 갈등인지는 의문스럽다는 것입니다. 내적 동기유발과 배분적 자리잡기는 이미 지나칠정도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때문에 국가적 차원에서의 낭비와 갈등, 심리적 위화감이 조성되고 있을 정도지요. 

문화를 이야기하는것은, 다소 그것이 현실세계와 동떨어져보이고 혹은 무기력해 보일지라도, 궁극적인 차원에서의 조화와 주체적 경각을 가져올 수 있는 가장 유효한 현시대의 코드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의 길로 정형화된 인생관을 넘어트리고 제2, 제3의 방법을 제시할 수 있을 창조적 활동성을 옹호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결코 현실적 상황에 대한 회피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이상, 너머의 가능성을 찾기 위한 모색의 과정인 것입니다. 

개인의 창조적 역량과 노력에 대한 댓가가 주어질 수 있는 길이 없다면, 우리는 영영 공업경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할겁니다. 젊음-순수함-소통지향의 형체없는 특성보다 제가 더 집중하고 싶은 것은 우리 세대가 가지고 있는 특정한 형태의 좌절과 그로 인한 공포입니다. 다양하게 이것에 접근할 수 있겠지요. 때문에 저는, 우리에게 가장 친근하며 또한 영향력있는 수단으로서, 함께 이야기하며 전초를 마련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2009-04-05
08:44:09
 

 

상병 김지호 
26.80.13.104   우리는 우리만의 영역을 구축해야 합니다. 어느 시대든 간에 20대가 제일 활발하게 역동적으로 움직였고, 지금 시대도 그걸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답습했던 10대시절을 기억하며, 그리고 지금 20대 후반을 달리는 선배들을 보며 우리는 우리만의 발전상을 그려 나가야지 않겠습니까. 

우리라고 못할 거 없습니다. 각종 제약이 뒤따른다 해도 우린 넘어설 수 있습니다. 

왜냐, 우린 20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바라보는 눈이 한둘이 아닙니다. 밑으로는 지금의 10대 후배들이 있고, 위로는 부모님 세대부터 해서 형 누나 등의 선배 세대까지 - 많은 사람들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고, 그들과 공유를 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만의 독특하고 발전성 있는 자세와 모습이 절실히 필요하지 않을까요. 

단순한 생존논리로만 바라보지 말고 말입니다. 이미 우리는 중고생때의 입시제도로 생존논리를 알았고, 자본의 힘으로 휘둘리는 모습을 알아차렸습니다. 순수함을 논하는 친구들은 바보 취급을 받았고, 알량한 제도 속에 꿈틀거리는 친구들은 참다운 학생이란 소리를 듣던 그 모습 - 아직 저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에겐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니까요. 2009-04-05
09:09:35
 

 

병장 김형태 
54.4.11.94   우리의 목소리를 담기위하여는 상당히 체계적이고 구체화되있네요. 방법만 따지자면 너무 많은 방법이 있겠지만 최선의 선택을 잘 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제 다음주에 펼쳐질 워크샵을 통해서 우리의 목소리가 담긴 새로운 '어떤것'이 나오리라 생각하니 가슴 벅차요. 

부디 워크샵에서 많은 내용을 다뤄주셨으면 좋겠습니다만- 그렇기 위해서는 1박2일도 모자랄 것 같은데, MT시즌의 그곳에서 단지 우리의 책마을만을 위해 주시길 바래요(제가 못가서 딴짓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에요 흥) 

일단 판을 벌립니다. 그렇기엔 많은 얼개가 올라와야 할 것 같은데, 혹시 저녁자들의 얼개도 볼 수 있을까요? 2009-04-06
08:49:27
 

 

병장 고승철 
22.114.1.40   "이러한 20대의 경향성은 곧 웹에서의 모습으로 구체화되고 있다. 미분된 양상의 논의들, 개인적이고 감성적인 감정의 편린들의 나열, 현실 앞에서의 무력감과 소극적 수용, 탈이념에 대한 강박성에 이르기까지, 그 하나하나는 곧 담론의 해체, 목소리의 미형성으로 나타나고 있다." 
감성적인 감정과 탈이념.... 20대의 모습인지는 몰라도 지금 저의 모습을 표현할 수 있는 전부가 아닐까도 합니다. 감성적이어야 한다, 정해진 무언가로부터 탈피해야된다. 라는 단순한 생각들만이 도배되어진 나에게 당신들의 광장에 발 하나를 건치는 걸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 우뚝선 무언가로 자라고 싶네요... 
'장미의 이름'에 "단순한 평신도들이란, 제가 사는 지방에서 설교하고, 제 마을을 지나고, 제 마을 광장에 서는 자를 따르는 법이다."라고 하는 구절에... 멈칫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글을 읽으면서도 멈칫해지네요... 지금 광장에 서있는 필진을 비롯해 암묵적으로 자리를 잡고 계신 이곳에 지금은 없는 광장에 서있는자들을 지금은 따를테지요.. 아직은 평신도 이니 나중엔 아마도 ..이교도로 변해 당신네들을 잡아먹고 있을테지요.... 
그게 살아가는 맛일테니까요. 쫌 무섭네요.(웃음) 
시즌2 항상 기대되네요... 쨋든 이글은 [가지로]... 2009-04-06
10:5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