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5월베스트선정-독서후기] 아파트 공화국  
병장 박성진   2008-05-05 14:45:22, 조회: 597, 추천:1 

이사후 처음 올리는 후기네요. 그간 익숙했던  이름들이 하나둘 떠나가는 걸 보니 저도 갈 때가 되었나봅니다. 이런. 이제 좀 활동할 만하겠구나 싶었는데 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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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서울에서 나고 자라신 서울 토박이시다. 어릴 때 어머니와 함께 서울의 외가를 찾아가는 길에 어머니께서는 가끔 예전에 이 동네의 여기쯤에 무슨 밭이 있었고, 저쪽 어디쯤에 개천이 흐르고 있었다는 말씀을 하셨다. 하지만 당시 어린 나로서는 전혀 상상할 수 없었는데, 어머니가 가리킨 그곳은 모두 예외없이 아파트가 빽빽히 들어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나서부터 아파트에서 자라났고, 아파트 이외의 집에서 산 기억이 없다. 어릴 때 같이 놀던 친구들도 모두 아파트에 살았다. 조금 먼 곳에 잇는 친구를 사귄다 해도 기껏 다른 '단지'에 사는 정도일 뿐이었다. 일년에 한두번 갈까말까한 시골에서나 아파트와는 좀 다른 모습을 느낄 수 있었지만, 내게 끼친 영향은 없다시피 했다.
지금은 부모님, 혹은 그 나이대의 일가 친척 모두가 아파트에서 살고 있지만 우리 윗 세대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아파트 이외에 집에서 살았던 기억을 모두 공유하고 있다. 생각보다 아파트라는 주거 양식이 보편화된 것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불과 한 세대 차이로 우리는 아파트 이외의 주거 공간을 상상하기 어려운 세대가 되었다.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된 것일까.

'아파트 공화국'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을 제공하기 위해 한국의(그리고 그중 가장 대표적인 서울의) 아파트를 체계적으로 분석한 책이다. 사람들은 땅이 좁고 사람은 많다는 이유로 대규모의 아파트 건설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프랑스인인 저자가 분석하는 현실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과는 상반되는 것이 많다. 저자는 프랑스에서 실패한 아파트라는 주거 양식이 한국에서는 어떻게 도입되었으며 어떤 과정을 거쳐 사람들의 마음 속에 확고히 자리잡게 되었는지 분석한다. 초창기 기피되었던 아파트가 정부의 적극 지원을 통해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이윽고 '현대적'이고 '서구적'인 주거 공간으로의 위치를 확고히 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약 30년만에 우리는 수백년간 유지해왔던 주거 양식을 바꿀 수 있었다. 하지만 과연 그렇게 많은 아파트가 지어져야 했을까? 땅이 좁고 인구가 많은 나라이기에 다른 대안은 존재할 수 없었을까? 저자는 섣불리 주관적 판단을 하려 하지 않는다. 단지 자료와 함께 의문을 제기할 뿐이다. 

일부 예를 들어보자. 재개발이 진행되어 아파트 단지가 된 달동네의 인구 밀도가 달동네이던 시절보다 더 줄어들었다는 사실, 평 수가 넓은 아파트일수록 작은 평수의 아파트와 비교해 세대당 가족 수가 더욱 적다는 통계는 수많은 아파트 건설이 누구를 위해 이루어졌는지 생각해볼 만한 자료이다.
아파트 단지 건설은 기존 거주민을 외부로 밀어내고 거기에 걸맞은 새로운 주민(중산층 이상)의 유입을 통해 이루어졌다. 새로이 지어지는 아파트에 기존 거주민이 입주하는 일은 많지 않다. 서울 중심에서 외곽으로, 그리고 다시 수도권으로, 그리고 다시 새로 건설되는 신도시로, 계속 밀려날 뿐이다.

저자의 분석에 따르면 아파트는 그 자체로 꼭 '현대적'이고 '서구적'인 것이 아니다. 미국인의 대부분은 정원이 딸린 개인 주택에서 생활하고, 네덜란드나 벨기에 등 인구밀도가 높은 나라에서도 아파트는 그다지 선호되는 거주 양식이 아니다. 프랑스의 대단지 정책은 이민자 유입과 폭동이라는 결과를 가져왔을 뿐이다.  
한국의 아파트는 모든 낡은 것 - 옛날 것 - 과 결별하여 '조국 근대화'에 국가 역량을 집중하던 국가 정책과 부합하는 주거 양식으로, 대규모로 신속하게 많은 집을 지을 수 있다는 점에서('아파트 건설 180일 작전'과 같은 예에서 볼 수 있듯이)국가적으로 장려되었고, 이러한 정책은 역시 낡은 것을 벗어던지길 강렬히 바라고 있던 국민들에게 수용되어 이윽고 아파트 자체가 '현대적'이고 '서구적'인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아파트 한 채 마련하는 것'이 좀 살만 한 사람들, 다시 말해 '중산층'으로의 편입을 의미하게 된 것이다. 아파트는 가장 편리한 형태의 주거 공간이자 그 자체가 재산 증식을 위한 재테크의 수단이다. 집을 가진 것과 아닌 것의 차이가 천지차이라는 것은 아파트가 단지 사는 집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해 준다'는 광고처럼. 어디 사느냐의 문제는 사회적 상징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저자는 아파트에서의 생활 양식을 면밀히 분석하면서 여전히 소위 '낡고 살기 불편한' 한옥의 주거 양식이 아파트에 변형되어 도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옥 생활의 불편함으로 지적되었던 신발 신고벗기, 식사 때마다 상 옮기기 등이 그런 예로 활용된다. 따라서 아파트가 원래 '서구적'이고 '현대적'이라는 것은 단지 상징일 뿐, 한국의 아파트는 어디까지나 한국적으로 변용되어 발전해온 것이라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어쨌든 이제와서 아파트에 대한 호불호를 따지는 것은 의미없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도시에는 저마다의 발전 방식이 있으며 이제 서울이란 도시에서 아파트는 뗄레야 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우리 개개인에게도 마찬가지이고. 저자가 조심스레 분석하는 아파트 도시 - 서울 - 의 미래는 현재 진행중이다. 초기 건설되었던 많은 아파트에 대한 재개발 사업이 진행중이며, 70년대 이후 건설된 대규모 아파트 단지들의 수명이 다해감에 따라, 현재 서울 모든 지역에서는 재개발에 대한 욕구가 풍선처럼 부풀어오르고 있다. 최근 이슈가 되는 뉴타운 사업계획도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파트의 대규모 건설로 인해 서울의 모습은 그 어떤 도시보다도 역동적으로 변화하였다. 하지만, 그 아파트들이 다시 재개발되는 시기가 되면 도시는 어떤 모습을 변화할 것인가? 

이 책을 읽고 그간 몰랐던 많은 사실을 알 수 있었고, 지금까지 아주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던 아파트 주거 양식에 대해 많은 의문을 갖게 되었다. 더욱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생각해 볼 계기를 마련했으면 좋겠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가치가 뒤집어지는 느낌, 전혀 몰랐던 것을 새로이 알게 되는 재미가 생각보다 크다. 


* 책마을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8-06-12 10:46)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8-12-08
10:30:12 

 

일병 이재륜 
  오. 
책 전반의 내용이, 
아파트라는 주거공간에 대한 고찰인가보네요. 

건축학이나 건축사 쪽에 관심있는 분에게도 많은 도움이 될 듯 하네요.(웃음) 2008-05-05
21:38:27
  

 

병장 민경석 
  "'아파트 한 채 마련하는 것'이 좀 살만 한 사람들, 다시 말해 '중산층'으로의 편입을 의미하게 된 것이다."라는 문구가 의미심장하군요. 기실 아파트라는 게 이른바 중산층을 위한 하나의 '꿈' 같은 게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뉴타운 개발만 봐도 아파트를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만 하나의 희망이자 꿈이겠지요. 집을 소유하기를 바라고만 있는, 전세나 월세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집 값 상승이라는 지옥이겠구요. 아파트와 이 부동산이라는 복마전(중산층과 하층을 갈라놓는 분할선)이 정말 무섭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습니다. 2008-05-06
08:03:12
  

 

상병 이태형 
  아파트가 다른 나라에서는 그닥 환영을 못 받는 건축양식이었군요. 
크으. 
하지만 서울같이 인구밀도가 높은 도시는... 2008-05-06
08:11:30
  

 

병장 박준연 
  잘 보았습니다. 후기만 읽고 추측컨대, 작년즈음에 읽은 강준만씨의 <강남, 낯선 대한민국의 자화상>이란 책의 내용과 비슷하지 않나 생각됩니다. 요새 대새는 아파트보다는 주상복합이죠. 밑바닥부터 올라가야 할 제 인생, 올라가는 집값을 보며 죽기전까지 서울에서 집한채 살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2008-05-06
08:27:34
  

 

상병 임정훈 
  개인적으로는 우리나라에 아파트라는 거주양식이 자리잡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외로움을 잘 타고 무리짓기를 좋아하는 문화특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끊임없이 관계맺기를 시도하죠 인터넷을 비롯한 온라인 문화도 일촌맺기나 안부확인 등등 새로운 문화창출이나 생각의 공유보다는 관계맺기 확장이 크고. 역사적으로도 과거 상업적으로 거리가 먼 소규모 농촌 부락 형성도 또한 농지의 효율적 사용보다는 마을의 형성에 좀 더 촛점이 맞춰져있다고 하구요. 2008-05-06
10:37:48
  

 

병장 박성진 
  재륜님// 저는 건축 쪽에 그렇게 관심있는 편은 아니었지만 꽤 흥미롭게 읽히더군요. 관심을있는 분들께는 더 재미있게 읽히지 않을까 싶어요. 글에서 언급하진 않았지만 책 속에서 아파트에 대한 건축사적 부분도 장을 할애해서 다루고 있기도 하구요. 

경석님// 초창기 지어진 아파트에 입주하는 사람들의 면면만 보아도 아파트가 '중산층 이상'을 입주자로 설정했음을 알 수 있게 됩니다. 가장 작은 평수의 아파트라 해도 공무원이거나 대기업 근무하는 샐러리맨이 대부분를 차지하고 있었으니까요. 지금은 그렇지도 않습니다마는.. 
어떻게 보면 예전보다 가지기는 어려워졌는데 '아파트 한 채 마련하는 것'에 대한 상징적 의미가 더욱 커진 것 같아 무서울 정도가 된 것 같습니다. 누구나 다 눈에 불을 켜고 쫓는 목표가 되었으니 말예요. 

태형님// 제가 후기를 쓰면서 말하고 싶었던 것이 서울같이 인구밀도가 높은 도시라 하더라도 아파트만이 유일한 대안이었을까. 에 대한 문제였는데 글이 애매해서 그런지 잘 전달이 안 되었나봅니다. 이런. 

준연님// 준연님 말씀대로 그 책하고도 연관되는 점이 있는 것 같네요. 읽은지 오래되어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저도 두 책을 같이 읽어보면 더욱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비슷한 주제를 다루는 만큼 서로 보완될 수 있는 부분이 있겠죠. 
저는 대다수 주상 복합 아파트에서 나타나는 '구별 짓기' 현상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어떻게든 남들과 다른 점을 나타내려 하는.. 그런 현상이 주상 복합에서 먼저 시작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요즘 아파트는 다 그런 추세를 따라가는 것 같은데(광고만 보아도 그렇죠), 다 똑같아 보이는 아파트에서 어떻게든 차이를 나타내려고 하니 그 노력이 참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정훈님// 사람들은 아파트에서의 삶을 도시적이고 인간미가 없다, 고 이야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매주(혹은 5일이나 3일 간격) 열리는 장터라던가 반상회 등을 통해 관계를 형성하고 무리짓기를 시도한다, 고 저자는 이야기합니다. 
한국인들이 정말로 무리짓기를 좋아하고 외로움을 많이 타는가, 에 대한 옳고 그름은 일단 차치하고, 이러한 특성을 전제한다면 그러한 특성 '때문에' 아파트가 성공했다기 보다는 어떤 거주양식을 택했더라도 무리짓고 관계를 형성하는 한국적 특성이 나타났을 것, 이라고 보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싶네요. 2008-05-06
12:35:59
  

 

상병 이태형 
  하지만 과연 그렇게 많은 아파트가 지어져야 했을까? 땅이 좁고 인구가 많은 나라이기에 다른 대안은 존재할 수 없었을까? 저자는 섣불리 주관적 판단을 하려 하지 않는다. 단지 자료와 함께 의문을 제기할 뿐이다. 

이 부분에서 충분히 성진님의 의도는 짐작(감히 이해라고는 말 못함)할 수 있었어요. 
근데 뭐랄까, 그때 당시에서는 그게 최선의 방책이 아니었을까 싶은 과거에 대한 옹호랄까?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그들의 입장에서..? 
그런 걸 말씀드리고 싶었는데 저야말로 글이 애매해서..(울먹) 
왜 있잖아요. 그런거. 하하하하.(도저히 글로 설명이 안됨) 2008-05-06
15:51: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