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5월베스트선정-내글내생각] 31  
상병 홍성기  [Homepage]  2008-05-14 08:34:52, 조회: 960, 추천:14 

 시멘트 바닥에도 가을은 불었다. 콘크리트 담장을 끼고 도는 길음이는 발을 내딛을 때마다 메말라갔다. 주민등록증을 내고 교도소 정문을 통과했다. 친구밖에 없다 말하는 길음이에게 나는 큰 한숨을 내쉬어 보였다. 익숙하게 면회 신청서를 펼쳤다. 길음이는 주저앉아 머리를 싸맸다. 주민등록번호는 뭐야, 주소는 뭐야 묻다가 관계 란에서 멈칫 했다. 길음아, 뭐라 그래. 엄마 친구? 그제야 길음이는 주섬주섬 일어섰다. 피면회자와의 관계, 엄마. 잘도 쓴다. 글도 모르는 년이.

 형오를 기다리는 동안 길음이에게 자판기 율무차를 뽑아 건넸다. 길음이는 마시는 둥 마는 둥 내려놓았다. 낙엽이 칼 가는 소리를 내며 시멘트 바닥을 쓸었다. 길음이는 또 머리를 싸맸다. 네 팔자도 참, 하니 길음이는 이제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고, 형, 오. 이 번 면회실, 하고 방송이 나왔다. 먼지가 매캐한 복도를 지나 썩어가는 문을 벗기고 면회실로 들어섰다. 한 꺼풀 속으로 들어섰을 뿐인데 싸늘한 쇠막대기가 속살을 후비는 듯 소름이 일었다. 잠시 뒤, 첩첩한 쇠문을 열고 2412번 형오가 나왔다. 깔깔한 아이보리색 죄수복을 보자 기가 막혔다. 길어본 지 오래된 형오의 머리카락은 더 짧아져 있었다.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던 길음이었지만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될까. 형오를 보자마자 무너지며 악다구니를 퍼붓는 길음이를 나는 겨우 겨우 진정시켰다.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형오와 마주했다. 아주머니, 힘든 걸음 하셨네요. 쇠 끓는 형오의 목소리가 유리벽에 뚫린 구멍 세 개를 비집고 나왔다. 나야 힘들어도 잠깐이지, 내 목소리가 기어들어간다. 너희 엄마는 널 또 어떻게 기다린다니. 형오의 눈알이 까라진다. 교도관이 한 눈 파는 사이 몰래 구멍 사이로 담배 한 개비를 넣어줬다. 형오가 냉큼 담배를 주워들고 러닝 속에 숨겼다. 길음이가 주억거렸다. 네가 어미를 생각하면 이럴 수가 없다. 너 나온 지 얼마나 됐다고. 이제 사람 되겠다고. 안 믿었지만 또 믿고 있었다. 나는 이제 죽으련다. 이제 그냥 콱 죽으련다. 그러자 형오가 말했다. 어쩌겠어, 또 이렇게 돼 버린 걸. 담담한 목소리였다. 내가 타이르듯 말했다. 형오야, 엄마한테 미안하다고 그래. 하지만 형오의 눈빛은 오히려 더 또렷해졌다. 모르겠어요. 나도 이제 진짜 모르겠어요. 아주머니, 제가 사탄이라고 생각하세요?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글쎄, 그런 것까진 모르겠다. 내가 불교기도 하구, 하고 얼버무리자 길음이가 눈알을 부라렸다. 그래, 네 안에 사탄이 산다. 시도 때도 없이 사탄이 살아. 내가 기도가 부족한 탓이지, 내가 죽어야 된다. 그래야 노여움이 풀리고 다 잘 살지. 내가 죽어야지. 면회실에 다시금 오싹한 기운이 돌았다. 형오를 볼 수 있는 시간은 고작해야 오 분이었다. 나는 길음이를 가로막았다. 형오야, 네가 어쩌다가 그런 일을 했는지는 모르겠다만 일단은 내가 아가씨를 만나 볼 참이다. 변호사는 차차 생각하자, 응? 형오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내가 말을 이었다. 환절기라서 점점 쌀쌀해질 거야. 고될 텐데, 네 몸은 네가 알아서 챙겨야 돼. 네 엄마는 내가 봐 줄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아무쪼록 넌 네 몸 잘 챙겨야 된다. 아프면 너만 서러운 거야, 알겠지. 형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됐다.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길음이는 한숨만 푹푹 쉬어댔다. 탁탁, 교도관이 서류 뭉치를 책상에 두드려 박아 가지런히 정리했다. 끝내라는 소린지 형오가 먼저 알고 일어섰다. 얼결에 나도 따라 일어섰다. 몸 건강해야 된다, 하고 내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형오는 대답대신 길음이를 바라봤다. 길음이는 신음하고 있었다. 형오가 다시 나를 보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아주머니, 아주머니도 제가 사탄이라고 생각하시죠? 나는 그만 말문이 턱 막혔다. 형오야. 그건 말이지, 내가 주저하자 형오가 말을 이었다. 아주머니, 제 안에 한 번도 사탄이 들어왔던 적은 없어요. 그런 것이 적어도 제 몸 속에는 없습니다. 형오의 얼굴에 설핏 웃음이 스쳤다. 그냥 제가 사탄이에요, 아주머니. 제가, 고형오가 사탄인 겁니다. 홀가분한 목소리였다. 길음이는 그대로 혼절했다. 엄마, 내가 사탄이야. 엄마, 엄마, 형오가 울부짖었다. 교도관이 사람을 불렀다. 형오는 그대로 꺼들려 철문 속으로 사그라졌다. 나는 멀어지는 형오의 등에서 성수 속을 유영하는 살진 사탄의 얼굴을 보았다. 후에 형오의 편지로 알게 되었지만, 형오는, 차라리, 사탄임에, 끝끝내, 살아남을 수 있었다.

 길음이는 글을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다. 내가 지난 겨우내 타박해서 배운 게 고작해야 제 집 주소와 이름자 정도 끼적일 줄 알았다. 그럼에도 신기한 것은, 길음이가 기도나 성경을 읊을 때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딸마저도 어려워하는 단어를 곧잘 사용해댔다는 것이다. 길음이는 그것을 그저 외운다고 했다. 그 두꺼운 성경을, 그 어려운 교리를 길음이는 달달 외웠다. 집 앞 간판도, 제 서방 자가용 번호도 읽을 줄 모르면서. 그런 걸 보면 글 배울 머리가 없진 않았다. 하지만 바보도 석 달이면 꿴다는 한글을 길음이는 평생 동안 익히지 못했다. 그래서 길음이는 이따금씩 편지를 받으면 나에게 가져와 읽어달라고 부탁하곤 했다.

 면회를 다녀오고 일주일 정도 지났을 때, 형오의 편지를 받았다. 수신자가 나로 되어 있어 일단 겉봉을 뜯었다.

 아주머니, 저 형오입니다. 몸은 건강하시죠? ..(중략)..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 은영이에게 좀 부탁드립니다.
변호사는 됐습니다. 죄를 받게 되면 받고, 옥을 살게 되면 살겠습니다. ..(후략)

 은영이는 형오가 욕보인 아가씨의 이름이었다. 여덟 장 분량의 편지지엔 빼꼭히 형오의 지난 생이 들어차 있었다. 마치 남의 이야기처럼, 덤덤하고 메마른 문장이었다.

 1984년. TV에서 왁자한 소란이 쏟아졌지만 누구 하나 웃는 사람이 없었다. 형오는 말라붙어 있었다. K 방송국의 가족오락관이 처음으로 전파를 타던 날. 그 좁은 방 누런 장판에는 찝찔한 밥국물이 피와 섞여 질퍽거렸고, 형오는 연탄집개로 죽도록 맞았다. 형오 나이 일곱 살 때였다. 소주에 신 김치를 말아먹던 형오의 아비, 고길수는 길음이가 교회를 나간 사이 눈알이 돌아가 미친 년, 미친 년, 울부짖으며 형오를 두들겼다. 고길수는 형오가 피를 토하며 고꾸라지자 집을 나가서는 그길로 타고 가던 오토바이와 함께 다리에서 떨어져 죽었다. 길음이는 죽어가는 형오를 발견하고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고길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한 번 기도를 올렸다.

 뇌가 끓고 살이 뜯기는 고통이 지진처럼 지나갔다. 형오가 눈을 떴을 때, 곁에는 목사 안광희와 길음이의 기도소리가 덕지덕지 내려앉고 있었다. 형오는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는 그것이 끝없는 서러움이었노라고 회고했다.

 거지처럼 부랑하며 살았던 길음이는 열두 살 때 안광희의 눈에 띄어 신복교회로 들어가 살았다. 나도 목사 안광희를 본 적이 있다. 육순의 나이에도 허여멀건 얼굴에 툭 불거진 눈두덩이 퍽 중후하고, 하얗게 센 머리칼은 가르마가 정갈해 고운 명주처럼 보이는 노신사였다. 길음이는 신복교회에서 식모처럼 살다 안광희의 중매로 교회 남새밭을 돌보던 비렁뱅이 고길수와 결혼했다. 고아였던 길음이에게 신복교회, 안광희는 어머니였고, 아버지였고, 학교였고, 집이었다. 길음이는 아비 없는 자식이 된 형오를 안광희에게 부쳤다. 길음이의 말에 따르면, 이 모든 건 하나님이 내린 기나긴 시험이었다. 형오는, 그래서, 몇 번이고 생을 시험받았다.

 길음이가 행상을 도는 사이, 형오는 학교도 가지 않고 에덴에서 사과나무를 돌봤다. 에덴은 안광희가 소유한 과수원의 이름이었다. 형오는 하루 다섯 시간 자고 꼬박 과수원 산에서 뒹굴었다. 그곳엔 불문율이 있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과실을 탐하지 말 것. 신도들이 이따금씩 사과를 으지적대며 베어 물 때도 형오는 잘도 참았다가 부엌에 쪼그려 앉아 구정물 같은 시래깃국에 밥을 비벼 먹었다. 그럼에도 형오는 행상을 풀고 돌아온 길음이에게 배를 통통 쳐 보이며 배가 불러, 배가 불러 하며 춤을 추었다. 형오 나이 아홉 살 때였다.

 음식이란 실로 사탄이 놀리기 쉬운 것이라, 창자를 비운 만큼 천국을 구경할 수 있습니다, 안광희가 말했다. 그래서 신복교회에는 한 달에 한 번 금식일이 생겼다. 금식일에는 모든 신복교회 신도가 하루 종일 빈속에 기도만 외었다. 하지만 형오만은 예외여서 그날도 에덴에서 사과 봉지를 씌웠다. 사탄이 씐 벌레와 새가 과실을 탐하는 까닭이었다. 만약 형오에게도 사탄이 씌었다면, 그때였을 것이다. 막 흙바닥에 떨어져 짓무른 사과를 발견하고선 허겁지겁 베어 물었을 때. 공교롭게도 그때 안광희와 교인들이 멀리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고, 형오는 선악과를 베어 문 원죄로 사탄이 되었다. 이럴 줄 알았지, 사탄의 자식. 안광희는 구둣발로 사정없이 형오의 작은 머리통을 짓이겼다. 그리고는 형오의 머리채를 잡아챘다. 잘못했습니다, 아버지, 잘못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형오가 울부짖었다. 하지만 안광희는 형오를 쥐어흔들며 산 중턱까지 올라갔다. 아버지, 아버지, 살려 주세요, 아버지. 육년 전 여름, 골방을 적시던 밥국물이 형오의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다. 생을 시험받는 느낌, 그런 것. 안광희는 우악한 나무에 형오를 노끈으로 동여맸다. 으헝, 으허허헝. 형오는 안중에도 없이, 안광희는 산을 내려갔다.

 형오는 그 산에서의 하룻밤에 대해 말을 아꼈다. 온갖 산짐승과 날벌레들이 날름대며 살을 후벼 팠을까, 죽은 제 아비가 연탄집게를 들고 찾아왔을까. 아니면, 사탄과의 밀담을 나눴을까. 해가 뜨기 전에 형오는 가까스로 노끈을 끊고 산을 내려왔다. 그리고 숨어들어간 신복교회에서, 신의 전당에서, 엄마와의 골방에서, 형오는 보았다. 문틈 사이의 길음이는 안광희와 신음하며 살을 섞고 있었다. 후에, 안광희는 돌아온 형오를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이제 네게 사탄은 없다며 안광희는 다정하게 형오를 보듬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사람이라, 안광희의 말에 형오가 웃었다. 길음이도 웃었다. 형오는 오래지 않아 신복교회를 나왔다. 형오 나이 열세 살 때였다.

 형오는 그 시기를 미쳤다고 표현했다. 교회를 나온 형오는 애꿎은 차 백미러를 부러뜨리고, 차바퀴에 구멍을 뚫고, 남의 가게 쇼윈도를 깨고, 물건을 훔치고, 소화기를 틀고, 사람을 때리고, 맞고, 무전취식하고, 쓰레기를 뒤졌다. 경찰서를 들락날락하던 형오는 이내 안광희를 위시한 교회 청년들에 의해 다시 신복교회로 끌려갔다. 그리고, 죽도록 맞은 뒤 다시 에덴에서 사과 봉지를 씌웠다.

 안광희는 점점 대담해져 한날은 아예 형오를 골방 밖으로 쫓아내고 길음이를 범했다. 안광희는 아내가 있었다. 어릴 적 소아마비를 앓아 수족이 불편한 그녀는 신앙심 깊고 수더분한 여자였다. 형오는 당장이라도 그녀에게 달려가 같이 안광희를 방에서 내쫓고 침을 뱉거나 욕지거리를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형오는 이미 그래선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형오가 결심하고 방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고 나온 안광희와 형오의 눈이 교차했다. 방안에서 부대끼던 농밀한 냄새가 안광희의 등을 타고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목사님, 사모님이 부르세요. 형오가 말했다. 안광희는 뭐, 하고 되물었다. 급한 일이래요, 어서 오시래요. 안광희는 머무적거리다 옷을 고쳐 입고 골방을 나섰다. 형오가 길음이 앞에 뛰어가 무릎을 꿇었다. 엄마, 엄마야. 우리 나가자. 지금 가자. 이제 나 못 살겠다, 엄마. 못 참겠다. 그러자 길음이는 이제 살만해졌다. 네가 못 참을 게 뭐가 있니, 하며 고개를 반대로 꺾었다. 형오는 다급해졌다. 엄마, 이제 나 죽을지도 몰라. 나 다시 안 올지도 몰라. 그 때, 형오는 길음이에게 죽음과도 같은 말을 들었다. 그래, 그것 또한 하나님의 뜻일 지도 모르지.

 그날 밤, 형오는 다시 사탄이 되었다. 안광희는 청년부 신도들을 인솔하여 사탄을 강가로 끌고 갔다. 그리고는 쌀 포대에 형오를 구겨 넣고 주둥이를 졸랐다. 이 미친 섀끼들아, ㅁI친놈들아 소리쳐도 ㅁI친놈들은 말이 없었다. 강물은 쌀 포대를 순순히 품고서 누구를 위해서랄 것도 없이 그저 그렇게 흘러갔다. 하류까지 떠밀려간 쌀 포대는 낚시를 하던 한 남자에게 가까스로 발견되었다. 형오는 사탄처럼 살아남았다. 어둔 밤, 하늘에 달빛이 자상처럼 박힌 밤이었다.

 형오는 길음이를 등지고 전국을 들개처럼 누볐다. 한번은 누나 이사벨이 살고 있는 친가를 더듬어 찾은 적이 있었다. 형오는 없는 집 형편에 조모에게 벌건 고추장 밥을 정신없이 얻어먹고 길음이 욕까지 흠씬 먹었다. 개 같은 년, 미친 년, 지 섀끼 하나 간수 못하는 년, 더러운 년! 형오는 도망치듯 빠져나와 낯선 곳만 골라 낯선 자가 되어 살았다. 그리고. 그리고 스물네 살. 가슴에 칼을 품고 살던 스물네 살의 여름.

 2001년. 그해 여름은 어찌나 무덥고 지루했던지. 돼지기름 끓는 냄새가, 도랑물 썩는 냄새가, 비지땀 노린내가 아지랑이처럼 지천에 피었다. 형오는 주정뱅이를 때려눕히거나 아녀자를 협박해서 남의 돈을 만지고, 남의 오토바이를 훔치고, 식당에서 음식을 시켜먹고 달아나고, 아무데나 똥을 싸지르며 살았다. 잊을 수 없는 그해 6월 23일, 길음이의 생일에, 형오는 홀로 재첩국을 비우고 두릅에 초장을 발라 소주를 마셨다. 얼근해진 탓인지 형오는 길음이를 떠올렸다. 형오가 신복교회를 떠나 산 지 어느덧 십년, 형오는 잔 가득 제 어미의 나른한 살 냄새를 따라 마셨다. 무심한 TV에서는 가족오락관이 방송되고 있었다. 왜 하필 그때였는지. 형오는 숟가락을 집어던지고 오토바이를 탔다. 마치 생을 내걸듯 정신없이 갓길을 달리던 형오는 때마침 벌어진 택시문짝을 날리고 나서야 멈췄다. 광대뼈가 억셌던 택시기사는 널브러진 형오를 일으켜 따귀를 쳤다. 야, 이 또라이 같은 섀끼야. 이거 순 미친 섀끼 아냐. 이거, 순, 미친, 섀끼, 미친, 년! 미친 년! 미친, 미친! 아아, 아버지, 살려주세요, 아버지.... 점점 택시기사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형오는 그날 품고 있던 칼로 사람을 죽였다.

 형오는 살인으로 7년을 살았다. 연락이 끊겼던 길음이는 어떻게 알았는지 형오를 찾아가 옥중수발을 들었다. 그래서인지 형오는 감옥에서 7년 동안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살았고, 출소하기 두어 달 전부터는 면회를 간 길음이를 대신해 기도까지 올릴 정도가 되었다. 형오가 출소하던 날, 교도소 앞에는 신복교회 신도들이 운집했다. 그들은 두부처럼 성경을 들고 있었다. 

 그 즈음 길음이는 안광희의 중매로 동네에서 도장을 파는 오상근과 재혼했다. 형오는 출소하자마자 길음이의 신혼집 이사를 도왔다. 나 역시 그 자리에 있었는데, 오상근이 새 집 열쇠를 잃어버려 발을 동동 구르자 형오가 익숙한 솜씨로 담을 넘어 문을 열어주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 우리 아들 기술 있어서 좋네, 농담 같은 길음이의 말이 전혀 우습지 않았다. 이사를 마치자 형오는 누나를 보고 싶다며 집을 나섰다. 우리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형오에게 현금을 두둑하게 챙겨줬다. 그 때 알아차렸어야 했건만. 형오에게 필요했던 건 돈이 아니었다. 형오는 집을 나선지 나흘 만에 다시 감옥으로 들어갔다.

 형오는 시내를 하릴없이 쏘다니며 사람 구경을 하다 포장마차에서 알싸한 양념순대 한 접시를 비우고, 운동화를 사 신었다. 이사벨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형오는 혼자서 당구장을 기웃거리다가, 게임방에 들어가 내내 인터넷 첫 화면만 켰다 끄다가 나왔다. 형오가 살았던 곳은 하나도 빠짐없이 사라져 있었다. 낯선 풍경은 매 걸음마다 형오를 게워냈다. 비틀대던 형오는 극장에서 재미없는 코미디 영화 한 편을 봤다. 여전히 이사벨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형오는 공중전화 수화기를 집어던지고 이끌리듯 피자집으로 들어갔다. 어둑해질 즈음 가장 먼저 황혼 같은 조명을 밝힌 곳이었다. 형오는 거기서 심은영을 처음 만났다. 공복에 베어 문 사과 같은, 포대 속에서 바라본 초승달 같은 아가씨라고, 형오는 그녀를 그렇게 표현했다. 형오의 필체가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형오의 편지엔 사랑이란 단어가 없었다. 하지만 앳된 문장이, 쓸쓸한 공백이, 어지러운 필체가 아우성치며 사랑, 사랑, 사랑 외치고 있었다. 아마 형오는 사랑이란 단어를 쓸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것이겠지, 하고 생각했다. 형오에게 있어 사랑이란 건 고작 성경 속에만 존재하는 접속사 같은 것이었을 테니까. 

 심은영은 반짝이는 아가씨였다. 그녀는 새치름한 눈매에, 콧날이 예쁜 곡선을 그리고, 흰 살빛에 붉은 유니폼이 유난히 잘 어울리는 아가씨였다. 형오는 피자 한 판이 다 굳을 때까지 심은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심은영은 애써 형오의 시선을 밀어냈다. 보다 못한 점장이 다가가 피자를 패킹해 드릴까요, 묻고 나서야 형오는 핫, 하며 정신을 차리고 가게를 나섰다. 형오는 피자집 앞 공중전화 부스에서 하염없이 받는 이 없는 전화를 걸었다. 오후 열시쯤, 비쩍 마른 체격에 피부가 허연 남자가 피자집에 들어섰다. 심은영이 보란 듯 그의 팔짱을 끼고 나왔다. 형오의 심장이 뭉클뭉클 피를 토했다. 형오는 곧장 그들의 뒤를 밟으려다 관뒀다. 형오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때, 자신을 억누른 건 신도 아니고 길음이도 아닌, 지난 7년간의 세월이라고, 형오는 그렇게 말했다.

 형오는 음모와 벌레가 나뒹구는 더러운 여관방에서 잠을 자고 일어나 곧장 시내로 향했다. 그리고 싸구려 크림빵에 우유를 오물거리며 하루 종일 피자집 앞을 서성거리다가 퇴근하는 심은영의 뒤를 밟았다. 형오는 그저 조용한 곳에서, 심은영과 아무 말이나 나누고 싶었단다. 살아온 얘기가 복받쳤단다. 왜 하필 심은영이어야만 했을까, 그것을 지금 와서 사랑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낯선 동네 낯선 골목, 심은영의 반지하 자취방 앞에서 형오는 한참이고 서성였다. 방범창 사이로 형광등 불빛이 조각조각 갈라지고 있었다.

 다음날, 형오는 길음이에게 전화를 넣었다. 뭐하냐고? 응, 그냥, 엄마. 노느라고, 헤헤. 아들을 놓친 지 오래 된 엄마는 수화기 저편의 달뜬 목소리를 눈치 채지 못했다. 무심한 길음이는 다치지만 말아라, 하나님이 너를 지켜주신다, 하고선 전화를 끊었다. 가로등이 불을 밝힐 때 즈음 형오는 낡은 골프가방을 메고 길을 나섰다. 출소한 지 사흘째 되는 밤이었다.

 새벽 네 시. 심은영의 자취방 앞에서 형오는 담배 한 갑을 꼬박 태웠다. 심은영이 방으로 들어간 지 다섯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어둔 방 안에서 쌕쌕, 가느다란 숨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착각이겠지. 형오는 마지막 담배 한 개비를 발로 으깬 뒤, 어둔 그늘을 끼고 돌아 미리 봐 둔 창문 곁에 섰다. 골프가방을 열자 드라이버와 절단기가 대가리를 내밀었다. 그 섬뜩한 쇠 냄새란! 형오는 익숙한 솜씨로 방범창을 까고 창틀을 뜯었다. 교도소에서 수백 번도 더 해 본 공구질이었다. 후끈한 냄새가 창문을 타고 올라왔다. 그 애의 냄새일 거야. 형오가 주저 없이 창문으로 발을 들였다. 어둠 속에서 눈과 눈이 마주쳤다. 심은영이었다. 형오는 도망가는 심은영의 입을 틀어막고 눈빛으로 천 마디 말을 내뱉었다. 나야, 내가 이렇게 네 가까이 있다, 형오의 심장이 꿈틀거렸다. 추워, 은영아, 어둠이 뒤틀리며 눈 하나가 더 나타났다. 웬 여자 목소리였다. 형오의 숨이 가빠졌다. 이 애 혼자 사는 집이 아니었던가. 막 잠에서 깨어난 여자는 말없이 눈알만 커졌다. 형오는 어찌할 바를 몰라 두 여자를 번갈아 살피다 품고 있던 칼을 꺼내들었다. 조용히 해, 하며 형오는 칼끝을 흔들었다. 그토록 얻고 싶었던 그녀와 나만의 시간, 이게 아닌데. 형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알싸한 바람이 방안을 훑고 지나갔다. 신이 있다면, 왜 나를. 형오는 심은영의 브래지어를 벗겼다. 갓 깐 귤껍질 같은 냄새가 났다. 창백한 가슴에 달빛이 내려와 산산이 부서졌다. 형오는 심은영을 강간했다.

 아가씨, 어쨌든 이렇게 되었으니 나와 서로 좋아하면 안 되겠습니까. 나와, 이 고형오와 같이 살면 안 되겠습니까, 저는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형오는 경찰이 올 때까지 심은영을 떠나지 않았다. 형오는 무릎을 꿇고 이마를 장판에 찧고 손을 비비고 눈물을 흘렸다. 방안에는 운동화 흙발자국과 피와 정액으로 얼룩진 시트와 영혼을 도려낸 식칼과 몸뚱이만 남은 심은영이 선명하게 사탄의 궤적을 그리고 있었다. 그만요, 제발, 제발 그만요. 심은영이 애원했다. 누구에게 그러시는 거에요, 왜 저한테 자꾸 그래요, 왜 그래요...

 ...저를 불쌍하다 생각지 마세요. 그러라고 쓴 편지는 아닙니다. 그냥, 전해 주세요. 이제와서 생각해 보면, 저는 은영이에게 제 삶을 이야기하기 위해 이제까지 살아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형오의 편지는 거기까지였다. 나는 편지를 떨어뜨리고 한참이고 울었다.

 길음이에게 전화를 넣었다. 응, 그래, 숙희야. 길음이는 목이 쉬어 있었다. 이런저런 얘기 제하고 물었다. 길음아, 아직도 하나님을 믿니. 네 아들이 저 꼴인데. 길음이가 정색하고 대답했다. 무슨 그런 걸 묻니. 이 모든 건 하나님의 시험이야. 형오가 운이 나빴을 뿐이야. 사탄 같은 것들 때문에. 그 더러운 계집애 때문에. 나는 벌컥 소리쳤다. 그럼 시험은 대체, 언제까지, 언제까지 계속되는 거니! 수화기 저편의 목소리가 잠시 멎었다. 내 안에서 모든 것이 엉클어진 기분이 들었다. 이윽고 길음이가 대답했다. 나도 몰라. 그냥, 그냥 살아야지. 그걸 알면 시험이겠니.

 반년 만에 서울에서 공부하는 아들 선호가 찾아왔다. 떡국을 끓여 먹이는데 형오 이야기가 나왔다. 어, 그 형 또 들어갔어? 선호가 되물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 이번엔 힘들 것 같다. 일이 어렵게 됐어. 선호는 혀를 찼다. 내가 물었다. 일을 당한 아가씨는 더 이상 한국에서 못살겠다면서 합의를 할 거면 자기를 유학 보내 달래. 남자친구랑 같이 미국 가서 공부하겠다고. 그런데 요즘 애들은 다 그러니? 보통 애인이 그런 일 당하면 정 떨어지지 않니. 남자친구는 배알도 없는지... 선호는 떡국을 뜨다 말고 웃었다. 그럼, 엄마. 진짜 사랑하면 그런 건 아무 문제도 아니지. 나는 헛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런가, 요즘 애들 참 별나구나. 선호가 말을 이었다. 그런 일을 당한다고 바로 떠날 애인이면 차라리 없는 게 낫지. 내 입속에서 말이 맴돌았다. 그래, 그런 것도 어찌 보면 시험이겠네...

 상을 물리고 어렵사리 편지 이야기를 꺼냈다. 선호야, 형오가 이걸 그 아가씨에게 전해달라는데, 어찌해야 될지 모르겠다. 이런 걸 지금 와서 보여줘 봤자... 선호는 편지를 찬찬히 훑어보더니 이거, 근데 상당히 충격적인데, 하며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안 보여줄 수도 없고, 괜히 우스운 일 하지 싶다, 하고 내가 한탄하자 선호가 글쎄 자기가 그 편지를 소설로 적어보겠다며 나서는 게 아닌가. 아니, 이걸 왜 소설로 써. 네 공부하는 것도 바쁜데. 내가 말리자 선호가 말했다. 잘은 몰라도 지금의 형오 형에게 있어서 사탄은 바로 지나간 생이야. 아마 본인은 모르겠지만 고해성사 하듯이 그 아가씨에게 매달렸겠지. 선호가 다시금 찬찬히 편지를 훑었다. 보다 많은 사람이 형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 신은 시험만 내렸고, 세상은 형을 감옥에 가두기만 했잖아. 형에게 진짜 고해성사를 할 수 있게 해 주고 싶어. 물론, 죄를 사할 순 없겠지만. 선호는 확신에 차 있었다. 얼마 뒤, 형오는 선호가 자기 이야기를 쓰는 것을 수락했다.

 지금 창밖에선 개 짖는 소리가 들리고, 청국장 끓이는 냄새가 구수하다. 조그만 시골마을엔 한없이 낙엽이 번지고, 거름이 구르고, 왕겨가 날린다. 그리고 내 아들은 형오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

올해 31세 형오는, 특수강간으로 8년형을 받고 감옥에 있다.

* 책마을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8-06-12 10:47)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8-12-08
10:31:02 

 

병장 엄기정 
  잘 읽었습니다. 누가 사탄이고 누가 천사인지 그 애매한 구분의 갈림길을 우회적으로 잘 표현하신것 같네요. 이 글을 읽는 내내 생각하고 있었던 말을 마지막에 선호가 대신 해주네요. (땀) 2008-05-14
08:55:40
  

 

상병 조현식 
  성기... 글 잘썼네! 2008-05-14
09:15:28
  

 

병장 문 혁 
  정말 잘 읽어지는 글이네요. 왠지 대하소설 속에 한 인물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드네요.(웃음) 2008-05-14
09:21:12
  

 

병장 장재혁 
  잘 읽었습니다.. 
뭐랄까..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표현의 마이너스적인 형태를 
잘 보여준거 같네요.. 2008-05-14
12:41:03
  

 

병장 이승익 
  와. 이런 글은 어떻게 쓸 수 있는 건지. 글재주 없는 저로서는 부럽기만 합니다. 2008-05-14
12:46:24
  

 

상병 박진언 
  좋은 글, 잘 봤습니다. 2008-05-14
14:03:08
  

 

상병 문수민 
  제목 31의 뜻은?? 2008-05-14
14:24:35
  

 

상병 홍성기 
  고맙습니다. 31은 올해 형오의 나이를 뜻합니다. 2008-05-14
19:25:51
  

 

상병 정상행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꽤 긴글인데 전혀 길다고 안느껴지는군요. 2008-05-14
20:01:00
  

 

병장 이현승 
  아주 좋습니다. 필력이 있으시네요! 2008-05-20
10:39:03
  

 

상병 이태형 
  감탄, 감탄. 
저 이거 스크랩해도 되요?(웃음) 2008-06-03
11:32:56
  

 

병장 임정훈 
  와. 2008-06-03
15:43:08
  

 

상병 이동석 
  단번에 읽히는 호흡이 참 좋습니다. 2008-06-05
19:26:55
 

 

병장 정원택 
  오랜만에 재미있게 읽은 글 입니다 . 2008-07-25
15:21:31
  

 

병장 허기민 
  다시 읽어봐도 역시 멋진 글이네요. 2008-08-07
13:51:01
  

 

병장 노요셉 
  엄청나다는 말밖에... 2008-08-28
15:03:54
  

 

상병 김무준 
  잘 읽었습니다. 2008-10-07
14:02: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