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5월베스트선정-내글내생각] 자화상, 우리의 자화상
병장 박준연 2008-05-09 14:07:43, 조회: 453, 추천:5
특목고 진학을 준비중인 내 동생은 중학교 3학년, 곧 고등학생이 된다. 집에서는 올해부터, 아예 '명문고생아! 명문고생아!'라고 부르자는 농담 같은 말이 오가기도 했다. 계속 긴장을 늦추지 말라는 뜻이다. 그래도 나는 그렇게 부담을 팍팍 주지 말라고 말리지 않았다. 그냥 나만은 그렇게 부르지 말아야겠다고, 잔혹한 심리극의 공범이 되지 말아야겠다고 약간은 비겁하게 생각했을 뿐이다.
나의 비겁함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밖에서는 짐짓 목청을 높이며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 떠들고 다닌다. 나는 누구이고, 내가 살아야 할 이 세상은 어떤 곳이며, 나와 함께 이 세상을 살아갈 다른 사람들은 어떤 존재인가를 아이들은 배워야 하고, 또 학교는 그것을 가르쳐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작 집에 발을 들여놓기만 하면, 나는 다른 사람이 된다. 그저 특목고 진학 준비생을 동생으로 둔, 이 땅의 수많은 사람 중 한 사람이 될 뿐이다. 동생이 좋은 고등학교와 좋은 대학에 진학해서 조금이라도 더 윤택한 삶의 자리를 갖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다 덜컥 '황우석 사건'같은 큼지막한 사건을 생각하면, 화들짝 놀라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우리 사회에서 좋은 대학을 나오고, 좋은 직장을 얻어 잘산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되묻게 된다. 아마도 나뿐만 아니라 누구든 그리 떳떳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권력을 많이 틀어쥔 사람일수록 그 속내에는 합법을 위장한 협잡과 중상, 위선과 허위가 깊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잘산다는 것은 알랑한 대학 졸업장을 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떤 마음 씀씀이로 세상을 살아가는가에 달려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그러나 그것 또한 생각일 뿐이다. 선뜻 동생에게 "공부하기 싫으면 하지 마라. 지금부터라도 네가 좋아하는 일을 해라"라고 쉽게 말하지는 못한다. 물론 더러 그렇게 말할 때도 있다. 기대에 못미치는 성적표를 앞에 두고 공갈과 협박을 일삼을 때다. 이때를 제외하고 동생이 스스로 자신의 삶을 생각하고 결정하도록 기다려준 적이 없다. 다만 교활하게도,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라도 좋은 대학을 가야 한다고 윽박지를 뿐이다. 혼란스럽다. 무엇이 진정으로 이들의 앞길을 열어주는 것일까? 이 땅에 사는 학생들도 힘들지만, 가족들 또한 그리 편치만은 않은 것이다.
그래도 지난번에는 동생과 얘기를 나누기는 했다. 이러저러한 일상의 이야기 끝에 불쑥 물었다. 동생에게는 난데없는 질문이었을 것이다.
"'자화상'하면 무엇이 떠오르냐?"
"딱 떠오르는 것 말이야?"
"그래, 말해봐"
"빈센트 반 고흐"
"그런 단편적인 것 말고, 주렁주렁 매달려 떠오르는 생각은 없어?"
동생은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대답을 기다리며 동생을 빤히 바라보았다. 못내 기다림이 불편해진 동생은 난데없는 질문이 귀찮고 부담스러운지 대답부터 하고 본다.
"아무 생각 안나"
나는 마뜩지 않은 기색을 감추려고 했으나, 나와 15년 가량을 같이 지낸 동생이 그것을 모를 리가 없다. 이미 눈길을 거둔 형에게 무안하기도 했으리라. 동생은 일어서면서 한마디를 툭 던졌다.
"자신 없어. 10년 후를 생각하면"
이것저것 많이 건너뛴 짧은 답이었지만, 적어도 나는 알았다. 동생은 알 수 없는 미래가 무엇보다 두려운 것이다. 자연스럽게 미래의 모습은 현재 자신의 모습과 오버랩 되었을 터이고, 그 불확실성 때문에 현재의 모습조차 그려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안타까운 마음이 왈칵 들었지만, 어떤 마음도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저 질문 자체가 별것 아니라는 듯이 딴청을 부렸다.
"그래? 들어가 봐라. 잘 알았다."
동생은 더 말을 건넬 듯 망설였으나, 나는 짐짓 TV로 눈을 돌렸다. 나 역시 동생의 현재의 자화상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동생의 밑그림을 그릴 뾰족한 대안이 없었으며, 한편으로 어쩔 수 없이 나의 타협적인 자화상도 선명하게 떠오를 것이 분명하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또 한번 비겁하게 동생의 힘든 마음을 모른 척 지나쳤다.
그렇다. 누구나 스스로를 돌아보는 일은 쉽지 않을 터이다. 현재란 누구에게나 만족스럽지 못하기 마련이다. 자신의 현재를 느꺼운 마음으로 받아 안을 수 있다면, 그만큼 행복한 경우도 없으리라. 그러나 평범한 우리들은 언제나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기약하며 산다. 현재의 자화상은 늘 미래에 눌려 턱없이 부족한 모습으로 일그러져 있다. 더욱이 삶이 유동적인 청소년들의 자화상은 미래와 현재 사이에 어두운 심연이 존재할 것이다. 어떤 현실적인 끈조차 손에 쥐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저 미래에 대한 희망과 거기에 못 미치는 현재의 왜소함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일그러진 자화상이라도 거듭 그려보아야 할 일이다. 그렇게 그려봄으로써 미래의 얼굴과 현재의 얼굴을 단층 없이 잇는 끈을 발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미움과 연민, 다시 미움과 그리움의 끝없는 출렁임, 모멸과 학대, 환멸과 자긍의 교차는 모든 존재들이 스스로를 응시할 때 느끼는 감정이다. 그러나 이미 철들어버린 사람들은 이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지 않는다. 상반된 두 감정을 교묘하게 얽어 밋밋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세상일에 능숙하지 못한 내 동생은 그 두가지를 잘 섞어내지 못한다. 반죽이 덜 되어 따로 놀고 있는 것이다. 몸과 마음, 생각과 행동이 제멋대로 날뛰는 것이다. 김치도 배추와 소금, 젓갈과 고춧가루가 뒤섞여 잘 발효가 되어야 제맛이 나는 법인데, 동생은 배추는 배추대로 생생하고, 소금은 소금대로 짜고, 젓갈은 젓갈대로 비릿하고, 고춧가루는 고춧가루대로 매운 채 제각기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니 맛이 있을 리가 없다. 이들 각각을 잘 섞어내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숙성할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지금 그대로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는 것이다. 울퉁불퉁한 존재, 어디로 튈지 모르는 부정형의 존재, 모순된 존재 자체를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따스하게 끌어안는 것이다. 사실 이 모순이야말로 성장하고 있기 때문에 겪는 것이다. 몸이 마구 성장하기에 마음이 미처 따르지 못하는 것이며, 정신이 마구 성장하기에 행동이 제대로 뒷받침해주지 못하는 것이다. 어쩌면 스스로 어른이라고 하는 이들이 고통스럽지 않은 것은 더이상 성장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서정주처럼 '그래, 나는 헐떡이는 개처럼 산다. 어쩔테냐?' 윤동주처럼 '그래, 나는 내가 밉기도 하지만 좋기도 하다. 그게 아름다운 추억이 되지 않겠느냐?'고 의젓하게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목하 기다리는 중이다. 동생을 밖으로 불러내, 허름한 선술집에서 함께 소주잔을 기울이게 될 그날을. 성공과 실패라는 세인들의 잣대와 상관없이 한 시절을 잘 견디어낸 것만으로 축하하며 마주 앉게 될 날을. 얼굴이 붉게 물든 동생이 불쑥 술잔을 내밀며 한마디 해주기를.
"도대체 형 같은 어른들이 한 일이 뭐가 있어?"
그러면 나는 이렇게 말해줄 것이다.
"야, 술 마실 때는 술이나 마셔."
* 책마을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8-06-12 10:47)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8-12-08
10:32:15
상병 신지훈
왜 좋은 고등학교, 대학교를 가야하는가, 저도 엄청 고민 많이 했었죠.
그때 나름대로 내린 결론은,
아직은 어느길로 가야할지 모르니 나중에 뻗어나갈 길이 많은 곳으로 가자...
그게 결국 대학교 진학을 택하게 한 이유랄까요...(땀땀) 2008-05-09
15:36:55
병장 정찬용
"도대체 형 같은 어른들이 한 일이 뭐가 있어?"
..... 없어요. 미안합니다. 어렸을 때는, 어른이란 힘으로 세상을 들어올린 헤라클레스 같은 사람들이라고, 나도 역시 그렇게 될수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풋, 도대체 뭘 믿고..
현실은 시궁창. 제게 남겨진 일이라고는, 우울하게 LCD판때기 쳐다보며 자위하는 일밖엔 없네요. 2008-05-09
20:16:23
상병 이태형
좋네요.
많은 걸 생각케하는 글이었어요.
<가지로> 외칩니다. 2008-05-12
19:40:31
병장 이동석
음, 촌장님이랑 술한잔 하고싶게 만드는 글입니다.
경희대 다니신다는데
(출처불명의 정보)
어느쪽 캠퍼스이신지? 흐흐 2008-06-17
13:45:45
병장 박준연
동석 / 누군가의 표현을 빌려보자면 제 대학생활의 팔할은 '회기'가 키웠답니다. in 서울이면서도 전혀 서울답지 않은 그곳에서 대학생활의 꿈과 낭만을 키웠답니다. 2008-06-18
15:34:00
병장 이동석
회기 캠퍼스로군요.
반갑습니다.
상당기간 경희대 다니는 친구집에서 기생(!)했던 덕에
회기역이 낯설지 않군요. (웃음)
요즘도 휴가 나가면 참새가 방앗간 들르듯
회기역 파전골목 들렀다가 버드에서 맥주 한잔하고 물담배 피러가는게 일상입니다.
저도 서울에서 지내는 동안 늘 어지럽고 답답했는데
회기만큼은 참 정겹던데요. 흐흐. 2008-06-19
15:09:09
병장 이태형
항상 지하철로 오가면서 한 번도 정차하지 않은 곳이로군요.
이번 역은 회기, 경희대학교 앞입니다.
내리실 문은... 2008-07-01
10:28:01
일병 김세현
이런 이야기 들을 때마다 형이나 누나가 없는게 너무 아쉽습니다..이야기로 보아 좋은 형님이신 것 같습니다. 동생분이 어서 자신의 기호를 파악하고 특색있게 재료를 선발해 맛있는 김치를 담그시길 바랍니다(웃음) 2008-07-08
13:5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