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5월베스트선정-내글내생각] 문학적 글쓰기와 영화적 글쓰기
병장 민경석 2008-04-29 10:53:59, 조회: 558, 추천:3
예술은 항상 그 자신의 질료와 형식을 갖습니다. 회화의 질료는 물감, 혹은 색체이며 음악의 질료는 특정한 악기가 보유하는 독특한 질을 가진 소리입니다. 사진은 우리의 세계 그 자체를 질료로 삼고, 또 우리가 사유를 하나의 예술로 볼 수 있다면, 그것의 개념은 어떤 질료들일 것입니다. 예술에서 아마도 가장 중요한 문제들 중 하나는 개별적인 예술을 근거짓는 그 질료 자체의 잠재적인 강렬함을 어떻게 눈 앞에 펼쳐내는가, 혹은 재현하는가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한 조각의 목표는 조각이 모사하는 특정한 인물이나 사물이 아니라, 조각된 돌덩이나 나무 그 자체의 힘, 또는 본질을 모사된 인물이나 사물을 매개로 재현하고 상징화하는 작업에 다름아닙니다. 세잔의 목표는 사물이 해기 뜨고 짐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보인다는 사실(현실)의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그 사물을 이용해 색체 자체의 강렬함을 캔버스라는 표면 위에 현시하는 것입니다. 이런 한에서 인상주의가 개척한 현대적 ‘형식’이란 곧 질료 자체의 강렬함을 어떻게 드러내는가의 물음에 답하는 창조적인 실험에 다름 아닙니다.
문학가는 언제나 언어로 작업합니다. 이는 그가 이미지나 소리를 다룰 때에도 마찬가지이지요. 이미지, 소리는 애초에 문학의 질료가 아닙니다. 이미지는 사진과 영화의 재료이고, 소리는 음악의 몫입니다. 그래서 플로베르가 아무리 열심히 이미지를 다룬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문학적인 것 혹은 언어적인 것이지 결코 이미지적인 것이 아닙니다. 반면 조 라이트 감독이 만든 ‘오만과 편견’은 전적으로 영화적이지요. 소설가 김애란은 타큐멘터리 영화 ‘어느날 그 길에서’에 대한 글(주간 영화잡지 씨네 21에 실렸음)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납작한 낱말 카드...(중략)...바르고 온당하지만 핼쑥해져버린 단어들...” 그 예로 ‘인권’, ‘독립’이라는 단어들을 듭니다. 그 단어들의 의미론적 무게감은 그 사용의 차원에서는 한없이 빈곤해졌고, “그 수북한 단어장 위에 내가 서있는 모습”을 보면서 빈곤해진 자신의 삶을 말합니다. “내가 아는 단어는 그 단어가 아니었다고...(중략)...많은 영화들의 가치는 그 편평해진 말들을 두텁게 하고, 그 말이 지시하는 존재의 울퉁불퉁함과 깊이를 보여주는 데 있을 거라고.” 영화가 제공하는 삶 그 자체의 이미지가 주는 구체성은 TV에서만 보고 가볍게 넘기던 동물들의 로드 킬(road kill)에 깊이를 부여합니다. 죽어가는 동물들의 표정과 눈동자. 김애란은 이런 이미지들을 말라버린 개념들이 다시 깊이를 얻는 자양분으로 적습니다. 삶은 결국 언어를 통해 무게와 풍요를 얻지요.
반면, 영화의 위치에서, 처음부터 이미지의 영역에서 시작하고 그 다음에서야 쓸 수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기서도 물론 언어로 글을 쓰지만, 대체로 (영화에 매혹된) 영화광 출신의 사람들에게는 이미지 자체의 현존이 그 언어적 번역에 앞섭니다. 영화평론가 정한석은 “...씨네마토그래피란 의미가 중지된 상태에서 인상과 형상에 대한 지각만으로 세상의 실체를 벗겨낼 수 있다고 믿는 촬영술이다...”라고 씁니다(김애란과 정한석의 글은 모두 같은 호수의 씨네21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이미지가 제공하는 감각에 집중합니다. 혹은 사유는 언어의 몫이라는 통념에서 벗어나 언어가 제공할 수 없는, 오직 이미지만이 다룰 수 있는 그러한 방식의 사유에 집중하고자 합니다. 그들이 영화에 대해 쓸 때, 구구절절 자신이 빠져든 이미지를 설명하는 이유는 언어가 영화의 이미지가 제공하는 사유의 풍요로움을 도저히 담아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화평론가들은 오히려 언어의 세밀한 표현에 민감해지게 되지요. 세진이 그 질료적 감성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회화의 새로운 형식을 발명해야 했듯이, 영화광들은 영화의 이미지가 가져다준 힘과 매혹을 언어로 번역하기 위해 글 자체를 새롭게 씁니다. 이미지를 우선에 두고 쓰기. 단락을 나누는 게 아니라 숏을 나누는 것처럼 쓰기. 퇴고하는 게 아니라 편집하듯이 쓰기.
아마도 글을 쓴다는 문제에 진정으로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이들의 방식을 염두해 두어야 할 것입니다. 철학은 개념을 그 한계에 이르기까지 시험하고 실험하는 한에서 예술이 될 수 있습니다. 새로운 개념을 창안, 발명하고 또 새로운 개념을 실험하는 행위는 우리를 아직 가보지 못한 사유의 영역으로 끌어 올립니다. 어떤 개념이 우리를 가장 먼 곳까지 데려다 줄 수 있을까요? 들뢰즈는 하나의 예술이 자신을 정의하는 그 개념적인 정의를 넘어설 때 철학적으로 된다고 썼습니다. 규정된 예술 개념에 충격을 주기.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하기. 변기가 예술관에 전시됐을 때가 그렇지요. 문학은 영화에서 언어적인 풍요로움을 수혈받으며 전진하고, 영화을 보는 사람들는 영화의 이미지가 제공하는 사유의 충격을 감당해내기 위해 언어를 계속해서 반복합니다. 문학과는 달리 영화로 시작해 쓴다는 행위는 언제나 어떤 더듬거림을 수반합니다. 영화에게서 언어는 자신의 외국어나 다름 없습니다. 하지만 언어는 이러한 더듬거림을 통해서만 새로운 활력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들뢰즈는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국어를 마치 외국어인 듯 사용해야 한다고 씁니다. 들뢰즈적인 마이너리티. 영화를 통해 우리 자신의 언어를 마이너리티로 만들 수 있을까요?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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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8-12-08
10:33:26
상병 이태형
크어 이해 못하겠다(...)
오랜만에 범접하지 못할 글을 읽고 또 다시 좌절해버린 사람입니다(울음)
규정된 예술 개념에 충격을 주기.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하기.
음, 개념적인 정의를 넘어설 때 철학적인건가! 2008-04-29
11:05:34
상병 박진언
이미지를 언어로 말할 때 '절름거리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의 사고 자체가 언어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 큽니다.
인지심리학 책을 보면 언어와 이미지에 대한 인지 개념은 다른 저장공간을 씀으로써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하지만 스티븐 핑커는 그의 책 '언어 본능'에서 우리가 언어를 쓰는 것은 단순히 우리의 뇌라는 컴퓨터에서 돌아가는 하나의 프로세스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보여 주지요.
그러한 면에서 보면 우리의 모국어를 외국어처럼 사용하려면 모국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언어' 자체에 대한 하부구조 즉 언어가 어떻게 언어로써 기능하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합니다. 2008-04-29
12:49:59
병장 장윤호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경석님이 보신 씨네21이 몇호인지 알고 싶네요. 2008-04-29
12:51:57
병장 민경석
박진언님의(혹은 스티븐 핑거의) 통찰을 받아들인다면, 뇌의 프로세스라는 것이 언어나 이미지에 대한 사고의 틀을 결정하는 일종의 하부구조라고 볼 수도 있겠군요. 흥미로운 지적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언어의 역량을 늘리고 새롭게 사유하는 일은 그 과정을 아는 지적인 행위보다는, 어떤 지배적인 언어사용 방식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실험을 계속하는 실천적 작업에 가깝습니다.
이 지배적인 언어사용 방식이란 일련의 초등교육에서부터 주입되는, 어떻게 언어를 조직하고 문장을 구성할지, 논리적으로 글을 쓰는 법 같은 제도화된 사고 방식의문제이며, 모국어라는 것은 이렇게 제도적으로 짜여진 언어 사용을 이르는 말이니까요. 우리가 생각하도록 학습된 방식이 아닌, 진정으로 사유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사유를 더듬거리게 하는 언어 외적인 무엇과 대면하는 행위를 두려워해서는 안되며, 또한 새롭게 사유하는 언어적인 방식을 실험하는 역량이 필요합니다.
장윤호님// 지금 잡지가 생활관에 있어서, 정확히 몇 호인지는 잘 모르겠군요. 비교적 최근호라는 것만 기억나네요.(웃음) 2008-04-29
14:04:43
상병 박진언
스티븐 핑커가 제시한 재미있는 통찰 중 하나는, 피진어와 크리올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민 1세대들이 영어를 배울 때는 영어와 모국어의 용법이 혼합되어 전혀 새로운 언어가 생기게 됩니다. 이걸 피진어라고 정의합니다. 보통 피진어를 쓰는 이민자들은 말투가 어눌하고 문법에 맞지 않는 듯한 문장을 만들어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민 2세대가 쓰는 언어는 1세대가 쓰는 언어와 문법 구조가 거의 같은데도 불구하고 1세대보다는 훨씬 자연스러운 문장을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이 언어는 영어나 모국어 한쪽으로만 보자면 전혀 문법에 맞지 않는 언어이지만, 보편적인 주술목구조를 훌륭하게 가지고 있는 하나의 언어를 만들어 냅니다. 이것이 크리올어입니다.
또한 수화에 대해서도 재미있는 고찰이 나옵니다. 1세대 수화자는 단지 단어의 나열을 손짓으로 표현하는 수준에 그치지만, 2세대 수화자는 (이전의 구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의 문법을 만들어 내어 하나의 언어를 만들어냅니다.
민경석님의 말씀은 표준사회과학모델의 주 논지인 '인간은 빈 서판(Blank Slate)이다' 라는 전제를 깔고 계십니다. 이 전제대로라면 1세대의 피진어와 2세대의 크리올어는 문법상으로 '똑같이' 어설퍼야 합니다. 2세대가 어떻게 피진어를 학교에서 '체계적으로' 교육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사례에서, 스티븐 핑커는 '인간은 언어 자체를 구조화하기 위한 모듈을 가지고 있고, 그 모듈에 의해 새로운 언어 체계를 만들 수 있다' 고 주장합니다.
말씀하신 새롭게 사유하는 언어적 양식은 단순히 '주입'받은 것을 거부하는 움직임만으로는 절대 '더듬거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언어를 '주입'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표현으로 아까 저의 발언을 다시 한번 적어보자면, 우리가 언어를 '더듬거리게'하는 것은 오히려 우리 자체가 그 언어발현의 의미에 대하여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언어를 거부하는 것으로는, 다시 말해 언어 외적인 의미에서 언어의 더듬거림을 찾는 것은 언어의 지평을 넓히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영토로 언어 외적인 것이 포획되는 포획장치의 움직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언어 외부에서 언어로 들어가는 움직임이 아닌, 언어에서 언어 외부로 나가는 움직임을 찾아야 합니다. 이것은 언어 자체의 하부구조를 이해해야만이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2008-04-29
14:48:12
병장 민경석
제도적인 언어 사용의 문제는 다분히 역사적인 의제입니다. 결코 빈서판의 문제가 아니지요. 저는 1800년대 중후반의 유럽으로 돌아가 볼 것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그곳에서 탄생한 사회의 자본주의화, 도시화는 대중정치의 문제를 등장시켰고, 그리고 이러한 대중정치는 결국 선동과 제도적 주입의 정치입니다. 초등교육은 그러한 제도적 언어의 학습이 이루어지는 결정적인 장소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어떤 하나의 민족이 존재한다는 가정을 깔고 있는 ‘역사’를 교육받습니다. 또 관료제적 사회가 요구하는 일정한 지식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대중으로 교육되고, 그러한 사회가 요구하는 방식으로 생각하고 사고하는 법을 익히게 됩니다. 제 문제의식은 사투리와 표준어의 문제. 서론, 본론, 결론으로 대표되는 특정한 글쓰기 방식의 문제입니다.
저는 사유의 외적 충격이 우리가 쓰고 있는 지배적인 개념들을 유효하지 않게 하는 새로운 개념들을 창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언어는 외적 충격들을 단순히 자신 안으로 포획하기만 할까요? 그럴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인터넷이라는 외적 항은 언어 안으로 들어왔을지는 몰라도, 언어가 그 안에서 전혀 충격을 받지 않았다고는 말하지 못할 것 같군요(이모티콘의 문제만 봐도 그렇고). 이민은 그 자체로 외적 충격입니다. 피진어와 크리올리어는 그 언어적 변화에 대한 하나의 결과라고 생각되는군요.
언어의 하부구조를 이해함으로써 언어 밖으로 나갈 수 있을까요? 저는 그 실천적 효력에 대해 질문하고 싶습니다. 언어의 하부구조를 이해한 사람들은 언어를 변화시키려고 할까요? 물론 저는 그 하부구조를 이해한다는 게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아마 박진언님께서 언급하시는 스티븐 핑커를 읽어봐야 하겠지요. 하지만 우연적 충격이 아니고서야, 대체 어느 누가 지배적 사유를 넘어서는 개념들과 문장들을 창안할까요. 인간의 창조력은 약합니다. 아마도 그 모듈에 의해 지배받고 있다고도 할 수 있겠군요. 우리는 완전히 언어 바깥에서 사유할 수는 없습니다. 결국 언어로 돌아올 수밖에 없을 겁니다. 마치 영화를 보고 어쩔 수 없이 글을 써야하는 평론가들처럼요. 2008-04-29
15:34:38
상병 박진언
언어의 하부구조를 이해한다는 것은 언어의 문법적 주술관계가 일정 관계를 가진다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결국 언어를 담담하는 모듈의 작동방식에 대한 의문이며, 나아가서는 인간 두뇌의 작동방식에 대한 의문이기도 합니다.
언어라는 것 자체를 좀 더 다른 방향으로 바라보시면 어떨까 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라는 것은 결국 다른 사람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일종의 수단입니다. 결국 언어의 사용은 언어 외적인것의 '사용'과 같은 맥락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사유의 외적 충격을 극복하고 환경에 적응하여 생존하는 것을 첫 번째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도구들은 그 목표를 위해 일차적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언어의 하부구조를 이해한다는 것을 언어 자체의 경직성을 증가시키는, 즉 '이 문법 이외의 문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부정의 의미가 아닌 '어떤 문법이든 그것이 인간의 머리에서 창조된 것이라면 용인할 수 있다' 라는 긍정과 유연성을 지향한다는 것으로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언어의 '더듬거림'은 언어 자체의 도구적 용도를 풍요롭게 할 수 있지만(예를 들어 김삿갓의 시) 오히려 언어 자체의 도구적 용도를 제한하는(예를 들어 암호화)용도로도 쓰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칼을 볼 때 주의해야 할 것은 칼날이 아닌 칼 손잡이를 잡고 있는 손인 것처럼요. 2008-04-29
16:17:48
병장 민경석
생물학적 측면에서 보자면, 식물의 매커니즘은 즉각적인 반응입니다. 반면 동물은 지연된 반응을 하지요. 어느 쪽이 유리한지는 복잡한 생물학/진화론적 접근이 필요하지만, 인간이라는 동물은 행동의 지연이라는 방향에서는 가장 유리한 동물입니다. 행동의 지연이 생각을 만들어 냈습니다. 사고 매커니즘이야 동물도 가지고 있을 수 있지만, 언어는 이 생각을 표현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일 수 있지요. 언어는 지시와 명령을 하기 위한 도구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도구적 언어가 지배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도구적 언어 사용을 강조하거나 그것을 위해 노력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반대의 방향으로 가기 위해서는 엄청난 에너지와 노력이 필요하지요. 이러한 사용은 다분히 정치적이고, 또 그만큼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언어가 언어 외적 사용과 동일하다는 관점은 쉽게 수용하기 힘들군요. 물론 수행문처럼 명시적으로 행동과 동일시될 수 있는 그런 언어적 형태도 있지만, 이 문제는 언어학 내부에서도 굉장히 논쟁적인 주제로 알고 있습니다.
하부 구조의 이해에 긍정적인 측면에는 동의할 수 있습니다. 아마 제가 더 알아가야 할 부분이겠지요. 나중에라도 스티븐 핑커의 책을 읽어보도록 하지요. 아마 지금 이상의 논쟁은 그 이후에 할 수 있을 것 같군요(웃음). 2008-04-29
16:38:05
병장 이동석
민경석님은 참 아스라히 사라지신 분이로군요.
아깝습니다. 한발 늦은게. 2008-07-08
07:13: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