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5월베스트선정-내글내생각] 당신의 외야수에게 건배  
상병 조현식   2008-05-19 10:07:00, 조회: 650, 추천:2 

당신의 외야수에게 건배


야구가 인기다. 

13년 만에 500만 관중을 돌파하느냐 마느냐에 스포츠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연일 구장에 꽉꽉 들어차는 사람들의 발길은 끊이질 않는다. 8,90년대 야구에 미쳤던 십대들이 이제는 아버지란 이름으로 아들의 손을 잡고 경기장을 찾고 있다. 그동안 야구에 관심이 없었던 사람들도 호기심에 야구장을 찾았다가 그 열기에 팬이 되어 돌아간다. 긍정적인 다단계 판매라고도 볼 수 있겠다. 세상 어느 운동종목과도 동떨어져서, 도대체 어떻게 이런 경기를 생각해냈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 불가사의한 종목에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도 이상하다. 야구는 내가 알기로 가장 규칙이 복잡하고 생각을 많이 해야 하는 요즘 시대와는 어울리지 않는 경기인데.

서론이 길다. 좋아하는 이야기를 할때면 언제나 이렇게 되어 곤란하다. 사실 내가 오늘 말하고 싶은 것은, 뜨거운 야구의 열기도, 야구의 역사에 대한 기나긴 사족도 아니다. 오히려 팬들의 눈이 쏠리는 투수와 타자의 숨 막히는 대결 저 뒤에서, 혹시 날아올지 모르는 하나의 공을 위해 무진 달리는 외야수들에 대해서다.

외야수라는 단어는 흔히 거포라는 이미지와 연결된다. 수비가 매우 중요한 내야에 비해 외야는 널널하고 한가로운 이미지다. 외야수들에게 필요한 덕목은 이름 그대로 외야의 야수능력이라기보다는 타석에서 한 방 크게 날려줄 수 있는 힘이다. 야구장을 찾는 사람들, TV앞에 모여 앉은 사람들도 외야수비에는 그다지 주목하지 않는다. 그들이 아주 크나큰 실수를 할 때를 제외하고.

그러나 그들이 얼마나 가혹한 환경에 처해 있는지는 직접 야구경기를 해보는 외야수만이 알고 있다.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라면 외야수의 압박감이 얼마나 큰 것인지 알게 된다. 하늘에 높이 뜬 하얀 공하나 잡는 게 뭐 그리 큰일이냐고 웃어버리는 사람도 있겠다. 그렇지만, 그래도, 그렇지 않다. 야구란 경기는 원래 성립이 될 수 없는 경기다. 140km 이상인 공은 사람의 신체반응속도로 치는 것이 불가능한데, 어쨌든 타자는 160km짜리 공이 들어와도 세 네 번에 한 번은 공을 쳐낸다. 이런 빠른 속도의 공을 쳐낸 타구는 투수가 던진 공보다 더 빠르게 외야나 내야로 향한다. 그렇지만 산술적으로 가장 공이 많이 향하는 위치에 무려 사람들이 7명이나 서 있기 때문에 안타가 될 확률은 0에 수렴한다. 그럼에도 안타는 나오고 경기는 진행된다. 결과적으로 외야수들은 100% 잡을 수 있는 공을 잡느냐, 아니면 놓쳐서 안타를 주느냐를 가지고 3시간 동안 자신과 싸우는 직업이다. 잡으면 아무렇지도 않게 벤치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고, 놓친다면 안타를 내주어 실점의 빌미를 제공하여 밤에 잠을 못 이루게 되거나 눈에 띄는 큰 실수라도 하는 날이면 당장 경기장에 모인 몇 만 명의 팬들의 원성을 사게 되는 매우 불합리한 포지션이다.

축구의 골키퍼는 원래 공격수가 찬 공이 100% 골대에 들어간다는 산술적 계산속에 시작하기 때문에, 그들이 골을 먹히는 것은 거의 ‘어쩔수 없이 점수를 내줬다’ 라는 축구팬들의 공통적인 이해와 배려 속에 면죄부를 얻는다. 그런데 축구의 골키퍼에 대입할 수 있는 야구의 외야수는 정반대의 위치여서 문제가 된다. 그들은 절대로 공을 떨어뜨려서는 안 된다는 전제를 가지고 시작한다. 이 ‘절대로’의 절대적인 압박감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것은 전교 1등이 1등의 자리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매우 불안하고 위태로운 압박감과 같은 향기를 풍기는 듯 보인다. 그들이 그것을 해주는 게 당연하기 때문에, 그들이 받는 스트레스, 초조함의 강도는 그 당연한 기대와 비례해서 더욱 커진다. 그렇지만 전교 1등은 2등으로 떨어져도 세상이 무너지거나 하는 것은 아니지만, 외야수의 경우 한 경기의 패배로 직결된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외야수의 초조함은 내가 이 공을 놓치면 내 연봉이 깎이고, 보너스가 깎이고, 욕을 있는 대로 먹을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처절해 보인다.

조막만한 내야에는 1,2,3루수에 유격수, 투수, 포수까지 6명이나 모여서 있는데 반해, 경기장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외야에는 단 세 명의 외야수만이 필드를 지키는 것에서 이 압박감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다. 외야수들의 뒤에는 아무도 없다. 자신이 실수를 한다면,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다. 작고 하얀 공은 종종 라이트에 숨어서 외야수가 확인할 수 없는 위치로 떨어지기도 하고, 예상보다 앞에 떨어지기도, 뒤에 떨어지기도 하는데 - 이런 많은 변수를 감안해서 수비를 하고 있음에도 자신의 중대한 위치에 비해 너무나 소홀한 사람들의 태도 때문에 그들은 외롭다.

그들이라고 허슬플레이를 하기 싫은 것은 아니다. 내야수들이 흔히 하는 것처럼 무모해 보이는 공에도 다이빙캐치를 해보고 싶고, 글러브만으로 토스하는 묘기를 보여주고도 싶다. 그러나 그들은 그럴 수 없다. 가장 안전한 방법으로 공을 처리해야 한다. 내야수의 다이빙 캐치는 자신이 잡지 못해도 외야수가 뒤에서 막아 줄 것이라는 다분히 의도적인 허슬플레이인데 반해 외야수들의 다이빙 캐치는 잡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차라리 타자를 1루로 보내는 차선책을 선택한다. 도박하기에는, 그들의 위치가 너무나 열악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잡아줘야 한다, 그런데 그 당연한 이유는 대체 뭐냔 말이다. 나에게 모두의 운명이 달려 있는데 나 멋져 보이자고 다이빙 캐치 했다가 뒤로 공이 굴러가면? 그래서 1루만 보낼 수 있었던 주자가 내가 철푸덕 엎어져 있는 동안 홈으로 들어와 버린다면? 거기까지 나의 생각이 미친 순간, 불현듯 떠올랐다. 이건 아버지들의 마음이다. 내 삶 살겠다고 회사를 때려치우기엔 차마 가족들의 얼굴이 밟히는 아버지들의 마음이다. 어쩔 수 없는 차선책을 선택한 그들의 마음을 우리는 모른다.



병신! 조금 더 앞으로 나오거나 다이빙 캐치를 했으면 안타를 내주지 않아도 됐잖아!

난 아버지 같이 살지 않을 거에요! 회사에서 이리저리 치이는 삶은 내가 원하는 게 아니에요!



누구나 화려한 위치를 원하지만, 그들은 그런 위치에 있기에는 짊어져야 할 것이 너무 많기에, 그 넓은 외야를 지키러,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 그 넓은 외야를 - 그 넓은 세상을 지키러 그들이 나간다. 안타는 내줄지언정, 승리를 지키러 그들이 나간다.


* 책마을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8-06-12 10:47)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8-12-08
10:32:43 

 

상병 홍석기 
  정말 힘든 포지션이죠. 힘들고 중요하지만 (특히 센터의 경우에는 가장 공이 많이 오는 곳이기도 하고, 수비 위치를 알맞게 조정하는 '야전사령관' 으로 비유 되기도 하죠) 가장 없어 보이기도 하는 비운의 자리네요. 하지만 명작은 고난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듯, "play of the day" 에 가장 많이 잡히는 것이 외야수의 허슬플레이 이기도 하다는...또 이 호수비 하나가 상대에겐 좌절을, 흔들리던 투수에겐 믿음을 주며 게임의 흐름을 바꿀 수 있기도 하죠. 거기다 홈런이라도 하나 뺏는다면...하하. 사실 너무 암울한 포지션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흔히 캐쳐를 마누라, 쇼트를 친구에 비유하던데, 외야수도 정말 아버지의 이미지에 꼭 들어맞네요. 좋은 글입니다. 

p.s: 저는 거포 이미지에 1,3루를 떠올리는데...외야는 발빠른 준족에 해당하지 않나요? 2008-05-19
10:34:27
  

 

상병 조현식 
  상병 홍석기// 발빠른 준족이라면 저는 2루수 유격수가 떠오르네요. 사실 진정한 거포이미지는 1,3루수긴 하지만요. 제 생각에 외야는 발빠른 준족보다 수비는 좀 안되도 장타를 칠 수 있는 느낌이라서. 어깨가 좋아야 하구요 2008-05-19
10:47:48
  

 

병장 장재혁 
  이거.. 논리적인 사유가 아주 재미있는 글이네요.. 
A+급의 외야수들은 타자가 공을 치는 순간 들려오는 타격소리로도 방향을 예측하고 달려간다고 하죠. 뿐만 아니라 최고의 주루 감각을 가지고 있는 선수들 역시 유격수와 외야수 들이 많기도 하구요. 

앞서 석기씨나 현식씨가 말씀하신 것 같이 준족들이 많긴하지만, 외야수들의 특기는 장타력과 주루플레이시 경기를 읽는 센스죠. 2008-05-19
11:25:54
  

 

병장 박동희 
  참 좋은 글입니다. 아버지 생각을 하게 되네요 2008-05-19
17:21:13
  

 

상병 이태형 
  잘 읽었습니다. 

<가지로> 외칩니다. 2008-05-20
07:54:04
  

 

병장 홍승호 
  전 공이 뒤로 빠질지라도 다이빙캐치하는 그 정신 때문에 메이져리그가 더 좋아요. 

박사장의 호투를 빕니다!!! 2008-05-20
09:29:00
  

 

병장 김별 
  와 잘 읽었습니다. 2008-05-21
14:11:17
  

 

죄송합니다 
  로그인이 안 된 상태에서도 꼬리를 달 수 있다니... 

놀랍습니다. 

이 페이지에서만 가능한 일인가 봅니다. 2008-08-29
14:00:35
 

 

병장 김우열 
  멋진 글이군요 2008-10-24
03:2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