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베스트-내글내생각]역지사지(易地思之)의 제련에 반대한다.  
병장 이지훈   2009-03-04 22:30:00, 조회: 139, 추천:1 

역지사지는 자기 자신이 아닌 상대방과의 대화와 교감에 있어서 효과적인 사고방식 중 하나다. 상대가 처한 상황과 입장을 고려하여 우리는 대화, 교감 상대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며, 불필요한 오해를 상당 부분 예방할 수 있고 또 해결해나갈 수 있다. 의사소통에 있어서 역지사지는 최고의 미덕이자 최선으로 인정받아 왔다.

역지사지가 최고의 미덕이자 최선이 될 수 있는 것은, 역지사지가 인간의 사고라는 불길 속에서 갓 달궈져 나온 고철덩어리, 그 자체로 존재했을 때이다. 불길 속을 헤치고 나온 역지사지라는 고철덩어리는 벌겋게 달아오르면서 상대의 입장에 유연해지고, 무채색으로 식으며 자신을 단단하게 한다. 사고라는 불길이 멈추지 않는 이상 타오름과 식음의 과정은 끊임없이 반복되며 역지사지는 유연하면서도 단단하게, 단단하면서도 유연해진다.

우리는 역지사지라는 이 질 좋은 고철덩어리를 이러저러한 망치로 두드려 제련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벌겋게 타오르는 역지사지를 망치 앞에 대령시키고 내려치기 시작하면, 역지사지는 금세 훌륭한 창이나 방패가 된다. 역지사지의 창과 방패는 우리의 황홀한 승리를 보장한다. 우리는 그 영광의 유혹 앞에서 아무 거리낌 없이 망치를 높이 들지만, 내리치는 순간부터 역지사지가 최고의 미덕이자 최선이 아니라 망치 주인만의 도덕이 된다는 것은 인지하지 못한다.

인간들은 어떤 조건 속에서도 서로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우리가 서로 대화하고 교감하는 수단인 언어, 예술 등이 완벽한 의사소통의 도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끼리 지속적인 의사소통을 유지하고, 더 나아가 발전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은 완전한 이해는 불가능하지만, 완전에 가까운 이해는 가능하다는 믿음 덕분이다. 우리의 노력으로는 결코 완전한 이해라는 물을 100도의 끊는 물로 만들 수 없다. 하지만 90도의 뜨거운 물, 적어도 40도의 따뜻한 물을 만들 순 있다. 우리는 90도, 40도의 물을 만드는 노력에 주목해야하며, ‘서로 완전히 이해할 수 없음에 대한 긍정적 인식’의 역지사지 사고방식은 물이 90도와 40도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의 기초가 된다.

이러한 역지사지의 사고방식은 설령 우리가 대화나 교감 진행 중 크나큰 오해에 직면한다하더라도, 지속적인 대화와 교감의 틀을 깨뜨리지 않고 유지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역지사지를 틀 혹은 장(場)으로 보지 않고 오해를 ‘해소’하는 직접적인 도구로 바라봤을 때, 역지사지는 오해를 해소하는 것도 모자라 그 틀마저 해체시켜버리는 강력한 창, 방패가 된다. 역지사지를 제련해 만든 창은 역지사지 미덕의 권위를 이용하는 것으로, 오래 전부터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인정받아온 역지사지의 미덕을 특정인, 특정집단의 도덕으로 하여 상대방에게 이를 강요한다. 특정인, 특정집단 도덕의 강요에는 이미 상대가 자신을 어차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더 이상의 논의가 필요 없이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겠다는 의도가 다분하다. 굳이 역지사지를 이용하는 것은 역지사지가 널리 알려져 있는 미덕이고, 이는 ‘자신의 뜻’에 강력한 정치적 정당성을 부여해주기 때문이다. 이처럼 도덕의 강요, 역지사지의 창은 상대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상대와의 차이를 수렴하려는 역지사지와 다르다.

역지사지를 제련해 만든 방패는 논리의 부족과 자기모순을 극복하는데 탁월한 능력이 있다. 자신과 상대방의 차이를 대화와 교감으로 수렴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한 편이 자신의 논리 부족과 모순을 극복하지 못해 불안감에 휩싸이는 경우가 있다. 즉 상대는 자신의 단단한 논리로부터 자신의 입장을 제대로 상대방에게 전달하고 있는데 반해, 자신은 비교적 빈약한 논리로 자신의 입장에 대해 충분한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이다. 이 때 ‘빈약한 논리의 자신’은 자신이 충분히 이해받지 못하고 있고, 제대로 무언가를 전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불안해하게 된다. 여기서 지속적인 대화와 교감의 노력이 아닌 역지사지의 방패를 꺼내어 자신을, 혹은 상대를 이해시키거나 이해하려고 하면 그 동안 어떤 대화가 오고 갔던 상관없이 소통은 끝이 난다. 역지사지 방패의 사용자는 상대가 자신에 대해 본질적으로 무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용하여 소통을 단절시킨다. 

굳이 멀리, 넓게 보지 않고, 가까운 사람들과의 대화와 교감 속에서 살펴보아도 제련된 역지사지는 그 승리의 영광을 뽐내며 이리저리 휘둘리고 있다. “네가 나에 대해서 뭘 알아.” 라던가, “넌 왜 내 입장을 생각해주지도 않느냐.”라는 등 제련된 역지사지는 우리가 서로 절대 같은 길을 갈 수 없는 타자(他者)라는 사실만을 명확히 보여준다. 상대를 이해할 수 없는 상대로 만들고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대로 만드는 것은 자신의 목적을 위한 일종의 게으른 편의주의다. 역지사지는 상대를 무조건 이해하기 위한, 상대로부터 무조건 이해받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대화와 교감의 장을 유지시켜주는 사고방식일 따름이다. 단지 역지사지라는 것도 인간의 사고에서 나온 것이기에 우리의 필요에 따라 도구로 활용이 ‘가능’할 뿐이다. 물론 역지사지를 도구로 제련하여 사용하는 것은 자유다. 누군가의 사고를 제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니까. 하지만 상대와의 대화와 교감이 어긋날 때마다 역지사지의 창과 방패를 꺼내지 않고 그것을 고철덩어리 그 자체로 내버려두고 본래의 타오름과 식음의 과정을 계속하게 한다면, 제련에 쓰이지 않은 남은 열기와 단단하면서도 유연한 고철덩어리의 열기가 “완전한 이해”의 온도를 0.1도라도 더 올려주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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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8
09:05:37 

 

병장 김무준 
  잘 읽었습니다. 2009-03-05
15:50:16
  

 

상병 황호상 
  잘 읽었습니다. 역지사지라는 고철덩어리의 제련, 역지사지의 창과 방패라.. 재미있는 비유네요. 후후.. 
뭔가 얘기를 덧붙이고 싶었는데, 쓸데없는 군더더기가 될까봐 생략합니다. 역지사지의 방패부분은 '똘레랑스(?)' 의 상대주의로 포장된 지적 게으름과도 가까운 얘기이군요. 

뜨겁게 대화하고 교감합시다. 가지로- 2009-03-06
11:17:57
  

 

병장 이지훈 
  무준// 

감사합니다 

호상// 

사실 창의 이야기로부터 이걸 쓰기 시작한 것이라 방패 이야기는 균형을 맞추려다보니(?) 조금 고민이 부족하고 어설픈 것이 아닌가 싶어요. 그러다보니 제가 이미 알고 있던, 그러니까 깊은 고민없이 꺼내들 수 있는 생각이 반영된 것 같아요. 좀 억지스러운 것 같기도 하고... 
요즘은 글이 다 산으로 가는군요. 그렇다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도 아니고...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