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가치판단 오딧세이 
 병장 조주현 01-04 15:33 | HIT : 420 



 개인적으로 아끼는 글입니다. 좋았다가 싫어졋다가 다시 좋아진.
 재탕은 범죄라 그랬나요....(먼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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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치 우열 판단에 앞서.

 지능을 가진 외계 생명체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한 그들의 의견은 양쪽으로 갈렸다.…[중략] 

 그들의 견해는 훨씬 더 이색적이었다. 그들은 진정 고도로 발달된 생명체라면 아예 육체를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과학적 지식이 발전해 나감에 따라 자연이 자신들에게 준 육체를 없애 버렸으리라는 것이다. 육체는 연약하고 질병과 사고에 쉽게 쓰러지며 결국은 죽음을 피할 수 없으니까. 그래서 발달된 생명체들은 처음 타고난 육체가 낡으면(또는 그전에라도) 기계와 플라스틱으로 만든 새 몸으로 바꿔 불멸의 생명을 얻었을 것이라고 했다. 뇌는 원래 몸의 다른 장기들 보다 조금 더 오래 남아 기계팔과 다리를 움직이고, 맹목적인 진화 과정을 거친 감각기관 보다 훨씬 더 섬세하고 예민한 전자 감각기관을 통해 우주를 관찰할 터였다. 

 심지어 인류도 이 방향을 향해 이미 첫발을 뗀 상태였다. 예전 같으면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은 인공 팔다리, 인공신장, 인공허파, 인공심장 덕분에 활동적이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이렇게 나아가다 보면 결론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 결론에 도달하는 길이 아무리 멀어 보일지라도. 

 궁극적으로는 아마 뇌도 사라질 터였다. 의식이 자리잡고 있는 곳으로서 뇌는 반드시 필요한 존재가 아니었다. 이는 전자두뇌의 발달로 인해 이미 증명된 사실이었다. 정신과 기계의 갈등이 어쩌면 완전한 공생이라는 영원한 휴전협정에 의해 마침내 해결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것조차 끝이 아닐 수 도 있었다. 신비주의쪽으로 기울어있는 소수의 생물학자들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여러 종교의 신앙체계에서 단서를 얻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정신이 물질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라는 추측을 내놓았다. 기계몸도 피와 살로 이루어진 몸처럼 인류가 오래전에 '영(靈)'이라고 불렀던 그 무언가에 이르기 위한 디딤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 너머에도 뭔가가 있다면, 그것의 이름은 '신'일 수 밖에 없었다. 
 ㅡ Arthur C. Clarke -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 챕터 'ET에 대하여' (P.257 ~ 258)

'물질적 가치와 정신적 가치 사이에 우열을 논할 수 있는가 라는 물음에 그것은 우열의 문제가 아니다 라고 이야기했던 적이 있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친구는 진군, 난 조군으로) 

 진 : 요즘 된장남녀가 이슈인데, 그게 욕먹을 만한 일인가? 난 요즘은 이런 생각이 들어. 자기 돈 쓰겠다는데, 그게 스스로 번 돈이든 부모님 돈이든 자본주의 안에서 굳이 남이 왈가왈부할 이유는 없잖아? 

 조 : 음, 나도 그런 생각이 들어. 더욱이, 부모님 돈으로 옷을 사고 신발도 사고 하는 나로써는 그런 소비행위에 뭐라고 비판할만한 자격이 있는가하는 생각도 들고말야. 

 진 : 솔직하게 말해서, 돈 많으면 못할 게 없잖아. 모든 물질적 가치와 교환이 가능한 최적의 교환재니까. 지금이 자본주의에 기반한 사회인 만큼 돈이 중요한 가치로 여겨지고 있고, 그러니 돈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잖아. 돈만 있으면 다한다. 물질 만능주의~. 물질적 가치가 종교나 뭐 그런 기타 정신적인 가치를 실제적으론 앞지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아? 종교도 사후세계같은 어찌보면 또 다른 형태의 물질적인 가치추구 행위로 볼 수 있지 않아? 사후세계나 구원이 종교인들이 얻기를 바라는 실리에 자리한 것 아니야? 그것만 제거하면 허울 좋은 다수의 종교인들은 떨어져 나갈 것 같은데. 그러고 보면, 흔히들 물질적 가치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정신적 가치를 왜 요즘 사람들은 등한시하고 물질적 가치에 더 집착하는 걸까. 보다 높은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사람의 본능이라고 하면서 말야.

 조 : 글쎄, 그런 정신적 가치와 물질적 가치관계를 우열의 관계로 파악할 수 있을까? 난 그런게 다 취향문제가 아닌가 싶어. 물질적인 가치를 좋아하면 우선시하는거고, 그런게 싫다면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는거고. 굳이 생각해보자면, 물질적 가치를 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대다수라고 여기고, 아, 물론 정신적 가치를 운운하면서도 물질적 가치에서 결코 자유로울수 없는 사람들을 포함해서겠지. 여튼, 정신적 가치를 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소수라면, 다수는 소수를 이해할 수 없겠지. 왜 먹고살기도 힘든데 정신적 가치같은 추상적인 거나 추구하는 걸까. 예수같은 경우에도, 다수에 의해서 이해되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몇몇 사람들을 감화시키기는 했지만, 그것도 정말 물질적 가치의 은혜를 조금도 받을 수 없었던 최하층 사람들에게 통했지만. 여튼 좋은말 좋은 생각을 설파하고 퍼뜨리고 행하여도, 대다수에게서는 이해받기 어려운 일이었을 거야. 그러다가 결국 물질적 기반이 되는 대중을 혹한다는 둥, 여러 이유 붙여서 지고 가셨잖아. 멀리멀리. 뭐, 성경은 잘 모르니까 자세하게 짚지말고 대충 이렇게 넘어가자고, 
 그런데 말이야~ 이게 가만히 보니까 좀 다르게 보이거든, 뭔가 대다수의 이해의 바깥에 존재하는 예수의 행태는 이해하고 싶어도 정말 마음속 깊이 이해할 수 가 없었거든, 그런 이해바깥에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 사람들은 보통 두가지 자세를 취하지. 받아들여보기, 혹은 무조건 배척하기. 배척하기가 일단의 성공을 거두었지만, 받아들여보기로 한 사람들은 어떻게든 그들의 이해범위안에 예수를 끌어들여야만 했다는 말이야. 그래서 예수에게도 무언가 가치추구의 원동력을, 즉 사후세계와 구원 혹은 신의 아들이라는 식의 원동력을 부여하여 그의 행위에 당위성, 인과성을 부여하고 그리하여 그의 행위도 우리와는 조금 다른 것을 추구하였지만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추구행위의 일환이였다. 고 설명가능해진 거지. 중요한건, 그렇게 말한 이들이 예수를 납득시킬 필요는 없어. 예수를 이해의 범위에 넣어보려는 사람들에게만 받아들여지면 된다는 이야기야. 대중을 적당히 이해시키고, 그래도 불가해한 부분은 적당히 신의 권능정도로 넘겨서 탁! 나온게 종교아닐까. 그래서 종교는 현세구복적이고 구원의 형태를 띄고 있지 않은가 생각해. 줄여서, 불가해한 부분을 이해하기위해 당위성을 부여하는 과정에서 정신적 가치라는 것이 나왔다 라는 말이지, 내말은. 아! 한가지더. 이해하기 어려운 만큼 쉽사리 자신들이 추구하는 가치 밑에 깔고 보기는 어려웠을 거야. 그러니까 은연중에 자신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물질적인 가치 위에 두었을 거야. 

 진 : 그럴싸한데? 니 말은 우열관계란 그런 식으로 조장된 것이지, 사실 우열관계란 사실 따질 수 없다. 이런말이냐? 

 조 : 응, 취향문제지 우열관계는 아닌거 같아. 

 진 : 이런 궤변론자. 쿠헤헤. 대충 이해되는거 같아. 

 조 : 푸헤헤 궤변이지. 궤변. 

 정(精)과 육(肉)은 이분법적인 사고에 의해 서로 상반된 개념으로 인식되어있다. 인간이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역시 정신과 육체ㅡ조금 더 넓게 치환하자면 물질ㅡ의 경계를 가지고 있다. 그 경계선상에서 인간이 두 영역간의 우열을 논할 수 있을까.

 인간에겐 세가지 중요한 것이 있으니 그것은 의식주이고, 세가지 본능이 있으니 식욕, 수면욕, 성욕이다. 또한 저것들은 굉장히 물질적인 것이다. 의식주 ㅡ 의(衣)가 앞에 있는 까닭은 우리 민족이 체면을 중요하게 여기기에 그렇다는 문화적 해석이 있다. 때문에 다른곳에선 식의주라 불릴수도 있겠다. ㅡ
 물질적 가치를 간과하고 가벼이 여긴다면, 현실의 생을 지속해가고 정의 그릇이 되는 육체를 보존하는데 어려움이 생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고, 밥을 먹은 뒤 도를 논하는 만큼 결코 물질적 가치를 가벼이 여길 수는 없다. 바꿔 말해, 정신이 육체 안에 담겨 육체의 상태에 따라 상당부분 좌지우지되는 한, 이는 상보적인 관계다. 때문에 이 관계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기 위해, 인도의 고승들은 고행을 통해 이전에 비해 좀 더 자유로운 정신적 상태를 누리고자 하였다. 허나, 꼬집어 아픈 현실에 매여있는 일반인에게 좀 더 강력하고 최소한 영향력 면에서 우위에 서고 있는 가치를 뽑으라면 대부분 물질적 가치에 손을 들어 줄 것이다.


 아노미 현상에 대한 이야기는 도덕시간에 마르고 닳도록 들어온 현대사회에서 나타나는 대표적인 도덕현상이다. 근데, 아노미 현상을 굳이 현대에 들어 나타난 현상이라 보기에는 너무 비판적 수용이 결여되어있지 않나 싶다. 누구나 자신의 가치 기준을 가지기 전에 가치혼란의 시기를 겪을 것이다. 또한, 교류가 활발한 현대에는 예전에 접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가치체계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다양한 가치체계들을 피부로 느낄 수 있기에 더 고민하고 방황하는 것이 아닐까? 한마디로 더 폭넓고 자유로운 모 광고에서처럼 골라먹는 즐거움이 있는 혼란의 시기가 아닌가 한다.

 누구나 겪는 혼란 상태에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은 자본주의를 등에 업은 물질적 가치체계다. 이전에 비해 폭넓은 여가가 가능해짐으로 소비의 종류는 생필품에 국한되지 않고, 여타 다른 부분으로 넓게 우리생활을 감싸 안고 영향을 주고 있다. 가치의 우열과 고민에 앞서 주요하게 작용하는 힘이 물질적인데서 나오기에 가치역시 그에 맞물려 생각을 지배하고, 결국 개인의 아노미현상이 종식될 때 쯤 각자의 가치척도에 물질적 가치가 자리하게 된 것이다. 최초로 일어난 광범위한 물질적 가치척도 확립은 아까도 이야기했던 사회적 분위기에 다수의 논리까지 등에 업고 아직 가치에 대해 혼란을 겪지 않은 새로운 세대로 압력을 가해, 사실 더 이상 거대한 아노미 현상은 일어나지 않고 있다고 생각된다.

 처음부터 정신적 가치를 우위에 두고 있던 친구에게 반박하여, 그것은 취향의 문제고 물질적 정신적 두 가치 사이에 우열을 논할 수 없다고 말했던 것은 차라리 이상적인 생각을 기반한 생각이었다. 실추된 정신적 가치를 더욱 가벼이 여긴 그런 말이었던 것이다. 지금은 명백히 물질적 가치가 정신적 가치의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여전히 정신적 논리를 중요시 여기고 있다고 말하는 소수의 다수는 조금만 벗겨보면 실은 웃어른에 대한 예의치례와 맥을 같이 하고 있을 뿐이다.


 다양한 가치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고, 대부분의 가치가 기록에만 존재하는 화석으로만 치부되고 있지 않는 것은 받아들이는 사람이 단일한 가치체계를 답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가치를 받아들여 그 혼재 속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꽃을 틔우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가치가 나름대로 생의 목적과 방향성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의 판단에 '받아들일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수용하고 추구하는 것이라면, 정신적ㅡ물질적으로 다양한 가치체계 전체를 가로지르는, 모든 가치가 추구하고자 하는 단일한 목적이 존재하고 있지는 않을까?

 그것은 바로 영속성이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가치의 핵심과 목적은 영속성에 있다. 고대부터 있었던 대표적인 물질적 가치 추구의 목적은 바로 영생(永生)이었다. 이는 수많은 신화와 기록을 통해 전해진다. 진시황은 불사불멸불로를 위해 서극(맞나?)을 보내 불로초를 찾아오게끔 했다. 서양에서는 신의 음료 넥타르와 황금사과를, 남미에서는 초콜릿을 마심으로 생명이 지속될 수 있다고 믿었다. 물질적 가치를 극한으로 추구한 사람들의 원동력이 된 공포의 자리에는 Mortality. 필멸성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반대인 영원 영속 불멸을 가치체계를 통해 추구한 것이다.

 기본적으로 모든 물질은 필멸한다. 결코 넘을 수 없는 한계가 명확히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그 너머를 추구하는 행위는 끊임없이 추구되고 있다. 기억은 망각되기에 개인은 사진과 비디오를 남겨서 한계에 도전하고 있으며, 육체는 늙고 병들기 때문에 인공신체를 개발하고, 배아줄기세포를 복제하려고 하는 등, 생의 한계에 도전하고 있다.(생의 한계에 가장 기본적인 도전은 역시 자손을 남기는 것이겠지만서도 말이다.) 가장 크게 규정지어진 한계인 필멸의 운명은 물질적인 면에서 끊임없이 도전 받고 있지만, 굳건하게 자리하고 있다. 

 여기서 포기하고 말았을까? 아니다. 결코 닿을 수 없는 영원에 이르기 위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자리한 것이 바로 정신적 가치체계이다. 정신적 가치는 실체가 없고, 끝을 가늠할 수 없기에 다시 말해 물질적 이해 바깥에 무형으로 자리하기에 쉽사리 한계를 규정지을 수 없다. 또한 정신적 가치가 끊임없이 전수되어 그 가지가 더욱 크고 많이 자라나, 세대를 거슬러 살아있으니, 명백이 끊기지 않는 한 분명 아직까진 지속되고 있음이 맞다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결코 넘을 수 없었던 사(死)의 고리를 정신적 가치가 끊고 있음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가치가 일괄적으로 추구하는 불멸의 기준에 비추어 보아, 정신적 가치를 물질적 가치위에 둘 수 있었던 것이다. 

 불멸이야 말로 인간의 모든 가치가 추구하는 영속적인 목적이다.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자 하는 욕구도, 돈을 많이 벌어 대대손손 번창하고자 하는 욕구도, 높은 정신을 이룩해 더 나은 세계로 인류를 이끌고자하는 욕구도, 자손을 남기고자하는 욕구도, 결국 영속성과 맞닿아있다. Immortal은 ㅡ아직까진ㅡ 결코 닿을 수 없는 이상향이기에 모든 가치가 도전할만한 가치이고 처음부터 내제되어있는 한계이다.

 하지만, 모든 가치(물질적ㆍ정신적 가치)가 싸우고 있고 닿고자 하는 종착지가 불멸, 영속성이라 해서 물질적 가치추구가 정신적 가치에 비해 열등한 위치에 놓을 수 없다고 말하지 말자. 물질적 가치는 애시당초 필멸이 거대한 장애물로 자리하고 있기에 드라마틱한 도전을 계속하고 있지만, 정신적 가치는 처음부터 필멸을 뛰어넘어 영원을 향한 여정을 시작하였으니.


 인간은 단일한 가치체계에 기반하여 살 수 없다. 허나, 다수의 사람은 수많은 가치체계 중 어느 한 곳에만 지나치게 집중하여 바라보고 생활하고 있는 것 같아 아쉽다. 영원에의 추구는 결코 한 가지 가치체계로는 이루어질 수 없기에 편협한 시선을 버리고 시야를 넓혔으면 한다. 또한 그 모든 것이 혼자서는 결코 이룰 수 없음을 안다면 더욱 바람직하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