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 년, 초원결의 _김청하 
 병장 임정우 03-06 08:38 | HIT : 252 



100 분 간 공부하고 20분 동안 휴식을 취해야 하는 학교 독서실의 폭력을 참을 수 없었던 나는 집 근처의 사설 독서실을 선택했다. 대체 공부라는 것이 그렇게 한다고 되는 것인가. 나는 당당하게 교무실 문을 둘로 자르고 안으로 들어갔다. 저는 이런 식으로는 공부할 수 없습니다! 난 당당하게 증거를 제시했다. 난 한 손으로 무언가를 들고, 한 손으로는 그 것을 두드리며 당당하게 말했다. 모의고사 문제집을 기준으로 생각한다고 해도 중간에 풀다가 휴식시간이 되어서 주변에서 시끄러워지면 못 한다거나, 배가 고파서 효율이 제로가 되는 상태에서도 공부를 지속해야 한다니 이런 비효율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저는 제 방식대로 공부하고, 결과로써 선생님께 저 자신과 저의 생각을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잠시 후, 난 당연히 교무실에서 쫓겨났다. 아마도 그는 내가 무슨 말을 할 지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난 그냥 평범한 학생이었다.

 하지만 학교 독서실의 자리는 제한되어 있었고, 다행히 난 학교 독서실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같은 반 친구를 찾을 수 있었다. 난 교무실 문을 두 손으로 고이 움켜잡고 행여나 드르륵 소리가 날까 걱정하며 조심스레 열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선생니이임~~ 얘가 학교 독서실에서 공부하고 싶대요오~ 그렇다. 난 그렇게 타인의 피를 대가로 비열한 자유를 되찾았다. 

 새로이 얻어진 자유는 어떻게 얻어지는지와 상관없이 달콤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 독서실 옆에 펼쳐지던 드넓은 초원(그곳은 비록 '지능계발 초원오락실'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었지만, 그것은 들어올 자격 없는 자들을 필터링하기 위한 하나의 카모플라쥬(위장)였을 뿐이다. 언어는 말해지는 순간 세계를 재단해버리고 말지만, 뭐라고 이름붙여도 별은 바라보는 자에게 빛을 주지 않는가!)은 그렇게 얻어진 나의 자유를 앗아갔다. 복종은 때론 자유보다도 달콤하다. 나는 그 싱그럽고 푸른 초원에서 죠-랄프와 함께 나에게 무한히 발칸펀치를 날려대는 꼬마와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뒹굴었고, 아리따운 여도적 모리아(그녀는 처음엔 자신의 이름을 항상 C라고만 밝혔지만, 몇 년 간의 지난한 작업 끝에 나의 완전사랑을 깨달은 그녀는 결국 자신의 이름을 밝힌 상태였다)와 함께 미스타라를 지배하려는 악의 화신 신Synn을 몇 번이고 살해했으며, 요시미츠의 레이져검으로 마치 애벌레처럼 움직이며 가족 이데올로기를 비웃던 미시마 가문을 베었다. 그 넓고 아름다운 초원에서 나는 행복했고, 내 행복에 젖어 나는 내 피 대신 흘려진 친구의 피를 잊었다. 내가 조금이나마 나 대신에 흘려지는 피(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아마도 그때부터가 아니...었다. 

 얼마 후 중간고사가 끝났고, 나는 아무 것도 증명해내지 못했다. 난 하룻밤을 눈 뜬채로 한 고민한 끝에 책임을 다하지 못한 자유를 반납하려고 독서실 짐을 쌌다. 적어도 책임지는 자세를 보여주고 싶었다. 교무실 문을 부수고 들어가던 나를 조금이나마 떳떳하게 만든 것은 바로 그, 여차하면 책임지겠다는 자세였으니까. 물론 그 외에도 나를 움직인 이유가 어디 하나 둘이었...다. 나도 그땐 성적이나 진로 걱정이 좀 되기도 했다는 이유. 

 하지만 다음날, 학교 독서실 입실자 명단을 발표하던 반장은 나의 애타는(썩은) 눈빛을 외면했다. 난 그제서야 깨달았다. 애초에 내 자유는 내 사상이나 내 생각이 아닌, 친구의 피 위에 세워진 것이었다. 아아, 내가 지났던 것은 정녕 자유로가 아니라 루비콘 강이었단 말인가. 나는 그 날, 오열하며 초원으로 달려가 요시미츠-화랑의 태그와 함께 23승을 거두고, 눈물 섞인 노호성을 내뱉으며 초원의 왕이 되었다. 어쨌거나 '동네' 오락실이(라는 간판으로 사람들을 속이고 있)던 초원에서, 그 기록(*)은 한동안 깨지지 않았다. 

(*) 물론 몇 달 후의 얘기지만, 내 기록은 동네 김칫국물 아저씨의 28승 앞에 처참하게 무너졌다. 이후 그는 몇 번이고 연승을 거두어 내 23승의 기록을 초원의 메모리에서 삭제했다. 마지막에 본 그의 기록은 46승이었다.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그가 늘 입고 다니던 김칫국물 자국 남은 하얀 T셔츠도, 그가 늘 하고 있던 눌린 머리도, 그가 질질 끌고다니던 슬리퍼도 아니었다. 그의 주 캐릭터는, 아아, 모쿠진이었던 것이다.

 초원의 왕으로 군림하던 나는 학교 독서실로부터 탈주한 친구들에게 집 앞 독서실의 유용성과 깨끗함, 여학우들의 아름다움, 그리고 하이 테크놀로지를 설파하였다. 그러나 난 초원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았다. 말해질 수 없으며 단지 보여질 수 밖에 없는 것이었기에. 난 그저 20분 정도 만화책 보다가 어디론가 자리를 비우는 행동으로 보여주었을 뿐이지만, 아름다움은 모든 것을 초월하지 않는가. 친구들은 곧 드넓은 초원의 품에 안겼다. 그리고 우리의 초원은 시작되었다. 

 권총 한 자루와 서로에 대한 깊은 신뢰만으로 대통령의 딸을 구해냈던 어느 날 우리는 결의했다. 각자의 전공을 살려 언젠가는 인간형 (메이드)(간호사)(관상용)(장애인 보조)(**) 로봇을 만들자고. 미대를 지망하던 녀석은 디자인을 하기로, 공고에 다니던 녀석과 기계공학과를 지망하던 녀석은 몸체를 만들기로, 컴퓨터공학과를 지망하던 나는 AI를 만들기로, 사학과를 지망하던 녀석은 구경하기로 각자의 역할을 배정하고 우리는, 다시모일 어느 날..이라기보다는 기말고사가 시작되는 다음 날을 위해 독서실로 돌아갔다. 훗날 사가들은 이 날의 결의를 초원결의라고 부르리라. 

(**) 참고로 간호사나 관상용 안드로이드를 제안했던 것은 내가 아니다. 그리고 메이드 안드로이드는 두 표가 접수되었다. 




 시간은 우리를 어디론가 옮겨놓았고, 우리는 각자 약속했던 전공을 선택하여 대학에 진학했다. 공고에 다니던 P는 학교를 그만두고 1년 앞서 모 게임전문 케이블방송국에 취직했으며, 그는 그곳에서 자기 나름대로 자기 역할을 다하고 있었으며 우린 그를 믿었다. 다만, 미대에 간다던 친구 J는 법대에 진학했다. 우린 처음엔 - 부끄럽게도 - 기계적으로 그를 비난했다. 가장 중요한 역할(그는 디자인을 맡았다)을 맡은 녀석이 그저 자신의 영달을 위하여 친구를 버리고 전공을 택하다니, 그날의 맹세는 너의 가슴 속에만 숨쉬고 있지 않은 거야? 비상소집이 행해졌고, 우리는 초원 옆의 술집에 다시 모였다. 그는 우리에게 울며 말했다. 그는 결코 타락하지 않았으며, 그 날의 맹세는 여전히 자신의 가슴 속에 있으며 그림을 그리는 일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그러나 그는 영달을 위해 전공을 택하지 않았으며, 전공 선택에 후회는 없다고 했다. 우린 그 말만으로도 더이상 그를 의심할 수 없었다.

 왜 잠시나마 그를 의심했던가. 부끄러워해야 했던 것은, 법학을 전공한다는 일을 한 가지 의미로만 해석할 수 없었던 우리들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우리가 함께 구한 대통령의 딸과, 텔아린에게 함께 파이어볼을 맞았던 기억과, 함께 했던 웃음을 잊지 않았다. 우린 그에게 안드로이드의 인권 문제와 같은 법적인 자문을 맡기기로 했고, 그 날은 우리가 마지막으로 미스타라를 지켜낸 날이었다. 






 그 후로 나는 한동안 그들을 보지 못했고, 그 동안 난 초원보다는 캠퍼스에서 무언가를 찾고자 했다. 그래서였는지, 두 해가 지난 어느 날 초원은 '김xx 뷰티 샵'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더이상 나의 초원이기를 거부했다. 1000원 바꾸면 가끔 100원 더 주던 초원의 아줌마/아저씨도,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었던 김칫국물 아저씨도 그 날 이후론 볼 수 없었다. 

 그리고 그 해, 친구 J는 다시 수능을 보고 미대에 원서를 넣었다. 난 그에게 사진으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려 하느냐고 물었지만, 그는 사진이 갖고 있는 원치않는 정보들을 쳐내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고 말했다. 난 그가 초원에 얽매일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 말을 할 필요는 없어보였다. 초원을 치기어린 장난으로 생각하기 때문은 아닐거다. 그는 어디에서는 무언가 해낼 것이고, 난 그를 인정하고 응원할 것이다. 어쨌거나 복학생 J는 지금, 다시 법대에 다니며 종종 그림을 그린다. 

 가끔 그들이 그리워 수신자부담 전화를 걸면(전화카드 쓰기는 좀 아깝다), "잘있냐?" / "어" 그걸로 끝이다. 휴가 나가서 전화를 걸면 "IRC들어와"하고 끝. 그 IRC에서는 "으하하 7시에 나오자고 했더니 다 나온다고 해놓구선 아무도 안 나왔어 으하하하하하하 사실 나도 안 나갔어 크하하하하하"하는 대화가 오가기도 한다. 우리가 쿨한건가? 아니다. 우리는 초원의 아들들이고, 컴퓨터 새로 사면 MSN보다 IRC부터 새로 까는 끈적한 인간들이다.


 그래 뭐 이제 파란 해방의 풀이 자라던 그 곳에는 '김xx 뷰티 샵'조차도 남아있지 않고
 사실 우리는 언젠가부터는 그 때 얘기도 잘 하지 않게 되었지만

 우리가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다고 해도, 
 우리가 다시 볼 수 없게 된다 해도, 

 괜찮아. 우리는 초원의 풀을 나눈 형제들이니까.



60707/ 책마을/김청하  


 상병 김지민 
 오락실 이야기가 이토록 재밌구나. 싶었다는 03-07   

 상병 진규언 
' 사학과를 지망하던 녀석은 구경하기로' 이 대목에서.. 그냥 피식 웃었어요..(웃음) 
 좋은글 감사합니다. 0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