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베스트선정-독서후기]정리_이타적 인간의 출현(병장 김현진)  
병장 김상열   2008-04-16 09:51:59, 조회: 455, 추천:0 

목차



1부- 이타적 인간은 어떻게 살아남았나? (1-1, 1-2)


2부- 경제인(Homo Economicus)에 다시 한 번 하이킥을.



(*1부는 내용 요약, 2부는 간단한 감상이 되겠습니다. 시간상 일단 1부부터.)









1부. 이타적 인간은 어떻게 살아남았나? (1-1)







저승의 안내원이 한 사자(死者)에게 천국과 지옥을 구경시켜 주었다. 



"저승에서는 팔보다 조금 긴 젓가락으로만 식사를 해야 합니다."



지옥에서는 사람들이 각자 음식을 스스로 먹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젓가락이 너무 길어서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다. 천국에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음식을 먹여주고 있었다. 그래서 지옥에 사는 영혼들은 굶주리고 있었고, 천국의 주민들은 풍족한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 천국과 지옥에 대한 묵은 유머들 중 하나. -



이타적 행위란



이타적 행위란, 남들에게 혜택을 주지만 정작 자신에게는 희생이 되는 행위이다. 봉사활동이나 기부와 같은 행위뿐만 아니라, 집 앞 골목을 청소하는 일상적인 것 또한 이타적 행위의 범주에 들어간다. 이타적 행위는 일상적으로, 우리 주변에서 종종 관찰되고 있다. 그런데 무슨 득이 있어서 사람들은 이타적 행위를 하는 걸까? 이미 멀쩡히 존재하는 '이타적 인간'들은, 정작 왜 존재하는 걸까? 



이타적 인간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새삼스럽게 이런 걸 묻는 이유는, 실제로 이타적 인간은 살아남기 힘들기 때문이다. 앞의 천국과 지옥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만약 지옥에 천국의 주민이 한 명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 천국에서 온 그 사람(사람?)은 평소 해 왔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음식을 먹여줄 것이다. 그러나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이기적인 지옥의 주민들은 그 한 사람에게 기생하게 된다.(좀 더 학술적인 단어를 사용하자면, '무임승차'를 한다.) 이런 상황이라면 천국에서 온 마음씨 좋은 그 사람은 굶어 죽거나 다른 사람들처럼 젓가락을 자기 입에 가져가기 위해 애를 쓸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지옥에서 살던 사람들과 천국에서 살던 사람들을 반씩 섞어 보면 어떨까? 지옥에서 살아왔던 사람들은 천국에서 살던 사람들이 집어 주는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상대에게 아무런 보답도 하지 않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음식을 집어 주던 착한 사람들 또한 하나 둘 변하게 될 것이다. 가만히 있어도 다른 착한 사람이 음식을 먹여 줄 테니까. 



지옥에서 살던 한 사람이 천국으로 이사를 가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남에게 음식을 먹여주는 데 익숙하지 않은 그 사람은 음식을 받아 먹기만 할 것이고, 착한 사람들은 하나 둘 이 전략의 효율성(?)을 깨닫고, '공짜' 식사를 하게 될 것이다. 이렇듯 선행은 '진화적으로 안정적이지 않다'. 선행의 전략은 오래 살아남을 수 없다는 말이다.





1. 혈연선택 가설

이타적 인간의 탄생과 생존을 두고 많은 가설들이 제기되었다. 그 중 하나는 희생과 헌신이 유전자의 명령이라는 설이다. 진화론자들 중 가장 유명한 리처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에서 유전자는 이기적이라고 말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지금까지 '살아남은' 유전자는 아마도 이기적일 것이다.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유전자를 가진 사람은 당연히, 쉽게 죽을 테니까.



그럼에도 이타적 행위는 엄연히 존재한다. 이 시점에서 진화론자들은 '혈연선택 가설'을 제기한다. 얼핏 이타적으로 보이는 행동은 사실 유전자의 이기적인 본능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혈연으로 이어진 집단에 주목한다. 다른 집단과 비교해 보면 혈연으로 이어진 집단 간의 이타적 행위가 더 잦다. 부모의 입장에서 보면 자식은 부모 자신의 유전자를 50% 공유하고 있다. 그러므로 자식이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그 후손을 많이 퍼트리면 그만큼 자신의 유전자가 퍼지게 되는 셈이다. 



비슷한 예를 벌의 사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벌들은 극도로 이타적인데, 진화론자들은 그 이유를 벌 집단의 혈연관계에서 찾는다. 왜 일벌들은 자신이 낳지도 않은 알을 돌보고 필사적으로 지킬까? 일벌들은 여왕벌과 유전자의 75%를 공유하는 자매 관계에 있으며, 여왕벌이 낳은 알은 모두 일벌의 조카가 되므로 50%의 유전자를 공유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혈연선택 가설은 적어도 진화론자들이 적대하고 있는 창조론보다는 그럴듯하다. 창조론은 인간의 탄생은커녕 인간의 이타적 행위 또한 설명해 주지 못한다. 그러나 혈연선택 가설은 여타 사례 연구들처럼 귀납적 방법론의 함정에 빠진다. 벌들 중에서도 유전자의 공유도가 크지만 서로 돕지 않고 혼자 사는 종도 있다. 또한 이타적 행위는 혈연으로 구성되지 않은 개체들 사이에서도 존재한다. 동물의 세계에 자주 나왔던 미어캣은 먹이를 찾을 때 한 두마리씩 '교대로' 망을 보는데, 이 망을 보는 횟수는 혈연자와 외부에서 온 이민자 모두 동일하다. 우리 사회에서도 반례를 발견할 수 있다. 생판 모르는 남을 위해 봉사활동을 하고 장기를 이식해 주는 행위는 혈연선택 가설로는 설명할 수 없다.





2. 반복-호혜성 가설



이타적 행위의 진화를 얘기할 때 혈연선택 가설과 함께 자주 등장하는 가설이 '반복-호혜성 가설'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Tit for tat. 이하 TFT)" 의 전략을 취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고, 이타적 행위 또한 이런 '조건부 협력'의 원칙에서 설명 가능하다는 것이 반복-호혜성 가설의 핵심 논지다. 상대가 나를 도왔다면 나도 다음에 상대를 돕고, 상대가 나를 배신했다면 나도 다음에 상대를 배신한다. 사람들이 이런 전략을 취한다면 장기적으로 서로 돕는 것이 최고의 전략이므로, 사람들은 이타적 행위를 하게 된다는 말이다.


이러한 반복-호혜성 가설의 실례는 흡혈박쥐와 침팬지의 생태를 통해 발견할 수 있다. 흡혈박쥐가 사냥에 성공하는 확률은 실제로 그리 크지 않은데, 피를 넉넉히 섭취한 박쥐는 먹었던 피를 게워내어, 굶어 죽을 위기에 처한 박쥐에게 나누어 준다. 이 과정에서 박쥐들 간에는 TFT의 원칙이 적용된다. 박쥐 A가 과거에 B에게 도움을 받았을 경우, 이후 B가 굶을 때 A에게 도움을 받는 확률이 높다는 연구 결과가 나온 것이다. 또한 침팬지들은 자기 털을 다듬어준 침팬지가 먹이를 나누어 달라고 했을 때, 자기 털을 다듬어주지 않은 침팬지에게보다 더 잘 나누어 주는 경향이 있다.



원시 부족의 생활에도 반복-호혜성 가설을 적용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원시 부족은 식량을 조달하는 방식으로 '수렵'을 채택하고 있는데, 이들은 대개 사냥해 온 고기를 서로 공유하고 있었다. 사냥에 나가지 않은 사람도, 사냥에 실패한 사람도 고기를 동등하게 나누어 먹는다. 여기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작용한다. 첫째, 대부분의 수렵채취부족은 음식을 저장할 수단을 갖고 있지 않다. 둘째, 사냥은 단백질과 지방을 섭취하는 중요한 수단이지만, 그 성공률은 사냥으로 유명한 부족조차도 3%에 불과하다. 이 두 가지 요인 때문에 식량은 공유된다. 내가 사냥에 성공하면 다들 고기를 먹을 수 있고, 내가 실패하더라도 다른 부족원이 사냥에 성공하면 고기를 먹을 수 있다. '보험'의 기원인 셈이다.



중요한 것은, 이들 사이에서 '무임승차'가 작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사냥을 나가지 않아도 고기를 먹을 수 있음에도, 사람들은 사냥을 하고 있었다. 반복-호혜성 가설은 여기서 '반복'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부족원간의 관계가 일시적인 것이었다면 무임승차가 가능하지만, 사실 식량 공유는 장기적이고 계속 반복되기 때문에 무임승차는 불가능하다. 사냥을 나가지 않는 게으른 부족원에게는 고기를 나누어 주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반복-호혜성 가설은 굉장히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이 가설로는 이타적 인간의 존재 이유를 완벽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반복-호혜성 가설이 가진 두 가지 전제, "(무조건 협조가 아닌)조건부 협조"와 "반복"이 충족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이타적 행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태안 사람들이 우리에게 해준 게 뭐가 있다고 봉사활동을 간 걸까? 한 번 들르고 말 레스토랑에서 왜 15%나 되는 팁을 줄까? 



근본적으로, 사람들은 이익만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반복-호혜성에서 가정하고 있는 주체는 경제학의 주체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을 최선의 가치로 삼는 '경제인'이다. 그러므로 사실 반복-호혜성 가설에 이타적 행위는 없다. 그러나 세상에는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행위를 사회적 합의와 규범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부하는 '정말 이타적인' 사람들도 엄연히 존재한다.





3. 유유상종 가설

혈연관계가 희박한 수천 수만의 집단 속에서도, 한 번 보고 말 사람들 사이에서도 이타적 행위는 나타난다. 혈연보다, '반복' 보다 이타적 행위의 원인을 잘 설명할 수 있는 원인은 무엇이 있을까? 유명한 '죄수의 딜레마'를 살펴보면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데, 두 사람 다 협조적 전략(자백하지 않는다)을 선택한 경우에는 가장 높은 보수(둘 다 1년 복역)를 얻게 되지만, 두 사람 다 배신 전략(자백한다)을 택했을 경우에는 가장 낮은 보수(둘 다 10년 복역)를 얻게 된다는 사실이다. 상대가 배신 전략을 선택하지 않아야 무임승차가 가능한 것이 배신 전략이 가진 함정이다. 



제레드 다이아몬드(<총, 균, 쇠>의 저자.)는 사람들이 배우자를 선택할 때 자신과 유사한 종교적, 정치적 견해를 가진 사람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그는 다른 연구를 통해서 사람들은 공통의 의견을 통해 뭉치는 경향이 있음을 조사 결과 밝혀냈다. 한 사람이 이기적이냐 이타적이냐의 문제는 유전적인 문제라기 보다는 문화적, 환경적 문제이므로, 이 또한 사람들이 뭉치는 요소가 될 수 있다. 즉 이기적인 사람은 이기적인 사람과, 이타적인 사람은 이타적인 사람과 더 밀접하게 상호작용을 할 가능성이 크다. 이것이 유유상종 가설이다.



유유상종은 분명 이타적인 사람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준다. 이타적인 사람들은 혼자서는 살 수 없다. 그러나 이 행동 패턴에는 비용이 든다. 똑같이 생각하고 똑같이 행동하는 사회에서 새로운 것이 나타날 리가 없다. 집적의 이득이 있다면 ‘분업의 이득’ 또한 존재하는데, 특히 집단이 커질수록 집적의 한계효용은 감소하고 분업의 한계효용은 증가한다. 게임 “스타크래프트”를 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한 종류의 유닛 부대보다는 여러 유닛을 조합한 부대가 더 강하다. 그러나 어쨌든 미시적인 부분에서 유유상종은 작용하고 있으며, 이 행동패턴은 이타적 인간의 ‘방주’가 되는 것으로 보인다.

4. 값비싼 신호 보내기 가설

<동물의 왕국>의 단골 손님이 둘 있다면, 사자와 가젤이다. 사자가 가젤 무리 속으로 파고들어, 미처 도망치지 못한 가젤을 물고 유유히 사라지는 광경도 자주 봤을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익숙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이상한 광경이 있다. 사자가 가젤 무리를 향해 달려들 때, 대부분의 가젤들은 도망치기 시작하지만 한 두마리의 영양은 도망치지 않고 사자의 앞에서 껑충껑충 뛰는 것이다. 아니, 도망치기도 바쁜 순간에 앞에서 뜀뛰기나 하고 있다니?



‘사자의 가젤 사냥’을 하나의 게임으로 보자. 사자의 입장에서 보면 사냥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만약 자기가 사냥하기로 정한 타겟이 자신만큼, 심지어 자신보다 빠르다면 그날 사냥은 실패하게 되고, 아까운 체력만 낭비하는 셈이 된다. 반대로 ‘빠른 가젤’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은 충분히 사자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사자가 그걸 알아줄 길이 없기 때문에 다른 가젤들과 함께 힘들게 뛰어다녀야 한다.



그렇다면, 빠른 가젤이 사자에게 ‘난 정말 달리기가 빨라서, 당신은 아무리 해도 날 잡을 수 없을 거예요’ 라고 말할 수 있다면, 또한 그것을 증명할 수 있다면 사자도 그 가젤도 이득을 얻을 수 있다. 느린 가젤은 감히 할 수 없지만 빠른 가젤은 할 수 있는 행동, 그게 뜀뛰기다. 



인간의 사회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발견된다. 주먹 좀 쓴다는 사람들끼리의 싸움에서, 서로 병을 머리로 깬다거나 벽돌을 부수는 등의 ‘힘자랑’은 자신은 강하니 피곤하게 힘 뺄 거 없이 알아서 기어라는 뜻이며, 부자들이 비싼 외제차나 사치품을 사들이는 것 또한 자신의 부를 자랑하기 위해서이다. 이타적 행위 또한 이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선행 또한 잘난 사람이나 할 수 있는 것이다. 위에서 얘기한 원시 수렵부족의 식량공유 관습은 반복-호혜성 가설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데(연구 결과, 항상 잡아오는 사람만 잡아오고 얻어먹는 사람은 항상 얻어먹기만 한다고 한다) 이 ‘값비싼 신호 보내기’ 가설로는 설명이 가능하다. 봉사를 통해 자기 능력과 성품을 과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경제적으로는 손해만 보는 이런 행위를 하는 이유는? 생각해보자. 사회적으로 그 능력을 인정받는 사람에게 무엇이 주어지는가? 배우자다. 손해와 위험을 감수할 수 있는 능력과 자질을 인정받은 자는 더 우수한 배우자를 얻을 확률이 크다.





5. 의사소통 가설

인간이 가진 특유의 능력은 ‘언어’를 구사한다는 점, 그리고 언어를 통해 풍부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의사소통을 통해 이타적 행위를 존속할 수 있지 않았을까? 의사소통을 통해 배신을 경계하고 이타적 행위를 합의할 수 있지 않았을까?



경제학 이론은 차디찬 결과만을 남겨준다. 어쨌든 공공재는 무임승차하는 것이 이득이다. 개인의 입장에서 군대는 안 가는 게 가는 것보다 2년 이득이고, 어차피 앞집 사람이 청소할 동네 골목은 청소를 안 하는 게 이득 아닌가.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의사소통을 ‘값싼 수다떨기’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실험은 이론적 예측과는 동떨어진 결과를 보여주더라는 것이다. 공공재 게임(*)에서 의사소통을 전제로 했더니, 그러지 않은 경우와 비교했을 때 기부금액 수준이 40~45%가량 추가로 상승했다.



(*공공재 게임: 열 명의 사람이 각자 1000원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이 돈을 원하는 액수만큼 기부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다. 기부된 총액은 두 배로 곱해져, 모두에게 동일하게 나누어진다. 열 명 모두 1000원을 기부할 경우 열 명 모두 1000원의 추가 이득을 얻는다. 그러나 아홉 명이 1000원을 내고 한 명이 내지 않을 경우, 돈을 낸 사람은 900원의 추가 이득을 얻지만 돈을 내지 않은 사람은 1800원의 이득을 얻게 된다. 이런 식으로 계산해 보면, 돈을 내는 사람은 어느 순간부터는 기부한 돈 이하의 금액을 받게 되지만 돈을 내지 않은 사람은 무조건 이득을 보게 된다. 이는 공공재의 속성과 흡사하기 때문에 ‘공공재 게임’이라고 부른다.)



공공재 게임에서 의사소통이 갖는 효과는 크다. 재미있는 것은, 의사소통이 가능한 상태에서 무임승차자에 대한 적발과 처벌이 추가되지 않아도 그 효과는 유지되더라는 것이다.(물론 의사소통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타적 행위에 대해 토론하는 과정 자체가 사람들의 이타적 행위를 촉진시킬 수 있다.



의사소통이 어떤 차원에서 영향을 미치는 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확립된 이론은 없으나, 몇 가지 가설은 존재한다. 의사소통을 통해 사회적으로 가장 바람직한 행동이 뭔지 이해할 수 있으며, 의사소통이 이타적 행동을 해야 된다는 의무감을 심어줄 수 있다는 점, 서로의 진심을 확인함으로써 신뢰가 증대된다는 점, 집단의식이 생겨난다는 점, 의사소통만으로도 배신 전략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죄책감을 심어줄 수 있다는 점 정도가 있는데, 최근 집중적으로 연구되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해야 할 것은, 의사소통은 꼭, 얼굴을 맞댄 상태에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공재 게임에서 컴퓨터 메신저를 통해 같은 형태로 의사소통을 한 경우, 얼굴을 맞대고 한 것보다 기부율이 현격하게 떨어졌다고 한다. ‘술 한잔’의 사회적 역할은 여기서도 발견된다.





6. 집단선택 가설

위에서 이야기한 가설들은 모두, ‘자연선택의 힘’을 전제로 하고 있다. 즉, 당시 환경에 가장 적합한 특성이 그 환경에서 살아남고, 적합하지 않은 특성은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 더. 위 가설들은 모두 자연선택의 대상을 ‘개체’에 한정하고 있다. 개체의 범위에서라면 우리는 이기적 인간이 이타적 인간보다 살아남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집단’의 범위라면 어떨까? 자연선택의 범위가 개인 뿐만이 아니라 집단에도 적용된다면 말이다. 



홍수 등의 자연재해나 전쟁 등이 일어나는 상황을 가정해 보자. 이런 상황은 심심찮게 일어나고 있으며, 개인의 차원에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다. 이기적인 사람이 많은 집단과 이타적인 사람이 많은 집단이 각각 위 상황에 닥쳤을 때, 어떤 집단이 살아남을지는 뻔하다. 이타적 인간이야말로 사회의 경쟁력이다. 



집단선택 가설을 반박하는 학자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선택과정의 속도’라는 개념을 사용하는데, 선택과정의 속도란 환경에 적합하지 않은 속성을 가진 개체가 얼마나 빨리 사라지게 되는가, 그리고 환경에 적합한 속성을 가진 개체가 얼마나 빨리 증가하게 되는가를 의미하는 개념이다. 그런데 개인과 집단의 선택과정 속도를 비교해 보면, 개인에 대해서 더 빨리 작용한다. 즉, 이타적 개인이 많은 집단이 그 이득을 얻기도 전에 그 집단 안에 있던 이타적 개인이 사라지게 된다는 말이다. 선택과정의 속도 개념을 주장하는 학자들에 의하면, 집단선택 가설은 이론적 모형일 뿐이다.



그러나 실제 사회는 개인의 선택과정 속도를 지연시키는 안전장치들을 가지고 있다. ‘교육’이 그것이다. 사회는 교육을 통해 이기적인 특성을 지양하는 한편, 이타적인 특성을 개발하고 유지한다. ‘집단의 범위에서는 개인과 반대로, 이타적 개인이 많은 집단이 살아남을 확률이 더 크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7. 공간구조 효과

‘유유상종 가설’을 기반으로, 사회가 가진 공간적 구조가 유유상종 가증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며, 이타적 행위의 존속에 어떤 영향을 가져오는지 살펴보자. 



지식의 전수 과정은 각 행위 주체간의 활발한 상호작용이므로,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공간적 제약이 작용한다. 공간적 근접성을 가진 주체의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다. 또한 주체가 이기적 행위와 이타적 행위 중 어떤 것을 선택할지도 주변 ‘이웃들’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자주 상호작용을 하는 이웃들 중 평균 이상이 효과를 보는 선택지를 선택할 확률이 크다는 말이다. 이 원칙을 바탕으로 한 반복적인 딜레마 게임의 결과, 이타적 전략을 가진 사람들은 처음에는 급격히 감소했다. 이는 무임승차의 결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후 유유상종 현상에 의해 이타적 전략이 국지적으로 우월성을 확보해 60%대까지 상승한 후, 그 근처에서 지속적으로 경합을 벌였다. 



공간구조의 국지성이 이타적 인간의 생존과 증식에 유리한 조건을 만든다는 실험의 결과는 시사점을 던져준다. 바로, 세계화가 가져다 줄 암울한 가능성이다. 세계화는 이타적 인간의 생존에 불리한 환경을 제공하고, 이기적 인간이 끊임없이 이기적일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오염물질 배출을 줄이는 기술을 개발할 자본이 아까워 후진국에 공장을 이전하거나, 생산 단가를 낮추기 위해 후진국 아이들을 착취하는 커피, 축구공 산업의 현실을 보라!


2부. 경제인(Homo Economicus)에 다시 한 번 하이킥을!




요즘 ‘게임이론’에 관심이 많다. 이 때의 게임은 우리가 좋아라 하는 비디오 게임, 온라인 게임이 아니다. 게임이론에서 정의하는 게임은, 특정한 전제와 규칙이 적용되는 공간 하에서 이루어지는 각 주체간의 상호작용을 의미한다. 경제학 기본 교과서에서 꼭 등장하는 “죄수의 딜레마”나 “목초지의 비극”이 이 게임의 일종이다. 게임이론은 경제학에서 비롯되었으나, 요즘은 경제학의 벽을 넘어 사회학, 정치학, 심리학 등 다양한 분야에 응용되고 있다.





음의 호혜성. - 얼마면 돼? 얼마면 되겠어? -



‘최후통첩 게임’이라고 불리는 게임이 있다. 세 사람이 둥글게 앉아 있는 광경을 상상해 보자. 모임의 주최자로 보이는 사람이 사람 A에게 만 원짜리 한 장을 주고 이렇게 말한다.



“당신에게 이 돈을 드리겠습니다. 단, 당신은 이 돈의 일부를 앞에 앉아 계신 B님과 나누어야 합니다. 얼마를 드릴지는 당신 마음입니다. 단, B님께서 당신의 제안을 거부하신다면 이 돈은 다시 제가 돌려받겠습니다.”



편의상 돈을 준 사람을 주최자, A를 제안자, B를 응답자라고 하자. 과연 제안자는 얼마의 금액을 응답자에게 제시할까? 응답자는 제안자가 제시한 금액을 거절할까? 제안자가 얼마를 제시할 때 받아들이고, 거절할까? 



경제학 교과서에서 가르치는 방식대로 이 게임의 결과를 추론해 보자. 경제학이 가정하는 행동의 주체는 ‘경제인’이다. 경제인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이며,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선택을 한다.(그리고 이것을 ‘합리적’이라고 표현한다.) 그렇다면, 응답자는 제안자가 얼마를 제안하든 수락할 것이다. 제안자가 100원을, 심지어 한 푼도 주지 않는다고 해도 응답자는 손해를 보지 않으므로 그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다. 



게임으로 돌아가 보자. ‘최후통첩 게임’은 어떤 결과를 보여주는가? 실제로 1982년 독일 쾰른 대학에서, 42명의 학생들을 상대로 한 이 게임은 많은 경제학자, 사회학자, 심리학자들을 뒤집어지게 만들었다. 제안자들은 평균 37%를 응답자에게 제안한 것이다. 결과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50%를 제안한 사람이 가장 많았고 응답자들은 30%이하의 금액일 때는 제안을 거부했다. 아니, 한 푼도 주지 않아도 될뿐더러, 그런다고 거절할 이유도 없는데 말이다!



학자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왜 그렇게 행동한 걸까? 처음에는 피험자를 잘못 뽑아서, 주최자가 준 금액이 작아서 그랬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동일한 실험을 다른 사람들을 통해 반복해 보기도 하고, 금액을 무지막지하게 늘려도 보았지만 결과에 큰 차이는 없었다. 대부분의 제안자들이 40~50%를 제시했으며, 대부분의 응답자들은 20%주변 이하의 금액을 제안한 경우 가차없이 거부했다.



드라마 <가을동화>에서, “얼마면 되냐”고 외쳤던 원빈은 결국 송혜교를 얻지 못하고 말았다. 송혜교는 돈보다 사랑을 찾아 송승헌의 근육질 가슴에 안겼다.(돈 없고 빽 없는 전우들이여, 기뻐하라! 단, 우리는 송승헌처럼 운동도 열심히 하고 스타일 관리도 해야 된다…) ‘최후통첩 게임’ 또한 사람들이 경제적 이득이나 합리성을 절대적으로 신봉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50%의 금액을 제안한 제안자와 20%이하의 제안을 거부한 응답자들의 반응은 비슷했다. “공평하지 않다”는 게 그들이 그렇게 행동한 이유였다. 그들은 자신에게 이득이 온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불공평할 경우, 그 제안을 과감히 거부함으로써 ‘징계’하고자 했다. 이런 사람들의 모습을 경제인(Homo Economicus)과 대비시켜서 “호혜적 인간(Homo Reciprocan)”이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호혜적 인간의 모습은 문명 사회에서는 비슷하게 나타났다. 유럽, 중동, 아시아, 미국 등지에서의 실험 결과는 미세한 차이만을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현대 문명국가가 공통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시장, 화폐 등의 자본주의 제도를 도입하지 않은 상태에서 ‘최후통첩 게임’은 어떤 결과를 보여줄까? 몇몇 학자들은 아직까지 남아있는 원시 수렵채취부족들을 상대로 같은 실험을 진행했다.



여태까지의 연구 결과와 마찬가지로 제안자들은 0보다 높은 금액을 제안했으며, 응답자들은 제안된 금액이 낮다고 판단했을 때 그 제안을 거부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각 부족들이 가진 문화적 특성에 따라 제안 금액과 거부 금액이 천차만별이었다는 것이다. 즉, 호혜적 인간의 모습은 유전적 요인 등의 특성보다 사회적 요인에 의해 좌우된다는 결론을 낼 수 있다.



  양의 호혜성. - 선물교환. 신뢰의 경제 - 


호혜성을 더 깊이 연구하기 위해 ‘신뢰 게임’이라는 게임이 고안되었다. ‘최후통첩 게임’은 규칙을 지키지 않는 주체를 징계하는 ‘음의 호혜성’을 보여주었고, ‘신뢰 게임’은 규칙을 성실히 이행하는 주체에게 상을 주는 ‘양의 호혜성’을 발견하기 위한 게임이다.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고 신뢰 게임이 실제로 나타나는 현장을 예로 들겠다. 바로 ‘노동 시장’이다. 고용주와 노동자, 임금과 노동력이라는 단위를 사용해 노동 시장을 설명해 보자. 노동자는 고용의 대가로 노동력을, 고용주는 그 대가로 임금을 지불한다. 취직을 하기 위해서, 노동자는 다른 경쟁자들을 물리치기 위해 임금은 최소화하고 노동력은 최대화하겠다고 다짐해야 한다. 고용주 역시 임금은 적게 들면서 최대한의 노동력을 얻을 수 있는 노동자를 선호한다. 일단 계약은 이렇게 성립된다. 



그리고 노동 현장으로 가보자. 과연 이 계약대로 이행될 수 있을까? 이미 고용이 된 상태이므로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최소 임금을 받으면서 최대의 노동력을 소모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오히려 노동자는 최소 임금을 받기 때문에 최소한의 노동력을 소모하는 것이 가장 경제적인 선택이다.



그래서일까? ‘신뢰 게임’의 결과, 고용주들은 평균을 압도적으로 상회하는 임금을 제시한 노동자들을 고용했다. 그리고 그렇게 높은 임금을 조건으로 계약에 성공한 노동자들은 그만큼 높은 수준의 노동력을 제공했다. 고용주는 자신이 손해를 볼 수 있는 상황에서도 노동자들을 신뢰했고, 노동자들은 그 신뢰에 높은 노동력으로 보답했다. 



이는 노동 계약의 불완전성에 근거한다. 결국 고용주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은 높은 임금으로 노동자에게 신뢰를 표하는 것이다. 노동자를 감시하기 위해서는 CCTV나 카드 시스템 등의 장치가 필요한데, 이를 구입하는 비용과 관리하는 비용이 추가로 들게 되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노동자의 신뢰를 잃어버릴 경우, 투자한 임금만큼의 노동력을 얻지 못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노동 계약은 임금이나 업무시간 정도의 포괄적이고 일반적인 부분에 제한되기 때문에, 업무의 효율성은 고용주와 노동자간의 신뢰 관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불완전성을 제거할 방안이 마련되는 경우, 실험은 잔혹한 결과를 보여주었다. 최소 임금에 대한 최대한의 노동력 지출, ‘착취’가 진행된 것이다. 



책을 덮고 현실을 살펴보자. 이 땅에는 왜 이리 비정규직 노동자가 많은가? 왜 이들은 주7일 근무하고도 박봉에 쪼들리고, 눈 감으면 해고될까 봐 두려워해야 하는가? ‘신뢰 게임’은 감시장치의 무용성을 보여주었지만 이 땅의 고용주들은 회사에 CCTV를 달고, 출입증에 칩을 달아 직원들의 숨통을 조인다. 노동자들을 신뢰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노동자를 쥐어짜낸다면 고용주가 원하는 것을 당장은 얻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장기적인 이익은 불가능하다고 단언할 수 있다.



(물론 현재 정황상, 취업전선이 워낙 불안정하고 일자리 자체를 찾기 힘들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당장 고용주들의 착취를 감수할 수 밖에 없다. 지금이야말로 노동 계약의 불완전성이 제거된 상황이다. 그러나, 상황은 언제고 바뀌기 마련이며, 그때의 반동은 훨씬 격렬하게 전개된다. 보이지 않는 손을 극도로 신봉하던 산업화 시대의 영국에서 마르크스가 등장했음을 기억하라. 공산주의의 불길은 세계 전역을 붉게 태워버렸다.)



대부분의 계약은 불완전하다. 가장 완벽한 법 또한 빈틈이 존재한다. 사람이 사람을 심판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마찬가지로 계약의 빈 틈을 채울 수 있는 것은 CCTV와 원격 감시가 아니라, 결국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이다. 신뢰가 없다면 효율도 없고 경제 발전도 없으며, 행복은 꿈도 꾸지 못할 잊혀진 단어가 된다. 



믿기 힘들겠지만, 시장이 탄생하기 전 고대 그리스 사회는 ‘선물 경제 체제’로 움직이고 있었다. 상대의 선물에 선물로 답하는 과정에서 경제적 풍요와 함께 사회적 연대도 함께 이루어졌다. 지금의 시장경제 체제를 보자. 시장이 전제하는 인간은 믿지 못할 이기적 존재다. 역사는 경제학이 신봉하는 ‘합리적 인간’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비인간적인 존재임을 보여준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면, 다시 한 번, 호모 이코노미쿠스에 하이킥을 날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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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병장 구본성  
잘 읽었습니다. 나름 관심있는 분야인데, 읽으면서 이론들이 정리가 되네요.
2008-02-27 10:16:35  

02|병장 이기중  
잘 읽었습니다. 훌륭한 정리네요(웃음)

다만 '신뢰의 경제'는 약간의 비약이 보입니다. 포디즘 시대에 자본가가 높은 임금을 제시했던 것은 역선택의 방지, 즉 양질의 노동력 유인과 도덕적해이 방지, 즉 성과급을 통한 동기부여를 목표로 한 것이었습니다. 사실은 이거야 말로 경제적 인간론에 기반한 것이지요. '신뢰'라고 하기엔 약간 무리라고 봅니다.

노동계약의 불완전성 제거, 혹은 노동계약의 경직성(해고의 제한) 제거는 경제학의 관점에서는 역선택과 도덕적해이의 해결, 즉 공정한 계약을 위한 조치로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cctv와 카드시스템같은 감시장치가 없었던 산업화 초기시절에 착취가 덜했던 것은 아니었고, 포디즘의 시대는 이미 지났다는 반론도 가능하군요.


반론에 대한 진화론적 혹은 경제학적 재반론을 생각해보았으나, 잘 정리가 되지 않네요. 역시 마음편한 답은 사회학이나 정치학에...(크크)
2008-02-28 11:17:47  

  
병장 김현진
뭐 저도 경제학에는 잼병입니다(하하)

자본가가 높은 임금을 제시한 이유에 대해서는, 실은 저도 기중 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이들이 뭘 믿었냐는 건데, 노동자 자체를 믿었다기 보다는 돈을 많이 주면 일을 열심히 할 거라 믿었겠지요. 신뢰, 라고 썼습니다만 우리가 생각하는 다른 외부의 요인을 끌어들이지 않는 '순수한 신뢰'와는 거리가 먼 게 사실입니다. (배틀 로얄을 생각하면 이해가 편합니다. 물론 주인공들은 어찌어찌 길을 찾았지만, 우연에 가까웠고, 그 방법도 미시적인 차원에서나 가능한 거지요.)

하지만 순수한 신뢰를 기대할 수는 없지요. 이익의 문제로 연결되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순수한 신뢰관계는 잘 수립되지 않는데, 밥그릇이 걸려 있는 문제에서 그런 걸 기대하는 건 오히려 이상주의에 가깝다고 봅니다. 

그런데, 포디즘과 임금 문제는 어떤 관계가 있나요? 대충 감은 오는데...
2008-02-28 13:08:05  

02|병장 이기중  
포드인지 테일러인지 명확히 구분은 안되는데(맨날 비슷하게 쓰여서 헷갈려요) 대충 둘다 비슷한 의미로 쓰이는 듯.

컨베이어벨트를 도입하고 작업을 최대한 쪼개서 단순화시키고, 표준화된 작업조건을 만들어서 1일 표준 생산량을 정한 뒤 그것을 초과하면 성과급을 주고 미달하면 임금에 손실을 주는 방식으로, 엄청난 생산성의 향상과 동시에 노동자들에게는 엄청난 임금의 증가를 안겨주었다는, 대략 그런 얘기로 알고 있습니다. 나중엔 계속 같은 일만 하다보니 노동의 소외, 지루함 등등의 요인으로 오히려 생산성이 저하되었지만, 어쨌든 초기엔 그랬다네요.

역선택은 낮은 임금을 제시하면 낮은 임금을 받아도 되는 노동자들만 응할 것이기 때문에 양질의 노동력을 유인할 수 없다는 문제이지요. 포드는 성과급을 도입하면서 동시에 기본적으로 높은 임금을 제시했기때문에 양질의 노동력을 유인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정리하자면, 돈을 많이 주면 일을 많이 할거라 믿었다기 보다는 돈을 많이 주면 일단 일을 잘하는 노동자들이 모일거라 생각한거고, 그 다음엔 일을 많이 한 사람에게 돈을 많이 준거지요.
2008-02-28 14:50:17  

02|병장 장윤호  
재밌게 잘 봤습니다.

역사적으로 봐도 인간의 이기심과 경제적 판단이 제어장치 없이 '날 것'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을 공동체나 사회는 용납하지 않았지요. 공동체나 사회는 다양한 방법으로 경제적 인간의 발생을 막아왔다고 합니다. <거대한 변환>의 칼 폴라니라던가,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 등이 생각나네요. 그렇게 보면 200여년 전부터 나타나고, 장려된, 경제적 인간과 전 지구적 자본주의 경제는 인류의 역사에선 상당히 특수한 모습이라는 것이 설득력이 있는 것 같아요.
2008-02-28 13:48:57  

02|상병 정영목  
당직 때, 밤새서 일독을 했는데, 일단 게임 이론에 대한 입문서 역할을 충분히 한 것 같고, 이타적 행위를 설명할 때, 혈연선택과 호혜적 이타주의의 부족함을 보강하기 위해 유유상종가설, 집단선택, 공간분리 등의 가설을 제시할 땐, 꽤 준비 많이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개인적으론 집단선택에 대해선 찬성하진 않고, 유유상종가설은 크게 동감하는 바입니다. 이타적 행위자는 이타적 행위자끼리 모여야 이득이죠.
2008-02-29 22:49:40  

02| 신지훈  
좋은글 잘봤습니다~ 
한번도 의심해본적 없는데... 
왜 이타적인간이 존재하는지, 이제서야 의문이 꿈틀거리기 시작하는군요..(웃음)
2008-03-01 19:38:45  

병장 김현진  
제목 수정합니다. 이런 실수를 하다니(울먹)
2008-03-14 07:32:58  

04|상병 이태형  
그저 감탄만 할 뿐입니다.
흑흑.

2008-03-18 14:05: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