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1월베스트선정-내글내생각] 지망생의 넋두리(병장 이기중)  
병장 김상열   2008-04-16 09:37:45, 조회: 437, 추천:0 

달빛이 밝다. 잠이 오지 않는다. 벌써 12시가 넘었다. 12월 18일, 시간은 잘도 가는구나.

지승호의 인터뷰집을 읽었다. ‘하나의 대한민국, 두 개의 현실’ 그는 믿었던 사람에게 어지간히도 배신감을 느끼고 있는 모양이다. 서문에서 느껴지는 그의 분노는, 그 집단에서는 누구에게도 느껴본 적 없는 것이었다. 그는 그만큼 솔직했다. 전 같았으면 ‘그럴줄 모르셨어요?’하는 비아냥을 날려주었을텐데, 지금은 내 코가 석자인 처지니 책을 읽는 내내 무겁고 답답한 마음뿐이었다.

어떤 패배를 지켜보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별의 통보를 받았다. 내 이야기를 들은 친구는 그 패배의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많은 것을 잃은 이야기를 해줬다. 누군가는 집에서 쫓겨났다고 하고, 누군가는 부인이 우울증에 걸렸다고 하고, 누군가는 이혼을 했다. 아무것도 약속한 것이 없었으니 그들만큼 큰일은 아니었겠지만, 나의 이별도 그래서였을까. 안 그래도 불확실한 미래는 더욱 불확실해졌고, 꿈도 자신감도 확신도 사라진 듯하다. 우리에게 패배를 안겨준, 내부에선 극복의 대상이었으나 외부에 대해선 여전히 동지인 그 또한, 지금은 5년 전의 당당함을 잃었다.

5년 전과 3년 전엔 이렇지 않았다. 무언가 되어가는 느낌이었고, 친구들이 하나둘씩 사회로 진출하는 것을 보면서도 앞으로 먹고 살 걱정 따윈 없었다. 이제 미래에 대한 고민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지금, 모든 것이 한꺼번에 무너져 가고 있는 듯하다.


문득, 내가 왜 도대체 이렇게 힘든 길을 가려고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출한 권력욕도 없고, 그렇게 똑똑한 편도 아니고,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는 쪽도 아니고 유달리 인간에 대한 애정이 깊은 것도 아니다. 그저 불합리한 것을 못 참는 것이고, 합리적인 것을 바랄 뿐이다. 굉장히 단순한 바람, 그것을 지키기 위한 길이 왜 이리도 힘든가. 이럴 때면 우리 쪽 사람들이 즐겨 언급하곤 하는 이 대륙의 서쪽에 있는 나라들이 떠오르는 것이다. 남학생들이 여학생 기숙사에 들어가서 연애 좀 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사소한 불만으로부터 모든 권위에 저항하는 싸움이 시작되었던, 그런 사회에서 태어나 자랐다면 이 길이 이렇게나 힘들었을까. 아니, 굳이 이 길을 가야겠다는 생각이나 했을까. 문득 서럽다.

웃기는 생각이다. 역사에 가정이 불필요한 것은 그것이 실현될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무의미하기도 하지만 사건을 구성하는 수많은 제반요소들 가운데 한 가지 요소만이 다른 요소들에 아무런 변화를 미치지 않고 대체될 수 있다는 가설 자체가 비논리적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회에서 태어나 다른 사람, 사건, 사물을 보고 느끼고 겪은, 다른 인생을 가진 내가 어떻게 ‘나’일 수 있겠는가.


갑작스런 이별소식에 놀라 달려오신 어머니는 일부러 불확실한 미래를 택한 아들이 결혼이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푸념에, 모든 것을 처음부터 생각해보라 하셨다. 다른 길을 갈 수도 있는 것 아니냐. 하지만 처음부터 되짚어 봐도, 다른 길을 갈 수는 없었다. 나는 이미 이런 인간이니까.

동생은 얼마 전에 실패로 끝난 유학을 다시 하고 싶다고 했단다. 아니, 이번엔 아예 가서 살 생각인가보다. 사업이 잘 안 풀리는 듯한 아버지도 요즘엔 마음이 움직이고 있다고 한다. 외가 쪽 식구들은 다들 거기 살고 있다. 그러니...너도 갈래?

대륙과 섬을 구분하는 기준이 된 따뜻한 남쪽나라. 환경을 오염시키는 굴뚝산업은 죄다 제3세계에 맡겨버렸다는, 그래서 깨끗한 자연환경을 자랑하는 나라. 예산낭비라는 주민들의 반대가 두려워서 관청에서 낡은 신호등 하나도 마음대로 바꾸지 못한다는 이모부의 지나가는 이야기가 마냥 부러웠다. 가진게 아무것도 없어도 취업을 하려면 몸은 힘들어도 어지간한 수입은 보장되는 직업을 구할 수 있고, 백수로 살아도 먹고살 걱정은 없을 만큼의 실업수당은 나온단다. 게다가 이번엔 간만에 좌파정당이 정권을 잡았다지.

그곳에서 걱정 없이 살 수 있을까. 아니, 그러지 못할 것 같다. 똘레랑스를 모토로 하는 파리의 택시운전사도 굳이 그곳을 떠나 이 곳에 돌아와서 힘든 싸움을 자처하는데, 까칠한 성품으로 불합리와의 싸움을 즐겼던 내가 여기를 떠나서 이 곳의 문제들을 모른척하며 마음 편히 살 수 있을리 없다.


그러니 나는 또다시 싸움을 준비해야겠구나. 원래부터도 장밋빛은 아니었던 나의 미래는 이제 칙칙한 회색으로 우울해만 보이지만, 그러나 그런 싸움을 즐기는 괴팍한 성격 덕에 여기까지 살아온게 아닌가. 어차피 이 길을 떠나서 살 수는 없다.

달이 진다. 한 이야기의 끝과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이 다가온다. 나의 이야기는 아직 멀었다. 우울한 시대다. 어서 이 시대가 가고 소녀시대가 왔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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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장 장재혁
이거..뭔가 비관적이면서도 회한이 담긴....

그런데..마지막에 소녀시대라니..허허..
2007-12-18 11:15:19  

02|병장 김우상  
하아 하아 그래서 고민 고민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도 다르다는 것을 명백히 아는 내가
가야 하는 것인가.
2007-12-18 11:43:19  

02|상병 주해성  
마음이 울적하고 답답할떈 멍 때리며 지내는 것도 좋더군요.
2007-12-18 12:50:22  
  
병장 박준연
<가지로> 외칩니다!

예전에 후배와 밥을 먹다가 이런 말을 나눈 적이 있어요.
"우리가 진보적일까?"
"아니, 우리는 단지 '상식'만을 말하는 것 뿐이야."

우리네 사람들은 눈물과 그 못다 한 이야기가 얼마나 많던가요. 아무쪼록 힘내시길 바랍니다.
2007-12-18 13:20:09  
  
병장 안근홍
추적추적.. 해 지네요. 마음이. 
2007-12-18 14:08:07  

02|병장 장윤호  
진정 아름다운 글인 것 같습니다. 저도 <가지로>~
2007-12-18 14:16:43  
  
병장 김현진
가지로!
2007-12-19 08:27:00  

02|병장 정찬용  
아아 슬픈 넋두리. 잘 읽었습니다.
2007-12-19 20:40:47  

02|상병 김찬수  
잘 읽었습니다.
2007-12-19 21:06:56  

04|상병 이태형  
그저 합리적이기만 바랄 뿐인데 그 길이 왜 이리 힘든가..
좋네요, 아주 좋아요.
2008-02-11 12:11:29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6
13:23:44 

 

상병 이동석 
  우리는 할일이 참 많지요. (웃음) 2008-06-10
09:29:52
 

 

병장 이종석 
  피식 2008-07-26
23: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