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베스트-독서후기] Let me in  
상병 김요셉   2008-12-24 10:47:54, 조회: 248, 추천:0 

*
독서후기라더니, 영화 이야기는 대체 무어냐. 이런 불한당같은놈. 쯧쯧. 혀를 차신다면야, 플라톤의 '향연'을 읽고 쓴 글이라 우기면 그만이지요. 흐흐
*
글은 수시로 A/S됩니다. 이런 저런 생각이 꼬여서, 도저히 제대로 된 글이 나오지 않아요! 망할 플라톤. 망할 소크라테스.




1.
소년이 소녀에게 묻습니다. '너는 누구니?'
소녀는 간결하게 대답합니다. '나는 너야.'
수줍은 소년은 더이상 묻지 않습니다만, 아니 도대체 어떻게. 소년은 왕따에나 시달리는 약한 인간이나, 소녀는 엄동설한 추위에도 끄떡하지 않을 정도로 강한데. 소년은 낮에 움직이지만, 소녀는 날이 저물어서야 밖으로 나오는데. 소년은 언젠가 늙고 언젠가 죽겠지만, 소녀는 영원히 열 두 살 인데. 소녀는 뱀파이어인데. 그런데 어떻게 소년과 소녀가 등질관계에 해당한다는 것인지, 소년도 소녀도 그 답을 알려준 적은 없지만 어쩌면 진부한 표현 한 마디로도 충분하겠지요. '그것은 사랑이니까 - '
모든게 사랑때문이라는 오래된 변명은 이미 헤드윅이 신화적 고증에 따라 입증한 바 있습니다. 뱀파이어만큼이나 괴상한 정체성을 가진 헤드윅은 그녀의 노래 '사랑의 기원' 을 통해, 어째서 내가 너를 사랑하며 어째서 내가 너를 이토록 욕망하는지에 대해 노래했었지요. 그건 너와 내가 본디 하나였기 때문이라고요. 
그 노래의 원전은 플라톤의 '향연'에 나와 있습니다. 아가톤의 비극경연대회 우승 축하연이 있던 바로 다음 날, 아가톤의 집에서 열렸던 향연에서 '사랑'이라는 주제로 논쟁을 벌이던 중 희극시인 아리스토파네스가 들려주었던 이야기이지요. 
아주 먼 옛날 우리 인간의 본성은 오늘날과는 다른 것 이였답니다. 오늘날과는 다르게 여성과 남성의 양 성이 아니라 세 종류로 나뉘어있었으며 그들은 각각 태양의 자식, 지구의 자식, 달의 자식이라 불리웠답니다. 그들의 생김새는 마치 오늘날 인간 - 두 명이 합쳐진 것과 같아서 두 개의 얼굴과, 네 개의 손과 다리, 네 개의 귀와 두 개의 수치스러운 부분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태양의 자식의 경우 오늘날 남성 - 이라 불리우는 종의 인간만 두 명 붙어있는 모양이였고, 지구의 자식은 여성성만, 달의 자식은 양성의 특징을 모두 가지고 있었습니다.
두 명의 거인이 하늘을 침범하기 전 까지만 해도 그랬지요. 그러나 거인들과 마찬가지로 대단한 힘과 능력 그리고 오만함까지 지녀 신들의 자리까지 넘보려고 했던 인간들의 방종이 영 못마땅하던 제우스는, 거인족을 벼락으로 쳐 멸종시켜버린 뒤에 인간들 역시 약하게 만들어버리려 합니다. 고민 끝에 인간들 각각을 둘로 나누어버리기로 하지요.
제우스는 인간들을 둘로 자르고는, 아폴론을 통해 나뉜 사람들의 얼굴과 목의 반쪽을 잘려나간 쪽으로 돌려놓도록 명령했습니다. 인간이 항상 자신의 잘린 단면을 보면서 좀더 분별력을 지닐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지요. 또한 온 신체의 피부를 오늘날 배로 불리는 부분으로 당겨서, 마치 염낭을 묶듯이, 배 중앙에 하나의 주둥이가 만들어지도록 단단히 묶었습니다. 이 주둥이가 바로 우리가 배꼽이라 부르는 부분인데, 배꼽 주위에는 약간의 주름을 남겨두어 인간들이 예전의 자기 상태에 대한 기억을 가질 수 있도록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우리들 각자는 하나가 둘로 나뉘어진 존재 즉 반편의 사람이어서, 우리들 각각은 자기로부터 나뉘어져 나간 또 다른 반편을 끊임없이 찾아 헤매게 되었습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우연히 본래 자기자신의 반쪽을 만나게 되는 경우에는, 어느 누구라도 경이로운 감정에 사로잡혀 그 상대방과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으려 하게 되었구요. 또한 그 하나가 되고자 하는 욕망과 노력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된 것입니다.
헤드윅이 슈퍼스타가 된 옛 연인이 공연을 하는 곳 마다 따라다니며 공연장 주위의 허름한 술집에서 같은 시간에 노래를 부르는 것도, 뱀파이어 소녀가 인간 소년에게 'Let me in', 당신의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 달라 요청하는 것도 다 바로 그 때문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

2.
낭만적인 이야기입니다만, 이 이야기 뒤에는 에로스 속에 담긴 근원적 욕망의 위험성에 대한 경고가 숨어있습니다.
에로스적 욕망은 하나가 되기를 지향합니다. 그런데, 서로 다른 둘이 합쳐 하나가 되는 것이라면 적어도 둘 중에 하나는 죽어야 합니다. 둘 중에 하나는 나머지 하나에 완전히 삼켜져 자신의 본질을 잃어버리겠지요. 그 둘 전부가 헤파이토스의 용광로에 녹아 융합해 그 전과는 전혀 다른 어떤 것이 되어버릴지도 모르구요.
혹자는, 그래도 행복하기만 하면 된 것이 아니냐 항변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쨌건 잃어버렸던 내 반쪽을 찾아 태초의 온전한 인간이 되었으니 그거면 된 게 아니냐구요. 그게 맞는 말 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진정 오래 전에 헤어졌던 내 반쪽이 맞는걸까요. 우리는 헤어진지 너무 오래되었는데 말이죠. 인간 소년과 뱀파이어 소녀가 아무리 사랑한다 한들, 그들이 정말 오래전에 나뉘어 헤어졌던 달의 자식인지는 불분명합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햇볕이 들지 않는 컴컴한 상자 속에 뱀파이어 소녀를 집어넣고 어디론가 떠나는 소년의, 그 이후를 상상해 볼 때면 더욱 그렇습니다.
과연 소년과 소녀는 행복하게 잘 살았으려나요. 글쎄요. 영화 초반부 뱀파이어 소녀와 함께 살았던 늙은 인간 남자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결코 그들이 행복할 것이라 짐작하기는 힘들겠지요. 그 늙은 남자도 언젠가는 어린 소년이였을 겁니다. 뱀파이어 소녀와 알콩달콩 잘 살아가던 때가 있었겠지요. 그러나 남자는 뱀파이어 소녀를 위해 사람을 죽여 피를 채취했어야만 했고 - 비록 그것이 뱀파이어를 사랑한 남자의 자발적 행동이였다 할지라도 - 늙어 더이상 사람을 죽여 피를 채취하기가 힘겨워진 후에는 소녀를 위해 자살을 택합니다.
뱀파이어가 새로 선택한 인간 소년의 운명 또한 그와 크게 다를 것 같지는 않군요. 그게, 행복해 보입니까? 예?

"아니오. 행복해 보이지 않습니다."

라고 속 시원하게 대답해버리면 좋으련만. 그래서 이 영화는 결국, 사랑 영화는 커녕, 왕따로 자라 딱 보기에도 만만해보이는 인간 소년을 후려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제 배를 채우다 늙으면 버려버리고는 새 남자 만나서 떠나는 사악한 뱀파이어의 이야기다, 라고 딱부러지게 말해버리면 참 좋으련만. 도저히 그게 안됩니다. 그러니 제가 지금, 심각한 언어장애를 무릅쓰고 어버버버거리며 이 같잖은 글을 두들기고 있는 것이지요.
왜 안되냐구요. 아 그게, 어떡합니까. 뻔히 보이는데요. 사랑하는게 보이는데요. 마치 정말로 그 둘이 평생의 반쪽이듯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의 마음 속에 들어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게 빤히 보이는데요. 게다가 영화 속에서 왕따였던 인간 소년이 뱀파이어 소녀를 만난 뒤 겪는 변화는, 마치 뱀파이어 소녀가애초부터 소년의 마음속에 결여되어있던 '폭력성'의 상징이며 소년이 뱀파이어의 폭력성을 획득함으로써 조금 더 완전한 무엇이 되는 것 처럼 그려집니다.
그러니 그들이 나중에 어떻게 될 것인지가 뻔히 상상됨에도 불구하고 지금 당장은 그들의 사랑에서 아름다움을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들의 사랑을 지지할 수 밖에 없습니다. 심지어는, 인간 소년이 늙어 죽어가면서 일어나게 될 일 들 까지도 '낭만적 아픔'으로 다가옵니다.
향연에서 아가톤이 말한 바에 따르면, 사랑의 신 에로스는 그 어떤 신 보다 가장 젊은 신이며 경묘(經妙)하기도 합니다. 활짝 피어나 향기로 가득 찬 꽃처럼 아름다우며 그 어떤 쾌락보다도 강해 모든 욕망을 지배하는 절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가톤 뿐만 아니라 소크라테스를 제외한 모든 향연의 참석자들이 그렇게 에로스를 찬미하였습니다. 그런데 뱀파이어 소녀와 소년 사이의 사랑은 그런 행복이나 아름다움따위와는 전혀 거리가 먼 듯 싶은데, 그저 아픔 뿐인데도, 이것을 사랑이 아니라면 다른 무엇으로는 설명할 수 없으니 이게 어찌 된 일일까요.

3.
소크라테스는 비판합니다. 아가톤을 비롯한 대부분의 논객들이 '그 대상의 본모습은 상관하지 않고 가능한 한 무조건 그 대상에 가장 거창하고 훌륭한 찬사를 덧붙이는' 방식으로 에로스를 찬미하고 있으니, '칭찬해야 할 각각의 대상에 대하여 참된 것만을 이야기해야' 한다 생각했던 소크라테스 자신의 논조는 완전히 비웃음거리가 되어 버릴 것만 같다며 비꼬는 투로 좌중의 논객들을 비판합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그의 스승 디오티마에게서 들었던 에로스에 관한 '진리'를 들려주지요.
그에 따르면 에로스는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부드러움이나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멉니다. 사랑은 필시 어떤 대상에 대한 것일 것인데, 무엇을 욕망한다면 그것은 곧 대상이 자신에게 결여되어 있다는 뜻이지요. 또한 에로스는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이지 추함에 대한 사랑은 아닐 것이며, 즉 에로스 그 자신에게는 아름다움이 결여되어 있다 보는것이 타당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에로스가 추하고 나쁜 신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현명하지 못하다 해서 무지한 것은 아니지요. 훌륭한지 않는 것이라 해서 무조건 나쁜 것이라 단정할 수도 없구요. 에로스도 그와 같아서, 아름다운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해서 추하고 나쁘다 할 수도 없는, 그 대립된 것들 사이에 중간자와 같다 볼 수 있습니다. 아프로디테의 생일 축하연을 계기로 태어났기에 태생상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는 자가 될 수 밖에 없었으나 어머니 - 페니아 - 의 본성을 이어받아 언제나 결핍되어있고, 불사적인 존재도 가사적인 존재도 아니며, 앎과 무지의 중간 상태에 있는 존재가 바로 에로스 입니다.
이렇게 보자면 뱀파이어 소녀와 인간 소년의 사랑이 얼핏 이해될 것 같기도 합니다. 아름다움 자체는 결여되어있더라도, 아름다움을 소유하고자 추구하는 것 만으로도 그것은 에로스라 불릴 수 있으니까요. 더욱이 소녀의 폭력성 혹은 용기는 소년에게 (필요하지만) 결여되어있는 것이고, 소년이 가진 인간적 생동감 역시나 차가운 뱀파이어에겐 (필요하지만) 결여되어 있는 것이니 그 둘의 서로에 대한 욕망은 더욱 에로스에 가까워 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마무리하기에는 여전히 조금 석연찮습니다. 아무리 그렇다 할지라도, 둘의 욕망이 비극으로 끝날 것임은 분명해 보이니까요. 그 둘이서 아름다움을 죽어라 추구해 봤자 결국 추한 비극만이 남을게 분명하니까요.
다행히도 소크라테스가 논했던 사랑의 본질은,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에 그치지 않습니다. 

4.
위에서 주지한 바 에로스는 결핍의 상태에 있으며, 결핍의 상태에서 끝없이 아름다움을 추구합니다. 또한 당연하게도, 아름다움 - 에로스 - 를 추구하는 사람은 그 아름다움을 단지 소유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 속에 영원이 간직하기를 원하게 됩니다. 때문에 아름다움은 그 자체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것 속에서의 생산과 출산'까지도 함께 욕망합니다. 생산이야말로 가사적 존재의 삶을 영원히 유지시켜 불사적으로 만들어주기 때문이니까요. 즉 에로스의 본질이자, 에로스적 욕망이 향하는 대상은 '불멸성'이라는겁니다.
영화 초반부에서 늙어 자살한 인간 남자와, 영화 마지막에서 단 둘이 어딘가로 떠나던 소년 소녀의 장면은 (불행하게도)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 처럼 연상됩니다. 여기서 니체의 영원회귀를 떠올리는건 지나친 오버일까요. 차라투스트라는 영원회귀를 이렇게 설명했었지요. "모든 것은 가고 모든 것은 되돌아 온다. 존재의 수레바퀴는 영원히 굴러간다. 모든 것은 죽고, 모든 것은 다시 꽃피어난다. 존재의 세월은 영원히 흘러간다. 모든 것은 꺾이고 모든 것은 새로이 이어간다. 존재의 동일한 집이 영원히 세워진다. 모든 것은 헤어지고 모든 것은 다시 인사를 나눈다. 모든 순간에 존재는 시작한다. 모든 '여기'를 중심으로 '저기'라는 공이 회전한다. 중심은 어디에나 있다. 영원의 오솔길은 굽어있다."
영원히 12살에 머물러있던 소녀와, 그 소녀를 중심으로 나타났다 사라져가기를 끝없이 반복하는 '사랑'들. 수 백 년 동안이나 상처받기를 반복했으면서도, 또다시 상처받게 될 것임을 알면서도 다시 한 번 소년의 마음 속에 들어가기 원하는 뱀파이어 소녀의 '의지'와 '용기'. 그 '긍정(!)'.

비록 '생산과 출산'은 없지만 소녀를 중심으로 영원히 반복되는 '영원회귀'라면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불멸성'에 가깝지 않을까 해요. 그렇다면 이제서야, 그 둘의 사랑이 온전히 이해가 됩니다. 이제서야 어째서 그들의 사랑이 '아름답게' 보일 수 밖에 없는지 제대로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뱀파이어 소녀라고 해서 그렇게 사는 것이 좋을 리는 없지요. 어쩌면 수 백 년 전부터 반복되어왔을, 살기 위한 살인과 상실의 고통들이 달가울 리는 없지요. 그러나 소녀는 다시 소년을 만나 사랑을 시작합니다. 끝이 없는 영원의 오솔길에서 쓰러지지 않고 다시 한 번 일어나 반복을 되풀이 할 수 있는 긍정. 
그 안에서, 소녀의 사랑은 비록 비극적이더라도 아름다울 수 밖에 없습니다.



* 책마을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9-01-17 21:07)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6
13:16:40 

 

상병 이우중 
  수시로 A/S 가능이라니, 좋은데요? 허허. 왠지 쌍방향 같기도 하고 말이죠. 
잘 읽었습니다. 아직 영화는 못 봤지만 사랑의 비극이오히려 아름다움을 더해주는 것 같아요. 2008-12-26
13:24:17
  

 

상병 김요셉 
  좀 도와주라는겁니다. 과감하고 날카로운 지적으로... 
이거 원. 가방끈이 딸려서, 쓸만한 글 한 편 쓰기가 정말 쉽지 않아요. 허허 2008-12-26
13:27:27
  

 

상병 이지훈 
  좋은 글 고마워요. 

Let me in! 공감 '영철아 놀자'에서 봤더랬죠. 
이거 요셉님의 글을 보고 나니 더 보고 싶어졌어요. 아직 설탕 빨아먹으려면 멀었는데... 
사랑이라는 건...너무 어렵네요 어떻게 말하려고 해도요..허허 
하루빨리 Let me in을 보고 요셉님의 글을 떠올릴 수 있기를... 2008-12-28
05:05:01
  

 

상병 김용준 
  잘 일고 갑니다...근데...제가 보기에는 그저 비극적으로만 보이는군요. 아름다우면서 비극적이다...모...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죠? 그럼 요셉님은 어떻게 '아름답게' 보이시는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세요. 그냥 바램입니다. 하하하. 2008-12-29
11:29:19
  

 

상병 김요셉 
  용준 / 
여기서 '아름다움'을 읽어내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전제가 필요합니다. 

전제 하나. 소녀는 소년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전제 둘. 그 소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소녀를 거쳐 갔던 수많은 인간 남자들을 모두 '진심으로' 사랑했을 것이며, 
전제 셋.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영화의 장면 중에, 뱀파이어 소녀가 소년에게 '초대'를 부탁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자신은 초대를 받아야만 타인의 집에 들어 갈 수 있다면서요. 이제 막 소년이 소녀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그녀에게 거리를 두려 할 때 즈음이였지요. 
'초대'를 하는 대신 내 집에 들어와도 좋다는 암묵적 제스춰만 보이는 소년을 지나쳐 소년의 집으로 들어간 소녀는, 온 몸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갑니다. 그 장면이 정말 슬프로 처절해보였단 말이죠, 왜냐하면, 

그 소년 뿐만 아니라 소녀를 만났던 인간 남자들이 다 그러했을터인데, 모두들 소녀의 정체를 알아채는 순간부터 소녀를 멀리하고 내치려 하였을 터인데, 
그럴 때 마다 소녀는 그 때 처럼 죽음을 무릅쓰고 그들에게 다가가려 했었겠거니 생각하니. 그가 나를 받아들일지에 대한 확신도 없이, '확신'따위를 기다릴 정도의 여유도 없을 정도로 절막한 상황에서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지기 위해 온 몸을 내던졌겠거니 생각하니, 

또한 그게 '사랑'없이는 안되는거잖아요. 

예, 비극적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사랑이라서 아름답습니다. 비극으로 '끝'나더라 하더라도, 소녀는 영원히 살아가고 또다시 그렇게 누군가를 만나 온 몸을 내던져 사랑을 시작할테니, 결국 비극적 '끝'이란 없고 '영원'만 있을 뿐이니 아름답습니다. 2008-12-30
08:48:45
  

 

상병 김용준 
  요셉/ 
구체적인 설명을 들으니 이해가 되네요. 후후. 솔직히 그냥 글만 읽고 저는 영화도 안 봐서...이제 확실히 알겠습니다. 요셉씨 의견에 동조합니다. 하하. 

그래서 저는 이렇게 표현하고 싶네요. '비극'이란 있어도 '사랑'은 '영원히 아름답다' 

Ps. 이렇게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주시다니 저 김아무개는 그저 감사하옵니다. 후후. 2008-12-30
10:56:11
  

 

병장 이동석 
  독서 후기는 텍스트를 섭취한 기록-이고 
영화도 엄연히 텍스트-이니 독서후기라도 괜찮습니다. 2009-01-02
15:09:40
 

 

상병 장형순 
  소년이 초대를 미루고 소녀에게 먼저 다가오기를 요구하자 집으로 들어가 피를 흘리던 소녀의 행동이 저는 죽음을 무릅쓴 순수한 접근으로는 보이지 않던데요. 
되려 내가 이렇게 피를 흘리는데도 나를 받아들이지 않을테냐는 강요로 읽혔습니다. 
두려움이었던 '사랑'에서 나온 걱정이었든 그 순간을 참다 못해 들어와도 좋다고 허락하는 소년의 이어지는 모습에서도요. 

뭐 근데 일상의 연애도 다 그렇지 않나요. 
상대의 실체를 알아가는 순간 연애의 지속과 정리 사이에서 갈등하게 되고 
그 순간에 나를 받아들이던가 아니면 나를 죽여라 라고 강한수를 던지게 되는것은요. 

암튼.(이라고 쓰면 성의 없어 보이려나.) 
렛미인은 이런저런 면에서 참 좋은 영화에요 후후. 
영화속의 그 오묘한 감정선을 시원스레 정리해주셔서 감사해요. 2009-01-20
13:2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