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베스트-독서후기] 영화처럼 아름다울 수 없는 우리의 삶을 위하여  
상병 정근영   2008-12-10 21:48:46, 조회: 419, 추천:0 

「영화처럼」- 가네시로 가즈키

  가즈키의 신작이 나왔다. 내가 그의 작품을 마지막으로 읽었던 때가 작년 1학기중이었으니 거의 2년만에 그의 책을 읽은 것이다. 그의 신작이 하루라도 빨리 나오기를 진심으로 기대하고 있었지만, 막상 얼마전 책이 나왔다는 소식을 접했음에도 그때는 그렇게 애타게 읽고 싶다는 기분은 별로 들지 않았다. 아마도 그것은 제목과 그 짤막한 소개로부터 미루어 짐작한 애용이 내 기대와는 달랐기 때문이리라. 내심 나는 그의 작품이 「레볼루션 3」와 같이 시니컬하면서도 유쾌한 소설이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비록 그의 글이 호흡이 길고 무겁지 않아서 단편이라도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단편집이었던 「연애소설」이 내 기대에는 못 미쳤기 때문인지 몰라도 나는 그의 진가가 장편소설에서 드러날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신작인 「영화처럼」은 그런 나의 편협한 생각을 보기좋게 무너뜨려 버렸다.

  이 책은 '태양은 가득히', '정무문', '프랭키와 자니', '페일라이더', 그리고 '사랑의 샘'까지 다섯 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목에서부터 짐작할 수 있듯이 다섯 개의 단편 모두 '영화'를 소재로 하고 있고, 마치 진짜 "영화처럼" 이미지적이어서 장면장면들이 눈 앞에 생생하게 펼쳐지는 듯 했다. 첫 단편인 '태양은 가득히'부터 나로서는 듣도보도 못했던 많은 영화들이 나왔고, 요즈음에 흥행하는 대중적인 영화들만 보았을 뿐 영화에 대한 지식이 거의 전무한 나는 새삼 그의 영화에 대한 식견이 얼마나 넓은지 실감하게 됐다. '태양은 가득히'를 읽고, 나는 마치 내가 와서는 안 되는 세상에 떨어져 길을 잃고 헤매는 듯한 당혹스럽고 난처한 기분을 느꼈고, 내가 괜한 책을 읽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슬금슬금 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의 가네시로 가즈키가 나를 이렇게 실망시킬 리가 없다'는 기대를 하며 끈기있게 읽어 나갔다. 그렇지만 네 번째 작품인 '페일 라이더'에 이르기까지 나는 집중력있게 글에 열중하지 못했고, 거기에는 인쇄된 활자를 본다는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그렇게 별 감흥없이 난 결국 다섯 번째 단편인 '사랑의 샘'을 읽어나갔고, 두세 페이지쯤 넘겼을 때 나는 눈이 번쩍 뜨이고 말았다.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가즈키의 글이 내 눈앞에서 생생하게 살아나고 있었다. 앞의 네 단편들이 가치가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은 가즈키가 아닌 다른 누가 썼다고 해도 이해할 만한 글이었고, 나에게는 그냥 그렇고 그런, 나중에는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져버릴 그런 소설들이었다. 그러나 '사랑의 샘'에는 그가 여태까지 다른 책들에서 보여주었던 그만의 개성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부활해 있었고, 나는 피곤한 것도 잊고 당장 달려가서 광부님께 연등을 신청하고 정신없이 글에 빠져들었다.

  가즈키의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작가 본인의 개인적인 경험이 바탕이 되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대부분이 마이너하고 세상과의 소통을 거의 시도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렇게 마냥 아웃사이더인 건 아니고, 자기 나름의 방법으로 세상의 불합리함과 그로 인한 분노와 적개심을 표출한다. 그것이 적극적인 행동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닐지라도, 가즈키는 특유의 시니컬한 유머와 날아갈 듯한 유쾌함으로 어렵지 않게 긍정적인 에너지로 승화시킨다. '태양은 가득히'의 주인공과 용일, '프랑키와 자니'의 주인공과 이시오카도 언제나 그랬듯이 마이너한 캐릭터들이었다. 반면에 '사랑의 샘'에서의 인물들은 가오루를 제외하고는 가즈키가 예전에 보여주었던 밝은 듯해 보이는 어두움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 점은 재일교포인 그의 경험이 반영되어 있는「레볼루션 3」나「GO」와 같은 소설들의 주제의식을 볼 때, 가즈키의 작품에서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렇게 예전에 그의 작품에서는 보지 못했던 인물들을 머릿 속으로 그리면서 묘한 이질감을 느꼈을지언정 뭔가 중요한 것이 하나 빠져있다는 공허함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전보다도 꽉 차 있고 개성이 넘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곧 그런 느낌이 들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행운, 기적, 운명이란 말로 감상을 늘어놓기는 쉬운 일이다. 그러나 한 단어로 함축해서는 안 될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예를 들어 우주를 보면서 "아, 넓다!"고 해봐야 썰렁할 뿐이다. 때로 말이란 아주 중요하고 소중한 것을 진부하게 만들어 버린다. (p. 341)


  다른 작품들에서도 언제나 그랬듯이 주인공은 섣부른 말로 상대를 위로하려 들지 않는다. 위에서도 나왔듯이 가볍게 내뱉은 말은 오히려 진심을 가려버리기 때문이다. 할머니를 위해 데쓰야와 그 일당(?)들이 펼쳐가는 일들은 언뜻 보면「레볼루션 3」의 '더 좀비스'가 만들어내는 해프닝과 닮아있다. 그러나 '더 좀비스'가 만들어가는 일련의 사건들이 일상으로부터의 일탈과 그로인해 얻어지는 낯설지만 신선한 즐거움을 선사한다면, '사랑의 샘'의 인물들이 자신들에게 매우 소중한 존재인 할머니를 위해 준비한, 소박하지만 결코 그 의미가 작다고는 할 수 없는 이벤트는 가즈키의 팬들에게 색다른 감동을 느끼게 해 준다.

  거기다가 곳곳에 숨어있는 그의 센스있는 유머는 그야말로 제대로 물이 올랐다고 밖에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주인공의 입을 빌려 담담한 필체로 묘사되고 있는 개그는 앞 뒤의 상황과 연관지어 볼 때 웃지 않을래야 안 웃을 수가 없는 그런 즐거움을 주었다.


겐은 정체된 상황을 털어내는 본능적인 파워를 갖고있는 녀석이다. (p. 291)

나는 겐에게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무엇인지 물었다.
"24!!"
숙고한 끝에 영화가 아니라 드라마를 선택한 것을 보면 겐은 멍청한 아이로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는 것 같다. 나는 기분이 한결 가뿐해졌다. (p. 313)

인터넷을 검색하는데, 가오루에게서 '나가 죽어'란 메일이 왔다.
풋, 어휘가 부족한 녀석이다.
나는 '빅 덩'이라고 키를 두드려 보냈다.
답은 오지 않았다.
완벽한 승리다. (p. 319)

어제와 달리 하마이시 교수밖에 없었다. 실망한 눈치가 보이지 않게 조심하면서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쓰카사 군이 없어서 실망했나?"
고개를 숙이자마자 하마이시 교수의 유효펀치가 날아들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당황한 나는 또 입술을 깨물고 말았다.
하마이시 교수가 만면에 자애로운 미소를 띠고 말했다.
"자네는 정말 거짓말을 못하는군. 옛날에 우리 집에서 기르던 개하고 꼭 닮았어."
"......"
"시베리안 허스키였는데, 얼굴은 아주 영리하게 생긴 녀석이 자기 똥을 먹곤 했지."
"......"
"하기야, 뭐 그런 어수룩한 면이 오히려 더 귀여웠지만 말이야."
하마이시 교수는 먼 곳을 바라보는 아득한 눈길에 착잡한 목소리로 말했다.
"백혈병에 걸려서 말이야..."
그냥 놔두면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p. 322)


예전의 소설 등에서는 비교적 시니컬한 유머가 많이 나왔고 또 바로 그런 점에서 가즈키를 좋아하게 됐지만, 웃긴 상황이 담담한 필체 속에 녹아들어가는, 어색하지만 신선한 불협화음을 자아내는 이런 묘한 개그는 새삼 그의 위트에 감탄하게 만들었다. 어떠한 상황에서든 '피식' 웃게 만들 수 있는 그의 날아갈 듯한 유쾌함은 날 다시 가즈키에게 빠지게 만들어 버렸다.


아무리 가족이라도 어중간한 관심과 공감과 이해로 사람의 마음을 헤집고 들어가는 것은 흙묻은 신발로 타인의 집에 저벅저벅 걸어들어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p. 350)


데쓰야와 그 일당(??)들은 어중간한 공감과 이해로 할머니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기에, 자신들의 온 마음을 모아 할머니를 위한 영화 상영회를 계획한다. 그것은 바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처음 봤던 영화를 상영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결국 성공적으로 상영회를 마치고 감동적인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면 물론 좋았겠지만, 한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할머니가 할아버지와 같이 보았던 영화는「로마의 휴일」이 아니었다.


퓨하하하하H, 나는 폭소를 짓고 말았다. 만약 이 글을 쓴 사람이 가즈키가 아니었다면, 나는 허무한 마음에 당장에 달려나가서 양 볼때기에 불꽃 싸다구를 날렸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가 바로 가즈키였기에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가즈키에게는 이런 게 어울리니까. 물론, 어이없고 코믹한 장면이었지만, 내가 좋아한 가즈키는 바로 이런 날아가버릴 듯한 유쾌함이 최고의 매력이었으니까. 

이들의 첫 시도는 보기좋게 실패했지만, 이들은 별로 개의치 않는다.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첫 영화를 찾아낼 때까지 몇 번이고 다시 하면 되니까.
나는 왠일인지 책을 덮은 바로 그 순간부터 결국 이들이 성공을 하고 감동적인 장면으로 끝을 맺는 모습을,
나도 모르게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는, 데쓰야와 같이 혼자서 키득키득 웃어버리고 말았다.

감히 가즈키에게 바라건데,
어려운 말과 미사여구로 치장되어 고상한 척 하는 그런 글들은 다른 사람에게 넘겨버리고,
언제까지나 이런 유쾌한 글로 우리를 찾아와주길.

삶은 "영화같이" 단순하지 않다.
삶은 "영화처럼" 언제나 아름답고 낭만적인 장면으로 끝을 맺지는 않는다.
때론 웃고, 때론 웃으며, 때론 슬퍼하고, 때론 기뻐하며, 때론 좌절하고, 때론 성공한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삶은 "영화보다" 감동적이고 가치가 있는 것이다.



* 책마을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9-01-17 21:07) 

20.3.1.99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10
09:44:22 

 

상병 이지훈 
18.49.9.198   덕분에 제 독서희망목록(?)이 추가되었군요 

저도 퓨하하하하H 웃고 싶네요 

아무리 가족이라도 어중간한 관심과 공감과 이해로 사람의 마음을 헤집고 들어가는 것은 흙묻은 신발로 타인의 집에 저벅저벅 걸어들어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맘에 드는 표현이네요 제가 우리 가족을 위해 반드시 알아야할 문장으로 느껴졌다랄까요 2008-12-11
00:05:55
 

 

상병 박장건 
22.19.48.124   잘 봤습니다. 가네시로 가즈키의 소설은 레볼루션 이후로 아직 안봤는데...하하, 끌리게 만드는 후기였습니다. 2008-12-11
00:33:22
 

 

상병 김무준 
22.83.38.70   흠. 이번 달은 중학 수학 자습서 따위를 사느라 돈을 날렸으니, 다음 달에나 사서 볼 수 있겠군요. 하암. 리쌍이 생각나는 이유는? 2008-12-11
04:02:14
 

 

상병 정근영 
20.3.1.44   지훈님 // 네, 저도 아무래도 그 문장이 많이 기억에 남더라구요. 

장건님 // 흐흐, 레볼루션 3 는 죽음이었죠. 

무준님 // 음..? 뭘까요? 리쌍이 생각나는 이유는? 2008-12-11
06:57:08
 

 

병장 이동석 
40.6.1.206   영화처럼-이라는 노래가 있지 않나요? (물론 애매모호) 

어쨌거나 게시판 나누길 잘했군요. 좋은 글을 차분히 볼수 있어서요. 허허. 2008-12-11
09:32:08
 

 

병장 양홍석 
20.17.43.90   할머니가 할아버지와 같이 보았던 영화는「로마의 휴일」이 아니었다. 

역시나 이군요 2008-12-11
13:36:21
 

 

병장 윤영돈 
5.20.1.181   저도 처음에 영화처럼을 보면서 어-어? 했죠. 

이거 정말 가즈키가 쓴거야? 하면서 말이죠. 오히려 일본소설과 완전히 동화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고 해야할까요. 

하지만 마지막 단편인 '가족의 샘'에선 역시 가즈키야 했습니다. 2008-12-11
23:09: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