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베스트-내글내생각] 내안에 불이 산다.
병장 김민규 [Homepage] 2008-12-10 20:48:56, 조회: 240, 추천:0
내 안에 불이 돌아다닌다. 가슴팍에서 시작해서 서늘한 발끝으로 내려가는듯 하더니 어느새 머리 꼭대기까지 와 있다. 화끈한 느낌에 얼굴을 매만져 본다. 차갑다. 표면상으로는 어떠한 열의 변화도 없고 그저 느낌뿐이다.
두개골을 앞뒤로 반 갈랐다고 할때 뒷부분의 골이 들썩인다. 또 이 느낌인가. 보통 공부를 할 때는 이마 위 앞쪽 부분이 조금 당기고 말 뿐이다. 격렬한 정신노동의 결과로 편두통이 시작될 때에도 앞과 뒤를 가르는 경계부분이 욱신할 뿐 뒷부분이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들썩이는 경우는 없다. 이 정도 상태라면 - 자전거로 도로를 질주하면서 커다란 헤드폰을 끼고 음악에 한껏 빠져 도로와 내가 유리되었을 때라든가, 깔깔거리며 턱 근육이 아플 정도로 웃어재끼면서 정신줄을 놓았을 때라든가, 그 정도가 유일한 것 같은데 오늘따라 유난히도 유별나게 뒷머리가 경련한다. 기분좋은 아찔함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 엔돌핀이 분비되고 있는지 아드레날린이 나오고 있는지 자세한 이야기는 모르겠지만, 지금 나는 이 느낌을 즐기고 있다.
이것의 정체를 알기 위해 오랜 시간 방황을 했다. 내 안에 돌아다니는 너, 너 누구냐. 동반자냐, 적이냐, 일단 피아구분을 확실히 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 녀석은 기쁠 때 나타났다가 슬그머니 사라지기도 하고, 어느 순간 화 때문에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할 때 나타나서 머리끝으로 타고 올라가기도 했다. 내 안에 불이 산다. 그리고 돌아다닌다. 평소엔 어디 숨어있는지 찾을래야 찾을 수도 없는데 결정적으로 방심한 순간에 나타나 그곳에 가 있다.
아, 또 떨리는 뒷머리. 내 뒷머리는 참 유연하다. 어지간한 돌도 부수는 강철 앞머리와는 달리, 뒤쪽의 머리는 뇌가 두개골 밖으로 삐져나왔는지 어땠는지 물렁물렁하다. 이 기분좋은 경련을 맞이하며 나는 손톱으로 두피를 꽉꽉 지압하듯 마사지한다. 가죽이 붙어 따라 움직이며 호응한다. 얼핏 느낌으로는 내가 만지고 있는 것이 머리통인지 가죽인지 대뇌인지 머리카락인지 알 수는 없으나 나는 꼬불꼬불한 우뇌의 해면조직을 들어내어 만지작거리는 느낌으로 손을 움직인다. 손톱의 딱딱한 느낌에 이러다 정말로 구멍이 날 것 같다. 손바닥을 넓게 펴서 가죽에 밀착시키고 수제비 반죽을 만지듯 매만진다.
어느 날 문득 이 녀석이 좋아하는 것을 알아챘다. 바로 니코틴이었다. 꺼집어내려 해도 그렇게 나오지 않던 녀석이, 빨아들인 담배 연기 한 모금에 머리위로 부상하여 붕 떠 있다. 이거로구나. 당신 잡히었소. 혹자는 Sky Walking이라고 했고 누군가는 소주 두 모금을 빨아들인 느낌이라고도 했다. 녀석을 호출하는 빈도는 잦아졌다. 늘 더 가까이하고 싶었지만 녀석은 제멋대로였기에 항상 아쉽기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호출도 오래가지 못했다. 빈도가 잦아지면 잦아질수록 녀석은 권태감을 표출했고 마침내는, 어지간한 고급의, 순도높은, 그리고 진한 담배연기가 아니면,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허무감. 익숙해져간다는 것은 그런 것인가. 녀석의 변덕에 나도 질렸다. 나오든지 말든지 니 마음대로 해라. 내 몸만 버리는 것 같아 애먼 담배꽁초를 반으로 꺽어 던져버린다. 그렇게 하루. 이틀. 녀석이 나타났다. 녀석은 어지간히 애가 닳았는지 머릿속을 온통 훼집고 다니며 니코틴을 찾아댄다. 녀석, 딱 걸렸다. 나는 가죽 여기저기를 손톱 끝으로 딱딱 짚어 누르며 마치 혈도를 풀듯이 녀석을 괴롭힌다. 알싸한 비명을 지르며 힘들어하는 녀석 덕택에 온몸으로 찌릿한 전기 방전이 퍼져나간다. 온 머리 가죽에 손톱자국이 나서 더 이상 누를 곳이 없어졌을때에야 비로소 나는 멈춰선다 - 녀석의 흔적은 이제 온데간데 없다.
상실감에 하루를 살고 저녁이 되어 누웠다. 낮 사이 많은 일들이 있어 온몸은 녹초가 되었고 앞통수는 아파온다. 일종의 우울증인 것 같다. 사소한 일에도 조급하고 짜증을 부리며 내 안의 폭력적인 기질을 드러내려고 한다. 생각없이 방 문을 벌컥벌컥 열어놓고 다니는 이들 하나하나에게 분노가 치민다. 참자. 눈을 감아버린다. 그리고 그 녀석이 이번엔 가슴 한가운데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살아있었구나. 날 버리고 떠나지 않았구나. 그런데 왜 그런 모양이 되었니. 만신창이가 되어 옷은 헤어지고 얼굴도 엉망이네. 누가 그런거야. 불은 흐느끼며 활활 타오른다. 내 가슴 한가운데에서 타오른 불은 모든걸 집어삼켜버린다. 내 우울증도, 분노도, 조급도, 짜증도, 마치 열병합발전소의 심지가 된듯 버무려져 크게 불타오른다. 그래. 집어삼켜라. 내 너의 정체는 아직도 알 수 없으나, 나의 이 쓰린 속을 알아주고 함께해주는 것은 너밖에는 없구나. 모두다 태워버리자. 없애버리자. 그렇게 함으로서 너와 내가 이 세상을 걸어가는 힘을 다시 얻을 수 있다면, 집어삼켜라. 자비없이, 그러나 고통도 없을테지.
불은 천불이 되어 내 안에서 타오른다. 무엇으로 이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인가. 더 이상 이것은 누군가에 대한 목적있는 연소가 아니다. 맹목적인 열기는 산불처럼 퍼져나가 나의 정신마저 집어삼킨다. 말랑하던 뒷통수는 그 분노앞에 순수를 잃었다. 세상이 돈다. 나도 돈다. 뱅뱅 돌고 돌아 미쳐 돌아간다.
그래,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내가 직면해야했던 진실이었는지도 모르지.
* 책마을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9-01-17 21:09)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6
13:17:32
병장 정병훈
그래요. 민규님의 성함은 익숙한데, 글의 향기가 익숙하지 않다고 했더니, 연재에만 힘을 쓰던 민규님의 내글 내생각이여서 그런 기분을 느꼈나 봅니다.
뭔가 심경의 변화가 있으신건지, 책마을 글속에서 살아 숨쉬는 담배는 본인이 비흡연가서 어찌 느낌의 전달이 뚜렷하게 오질 않습니다. 하하하
제 몸엔 젊음이라 불리는 열정(熱情)이 살지만, 세상과 부딪힐때면 이내 소심(小心)해지더군요. 이런 느낌의 글 좋습니다. 흐흐 2008-12-10
20:57:01
병장 고은호
우울증도, 분노도, 조급도, 짜증도 모두다 집어삼켜버리는 불이라니....
이걸 멋지다고 표현해도 좋을까요?
모든 것을 파괴하고 재생한다는 전설상의 피닉스 같은....
그런 불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웃음) 2008-12-10
22:54:54
상병 박장건
잘 봤습니다. 후하핫-. 이거 책마을에 오자마자 재밌는 글을 보게 되서 기쁩니다. 흡연에 대한 욕구가 속도감 있게 느껴집니다. 직면해야했던 진실, 맞겠지요. 수많은 흡연자들이 느끼는 감정일테니, 그것은 분명 진실일겁니다. 2008-12-10
22:57:08
상병 이지훈
이 글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흡연자가 되어야 할까 라고 생각이 들 정도네요 흐흐 2008-12-10
23:58:33
병장 이동석
울분일까요, 앙금일까요, 놓쳐버린 사랑일까요, 무기력은 아닐까요,
잊어버린 불씨는 피를 따라 온몸을 돌고 돌아 가끔 치밀어오를때도 있지만, 곧
모든것이 허망해집니다. 2008-12-11
09:26:52
병장 정병훈
얼른 글쓴이가 나타나 이 글에 대해서 뭐라고 한마디 해야 될거 같은데요? 허허- 2008-12-11
10:29:03
병장 김민규
한 마디는요. 그냥 느끼는 그대로가 좋은 거 아닐까요-
사실 써재끼면서 내가 왜 이러고 있지, 이건 뭔 소리지, 했으니까요. 허허허
계속 멍-하군요. 누가 건드리면 터져버릴 것 같아요. 아이고.
빨리 깨어나야 할텐데. 2008-12-11
14:41:55
병장 정병훈
이거, 설탕봉지 사들고 와서부터 그런거 같은데, 유망주랑 잘 안되나보죠? 우히우헤헤-
네. 조용히 할께요. 2008-12-11
15:00:14
병장 김민규
낄낄. 그쪽이랑은 너무 잘 되어서 탈이랍니다. 4.5초동안 10번 만났어요.
우히히 2008-12-11
15:05:25
병장 이동석
10번 만났다는건... 헉-
(이동슥식으로 독해하면 그야말로-) 2008-12-11
16:35:25
병장 김민규
헉-
과로사로 쓰러질 지경이겠군요. 안타깝지만 너무도 건전한 나날들이었답니다. 흐흐 2008-12-11
17:04:07
병장 정병훈
민규씨는 변강쇠. 그 비결이나 좀 알아봅시다. 허허허- 2008-12-11
17:04:32
병장 김민규
순식간에 변강쇠로 레벨업. 감사합니다. 꾸벅....
이게 아닌 것 같은데? 2008-12-11
22:14:32
병장 정병훈
칼럼보고 순례왔습니다.
이 글이 김훈선생의 바다의 기별을 읽고 비슷한 느낌으로 쓰신 글입니까? 오호-
그게 맞다면, 다시 꼼꼼히 읽어봐야겠군요. 2008-12-12
09:57:31
병장 김민규
규정된다는건 참 무서운 일인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김훈선생이라니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인데, 그냥 <바다의 기별> 첫 장을 읽다가 좌절감에 생각나는대로 끄적였다고 쓰는게 더 정직한 표현이겠지요. 어쨌거나. 그것과는 아주 무관하게 저를 변강쇠로 만든건 병훈님이 맞는 것 같군요. 예끼! 이 사람 2008-12-12
10:38:11
병장 김민규
아참, 사족이긴 한데, 저랑 동거동락하시는 광부님이 무심코 띄워 놓은 창의 이 글을 보시고는 제게 물어 오셨습니다.
"무슨 고민 있니? 그건 그렇고 나도 담배 많이 피우는데 난 왜 뒷머리에 전기 스파크가 일 정도의 느낌은 없지?"
우문우답. "어쩌다 피워야 그렇지 말입니다" 2008-12-12
11:0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