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베스트-내글내생각]고통의 창조
병장 최도현 2008-12-22 09:17:00, 조회: 208, 추천:3
나는 그의 말에 깊은 감동을 느꼈다. 그의 말에는 내가 우려했던 허위가 전혀 깃들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내 가슴이 편안했던 이유는 그가 얼마나 삶을 절실하게 사랑해 왔고 많이 고민해 왔으며 또한 얼마나 처절할 정도로 괴로워했던가를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F.도스또예프스끼, <미성년>, 열린책들, P.821)
소설 <미성년>의 주인공은 그(베르실로프Versiloff)의 처절한 삶을 통해 다른 이에게 고통의 유용성을 이해시키는데 목적을 두고 있는 듯하다. 그는 무엇 때문에 그토록 괴로워했을까. 그의 고통은 누구에게 향해 있는가. 물론 소설 속에 이런 의도가 담겨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고통은 실제로 개인의 성품을 단련시킨다. 고통은 사람을 강퍅하고 냉소적으로 만들 수 있지만 때로는 매우 감수성이 예민하고 동정적이며 타인에 대해 겸손하고 열린 사람으로 만들 수도 있다.
고통의 필연성을 주장할 때 자주 인용되는 소재는 ‘진주’이다. 모래알을 머금은 조개가 오랜 세월 쓰라림을 품고 있다가 비로소 아름다운 진주를 탄생시킨다는 내용은 고통이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신체에 이상이 있을 때는 경고 신호가 있어야 하고 건강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스트레스가 있어야 한다. 고통의 대가를 치르지 않고서는 과학과 예술, 학문과 종교에서 어떠한 성취도 이룰 수 없음이 역사적으로도 증명되었다. 또한 감시와 처벌이라는 고통이 수반되지 않고서는 사회 체제가 유지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유용성을 통해 고통을 합리적으로 정당화하고자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만일 고통이 이 세계 안에 주어져 있는 것, 다시 말해 물리적인 질서 안에서 파악하고 이해해야 할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면, 우리 삶에 필수불가결한 고통은 아마도 사회과학자들이 일구어낸 이상적인 메커니즘이 되었을 것이다. 어떤 고통도 이와 같은 관점에서 정당화되지 않을 것이 없다.
알베르 까뮈의 소설 <페스트>는 고통이라는 것 자체가 물리적 질서 안에서,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너머로부터 우리 삶에 갑작스럽게 들이닥치는 것이며, 그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당면하는 딜레마에 대해 천착한다. 유한성을 지닌 인간 너머에 존재하는 절대적인 존재는 그의 전능함에 따라 설정된 세계를 창조하였고, 거기엔 각각이 존재하는 목적이 담겨있다. 그 절대자는 공의로우신 분이며, 그의 선하심은 무한하므로, 그가 창조한 모든 것은 결국엔 그의 뜻대로 선에 이르게 되며, 따라서 모든 것엔 의미가 있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허락한 고통의 속성 역시 사실은 선한 것인가.
마을에 전염병이 창궐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전염병으로 죽어간다. 그러나 의사는 전염병을 치료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세상을 창조한 신이 선하시고 전능하신 분이라면, 그가 창조한 페스트 역시 선한 것이며, 그것에는 그에 합당한 목적과 의미가 있으므로, 페스트로 인한 고통역시 겸허히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며, 우리가 함부로 페스트를 치료하는 것은 신의 뜻을 거스르는 것과 같다. 절대자의 선하심과 우리가 감당하고 있는 고통이 일으키는 충돌에 대해서는 C.S.루이스의 <고통의 문제The problem of pain>에서도 다루고 있다.
그러나 고통은 이렇게 물리적 구조 안에서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통은 그 자체로서 애매성을 지니고 있다. 욥의 고통은 그야말로 아무 이유도 없이, 무슨 목적도 없이 무의미하게 받는 고통이었다. 만일 ‘무엇’을 위한 고통이었다고 하더라도 그의 고통은 결코 타인을 위한 고통 또한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욥의 고통이 완전히 무의미한 고통이었다고 할 수 있는가? 결코 그럴 수는 없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드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도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욥기 42:5-6)
레비나스는 고통이 현상적으로 애매한 얼굴을 드리우고 있다는 점에서 맥락을 같이한다. “고통은 그 자체로는 어떠한 의미도 없고, 쓸모없는 경험이다. 고통 속에는 어떠한 내재적 합목적성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므로 이성을 통해서 고통을 해명하거나 정당화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I.레비나스, <쓸모없는 고통>)
레비나스에 따르면 고통은 종합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고통은 ‘너무 많음’, ‘너무 지나침’, 또는 ‘벗어남’ 따라서 외재적인 것, 내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것, 낯선 것으로서 ‘수용 불가능성’을 의미한다. 고통은 수용할 수 없는 것이고 수용할 수 없는 것 자체이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고통은 범주상의 애매성을 띠고 있다. (강영안, <고통의 철학: 레비나스의 고통론>)
고통이 만일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라면 고통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주어진 삶을 삶 그대로 수용하면서 때로는 기뻐하며, 때로는 슬퍼하며 그냥 그렇게 살아야 할 것인가? 고통은 그 자체로는 무의미하지만 타인의 고통을 위한 고통이라면 의미 있을 수 있을 수 있다고 레비나스는 말한다. 고통 받는 사람의 호소에 응답한다는 것은 그를 위해 책임을 진다는 것, 그의 짐을 대신 들어준다는 것을 뜻한다. 타인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것, 타인의 짐을 대신 짊어져 준다는 것, 이것을 레비나스는 순수한 의미에서 ‘윤리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윤리적이 된다는 것은 타인의 고통에 자신을 노출시키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이렇게 윤리적인 것, 즉 타인에 대한 나의 책임을 통해 고통의 의미를 찾고 있다.
고통은 수용할 수 없는 것이고, 낯선 것이며, 이해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애매성 속에서 고통은 타자와의 관계를 열어준다. 다시 말해 고통은 인간 상호간의 윤리적 전망을 열어주는 것이다. 고통 받는 사람의 외침과 신음에 귀 기울일 때, 바로 그때 타인의 고통은 더 이상 무의미할 수 없는 것이며, 나 자신이 다른 이의 삶에, 감히 ‘침입해야’하는 윤리적 의무성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관심이 먼저이고 그 외 다른 요소는 (예를 들어, 도덕법칙에 대한 존경이나 행복 또는 공동체의 보존과 같은 것) 윤리에 대해 부차적인 것이라고 레비나스는 말한다.
물론 우리는 고통 중에 있는 타인의 얼굴을 대면하지 않더라도, 타인에 대한 관심 없이도 얼마든지 타인과 교류하면서 아무 문제없이 살 수 있다. 그러한 삶을 우리는 일반적으로 ‘경제성’ 안에서 합리성을 극대화 할 수 있는 방향으로 스스로를 조직한다고 표현한다. 인간의 경제적 행동이란 가족관계, 정치관계 그 밖의 모든 사회적 관계와 독립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사회는 그러한 경제활동의 결과물로 생겨나는 것이라는 생각이 내포되어 있다. 즉 사회와 경제의 관계가 완전히 거꾸로 역전되어버린 것이다. K.폴라니는 <거대한 변형The great transformation>에서 인간사에 하나의 거대한 혁명적 변화가 있었는데, 즉 사회와 경제의 관계가 완전히 역전되어 사회적 관계는 경제에 순응해야 하는 현실이 도래하였으며, 경제학은 이제 더 이상 윤리학이나 정치학의 일부분이 아니라 객관적 현상을 연구하는 ‘과학’이 되어버렸다고 말하면서, 이러한 사고방식의 거대한 변형을 정치, 사회, 윤리적 차원의 가치를 모조리 갈아버리는 ‘악마의 맷돌’로 표현하였다. 경제성을 기반으로 삶을 살고있는 그들은 환하게 웃고는 있으나, 아마도 그 웃음은 허전한 웃음일 것이다.
환하게 잘 웃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다. 그렇지만 웃을 때 풍기는 느낌에 주의해야 한다. 예를 들면, 사람의 웃음은 그것이 아무리 명랑하고 소박한 것일지라도 상대방에게 왠지 우둔해 보이는 느낌을 주어서는 안 된다. 웃음 속에서 조금이라도 허전한 점이 느껴진다면, 그가 평소에 아무리 대단한 사상을 말하고 다니는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은 틀림없이 어느 정도의 한계를 넘지 못하는 지성밖에 지니고 있지 못하다고 할 수 있다. 또 그 웃음 속에 어리석어 보이는 점은 없을지라도 크게 웃은 다음의 모습이 왠지 갑자기 조금이라도 허전하게 보인다면, 그 사람에게는 진실한 의미의 인간적 품위가 없는 것이다. …… (중략) …… 그리고 이런 사람은 나중에는 꼭 타락의 길을 걷게 되어 <자기 이익을 확실히 챙기는 일>에 종사하게 될 것이며, 고상한 사상 따위는 젊음의 망상이나 환상으로 치부하고 주저 없이 던져 버릴 것이다. (F.도스또예프스끼, <미성년>, 열린책들, P.614)
레비나스에 따르면 타인의 고통은 ‘눈감아 줄 수 없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반응을 요청하며, 타인의 고통을 대신할 수 있을 때, 타인의 호소에 대한 응답, 즉 타인을 ‘책임’져야 한다는 윤리적 상황이 고통의 핵심이라고 레비나스는 생각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런 대리적 고통, 대속적 고통은 심지어 타인의 잘못을 자신의 잘못으로 수용하고자 한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 앞서, 모든 사람에게 책임이 있고, 나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책임이 더 많다는 메시아적 구원자의 모습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들 각자는 각 사람에 대해서 각 사람에 앞서 잘못이 있고, 나는 다른 사람보다 잘못이 더 많다. (F.도스또예프스끼, <악령>, 열린책들, P.1018)
레비나스의 고통론은 여기까지이다. 고통 받는 이웃의 호소와 부름에 기꺼이 응답하는 윤리성에서 의미를 찾는 타인의 고통론은 강영안씨와 손봉호씨의 입장과도 맥락을 함께 한다. 그렇다면 타인의 고통이 아닌, 나 자신의 고통은 과연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나의 고통에 대한 신음과 한탄을 다른 이가 와서 관심을 갖기까지 그저 이렇게 수동적으로 기다리고 있어야만 하는 것인가?
타인의 고통을 대신하는, 타인의 짐을 대신 짊어지는 나 자신이 이제 ‘주체’가 된 것이다. 레비나스의 고통론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고통 받는 타인을 위한 대속적 입장이 아니라, 이제 우리 자신에게도 고통이 존재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우리 스스로 고통을 창조해 낼 수 있다는 현실에 당면하게 된다.
고통은 수용할 수 없는 것, 낯선 것이며 외재적인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고통은 다른 이에게 머물러 있는, 저 멀리에 동떨어진 곳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 창조해내는 것이라는 점은 우리를 당혹스럽게 한다. 우주 한 복판에 타인과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 우리 자신이 남아있다면, 도대체 우리는 왜 타인의 고통을 짊어주지 못할망정 타인의 고통을 창조해내는 것일까. 그것은 아담과 하와가 왜 선악과를 따먹었는지, 가인이 왜 아벨을 죽였는지에 대한 물음과도 같다. 고통의 창조는 결국 운명적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타인의 고통을 창조할 때, 우리는 그에게 정말로 ‘복수’하고 싶어서 그 고통을 만드는 것일까? 복수를 할 때, 우리에게 타인이 고통 받고 결국 파멸에 이르는 것이 최종적이고 총체적인 목적인가? 그 단순한 타인의 슬픔이, 그 거창한 ‘고통의 창조’의 목적이 될 수 있을까?
우리는 어쩌면, 타인의 고통 이상을 원하고 있다! 우리의 복수는 과연 그 타인 한 명을 위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의 거창한 ‘고통의 창조’는 우리 스스로만을 위한 것이자 동시에, 우리는 그 창조 행위를 ‘누군가’에게 보여주기를 열렬히 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복수하고자 하는 고통 받는 타인은 결코 이 복수의 진정한 열정과 활력을 모두 받아들일 만큼 크지 않다. 이 열정은 그 유한한 타인에게 완전히 소화될 수 없는 것이다. 사실 그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행위, 그것이 더 핵심적인 목적인지 모르겠다. 우리는 지금 타인의 고통을 넘어선, 우리 자신과 타인 너머에 존재하는 절대자에게 항의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 큰 존재에게 이 창조행위를 보여주려고 안달하고 있다.
거대한 원수를 찾아가는 여정을 통해 그 절대자의 얼굴을 대면하였을 때, 거기엔 고통의 두 가지 긴장상태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한 쪽에는 용솟음치는 열정과 활력이, 다른 한 쪽에는 그 활력을 일소해버리고도 남는 침묵이 있다. 이 두 가지 긴장 상태 사이에는 절대 이어질 수 없는 심연의 길이 놓여 져 있다. 우리는 우리 삶의 곳곳에서 복수라는 열정의 창조행위를 하는 운명에 처해진 동시에, 모든 것을 포기할 통제력을 지닌 채 조용히 침묵하고 있기를 요구 받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나는 마음속으로 그녀 앞에 무릎을 꿇을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또 어쩌면 그녀를 심각한 고통 속에 빠뜨린 다음, <가급적 속히, 한순간이라도 빨리> 그녀에게 뭔가를 증명해 보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잠시 그녀에게 들러 그녀의 마음에서 모든 것을 알아낸 다음 아무런 상처도 입히지 않고 이 기묘한 상황과 괴물의 옆을 스쳐 지나, 그녀 곁을 영원히 떠나 버릴 수는 없는 것일까?> (F.도스또예프스끼, <미성년>, 열린책들, P.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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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6
13:17:14
병장 이동석
우와앗 도현님-
아직 안가셨군요. 가시기전에 저녁인사-좀 남겨주셨으면, 허허.
그리고 29일날 이곳 책마을에서의 첫 정모가 서울 인근에서 있답니다. 혹 그때 밖에 계시면, 시간 되시면, 함께 하시죠. 허허. 2008-12-22
11:09:25
병장 이동석
(계정이 잘리셨는지 쪽지가 안보내지기에 이 좋은글에 이따위 댓글을 남깁니다. 글은 찬찬히 읽어보겠어요.) 2008-12-22
11:10:45
병장 최도현
동석님~ 저 다음주 월요일에 집에가요. 그러니까 29일이지요.
동석님도 그때쯤 휴가이시군요.
아직 약속은 잡힌게 없는데, 시간 되면 꼭 갈게요. 하하.
특별히 저녁인사는 좀 쑥스럽고,
군생활 하면서 여기 책마을 덕분에 좋은글 많이 보고 갑니다.
동석님을 비롯해 모두 감사드려요. 2008-12-22
11:44:30
병장 이동석
어익후, 도현님 쑥쓰럽긴요. 허허. 2008-12-22
12:32:03
상병 이동열
글을 읽으며 역시 도현님 글이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느새 가버리신다니 아쉽습니다...
아직 도현님의 글, 생각을 이해하기엔 시간이 더 필요한데 말이죠... 2008-12-22
12:42:05
상병 이우중
C.S 루이스 '고통의 문제'는 '좋은 생각'류의 잡지에 문구가 간간히 인용되는 걸 발견하고는 전부터 꼭 한 번 읽어 보고 싶었는데 얼마전에 도서관에 들어온 걸 보았지만 2008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에 밀려서 그만 놓치고 말았답니다.
미리 저녁 축하드려요. 허허. 2008-12-22
15:42:18
상병 이지훈
말씀하시는 고통의 창조라는 것이...
자신이 스스로에게 가하는 고통, 그리고 상대에게 가하는 고통 모두를 포괄하는 것인가요? 기존의 고통론(레비나스 등)을 말씀해주시고 그 다음에는 스스로에게 가하는 고통에 대해 말씀해주실 줄 알았는데, 마지막 부분은 자신이 창조한 고통을 타인에게 가하는 것에 대해서만 말씀하시는 것 같아서요...음 어렵고 궁금해서 저녁드시는 분께 감히 축하인사에 앞서 질문을 드립니다
그나저나 좋은 저녁식사가 되시길 빌며..축하드립니다 흐흐 2008-12-23
04:44:12
병장 최도현
스스로에게 가하는 고통이거나, 타인에게 가하는 고통이든 그 최종적인 목적은 우리 너머에 존재하는 절대자에게 항의하는 것에 있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지요.
타인에 대한 복수는 운명적인 것이고, 타인에 대한 '용서'는 우리 밖에서 일방적으로 수동적으로 부여받게 되는 것이지요.
예전에 썼던 [이중성의 긴장]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부분입니다.
부가 설명이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동석님~
29일에 제가 전화드릴게요오~ 하하 2008-12-23
10:09:50
병장 이동석
하하, 사실 이 글을 읽고도 버엉-했습니다.
글쎄 지가요, 글은 못써도 읽는것만은 자신 있었는데, 아 그게 아니더라니까요.(주현아저씨 말투-)
도현님 다른글도 다시 읽고 찬찬히, 생각해볼께요.
그리고 연락 주세요~ 히히 2008-12-23
10:35:32
상병 이지훈
답변을 들었는데 왜 이렇게 어지럽죠? 흐흐 이중성의 긴장부터 다시 읽어보렵니다 허허
답변 감사합니다 2008-12-23
22:12:18
일병 김성현
결국 우리는 '어린애' 라는 거.
하지만 그 긴장 사이에서 비틀거리다 보면,
어느새... 자라있겠죠.
도현님 글 더 보고싶은데 아쉽네요.
가지로! 2008-12-24
12:17:19
병장 김정희
아아 어렵네요 글, 열심히 생각하면서 읽었습니다. 2008-12-24
12:46:45
상병 권오석
최도현병장님 1월10일에 전역하십니다 부럽습니다. 2008-12-31
14:15: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