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베스트-일상이야기] 보내지 못한 편지  
상병 김무준   2008-11-11 00:17:31, 조회: 442, 추천:4 

몇 번 손가락을 까닥거려 당신의 일상을 엿본다. 말을 건네 볼까. 아무렇지 않은 듯 자연스레 말을 걸면 우리는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까. 당신이라면 어떻게 답할까. 생각하고, 상상하고, 공상하며 다시 손가락을 놀린다.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본다. 그러나 한 글자도 쓰질 못한다.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본다.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본다.

컴퓨터가 멈춘다. 아무렇지 않게 컴퓨터의 전원을 끈다. 컴퓨터는 여러모로 편리하다. 한 번 밀어야겠어. 로우 포맷으로 하드를 깨끗하게 밀어주면 소프트웨어적 충돌은 어느 정도 잡히겠지. 윈도우를 다시 설치한다. 포맷하시겠습니까? 예. 컴퓨터는 여러모로 편리하다. USB를 통해 정보를 손쉽게 공유할 수도, 필요 없는 정보를 밀어버릴 수도 있다. 내 대가리도 이렇게 밀어버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짐캐리는 영화 속에서 자신의 추억을 지우다 추억 속에서 절망한다. 행복했으니까. 적어도 사랑하는 순간만큼은 행복했으니까. 당신은 내게 말했다. 살면서 얻게 될 행복보다는 차라리 슬프지 않는 편을 택하고 싶다고. 순간의 행복을 얻기 위해서 슬프고 싶지 않다고. 우리는 분명 하루가 아닌 순간을 기억한다. 나와 당신이 갖고 있던 그 추억의 조각은 하루가 아닌 순간일 뿐. 행복은 순간이나, 슬픔은 영원하다.

두어 시간이 지나 컴퓨터는 깨끗하게 정리되었다. 필요한 프로그램을 찾아다 설치한다. 그리고 다시 당신의 일상을 엿본다. 그래. 예전처럼. 기억 속에 사는 당신에게 찾아가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물음에 대한 답을 지난 일 년 간 나는 듣지 못했으니까. 전화를 켜고 문자를 보낸다. 세상은 철저히 텍스트화, 디지털화 되어간다. 나의 마음은 나의 사랑은 한줄기 전파로 바뀌어 당신의 마음에 닿으리라. 그 차가운 쇳덩이 너머로 나의 진심이 전해질까. 아무리 절규하고, 망설이다 손가락을 놀리고, 전송버튼을 누른 들 내 가슴의 온기가 당신의 가슴에 닿을 수 있을까. 내 짧은 말 한마디는 결국 차가운 쇳덩이의 모니터에 찍히고 찍혀서. 우리의 관계만큼이나 잔인하고 차갑게 던져지겠지. 그래.

순간의 행복을 기억하듯, 결국 내가 사랑한 것도 순간의 기억. 그 기억 속의 당신일까. 나는 지금 당신을 사랑하는 걸까. 메신저를 켜고 심심이를 불러낸다. 녀석은 말한다. 심심이가 잘 모르는 말이에요. 가르쳐 주세요. 피식. 웃고 말리라. 나는 잠시나마 프로그램 덩어리에 위로받고 그 위로에 현실을 더한 만큼의 슬픔을 얻어간다. 등가교환의 법칙이라더니. 공과 일로 이루어진 세상은 너무나 차갑다.

사랑해는 사랑했어가 되었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현실에서 도망친 당신이 내게 돌아온다면, 나는 두렵다. 당신의 사랑했어가. 사랑했을지도가 될까봐. 당신이 나를 잃는 것을 두려워하듯, 나는 당신의 행복. 그 순간의 존재마저 흐릿해질까 두렵다. 우리의 마음에 난 상처는 디지털이란 바늘로 꿰매기에 너무나도 버겁다. 갈기갈기 찢긴 가슴에 사랑이란 반창고를 덕지덕지 칠해놓았다. 그 보잘것없는 사랑을. 나의 가슴을 사진으로 찍어 당신에게 전송한들 까맣게 식어버린 모니터는. 너덜너덜한 심장의 처절하디 처절한 상처를 늘어놓을 뿐. 그 안에 타오르는 희망 따위 그려낼 수 없다.

편지를 쓰고. 다시 편지를 쓰고. 다음 편지를 생각할 때 쯤. 당신은 전화기를 없애리라 통보했다. 그나마 당신의 일상을 엿볼 수 있던 인터넷까지도. 내게서 차단해버렸다. 당신은 왜 모를까. 그런들 우리 인연의 끈이 끊어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나는 마찬가지로 바다로 향할 것이고, 당신을 찾을 것이고, 당신은 나와 바다를 만나러 그곳으로 돌아올 것임을. 그깟 차가운 금속덩어리들과 소프트웨어를 멈추게 한들 우리의 마음까지 멈추게 할 수는 없음을. 왜 모를까.

심장이 멎어버린 전화기로 식어버린 텍스트를 보낸다. 당신은 오늘 밤도 나를 생각하고 있으리라. 내가 그러하듯이. 일상의 디지털을 도려낸들 감성의 아날로그는 보이지 않는 선으로 묶여 있으리라. 당신은 다시 오늘을 죽어가고, 나는 다시 오늘을 살아간다. 당신은 슬픔에 죽어가고, 나는 당신에 살아간다. 그리고 별을 바라보며 노래한다. 나를 위해 살아달라고. 슬프지 않는 죽음이 아니라, 순간이 영원으로 바뀌는 삶을 살아가라고. 내던져진 글자에 피 묻은 가슴이 담기지는 않겠지만. 나는 다시 깨끗해진 컴퓨터 위에 손가락을 놀린다. 사백 킬로미터가 넘는 우리의 선이 늘어지고 늘어져 지구를 일곱 바퀴 반 돌더라도. 얼마의 시간이 걸리든. 내 마음은 당신에게 닿으리라 믿는다. 희망한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당신이 행복하기를 그려본다.



* 책마을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8-12-18 21:41)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6
13:03:40 

 

상병 이지훈 
  사백 킬로미터가 넘는 우리의 선이 늘어지고 늘어져 지구를 일곱 바퀴 반 돌더라도. 얼마의 시간이 걸리든. 내 마음은 당신에게 닿으리라 믿는다. 희망한다. 

읽을 때 왠지 떨리는 문장이군요 몇 천킬로미터가 떨어진 곳에 사는 사람과도 언제든지 대화할 수 있는 선이 존재하고, 이제 그 선마저도 무선으로 바뀌는 세상에 "우리의 선"같은 선만은 늘어지고 엉켜서 다시 풀 수 없을정도가 되더라도 제발 무선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허허 2008-11-11
04:14:28
  

 

상병 양순호 
  그렇지요, 무선이라면야 중간에 여기저기에서 헤집고 들어오고, 해나오고 해서 틀어지기 마련인데 유선은 단 한사람. 바로 나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있는 이에게 다가가니까요. 

제가 부대찌개집에서 유선 가지고 놀아서 이러는게 아녜요. 손아랫 직속 도련님도 유선을 가지고 놀아서 이러는게 절대 안에요. 

그리고 전 이런 표현들 좋아해요. 와닿잖아요. 특히나 짐캐리의 그 영화에서의 연기는 최고였어요. 단지, 제목이 기억나지 않을뿐이지만서두요. 2008-11-11
07:12:54
  

 

상병 이석학 
  그 영화 "이터널 선샤인" 아닌가요? [곰곰] 2008-11-11
08:28:15
  

 

상병 양순호 
  앗. 맞아요, 이터널 선샤인. 또 보고싶어지네요. 
보는 당시에는 상당히 지루해했지만서도요. 2008-11-11
10:47:19
  

 

병장 장상원 
  심장이 멎어버린 전화기로 식어버린 텍스트를 보낸다. 당신은 오늘 밤도 나를 생각하고 있으리라. 내가 그러하듯이. 


가슴 아픈 글이군요. 

예전 애인과 장거리 연애를 했던지라..전화 또는 문자메시지, 넷미팅(...) 등으로 연락했던 가슴 아픈 시절이 생각나는군요. 2008-11-11
10:58:58
  

 

병장 고동기 
  당신의 사랑했어가. 사랑했을지도가 될까봐. 

음. 

이건 내글내생각에 어울릴 정도로 좋네요. 

일상이야기가 이렇게 애잔하다니요. 2008-11-12
08:56:51
  

 

병장 김용우 
  동병상련,,, 2008-11-12
10:33:20
  

 

병장 김동욱 
  좋아요! 2008-11-13
23:36:05
  

 

병장 이동석 
  이런, 이 글을 어째서 이제봤단말인가요. 어흑. 2008-12-18
20:40: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