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베스트-독서후기]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인간실격」- 다자이 오사무  
병장 이찬선   2008-11-18 10:47:25, 조회: 360, 추천:1 

“수치스러운 평생을 살았습니다.” 
툭... 가슴이 떨어졌다. 첫 마디... 처음이라는 형식적 관념이 결국 귀결되는 것은 수치스러운 평생의 죽음뿐이던가... 다시금 툭... 슬퍼졌다. 동시에 약간의 소름도 끼쳤다. 전이(轉移)... 그렇게 ‘요조’, 그는 나에게 말을 걸었다.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한 자의 수기. 이 얼마나 시퍼렇게 칼날이 서 있는 한마디의 정의(定義)인가? 이 속에서 사라진 것과 동시에 여분으로 남아있는 것은 무엇인가? 불가해한 이 문제들이 다음의 물음들을 가능케 한다. 인간다운 삶이란 무엇인가? 이에 대한 통찰은 곧, 우린 과연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 것이 가능한가? 라는 문제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것이 ‘인간’에 대한 대답 - 그것이 존재론적이 되었든, 인식론적이 되었든, 허나 윤리적은 안된다. 그것이 끼어드는 순간 침묵 말고는 별 도리가 없다 -을 전제하는 한에서만 말이다. 언어를 상실했지만, 언어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던 그의 삶의 궤적들이 이 문제를 표상한다. 
『나는 남과 거의 대화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어릿광대 노릇이었습니다.』
『나로서는 서로가 속이면서도 맑고 밝고 명랑하게 살고 있는, 혹은 살 수 있는 자신을 가진 듯한 인간 자체가 난해한 것입니다. 인간은 끝내 나에게 그 해결을 위한 뾰족한 수를 가르쳐 주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을 알 수만 있었더라면 나는 이토록 인간에 대한 공포를 느끼지도, 필사적인 서비스를 하지 않고도 지낼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라캉에 따르면 언어 - 모든 상징적 차원(상징계)의 것들 -는 인간을 식민화 한다. 인식, 소통 등 인간을 존재 지으는 것들을 가능케 하는 것은 언어이다. 즉 상징적인 것이 현실을 구조 짓는다. 상징을 통한 우리의 인식은 차이에 기반한 인식이다. 상징계를 구성하는 각 항목의 의미 또는 동일성은 다른 항목들과의 차이, 이들의 부재-존재결핍-를 통해 주어진다.  우리가 인식하는 대상들은 또 다른 대상들을 경유함으로써만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당연히 순환적일 수 밖에 없다. “A가 무엇이냐? A가 아닌 것들이 아닌 것이다.” 이렇듯 상징계는 우리 인식의 실재적인 정초적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는, 끊임없이 순환하는 불완전한 체계이다. 이러한 인식론적 고찰은 곧 인간의 존재론적 고찰로 이어진다.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 되어 있다.”라는 라캉의 말은 분열된 인간 주체가 자신의 필연적인 결핍과 간극, 외상적 진실을, 자신의 문법과 논리에 복종하고 있는 무의식을 통해 생각하고 말한다는 것을 뜻한다. 상징계로 진입하는 인간은 ‘상징적 거세’ - 이는 분명 외상적 사건이다 - 를 거쳐야만 한다. 그것은 상징을 통해 구조 지워진 현실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즉자적인 존재로서의 나와 상징적 정체성 사이의 결코 건널 수 없는 간극 즉, 인간 주체의 본래적 결핍과 간극이 형성된다. 
『그것은 내가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기묘한 굴욕이었습니다. 도저히 살아 있을 수 없는 굴욕이었습니다. 결국 그 무렵의 나는 아직도 부잣집 도련님이라는 족속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징계로의 진입은 우리 자신 -비록 분열되어있지만 - 을 측정할 수 있는 척도처럼 작용한다. 이 때문에 상징적 질서 즉, 대타자(大他者)는 어떤 단일한 대행자로 인격화 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인격화 된 대타자가 주체화 된다. ‘신’, ‘역사’, ‘대의’들...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이러한 인격화 된 타자와 대면하는 곤혹스러움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라는 물음속에 내포되어 있다. 대타자의 욕망을 통해서만, 자신을 존재 지을 수 있는 인간에게 이는 결코 외면할 수 없는 곤혹스러움이다. “인간은 타자로서 욕망한다.” 두가지 의미를 지닌 이 명제 중 하나의 의미는 인간의 욕망은 상징적 질서 즉 대타자로 인해 구조지어 진다는 것이다. 「인간실격」에서는 이러한 명제를 극명히 보여주는 매우 희극적이면서도 동시에 비극적인 장면이 나온다. 
도쿄로 출장을 가는 아버지는 아이들을 불러놓고 돌아오는 길에 사다 줄 선물을 물으며 수첩에 적는 것이었다. 어린 요조는 어물거리고 말았고, 그런 요조에게 아버지는 완구점에서 파는 ‘사자탈’을 제안하지만 결국 요조는 어물거리며 대답 하지 못한다. 공포에 질린 요조는 그 날 밤에 몰래 아버지의 선물 목록 수첩에 ‘사자탈’을 적게 되고, 나중에 이를 발견한 아버지는 ‘웃는다’.  
또 다른 의미는 주체는, 타자 자체를 무엇인가 불투명하고 불가해한 것을 욕망하는 존재로 경험하는 한에서만 욕망한다는 것이다. 타자의 불가해한 욕망의 방향성은 나를 향해 있지만, 그것의 불가해성으로 인해 나는 내 욕망의 불가해성과 직면하게 된다. - 나의 욕망의 담지자는 ‘타자’이다. 요조는 그의 삶에서 그 무엇 - 단 한가지를 제외하고 - 도 ’스스로‘ 욕망하지 못했다. 이것이 타자와 나의 관계, 즉 다른 인격의 극단적인 불가해성이다. 불가해성에서 느껴지는 낯섦, 위화감. 이는 보이지 않는 여분의 것 - 통제 불가능성 - 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것이 곧 괴물성이자 공포이다. 그의 삶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괴물성에 대한 공포.

‘인간실격’ 그것은 필연적으로 특정한 기준을 전제해야만 한다. - ‘죄’. 그 죄는 어릿광대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지 못한 죄이런가? ‘인간’을 똑똑히 보면서도 그 상징적 허구성에 던져지는 것을, 상징적 허구의 실효성을 거부한 그의 ‘냉소’ - 냉소의 기반은 공포이다 - 가  죄이런가? ‘죄’의 앤터(반대말)의 규명, 그것만이 자신에게 찍힌 ‘죄인’이라는 낙인을, ‘존재결핍’을 통해 규명할 것이다. - 인간이라는 낙인 또한.
『“죄의 앤터를 알게 되면 죄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신... 구원... 사랑... 빛... 그러나 신에게는 사탄이라는 앤터가 있고, 구원의 앤터는 고뇌일 것이고, 사랑에는 미움이, 빛에는 어둠이라는 앤터가 있으며, 선에는 악, 죄와 기도, 죄와 고백, 죄와... 아아, 모두 시너님(동의어)이야. 아아, 죄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죄와 벌, 도스토예프스키. 순간적으로 그것이 머리 한 구석을 스치고 지나갔고, 나는 찔끔했습니다. 만일 저 도스토예프스키 씨가 죄와 벌을 시너님으로 생각하지 않고 앤터로서 늘어 놓았다면, 죄와 벌, 절대로 상통하지 못할 것. 얼음과 숯이 서로 용납되지 못하는 그것, 죄와 벌을 앤터로 생각한 도스토예프스키 씨의 검푸른 시궁창, 썩은 연못, 뒤얽힌 저변의...아아, 좀 알 것 같아. 아니야, 아직...』
그는 두 가지를 묻는다. “신뢰는 죄이런가?” 남을 의심 할 줄 모르던 요시코(요조의 처)는 한 남자에게 성적 유린을 당한다. “무저항은 죄이런가?” 저항하지 않은 요조는 정신병원에 감금된다. 그의 삶과는 결코 함께 하지 못했던 ‘신뢰’와 ‘무저항’. 그래서 동경의 대상이라는 위치를 점했던 것들이 기묘하게 전복되어 나락으로 떨어진다. - 구원은 없다. 남은 것은 미치광이 뿐. - 칸트와 함께 광기는 인간존재의 핵심 자체가 무제한적으로 폭발한 상태를 가리킨다고 지젝은 말했다. ‘죄와 벌’을 규명하는 논리적 모순 덩어리의 이면이 곧 ‘인간’과 ‘실격’의 기준이다.
얼마간은 이 지점에 머무는 것이 중요하다. 참을 수 없는 인간 존재의 결핍과 간극, 그리고 여분을 소급적으로나마 파악할 수 있도록.
『그들(인상파 화가의 무리)은 그것을 어릿광대같이 속여넘기지 않고, 보이는 그대로를 표현하는 데 노력한 것이다. 다케이치가 말한 대로 감연히 ‘괴물의 그림’을 그리고 만 것이다. 여기에 장래의 나의 친구가 있다고 눈물이 날 정도로 흥분해서는, “나도 그리겠어. 괴물 그림을 그리겠어. 지옥의 말을 그리겠어.”』
그가 그린 자화상 - 그의 삶 속에서 스스로 욕망한 것은 이 뿐이다 - 은 비록 사라졌지만, 그 자화상과 함께 할 때에만 우리는 ‘윤리’를 생각 할 수 있다. - ‘라캉’이 말한 ‘실천적 안티 휴머니즘’. 즉, 인간성의 지극히 비인간적인 핵심, 인간 존재의 잠재된 괴물성을 두려움 없이 고려하는 윤리. 이는 요조가 남기 그의 수기와 긴밀히 연결된다. 그토록 그가 찾길 원했던 자신의 자화상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수기로 생생히 현현한다. - 수치스러운 삶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삶으로의 쓰라린 역전.
인간에게 있어 타인은 선물이자 동시에 곤혹스러운 짐이다. 그들의 존재는 개인들을 인간존재의 가장 근본적인 영역과 대면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실격」은 이렇게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인간실격?」

흰 눈위에 새겨진 빠알간 핏자국... 이어지는 울먹이는 독백...
“고코와 도코노 호소미치쟈 (여기는 어디 있는 오솔길이냐) ?”
지독히도 아픈, 그러나 찬란히도 아름다운 슬픈 인간 존재.
다시 한번 “고코와 도코노 호소미치쟈...” 어디를 향해 있는지 알 수 없는 오솔길, 그 길 위에서 요조, 그가 말했던 “다만 모든 일체의 것은 지나갑니다.”라는 말... 지독히도 쓸쓸한 자위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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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8
09:01:32 

 

병장 정병훈 
  '어렵네요' 라고 밖에 쓸수 없는게 부끄럽네요. 잘 읽었습니다. 2008-11-18
14:03:08
  

 

상병 홍석기 
  혹시 이분은...도라지'청'차의 그 찬선님? 2008-11-18
14:26:07
  

 

병장 이찬선 
  어떨떨하지만 맞네요~ 
기억 한 켠에 먼지 쌓인 글을 다시금 떠올리는 건 역시나 부끄러운 일이군요~ 
좀 더 치열했을 것을... 이것 또한 인간의 굴레라면 굴레겠지요... 

그나저나 기억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참으로 오래간만인데 말이죠~ 2008-11-18
14:49:48
  

 

병장 이동석 
  왜 이렇게 오랜만이신가요- 허허. 

오밀조밀한 문단이 딱 도라지청 차-로군요. 허허. 2008-11-18
17:53:04
  

 

상병 이지훈 
  두 번 읽었는데 아직도 선뜻 댓글달기 어렵군요 허허 

댓글 달면서 세번째 읽으니 대충 알 듯 말 듯한데요.. 

덧, 이찬선 병장님이 생각하시는 제가, 저 맞습니다 2008-11-19
01:59:09
  

 

병장 윤기현 
  같은 책을 읽은 건 확실한데. 
읽은 걸 다시 표현하는 능력에서는 맙소사. 

인간실격에서 가장 기억나는 구절은. 
'세상이란 개인이 아닐까' 였는데. 
흐음 이찬선 병장님의 글을 읽으니. 
다시 한 번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막 드네요 
잘읽었습니다. 2008-11-19
10:08:44
  

 

병장 이찬선 
  동석// 오래간만이지요? 사실 책마을에 오래간만인건 아니구요. 종종 들러서 책마을을 

잘 다듬고 계신 동석님의 수고로움에 마음으로나마 박수도 쳐 드렸습니다. - 이건 정말입 

니다. 

사실 제가 그리 낙천적인 성격이 못되는 지라, ‘이곳’에서 무엇인가를 말한다는 거 자체에 

조금은 염세적이었다라고 할까요... 분명 회의적이진 않았는데 말이죠. 그런고로, 책마을 

에도 제 흔적을 선뜻 남기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그 과정에 서 있지만, 서서히 말해 

야 하는 이유들을 하나 하나 찾아가고 있네요. 저 위에 있는 ‘요조’ 저 친구처럼 말이죠. 

허나, 그 반대급부로 생겨버린 강박증이 동석님이 말씀하신 오밀조밀한 제 글에 드러나는 

것 같아 부끄럽기 그지 없군요~ 후후... 


지훈// 병장님이라는 말이 꽤나 낯설군...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던 그 사람의 말이 오 

늘 따라 꽤나 아프게 들리는구나~ 후후... 여튼 선배의 쓰잘데기 없는 농지껄이라고 이해 

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다~ 쪽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