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베스트-내글내생각] 하루살이2  
병장 홍성기   2008-11-19 14:30:36, 조회: 361, 추천:5 

나 죽고 왔어. 그녀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는 반쯤 문에 기댄 상태로 멍하게 그녀를 맞았다. 팬티바람에 허벅지를 벅벅 긁는 그의 뒤로 축구중계가 들렸다. 그는 질겅질겅 뭔가를 계속 씹어댔다. 들어올래, 손짓해도 그녀는 말이 없었다. 갈래, 하고 묻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어쩌자고. 그가 침을 탁, 뱉었다. 아파트 복도에 그의 음성이 부닥치며 윙윙거렸다. 그녀는 순간 움찔하다 오히려 바들바들 떨면서 그와 눈을 맞췄다. 그렇게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도대체 왜 이러는데, 그가 축구중계를 힐끔거리며 물었다. 그녀는 말이 없었다.  눈물이 몽글몽글 맺혀 그녀의 마스카라를 녹였다. 그러자 그의 표정이 일그러지며 욕설이 온 사방에 튀었다. 구정물 같은 감정이 그녀의 볼을 타고 턱에 도르르 맺혔다. 그가 말했다. 그럼 맘대로 해. 서 있든지, 가든지. 엘리베이터를 타든지, 계단을 타고 가든지, 그도 아니면 엎어지든지 내 알 바 아니지. 왜 이렇게 자꾸 사람을 짜증나게 만들어. 그녀는 입을 열려다 목이 메는지 다시 침을 삼켰다. 나는- 지금- 죽고- 왔어. 그녀는 그렇게 말하곤 넘어갈 듯 울었다. 그는 그제야 그녀를 잡아끌었다. 들어가자. 이게 무슨 망신이야, 시발. 그녀는 그의 집으로 끌려 들어갔다. 그가 신경질적으로 문을 닫고 그녀를 닦아세웠다. 내가 언제까지 못되게 굴어야 속이 시원하겠어. 네 감정을 언제까지 내가 감당해야 하는데. 잠자코 듣고 있던 그녀가 손등으로 턱에 맺힌 눈물을 쓱 훔치며 나는 불쌍해. 하고 읊조렸다. TV 중계는 공격수가 패널티라인 안으로 들어가자 점점 격해지고 있었다. 그가 눈을 질끈 감고 뭔가 털어내듯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뭐라는 거야, 대체. 또라이 같은 게. 그는 다시 소파에 푹석 누웠다. 그리고 김빠진 맥주 한 모금을 마시고 오징어를 찢어 입에 물었다. 질겅 질겅. 그가 무심하게 TV채널을 바꿔댔다. 어지러운 영상이 브라운관을 훑고 지나갔다. 그녀가 그의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이 나쁜 새끼야. 그러자 순간 그가 멈칫하며 돌아가던 화면이 홈쇼핑으로 고정됐다. 그가 누운 채로 고개를 천천히 꺾어 그녀를 노려봤다. 뭐, 인마. 치켜뜬 눈 위로 주름이 말려 올라갔다. 그녀는 왼손에 과도를 쥐고 있었다. 그리고 오른손 엄지손가락으로 눈초리의 눈물을 쿡쿡 찍어냈다. 그리고는 담담히. 아주 천천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는 죽고 왔어. 이 사실은 어떡하든 변하지 않을 거야. 오늘아침 혼자 상을 차리고, 가지나물을 먹다 네 생각이 나서 울었어, 밥풀이 튈만큼. 나는 그냥 사랑받고 싶었을 뿐인데. 너 같은 놈한테 기대나 하고 살았던 내가 가여워서 울었어. 죽고 싶은데, 그냥 죽어버리고 싶은데 내가 짊어지고 있는 짐이 너무 무거워. 우리 석찬이랑 옥이는 어떡해. 등 굽어서 썩어 있는 엄마는 어떡하고. 그러니까 누가 나를 복사해 줬어. 눈 한번 끔뻑하고 났더니 나랑 똑같은 애가 옆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더라. 글쎄. 모르겠어. 내가 진짜일까, 아니면 걔가 진짜일까? 모르겠어, 지금은. 걔랑 나랑은 막 먹은 가지나물까지 똑같이 복사됐으니까. 그냥, 가위 바위 보를 했는데 내가 보를 내서 졌어. 그래서 내가 온 거야.

그가 그녀를 찬찬히 살피며 소파에서 일어섰다. 이마의 주름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자신의 목에 과도를 꽂았다. 피가 사방에 날렸다. 뒤늦게 그가 뛰어갔지만 그녀는 그대로 현관머리에 쓰러져 죽었다. 그가 기겁을 하며 숨을 헐떡였다. 그때, 전화벨이 찌르듯 울렸다. 그가 어쩔 줄 모르고 전화와 시체를 번갈아 보다가 뛰어가 전화를 받았다. 전화기 저편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난 가위를 냈어. 그러니까 살아갈 거야. 살아가야 해. 그는 비명을 지르며 수화기를 던졌다. 그가 현관을 돌아보니 시체는 온데간데없었다. 그리고- 평온한 날들이 지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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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6
13:04:13 

 

병장 이동석 
  홍성기님의 귀환- 
드디어 바쁜일 끝나신건가요? 허허. 2008-11-19
14:51:37
 

 

상병 이우중 
  멋진 귀환인걸요? 
세상에. 그 상황에서 가위바위보를 하다니 정말 합리적이라고 해야 하나요 어찌 보면 웃긴 것도 같고-그렇잖아요. 똑같이 생긴 사람 둘이 앉아서 가위바위보! 가위바위보! 하고 있으면- 일그러진 표정으로 웃고 있답니다. 허허... 

저랑 같은 사람이 나타난다면 서로 네가 밖으로 나가 나인척 하고 활동하라면서 둘 다 자리에 누워 버렸을듯?(웃음) 2008-11-19
14:55:20
  

 

일병 송기화 
  엄청난 분이 돌아오셨군요! 
우와, 우와, 해대며 홍성기님 글을 읽던 기억이 막 나는군요. 
어쨌건, 멋집니다. 2008-11-19
15:03:48
  

 

병장 홍성기 
  감사합니다! 바쁜 일은 끝났습니다. 이제부터 한껏 글을 쓸 요량입니다. 2008-11-19
15:09:40
  

 

상병 홍석기 
  선리플 후감상 2008-11-19
15:12:42
  

 

상병 양 현 
  난 이런 글이 싫어요! 정말 매우매우매우매우정말정말 진짜로 싫어요! 
왜 다음을 기대하게 만드는거죠? 왜 가슴을 두근두근하게 만드는거죠? 
홍성기님이 나빠요! 

.....그러고보니 모 개그 프로그램에서도 이렇게 말하더라구요. 그러고서 
결말은 핑크빛 오오라. 샤르르르~ ... 알죠? (모름 말구요) 2008-11-19
15:14:08
  

 

병장 이동석 
  으허헝- 
김래원 콧구멍 모드- 

성기님 글을 쏙 빼서 영화 찍고 싶어요. 전율때문에 눈물이 주륵주륵. 2008-11-19
15:16:39
 

 

병장 고동기 
  아. 이제야 돌아오셨군요. 그동안 얼마나 성기님의 글을 읽고 싶었는지 몰라요. 
복도 앞에 서서 그와 그녀가 대화하는 부분. 정말이지 실감 납니다. 2008-11-19
15:59:16
  

 

병장 이찬선 
  ... 

나와 나의 가위바위보에서 승부의 가름이 발생했다... 
고로 승자인 나와 패자인 나는 다르다... 이것은 상정된 가정인가? 
아니면 차후에 형성된 다름인가? 

구역질이 났습니다... - 지극히 아득하군요... 
구역질의 안도감... 

좀 처럼 떠나질 않겠군요... 물론 담배 또한 말이죠... 2008-11-19
16:00:47
  

 

병장 조현식 
  좋은 글입니다. 하하. 2008-11-19
16:02:44
  

 

병장 정영목 
  역시 홍막장님의 글은 흡입력이 있어요. 
그대의 인생살이만큼 강렬한 듯. 
남은 기간 동안 주옥같은 글들을 뿜어내길 기대합니다. 

-북곽선생- 2008-11-19
17:38:41
  

 

병장 이동석 
  홍막장님? 허허허 

영목님을 북곽선생이라고 부르는건 들어봤습니다만. 허허. 2008-11-19
19:07:13
 

 

상병 김지웅 
  역시 필력이란 허허허허허 2008-11-20
03:17: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