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민주주의에 대한 메타정치, 혹은 민주주의의 미학  
병장 박원익   2010-01-29 02:53:50, 조회 : 37, 추천 : 0 

정말 잘 읽었습니다. 사츠슈나이더를 왠지 읽은 느낌이 들 정도요. 앞으로 좋은 독서후기들을 많이 부탁합니다. 

저는 영미식 정치(철학)자들의 사고방식에 모종의 "패턴"이 존재하는 건 아닌지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샤츠슈나이더의 "이상적 민주주의"와 "현실적 민주주의" 사이의 세심한 구분은 좀 당황스러울 정도네요. 이것은 오히려 민주주의에 대한 오래된 '편견'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예전에는 순진하게도 몇몇 이상주의적 사상가들에 의해 "인민에 의한 통치"가 가능했다고 여겼지만, 현실은 그렇지만도 않다, 라는 식의 사고방식 말이지요. 여기에 대한 계보학적 비판을 정리해야할지도 모르겠네요.

문희님이 올린 자크 랑시에르의 "민주주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글이 여기서 시사적일지도 모릅니다. 흔히 민주주의에 대한 사고방식의 패턴에 대해 그는 "민주주의는 시작되었지만...."과 "....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는 시작된다"라는 이중의 패턴으로 정리한 바 있습니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과잉"에 대한 동일한 두려움의 양갈래라는 것이지요. 사츠슈나이더 역시 '고전적 민주주의'와 '현실적 민주주의'를 굳이 구분하면서, 똑같은 두려움을 표현한 것 아닌가요? "인민의 자기통치"라는 "위험한 유토피아적 과잉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는 지금 불만족스럽게나마 이미 현실적으로 전개되고 있다"와, "민주주의는 이미 주어졌지만, 인민의 자기통치라는 유토피아는, 현실 민주주의를 사고하는 데 장애가 될 위험이 있다" 저는 오히려 이 사고방식의 역설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 도대체 항상 민주주의를 사고할 때 "그래도"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접속사를 동반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보다 비판적인 사고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다시 말해 이 민주주의의 과잉에 대한 두려움의 정체란 무엇인가요?

저는 도대체 이 두려움에 대한 "근거"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민의 자생적인 자기통치나, 일반의지의 발현이 "혼란"으로 귀결되 것이라는 사고는, 오히려 민주주의라는 이념 자체의 더 심층적인 심연을 은폐하는 속임수는 아닐까 생각합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메타규범(정당정치, 의회정치, 대의민주주의)을 설정하려는 온갖 강박들은, 다시 말해 사츠슈나이더 말대로, "인민의 자기통치"를, "인민의 동의에 의한 통치"로 번역하려는 시도들은, 오히려 "인민의 자기통치"란 실제로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막아버린 채, 그러한 자기통치의 유토피아적 시도가 마치 어떤 단일한 범주인 양, 따라서 지금-여기에서는 어떤 광기가 아니고서는 사유 불가능한 것인 양, 섣불리 가정해버리는 폐단으로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나요?

이러한 폐착은, "현대 대중은 모든 정치적 사안에 참여하고 명확한 지식을 가지기 어렵다. 그에 따른 귀결은 대의제 민주주의이다"라는 저 짧은 문단에 압축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대 대중이 정치에 참여하기 힘든 것은, 과연 '지식'의 문제일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당장의 전문 정치인들이 과연 얼마만큼의 대단한 '지식'을 가지고 있느냐는 의문도 들고요. 오히려 저는 지식의 문제라기보다는, 랑시에르의 말대로 이 모든 것은 '감성'의 문제가 아닐까도 생각해 봅니다. "이것은 내 주제에 맞지 않는다"라는, 자신을 세계의 특정한 부분에 위치시키는 감성적인 배분 것이야말로, 정치참여를 허용하고 가로막는 기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실은 그런 의미에서 "정당정치의 틀"을 소묘하려는 사츠슈나이더의 메타정치적 사고는 역설적이게도 광의의 "미학(=감성적인 것)"적 사고방식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는 민주주의에 대한 저 많은 이론들이 사실은 학적 논의의 가장을 한 미학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사츠슈나이더의 이론 역시 엄밀한 학문이라기보다는, 주제넘는 영역과 그렇지 않은 영역을 가르는 바로 그러한 감성의 분할로서, 어떤 미학에 가까운 게 아닌지 생각합니다.

오히려 가능한 민주주의에 대한 감수성을 창안해내는 직접-민주주의의 이상이야말로 진짜 필요한 게 아닌지 생각합니다. 결국 문제는 민주주의에 대한 감수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민주주의에 대한 일상적인 경험양식과 감각 자체를 바꿀수 있는 새로운 민주주의의 미학 혹은 반-미학이 요청되는 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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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마을을 지켜가는 것은 우리 모두의 몫입니다. 올바른 글을 사용합시다. 2010-01-30
08:15:00 

 

조문희 
  최근에 선임과의 대화에서 폴리스와 오이코스라는 그리스적 사유방식이 공과 사의 분류로 이어지고 이것이 민주주의를 사유하는데 핵심 기초라는 하버마스나 아렌트의 방식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이념 그 자체를 고민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선임이 랑시에르 이야기를 꺼냈었는데요. 
기껍게도 원익씨가 상당히 친절하게 글을 올려주신 덕분에 다시 한번 떠올릴 기회가 되었네요. 하하. 2010-01-29
09:27:01
 

 

오학준 
  "이러한 폐착은, "현대 대중은 모든 정치적 사안에 참여하고 명확한 지식을 가지기 어렵다. 그에 따른 귀결은 대의제 민주주의이다"라는 저 짧은 문단에 압축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대 대중이 정치에 참여하기 힘든 것은, 과연 '지식'의 문제일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당장의 전문 정치인들이 과연 얼마만큼의 대단한 '지식'을 가지고 있느냐는 의문도 들고요. 오히려 저는 지식의 문제라기보다는, 랑시에르의 말대로 이 모든 것은 '감성'의 문제가 아닐까도 생각해 봅니다. "이것은 내 주제에 맞지 않는다"라는, 자신을 세계의 특정한 부분에 위치시키는 감성적인 배분 것이야말로, 정치참여를 허용하고 가로막는 기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 저도 동의합니다. 전문 정치인의 '전문성'이 어떤 것이냐에 대해서 따지기 시작한다면, 결국 실질적인 내용은 없다는 것, 하지만 그네들에게 '전문성'이 있어 보이는 것은 우리가 '이것이 민주주의다'라고 설정해 놓은 몇 가지 직업들을 업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 그러므로 그네들의 전문성이란 실상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떤 실체를 넘어서는 '잉여'라는 것이라는 결론을 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거꾸로 그런 '잉여'를 책임지는 사람이 있어야, 우리는 안심하고 '민주주의 속에 있다'고 믿는 채로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겁니다. 정확히 대의민주주의가 여기 이 '안주'와 '위임' 그리고 '잉여'라는 말로 설명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것이 '민주주의'에 대한 진전된 사고를 가로막고 있는 중요한 이데올로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2010-01-29
09:32:54
 

 

 이기훈 
  제가 샤츠슈나이더가 한국 현실에서 의미를 가진다고 여긴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현대 한국 정치에서 민주주의라는 기표는 현실에 대한 설명을 하는 현실주의적 담론보다는 오히려 민주적이어야 된다는 당위적인 담론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헌법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할 때, 그것이 이미-현실로 한국이 민주적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렇기에 촛불을 든 사람들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헌법에 명시화되어있는 말을 할 때, 그것이 저항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겠구요. 
그렇기 때문에 이미-실현된 민주주의라는 것과 추구해야 될 가치로써의 민주주의 사이의 간극이 발생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이러한 간극을 어떠한 형식으로 메울 것인가야말로 우리가 지속적으로 해야 할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저는 직접민주주의의 이상이 어떤 류의 반민주주의와 맞닿아있지 않는가라는 생각을 하게됩니다. 촛불에 대한 예찬론자들이 말하는 "직접 민주주의의 이상"은 어떤 측면에서 볼 때, 아무것도 말하고 있지 않는 것과 같지 않나요? 
촛불은 현 정권의 특정 정책이나 정책 방향에 대한 광범위한 반대를 동원하는 데에는 효과적이였을 지 모르지만 그것이 무슨 대안적인 방향을 만들지는 못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촛불이나 다른 류의 "직접 민주주의"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이 삶에서의 경제 활동을 어느 정도 신경쓰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요. 정작 민주주의에서 유의미한 다수를 형성할 수 있는 "노동자" 혹은 "민중"으로 불리는 이들은 오히려 민주주의에의 참여가 현재 불가능한 이들은 아닐까요. 제 경험을 돌이켜 볼 때, 촛불이 한참일 때 있었던 기말고사를 포기하고 - 이는 장학금이라는 경제적 이권의 포기와 미래 소득의 포기와 연관이 되겠지요 - 참여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게만 여겨졌습니다. 이는 저 개인의 경험만은 아닐거라고 믿습니다. 이런 지점에서 민주주의가 삶과 공존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말하지 않고 "직접 민주주의"를 이야기하는 것은 참여할 수 있는 이를 특정 재산을 소유한 사람 이상으로 제한했던, 과거 자유주의의 패착을 반복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물론 경제 체제의 전면적인 개편 이 전제된다면 제가 설정한 이러한 류의 제한은 무의미하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샤츠슈나이더가 말한 "절반의 인민주권" - 전체의 인민주권에 의한 통치의 이상에 대한 안티테제 -가 오히려 현실적으로 실현가능한 형태의 민주주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조금 더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면 헌신적인 삶의 태도를 유지해야 하는 정당 활동가가 아닌, 직업 생활을 영위하면서 당원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중심적 위치를 차지할 수 있는 민주주의. 그런 삶과 공존가능한 정치의 형태는 여전히 대의적일 수 밖에 없고, 그렇다면 현실적으로 - 물론 학준님의 말처럼 이는 한국 현실에서 당위로 요청되어야 하는 것이지만 - 올바르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이러한 발언은 "전체의 인민주권"에 대한 두려움의 발로라기보다 그것은 당위적으로 요청되어야 하는 지점임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구조적 한계를 감안할 때 "절반의 인민주권"이라도 완전한 형태로 실현하는 것이 올바르지 않는가라는 개량주의적 발상이겠지요. 2010-01-29
09:35:01
 

 

 이기훈 
  이렇게 말은 하지만 확실히 제도적 민주주의 차원이 아닌, 이념적으로 요청되어야 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고민이 부족하다는 것을 절실히 생각하게 됩니다. 

실현가능항 형태의 민주주의라고 '여겨지는' 대의 민주주의에 대한 고민이 실현되어야 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이상을 막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한다는 학준님의 지적은 저에게 무척이나 뼈아프군요. 지적을 겸허하게 숭요하고 실현가능하면서 동시에 '실현되어야 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사유를 진행해야 한다는 강박을 느끼게 됩니다. 2010-01-29
09:40:03
 

 

오학준 
  기훈 // 댓글로 달기가 너무 길어서 답글을 달았습니다. 2010-01-29
11:52:42
 

 

조문희 
  엥 학상 왜 글 지우셨습니까 2010-01-29
20:00:48
 

 

오학준 
  아, 좀 정리좀 다시 하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