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의 이중성을 넘어서-이기훈님에 대한 답변  
병장 박원익   2010-01-29 19:21:05, 조회 : 8, 추천 : 0 

  기훈님의 댓글 정말 잘 읽었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제대로 된 "적수"를 만났다는 반가운 기분마저 듭니다. 기훈님과 같은 "개량주의자"여야, 같이 논쟁할 맛도 나지 않겠습니까? 

1. 민주주의의 이상을 논하는(물신화하는) 사람은 정작 누구인가?

  기훈님은 여전히 "민주주의"라는 기표가 당위적인 지향과, 현실적이고 구성적인 제도 양자에 걸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도덕적 이념은 규제적 이념과 현실 구성적 이념으로 이중화되며, 인간은 이 이중성 안에서 자연적 존재와 도덕적 존재로 분열될 수 밖에 없다는 칸트의 논의를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보입니다. 혹은 랑시에르의 말대로 한나 에렌트나 에티엔 발리바르처럼, 민주주의의 외관 이면에 또 다른 민주주의적 현실이 놓여 있을 것이라는 오래된 의심의 계보가 이어져왔습니다. 저는 이러한 계보 자체를 지금 당장 논박하거나 반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단지 제 말은, 이 회의주의의 전통이 행하는 구분 자체를 "문제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민주주의에 대해 당위적이고 이상적인 태도를 취하자고 제안하기보다는, 오히려 민주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할 것을 종용하고 싶습니다. 다시 말해, 민주주의가 당위적인 지향성과 함께 현실적-제도적인 측면을 함께 안고 있으며 이것을 엄밀히 구분해야한다는 기획 자체는, '현실주의'적일지는 모르겠지만, 이것이 본연의 '비판적' 태도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사족이지만, 저는 "민주주의"에 대한 보다 엄밀한 계몽적 태도가 요구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영미학계에서는 그러한 유산이 단절되어 있지 않나 하는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저는 좀 더 기훈님의 구분을, 그리고 샤츠슈나이더의 구분을 해체하고 싶습니다. 제 의구심은 다음과 같습니다. 실은 민주주의의 당위적 담론과 현실주의적 담론을 정교하게 "구분"하는 것은 그 자체로, 순진한 민주주의적 이상의 진앙지가 아니냐는 것이죠. 오히려 민주주의에 대한 순진한 믿음(혹은 "믿는 척 함")은 엄밀히 말해 그것의 현실에 대한 냉소적 관조는 같이 가는 게 아닌가요? 같은 맥락에서 랑시에르 또한 민주주의에 대한 담론이 "민주주의는 시작된다, 하지만....."과 ".....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는 시작된다"라는 이중부정으로 분열된다고 분석했습니다. 저는 민주주의의 이상성과 현실서에 대한 구분보다는, 오히려 랑시에르의 구분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항상 유보조항을 단 이 모든 입장들은 무엇을 뜻하는가요? 그것은 실은 현실주의적 사상가들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이상적 형상에 대한 물신적 태도를 견지한다는 것입니다. 기훈님은 사츠슈나이더와 함께 민주주의의 이상을 "인민의 자기통치"라는 것으로 훌륭하게 정리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러한 정식화에서, 정작 민주주의를 과도하게 "이상화"하는 혐의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것은 아직 사츠슈나이더나 기타 민주주의에 대한 현실주의적 사상가들이 아직 "인민의 자기통치"라는 민주주의의 이상의 계보학적 기원이 무엇인지에 대한 통찰이 결여되어 있다는 심증을 더욱 굳히게 합니다. 예컨대 이런 식입니다. 사실은 루소의 "일반의지"라는 개념은 그가 처음 그것을 고안했을 때 과연 지금 우리가 받아들이는만큼이나 "이상주의적"이었는지를 따져봐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그것은 루소가 처해있던 당대의 정세를 염두에 둔 현실적 개입의 침전물이라고 봐야하지 않을까요?


1-1. 촛불시위와 냉소적 주체

  기훈님은 촛불시위를 "당위적 민주주의"를 향한 지향의 전형적인 사례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저는 촛불시위 주체가 기훈님이 말씀하신 민주주의에 대한 당위적 지향과 현실적 담론 양자로 분열되어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다시 말해 촛불시위에 참여한 주체들은, 사츠슈나이더나 기훈님에 비해 뭘 더 "몰랐을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촛불시위의 주체들은 기훈님이나 사츠슈나이더만큼이나, 자신이 분열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요컨대 그들 역시 사츠슈나이더만큼이나 냉소적인 주체였기 때문에, 오히려 민주주의적 이상을 "믿는 척"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촛불시위라는 사례야말로 오히려 민주주의에 대한 영미식의 "현실주의"적 논의들을 패러디한 실례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촛불시위 참여의 주체들에게 문제는 무엇일까요? 저는 그들이 직접참여민주주의에 대해 지나치게 과도한 신뢰를 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에 대해 지나치게 냉소적이었기 때문에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2. 민주주의의 진실에 대한 두려움

  여기서 기훈님은 "직접 민주주의"에 대한 이상에 대한 모종의 두려움마저 내비치고 있습니다. 기훈님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직접민주주의의 이상이 어떤 류의 반민주주의와 맞닿아있지 않는가라는 생각을 하게됩니다."

  앞서 말했듯이 이러한 두려움은 굉장히 오래된 계보를 과시합니다. 민주주의가 정작 스스로 자처하는 것과 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 말입니다. 저는 이 두려움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의 한 구절을 맞세우고 싶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정확히 기훈님의 예리한 통찰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습니다. 거의 헤겔 변증법을 연상시키는 태도로,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민주주의는 과두정주의자들에게는 과두정처럼, 민주주의자들에게는 민주주의처럼, 왕정주의자처럼 왕정제처럼 비쳐져야 제대로 작동하는 것 같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직접 민주주의가 "문자 그대로" 실현될 경우, 그것이 곧바로 그것의 대립물로 화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그 자체의 순수성을 고집하면, 곧바로 작동불능한 무언가를 드러내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두려움이 전달하고 있는 "민주주의의 역설"을 온전히 수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문제가 민주주의의 이상주의와 현실주의의 이중성을 즐기는 논의보다 더 시급하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알려진 이러한 정식을 넘어서, 민주주의가 자기 자신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을 긍정하는 새로운 계열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에 앞서 저는 한 가지 중대한 사실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인용한 아리스토텔레스로 다시 돌아가자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통치권력을 뒷받침하며 통치자에게 통치자의 자격을 부여하는 '미덕'이 무엇인지를 열거합니다. 부, 명예, 능력, 등등... 그런데 이것은 한편으로는 이미 오늘날의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를 알려주지 않나요? 직접민주주의의 두려운 가능성에서, 굳이 반민주주의의 요소를 찾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금 현재의 민주주의에서야말로 어떤 류의 반민주주의적 보충물과 잇닿아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동일한 맥락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주주의는 그 자신의 외관과 다른 왕정제의, 과두정의, 포퓰리즘의 각종 이질적인 요소들로 보충되어야 "작동"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전히, 민주주의를 효율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본연의 민주주의 아닌 것을 보충할 때 여전히 그러한 보충을 정당화하는 게 무엇인지를 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역으로 그것이 반민주주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장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결국은 대면하지 못하는 것은 그러한 민주주의적 대리보충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민주주의가 그 안에서 반민주주의와 대립하는 역설은, 저 어딘가에 존재하는 이상주의적 충동 안에 자리하고 있는 게 아니라, 지금-당장 우리 앞에 가로놓여 있다는 사실. 그렇다면, 민주주의라는 이상에 집착할 때 그것이 정 반대의 무언가로 전도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두려워할 게 아니라, 오히려 민주주의라는 이상 자체가 이미 지금-여기에서 분열되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요? 

  이것은 우리가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물신이 아닌, 기표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당위를 요청합니다.


3. 여전히 "미학"이 문제인 이유

  어떤 점에서 저는 기훈님과 전혀 대립하지 않습니다. 기훈님이 말씀했듯이 "실현가능하면서 동시에 '실현되어야 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사유를 진행해야 한다"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공통적인 요청입니다. 그런데 기훈님의 문제는 이 "실현되어야 함"과 "실현 가능함"을, "촛불시위의 순수한 열정"과 "기말고사의 엄혹한 현실" 간의 대립으로 치환시킨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것은 여전히 "미학적"인 문제를 함축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역으로 어떤 의미에서는, 모든 것을 걸고서 촛불시위에 참여했던 헌신적인 운동가야말로 실은 대의제 민주주의의 이상을 체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사람 개인이 대의 민주주의의 함정에 빠졌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라, 바로 그러한 개인을 둘러싼 어떤 감성적인 배치야말로 오늘날의 보수적인 민주주의 이데올로그들의 세계를 그려내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예컨대 젊은 날의 순수한 열정을 불사르는 운동권이라는 이미지는, 정작 운동하는 당사자 자신에게는 낯선 형상이며, 오히려 그러한 미적 형상은 보수적 담론의 배치 안에서만 발견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운동 당사자에게는 절실한 삶의 문제 그 자체를, 현실과  이상 간의 어떤 대립으로 치환하려는 미학적인, 그리고 그만큼이나 정치적인 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기훈님이 말씀하시는 촛불시위의 사례도 그러한 방식으로 소묘되고 있지 않나요? 오히려 촛불시위를 새로운 감수성을 통해 바라볼 수는 없을까요? 저는 "헌신적이고 순수한 투쟁"과, "기말고사의 불순한 현실"을 대립시키는 구도 속에서만, 민주주의 이상을 가정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오늘날의 보수적인 민주주의 이데올로기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