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반의 인민주권" 독서후기  
 이기훈   2010-01-27 08:00:01, 조회 : 119, 추천 : 0 

소외를 극복하라 - 현대 민주주의를 바라보는 하나의 시선 

1. 작년 대선을 전후하여 이른바 일부 진보세력 및 네티즌 사이에서 ‘국개론’이라는 담론이 유행했다. ‘국개론’이라 하면 ‘국민개XX’론의 약자이다. 즉, 몇 번의 선거 결과에서 실망한 사람들이 그러한 실패의 책임을 국민에게서 찾은 담론이다. 이에 따르면 시민들이 각종 이데올로기적 장치 - 언론, 교육 등- 때문에 민주주의 하에서의 시민으로의 자질을 못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민주주의 하에서 시민은 참여적이어야 하며 자신의 이해관계를 명확히 파악해서 프로파간다를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공익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가 투철해야 하며 논쟁되고 있는 사안에 대한 논리적인 판단을 수행하여야 한다. ‘국개론’은 진보 세력들 사이에서도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왜 진보 세력은 이런 이데올로기 장치 혹은 헤게모니적 이념을 불러일으키지 못 했는가? ‘국개론’은 진보 세력의 자기 책임 회피는 아닌가? 이런 의문에 대한 긍, 부정 여부와는 상관없이 ‘국개론’은 한국 정치 세력의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의 한 단면을 드러내준다. 한창 촛불 집회가 진행 중일 때 보수 세력은 이들이 진보 세력의 선전에 넘어갔다며 그들의 지적 자질을 비판했다. 진보 세력은 이를 비웃었지만, ‘국개론’은 이의 좌파 버전은 아닌가? 그렇다면 진보 - 보수 세력간에 무척이나 상이한 듯 보이는 정치에 대한 이해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다. 이런 공통점이 무엇이고 그것이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가 우리의 민주주의에 대한 이론적, 실천적 지향에서 중요함은 부연할 필요가 없다. 

2. 샤츠슈나이더는 이를 민주주의에 대한 고전적 이해와 현대적 이해의 차이로 구분한다. 민주주의에 대한 고전적 이해는 우리가 익히 들어온 ‘인민에 의한 통치’로 정의된다. 이러한 정의가 전혀 어색하지 않은 까닭은 이것이 헤게모니화된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이기 때문일 것이다. 샤츠슈나이더는 이러한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를 비판한다. 샤츠슈나이더가 고전적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를 비판하는 까닭은 그가 반민주적이기 때문이라면 오독이다. 이를 이해하려면 두 가지 차원의 민주주의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그 구분은 현실적 민주주의와 이상으로의 민주주의에 대한 구분이다. 이러한 구분에서 볼 때, ‘인민에 의한 통치’라는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는 민주주의에 대한 이상을 당위적으로 요청할 뿐이지 현실을 설명하고 있지 못하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법 앞에서 만인은 평등하다는 주장은 현실을 설명하고 있기 보다는 당위를 요청하고 있다. 실제로 법 앞에서 만인이 평등하다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모든 법 앞에서 만인이 평등하다는 것을 이론적 전제로 삼고 논의를 전개한다면, 오히려 사법 내에서의 권력 관계에 대한 비판이 불가능해진다. 이렇게 된다면 법 앞에서 만인이 평등해야한다는 실천적 지향에 오히려 방해가 될 따름이다. 또 다른 민주주의 이론의 대가인 로버트 달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합의가 어려운 까닭은 많은 사람이 ‘실제의 민주주의’와 ‘이상의 민주주의’를 섞어서 쓰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상과 같은 이해 하에서 고전적 민주주의의 ‘인민에 의한 지배’라는 정의는 현실에서의 민주주의를 설명하는 이론적 전제로 적합하지 않다. 샤츠슈나이더는 현대적인 민주주의의 이해는 ‘인민의 동의에 의한 지배’라 정의한다. 현대 대중은 모든 정치적 사안에 참여하고 명확한 지식을 가지기 어렵다. 그에 따른 귀결은 대의제 민주주의이다. 고전적 민주주의 이론은 대의제 민주주의에 대한 현실적 인식을 가지지 못 했기에, 민주주의를 설명하지 못 했다. 샤츠슈나이더는 “민주주의의 위기는 실천의 위기일 뿐 아니라, 이론의 위기이기도 하다.”고 했다. 민주주의에 대한 고전적/현대적 이해의 차이를 구분한다면, ‘국개론’으로 대표되는 민주주의적 시민의 자질에 대한 담론이 오류를 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샤츠슈나이더는 간명하게 요약한다. “민주주의가 인민을 위해 탄생했지 인민이 민주주의를 위해 탄생한 것이 아니다.” 포이어바흐는 사람들이 만든 종교가 사람 위에 군림하는 현상을 소외라 부른 바 있다. 나는 이를 모방해 샤츠슈나이더의 민주주의 이해를 ‘소외 극복’이라 부르고 싶다. 샤츠슈나이더의 이론적 작업은,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상원 의원 수준의 정치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는” 시민들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 시민들을 위한 민주주의에 대한 것이다. ‘인민에 의한 지배‘가 ’인민의 동의에 의한 지배‘보다 더 민주주의의 ’이상‘에 가까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원하는 모든 형이상학적 가정을 현실화할 수 없다. 막수는 “여태까지 모든 철학자는 세계를 해석해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더 나은 민주주의를 꿈꾸는 모든 사람은 변혁하기 이전에 ’현실의 민주주의‘를 더욱 잘 이해해야 한다. 

3. 그렇다면 샤츠슈나이더의 민주주의에 대한 이론은 무엇인가. <절반의 인민주권>에서 나타난 그의 정치에 대한 이해는 ‘갈등’으로 요약가능하다. 갈등이란 무엇인가. 사회에서 모두가 동일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다면, 정치는 무의미하다. 모두의 이해관계에 맞는 정책을 펼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그런 상호대립되는 갈등을 인정해야 한다. 그것이 정치에 대한 이론의 첫 전제이다. 그렇다면 갈등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이에 대한 상반된 입장이 있다. 립셋은 그의 정당에 대한 연구에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자본 - 노동의 갈등이 서유럽의 정당 체제를 결정했으며 그것은 이미 확정된 이후 ‘결빙’되었다는 주장을 펼친 바 있다. 그러나 샤츠슈나이더는 그러한 ‘결빙’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갈등은 원래 있다는 사실에서 중요성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갈등은 만들어지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예를 들어보자. 지난 대선은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오바마의 당선이 유력시되는 상황에서 한-미, 남-북 관계의 문제도 있었으며 전 정권의 경제 정책에 대한 심판의 의미도 있었다. 그러한 다양한 갈등이 존재할 때, 시민은 어떤 판단을 했는가? 그것은 “경제를 살리겠다.”는 구호를 건 후보의 당선이었다. 이 말은 다른 갈등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갈등은 무수히 많았다. 그러나 정당이 선택하는 갈등만이 유의미한 것이다. 하나의 갈등이 유의미해지면 다른 갈등은 그 의미를 잃는다. 갈등이 변화하면 우리편이었던 사람은 상대편이 되고, 상대편이었던 사람은 우리편이 되곤 한다. 진정한 정치는 ‘갈등에 대한 갈등’이다. “갈등을 어떻게 정의하는가를 자기 마음대로 하는 사람이 권력을 차지한다.” 또한 갈등은 그 범위가 중요하다. A와 B가 있고 구경꾼이 100명 있다고 해보자. 그 때 A가 B보다 훨씬 힘이 세다면 A는 B와 1대1로 싸우자고 할 것이다. 그러나 B는 구경꾼이 누구의 편이 들어올지 모호하다고 하더라도 구경꾼을 끼워서 싸우려고 할 것이다. 이러한 예는 조악하더라도 갈등의 범위에 대한 많은 점을 시사해준다. 갈등의 범위를 어떻게 하는 가는 정치 세력의 구도를 결정적으로 바꾼다. 또한 강자는 갈등의 범위를 좁히는 ‘갈등의 사사화’를 선호하지만, 약자는 갈등의 범위를 넓히는 ‘갈등의 사회화’를 촉진한다. 샤츠슈나이더에 따르면 민주주의란 다름아닌 ‘갈등의 사회화’이다. 갈등이 사회화될 때, 개인간의 권력의 차이는 사라지고 수가 의미있게 된다. 민주주의란 갈등의 사회화를 통해서 다수의 지배를 가능케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론적 논의에서 샤츠슈나이더의 실천적 지침은 다름아닌 정당 정치이다. 이에 대립되는 적은 이익집단 정치이다. 이익집단은 ‘갈등의 사사화’를 지향한다. 또한 모든 정치를 이익집단으로 설명하는 것은 현실에도 부합하지 않을뿐더러, 실천적으로도 옳지 않다. 이익집단이 추구하는 ‘갈등의 사사화’는 상층 편향적이기 때문이다. 진보 세력 또한 이익집단을 통한 압력 추구를 주된 활동 전략으로 선택해서는 안 된다. 샤츠슈나이더는 그의 저서에서 이익집단의 무력함을 증명한다. “정당을 포기하고 이익집단을 추구하는 것은 가장 큰 승부(선거)를 포기하고 작은 승부에서 이기려 드는 것과 같다.” 정당이란 그 자신이 정부를 구성할 수 있는 유일한 집단이자 다수를 구성하려는 유인에 의해 움직이기 때문에 이익집단과 달리 시민의 통제 하에 있을 수 있다. 

4. 샤츠슈나이더의 실천적 지침을 요약해보자. 갈등이 사회의 갈등을 반영해야 한다. 경제적 갈등이 분명 존재한다면 그것이 없는 것처럼 여겨져서는 안 된다. 현실 민주주의 하에서 시민들은 주어진 대안을 선택한다. 뚜렷한 갈등에 따른 대안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다양한 정당이 제도적으로 인정된다고 하더라도 시민들에게는 그것이 민주주의일 수 없다. 그리고 민주주의에서 중심은 정당이 되어야 한다. 정당만이 시민의 선호를 반영할 수 있으며 스스로 정치적 책임을 가지는 조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갈등의 범위는 넓어야 한다. 갈등의 사사화는 오로지 상층에게만 유리하다. 그리고 정치학을 공부하는 학생으로 인상깊었던 말이 있다. 한 기자가 샤츠슈나이더에게 정치학을 연구하는 것이 개미가 집 짓는 것을 보는 관찰자의 시점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샤츠슈나이더는 “아니, 오히려 집 짓는 것을 관찰하는 집 짓고 있는 개미의 느낌이다.”라고 답했다. 샤츠슈나이더에게 정치학이란 낭만이 아닌 현실을 다루는 것이되 실천적 지향을 뚜렷하게 하는 것이고, 이론과 현실이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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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마을을 지켜가는 것은 우리 모두의 몫입니다. 올바른 글을 사용합시다. 2010-01-30
08:14:29 

 

오학준 
  잘 읽었습니다. <절반의 인민주권>은 짧지만 재미있는 책이었어요. 현대민주주의의 특성을 갈등의 사회화로 설정하는 샤츠슈나이더의 태도는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구분에 기초하는 동시에, 공적인 것을 사적인 것의 부분으로 밀어올리는 것이 현대민주주의의 특성이라고 보는 것과 같다고 여겨지네요. 문제는 그런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구분에 기초하는 모든 참여민주주의의 문제는, 실제로 대한민국 개개인이 어떤 공적인 것을 공유하고 있느냐라는 질문에 '당연하다고' 대답하는 데 있을 것 같습니다. 순수하게 거대한 이익집단을 운영하는 느낌이랄까요, 정당을 운영한다기보다는. 정당 자체가 사회적 갈등을 선택하는 보편적인 사회적 덩어리가 아니라, 정당이 이미 사회적 갈등에 기초한 상태에서 편파적인 이익만을 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정당이 사회적 갈등을 '관리'한다고 말하려면, 정당이 강령, 구성원 등에서 보편성을 보여야 하고, 그래야만 사회적 갈등을 정당의 힘으로 재구성할 여력과 정당성이 생길텐데, 현재는 정당이 오로지 '미리 존재한다고 여겨지는' 갈등의 선 위에서, 그 선을 따라 나뉜 구성원, 성향을 일방적으로만 추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됩니다. 그렇게 되면 샤츠슈나이더의 정당이론은, 거꾸로 대한민국에서 이상적인 이론이 되어버리는 건 아닐까요? 2010-01-27
09:11:02
 

 

 김소망 
  현실적이군요. 2010-01-27
10:24:36
 

 

조문희 
  와, 깔끔하네요. '갈등에 대한 갈등' 

그런데 저도, 학상과 비슷한 이유일지 모르겠지만 
정당정치는 '정당의 이익집단화'에 대해서도 유효한 것으로 남아있는지를 묻고싶네요. 
물론 기훈씨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정당의 ideal type 에 대한 것일테지만, 
현실 을 강조하는 한에서, 정당정치의 사사화 역시 지적해야 할 부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여기에는 지역감정과 인물중심의 정당 편성, 그리고 선거제가 지닌 결함도 맞물려있다고 생각하는데, 정치학도로서 기훈씨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실상 국개론에 대해서도 민주주의에 대한 고전적 / 현대적 이해의 문제 에서 내기에 걸린 ‘인민의 동의에 의한 지배’ 뿐만 아니라, 
'인민'이라 할 때 인민의 범주는 어디까지인지 
'인민'은 왜 그것에 동의하는지 
'인민'이 동의하는 정치적 의견은 어떤 토대에서 나왔는지-그것은 이미 나뉜 분할선에 근거하여 나온 의견인지 아니면 시민사회의 갈등을 재분할하여 나온 의견인지 
궁극적으로, 사회적 갈등의 다원성을 충분히 반영할 수 있는 정치제도를 가지고 있는지 
를 물어야하지 않을까요. 2010-01-27
10:37:54
 

 

조문희 
  그런데 후마니타스가 좀 짱이군요. 정치학도들에게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같은 출판사에요. 2010-01-27
10:46:22
 

 

 이기훈 
  학준/학준님께서도 이미 샤츠슈나이더 책을 읽으신듯 하군요. 그런데 학준님께서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구분에 기초하는 모든 참여민주주의"라는 말을 언급하셨는데 이는 샤츠슈나이더의 초점과 약간 다른듯하네요. 샤츠슈나이더에게 참여를 '강요하는' 민주주의는 현실에 어긋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른바 직접 민주주의라는 것이 실제로는 사회 이슈에 대해서 뚜렷한 견해를 가질 수 있는, 상층 편향적일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조악한 예를 들자면 '논술식 답안'을 쓸 수 있는 몇몇 상층부만이 '민주 시민 답다'고 여겨지는 소외가 이루어지지 않으려면, '객관식 보기'가 주어지고 있는 현실을 인정하고 이러한 현실의 한계 내에서 사유해야 한다는 것이 샤츠슈나이더의 논점인 듯 합니다. 

그리고 샤츠슈나이더의 이론의 특이성은 립셋&로칸의 고전적인 정당 이론과 대조되어서 설명될 수 있는 듯 합니다. 립셋&로칸은 자본 - 노동의 사회적 균열이 정치 영역으로 '왜곡없이' 반영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보수당 - 사회당 혹은 노동당의 형태로 양당제화되는 것이 이를 말하지요. 하지만 샤츠슈나이더는 사회 영역에서의 갈등이 정치 영역에서의 갈등으로 그대로 반영되지 않음을 말합니다. 어떻게 보면 보나파르티즘이랑도 연관되는 듯 한데, 정치 사회에서 갈등을 재-정의할 수 있는 고유한 영역이 있다는 것이지요.한국적 맥락에서 이야기하자면 자본 - 노동의 갈등이 있다고 하더라도 한XX당 - 민X당의 양당제가 이를 반영하고 있지 못함은 주지의 사실이겠죠. 진xX당이나 민주XX당이 유의미한 정치적 행위자가 아니라는 것이 립셋&로칸의 명제가 한국 현실에 걸맞지 않음을 말해주는 듯 합니다. 오히려 사회 내의 균열이 정당 간의 '자체적인' 논리로 인해 제대로 공적인 갈등화되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친박과 한나라당의 갈등은 사회 내에 존재하는 갈등이 정치 영역에서 갈등으로 반영된다기보다, 존재하지 않는 갈등이 정치 영역에서 새로 생성된 갈등이라는 것이지요. 

이런 현실을 볼 때, 샤츠슈나이더의 진단은 여전히 의미있다고 생각합니다. '미리 존재한다고 여겨지는' 갈등만이 아니라 정당이 스스로 갈등을 재-정의한다면, 그렇게 정의되어서 주어지는 갈등에 대해서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 오늘날 의미있는 '정당 정치'가 아닐까요? 

샤츠슈나이더의 이론이 "대한민국에서 이상적인 이론"이 될 수 도 있다고 학준님께서 말씀하셨지만, 제가 이해하는 현실주의는 마치 드라마 <공부의 신>에서 "서울대 가야지 인간된다"라는 류나 <개그 콘서트>에서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고 외쳐지는 류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현실에서의 구조적 제약을 선명하게 이론화해서 이해하되, 지향성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주의는 "그게 (더러운) 현실이니까 어쩔 수 없다"는 류의 니힐리즘이나 "현실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재정의되어야 한다."는 류의 이상주의 양자와 구분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희/문희님께서 '정당정치의 사사화'를 말하셨는데, 정당은 사회 보편의 대변자라기 보다는 부분의 대변자라는 것이 제 입장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문희님께서 지적하신 '정당정치의 사사화'와는 차이점이 있을 수 있는데, 문희님께서 이야기하신 것은 정당과 파당이 다르지 않다는 고전적인 비판과 연관이 되는 듯 합니다. 정당은 사회가 지향해야 될 바에 대해서 갈등한다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사적 이익 추구를 위한 갈등의 도구라고 이해하는 것이지요. 

물론 저도 이러한 현실에 대해서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자유XX당이나 친박이나 한XX당이 과연 의미있는 이념적 지향의 차이가 있을까요? 이에 대한 답은 회의적일 수 밖에 없지요.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균열이 존재할 수 밖에 없다면, 그러한 균열은 정치사회에서도 반영되어야 합니다. 루소가 말한 류의 일반의지가 있다면, 정치 사회에서는 그러한 일반의지에 따라서 정책을 행하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사회 내에서 공유되는 일반의지가 없이, 이해관계의 균열이 있다면 정치 영역내에서의 갈등은 현실적으로 필연적인 것이며 그것은 당위적으로 요청되어야 하기도 합니다. 친박과 한XX당의 갈등과 미디어법 사태에 대한 여-야의 갈등을 동일시할 수 없는 이유는 이 지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현실의 이야기로 돌아온다면, 여전히 정치 사회 내의 갈등이 거셈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사회에서의 균열이 반영되지 못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치가 정치계급만의 일이자 사회내의 균열을 반영하지 못 하는 갈등으로 여겨질 때, 이는 쉽사리 정치에 대한 회의주의로 이어질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일부 진보세력은 이를 정치 일반이 아닌 대의 정치의 문제로 판단하기도 하구요. 하지만 샤츠슈나이더의 지적대로 민주주의의 현실적 정의가 '인민에 의한 지배'가 아니라 '인민의 동의에 의한 통치'라고 한다면 그것은 정당 정치를 우회하는 방향으로 가서는 안 되고 "어떤 정당 민주주의인가"의 물음으로 이어져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2010-01-27
12:25:26
 

 

 이기훈 
  사족이지만 
책마을에 하루 몇 번씩이나 접속하지만 진행되고 있는 담론의 수준을 볼 때, 제가 참여해서 어느정도의 코멘트를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고 여겨졌습니다. 
이 담론의 장이 참여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학습의 대상으로 여겼던 것이지요. 
그래서 예전에 썼던 독서후기를 올리면서 무척이나 걱정하면서 올렸습니다. 

하지만 제가 가지고 있는 이론적, 정치적 고민이 만약 다른 분들에게 이미 선행되었던 것이라면, 저에 대한 코멘트를 통해서 또 다른 배울 부분이 있다고 생각도 해서 올려봤습니다. 

얼마전 후마니타스 그룹에 대한 비판에 관한 글이 올라왔던데, 후마니타스빠(?)로써 그런 입장에 어떤 비판 있는지, 그것은 어떤 식으로 극복되고 있는지가 무척 궁금하네요 2010-01-27
12:29:35
 

 

김예찬 
  엥 그러고보니 글이 없어졌네요. 

'후마니타스 그룹'에 대한 비판글이라고 보긴 애매했던 것 같구요, 맥락을 보자면 "후마니타스에서 세미나를 하는 이글루스 모 블로거들"이 요새 '우석훈 사단'을 비판하는 것에 대한 억울함을 호소한 글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기훈씨 오랜만에 뵙는 것 같습니다. 동원이가 얼마전에 기훈씨 이야기를 하던데요. 2010-01-27
13:10:35
 

 

조문희 
  기훈 / 
"문희님께서 '정당정치의 사사화'를 말하셨는데, 정당은 사회 보편의 대변자라기 보다는 부분의 대변자라는 것이 제 입장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문희님께서 지적하신 '정당정치의 사사화'와는 차이점이 있을 수 있는데, 문희님께서 이야기하신 것은 정당과 파당이 다르지 않다는 고전적인 비판과 연관이 되는 듯 합니다. 정당은 사회가 지향해야 될 바에 대해서 갈등한다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사적 이익 추구를 위한 갈등의 도구라고 이해하는 것이지요." 
글쎄, 전 지금 기훈씨의 댓글이 잘 이해가 안되는데, 
제가 일반의지-이념적 지향 / 이해관계의 균열-갈등 의 대립구도를 전제로 이야기를 진행시켰나요? 기훈씨는 제 입장이 마치 정당이란 사회 일반의 대의를 목표하느냐 아니면 개별적으로 이익을 추구하는 단체이냐 하는 구분에서 정당정치의 사사화라는 말을 끌어냈다고 생각하시는 듯 합니다. 사회가 지향해야 될 바에 대해서 갈등한다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사적 이익 추구를 위한 도구로써의 정당을 말하기 위해서 제가 문제를 제기했다고 생각하시나요? 원론적으로 말한다면 저는 오히려 기훈씨와 가까운 입장에서 말을 했던 것 같은데, "여전히 정치 사회 내의 갈등이 거셈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사회에서의 균열이 반영되지 못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라는 기훈씨의 말이 제 입장을 잘 요약해 주고 있는 것 같군요. 우리에게는 일반의지에 따른 정치 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표출되는 다양한 요구들을 적절하게 정치적인 것으로 만들 수 있겠는가가 중요한 것이죠. 여기까지는 지극히 기훈씨의 말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다만 제가 댓글에서 기훈씨에게 묻고 싶었던 것은 “샤츠슈나이더는 그러한 ‘결빙’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갈등은 원래 있다는 사실에서 중요성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갈등은 만들어지는 것”인 한에서, 한국의 정체가 갈등을 ‘잘’ 만들어 내고 있느냐, 요컨대, 우리가 오직 특정 유형의 정치공동체의 시민으로서만 권리를 가진다는 전제 하에 서로 경쟁하는 정체성 형성의 형식들이 ‘갈등’하는 것으로 이해될 만한 ‘조건’을 우리가 갖고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는, 이러한 차원을 논의함에 있어서 기훈씨가 혼동을 야기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댓글을 보니 제 심정적인 미심쩍음이 더 확실해지는데, 기훈씨는 공동선-일반의지-이념/균열-갈등 의 대립쌍이 헤게모니 투쟁으로 지극히 유동적임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헤게모니를 획득한 담론으로서 구성적으로 정립된 관념체계는 사회조직과 일반 행위의 '의미'에 소급적으로 필연성을 부과합니다. 때문에 사회 양식의 변화가 헤게모니 투쟁의 결과라 한다면, ‘경쟁하는 보편성들’ 가운데 보편성을 획득한 장에 의해 사회 전반을 구조화하는 원리가 작동하게 되지요. 여기서 이 획득된 보편성을 체현한 장은 자신의 고유한 논리를 도덕적으로(사회적인 것과 도덕적인 것이, 도덕이 강제만이 아니라 자발적인 행위도 포함하는 한에서, 불가분한 것임을 전제하는 하에) 정당화할 수 있는 능력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립하게 됩니다. 요컨대, 어떤 헤게모니가 보편성을 획득하는가에 따라 그곳에서의 ‘일반의지’와 갈등, 그리고 “갈등에 대한 갈등(혹은 선택양식을 선택하는 것)”이 구조화되고, 여기서 일반의지라 한다면 공화주의적 공동선 이 아니라 행동의 문법인 동시에 사회적 상상계로서 ‘주효한 참조점’으로서의 공동선이라 할 수 있지요. 다시 말해, 헤게모니는 사회의 부분들을 접합하는 논리인 동시에, 자기 고유의 (적대)전선을 그리는 방식으로 접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훈님은 지나치게 일반화된 대립쌍을 설정함으로써 ‘갈등에 대한 갈등’의 차원을 볼 수 있는 능력에도 불구하고, ‘구성’에 대해서만 이야기 할 뿐 ‘구성적 타자’ 즉 배제되는 차원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제가 말한 ‘정당정치의 사사화’가 다양한 갈등들을 정치적인 장에 주효한 것으로 만들지 못함을 지적한 것으로 여기지 못하고 당파적이고 이익집단적인 정당의 한계를 지적한 것으로만 여기게 되셨지 않은가 생각해 봅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헤게모니의 문제가 정당을 논의함에 있어서 지극히 절실하다고 여기면서, 저는 "보편성/특수성의 이분법이 중단되는 한에서 헤게모니가 존립할 수 있다는 것-보편성은 오직 모종의 특수성 속에 체현됨으로써만 존재하며, 역으로 어떤 특수성도 보편화 효과의 장소가 되지 않고서는 정치적일 수 없다."는 라클라우의 말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거기에서야 우리는 개방적이고 불확실한 경계들로 특징지어지는 어떤 장 속에서 ‘총체화하는 효과들’이 발생할 수 있음을, 대의제 정치가 특수한 보편성을 잘 대의하고 있음을 이야기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여기에서야 우리는, “어떤 정당 민주주의인가”라는 기훈씨의 절실한 물음이 제자리를 찾아, 한국 정치의 맥락에서 유효한 비판이자 정당 민주주의의 적절한 재정식화의 요구로 이해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2010-01-27
14:03:53
 

 

조문희 
  덧붙이자면, 저는 기훈씨가 쓴 이 글이 매우 달가웠는데 제 댓글이 기훈씨에게 좋지 못한 의도로 이해된 것 같아 속상한 마음입니다. 저는 다만, 현실 정치에 대한 기훈씨의 의견이 듣고 싶었을 뿐이었고, 기훈씨와 제가 동의하고 있는(것 같은) 기훈씨 글 전반적인 입장에 어떤 보충이 가능할 것인지 고민해보고 싶었던 것이었습니다. 오해하지 마시기를. 

후마니타스 그룹은, 예찬님이 잘 말해주었듯이 이글루스의 몇몇 분들을 말한 것인데, 저는 블로그 같은데 관심이 없는 관계로 친구가 '후마니타스'그룹이라기에 그 이름이 맞는 것인줄로만 알고 있을 뿐입니다. 그들은 대체로, 레퍼런스와 우석훈의 실력없음 같은 근거를 통해 우석훈의 담론 전체를 비아냥대고 있는 듯 하더군요. 제가 직접 본 일이 없으니 자세한 말은 아끼겠습니다. 2010-01-27
14:10:41
 

 

 이기훈 
  예찬/휴가 때 동원이 만나면서 "궁 안에서조차도 글 무지 잘 쓰는 사람 있다는 거 보면서 신기했어."류의 이야기를 했는데, 그게 동원이도 아는 사람이라고 해서 신기했더랬죠. 세상 참 좁구나 싶은 느낌. 기회되면 셋이서 술 한 잔 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 

문희/쪽지 확인 부탁드릴게요 2010-01-27
14:22:02
 

 

오학준 
  기훈 / 네. 사회적 갈등이 정당의 갈등으로 그대로 반영된다는 립셋/로칸 식의 정당론과 달리, 사회에 편재하는 수많은 갈등의 축을 정당이 적절하게 점유해서 기존에 드러나지 못했던 갈등들을 '공론장의 영역'으로 꺼내는 것이 샤츠슈나이더의 정당론의 요지일 겁니다. 그것이 사사화된 갈등을 사회화된 갈등으로 변환하는 '정치'일 것이구요. 샤츠슈나이더가 현실적이라고 했을 때, 그것이 "객관식 보기가 주어지고 있는 현실을 인정하고 이러한 현실의 한계 내애서 사유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현실적이라는 것에 저 역시 동의합니다. 

다만 제가 댓글에서 주장하고 싶었던 것은, 샤츠슈나이더에게는 일단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구분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공적인 사안에 대해 동등하고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는 것을 공적인 것이라고 하고, 가장으로서 전제적으로 집안의 경제적 재화를 생산하고 분배하는 것을 사적인 것이라고 했을 때(하버마스), 정확히 공적인 것은 이러한 사적인 것을 배제함으로써 자유로운 개인의 집합이 됩니다. 그리고 대의 민주주의의 발달은 사적인 것이라고 여겨진 부분들을 공적인 것에 맡기는 방식으로 진행되어 왔습니다. 예컨대 가사노동이 남편에게 종속된 아내의 전업이었다면, 이제는 남녀 모두 맞벌이 하면서 가사 노동이 사회적인 방식으로 해소될 여지가 생기는 것이 소위 말해 대의민주주의의 발달이었다는 겁니다. 이런 것이 사사로운 갈등을 공적인 갈등으로 변화시키는 것과 저는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각 개인의 사적인 요구들을 공적인 차원에서 수용하고 발언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민주주의의 태도가 될 것이구요. 

저는 이러한 공적/사적인 것의 구분과 그것을 공적인 부분의 확대로 밀어올리는 '민주주의'가 대한민국에서 이상적인 것이라고 말했던 것은, 대한민국에서 도대체가 '공적인 부분'이라는 것이 말해질 수 있느냐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이미 우리는 너무나도 사사화되어 있는 갈등들에 머물러 있지 않나요? 저는 "현실이니까 어쩔 수 없다" 혹은 "현실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재정의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샤츠슈나이더의 해법이 미국적인 상황에서 현실적이라면, 한국에서는 '이상적'인 방식으로 접합될 수 있을 거라는 의미입니다. 2010-01-27
15:56:35
 

 

 이기훈 
  학준/저 또한 한국 내에서는 공적이어야 할 갈등이 사사화되어 있다는 진단에 동의합니다. 그리고 어느 부분이 공적인 부분이어야 되는가 혹은 어느 부분이 사적인 부분이어야 되는가는 열려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경제적인 영역에서의 갈등이 공공화되지 않고 사사화될 때, 그것을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는 어려울 수 있는 거겠지요. 

예전에 강준만이 '각개약진 공화국'이라는 표현을 썼었는데 그것이 학준님께서 말씀하신 의미랑 맞닿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학준님께서 말씀하신 '이상적'이라는 것이 '공상적'이라는 것과 동의적인 의미가 아니라, 당위적으로 요청되어야 한다는 의미라면 제가 지극히 오독한 것이겠네요. 2010-01-27
16:23:06
 

 

오학준 
  네네. 저는 이상적이라는 말을 당위라는 의미로 썼습니다. 당위로 바꿔 놓을 것을... 2010-01-27
17:53:43
 

 

조문희 
  예찬 / 그 글을 올린 이후 다시 이글루스에서 활동하는 분들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 들을 수 있었는데, 저나 형이나 너무 표면적인 것들로 접근하지 않았나 의심이 들어서 글을 삭제했습니다. 제가 너무 섣부르게, 그리고 개인적인 감정으로 올려놓은 것이 아닌가 후회가 되더군요. 
후마니타스 그룹 이라는 이들의 주요 논지는 '세대 담론은 실재하는가'에 가깝다고 합니다. 언젠가 설탕나갈 날이 오면(흑흑, 외박이 앞으로 두번정도 잘릴 예정인지라 흑흑) 그들의 글을 찬찬히 읽어볼 생각입니다. 2010-01-28
11:46:23
 

 

김예찬 
  이글루스의 Socio 님하고 Ghistory님을 지칭하는 것 같은데요, 그 분들의 논지는 제 기억으로는 대충 이렇습니다. 

1) 소득을 기준으로 우석훈이 주장하는 '88만원 세대'로 묶을 수 있는 무언가가 존재하는가? 이를테면 '386세대', '88만원 세대'로 묶을 수 있는 기준이 존재하는가? 에 대한 반박이구요 

2) 이러한 엄밀한 기준 없이 탄생한 '88만원 세대'론을 기반으로 세대 운동이 가능할 것인가? 

3) 우석훈의 최근 주장들이 이론적 일관성 없이 '드립' 수준에 가깝지 않은가? 2010-01-28
13:58:47
 

 

조문희 
  예찬 / 엄밀한 기준이라, 이전에 서강대 였나 세대담론의 무효성을 주장하는 논문을 얼핏 보았던 기억이 있는데요.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세대담론의 유용성을 주장/기각하기 위해 '소득을 기준으로' 등 담론의 현실적 기반에 지나치게 호소하는 것은, 예를 들자면 알튀세르의 상상적 관계가 실제적 토대와의 반영관계(그에게 있어서 이데올로기의 지반으로서 생산양식 이란 물자체와 같은 것이었는데도 불구하고)를 명확히 하지 못한다는 일반적 실증주의의 강박관념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실상, '엄밀한 기준 없이' 라는 것은 기준이라는 실체가 담론 외부에 실재한다는 혹은 정치적 관계 외부에 일반적 의지가 실존한다는 주장과 그리 멀지 않은 것 아닌가요? 왠지모르게 저는 여기서 이전에 이준혁씨와 명교씨의 논쟁을 떠올리게 되네요. 
물론 중요한 문제제기에는 틀림 없지만, 저로서는 이글루스의 논의 가운데 3번에 대해서만, 그것도 어느정도 동의할 뿐입니다. 만약 지금 예찬씨께서 올려주신 게 그들 논의의 핵심이라면, 더 이상 그들에게 관심가질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하하. 예찬님의, 그리고 우리 책마을의(이렇게 말하면 저는 원익씨가 말한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겠죠) 공동생활전선이 얼마나 유의미한 것인지 새삼 느끼게됩니다. 2010-01-28
14:14:43
 

 

김예찬 
  아마 1번의 논거로 들었던게 그 논문 같습니다. 저도 명확히 기억은 안납니다만... 그런데 저는 오히려 그런 자세도 꼭 필요하다고 보는 편입니다. 특히 Socio 님이 이번 연세대 총학생회 선거를 두고 각 선본과 정책들을 비교 분석한 글을 읽어봤는데 학생 운동에 있어서 유효한 제언이 아닌가 싶더군요. 2010-01-28
14:28:50
 

 

조문희 
  예찬 / 저 역시 그런 사람들이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그들이 우석훈에 대한 비판자로서의 위치에 있는 한에서, 그들의 접근 방식은 난점을 갖고있다 이런 뜻입니다. 선본과 정책을 비교분석한 글이라, 한번쯤 보고싶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