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베스트선정-독서후기] 있잖아 블란치, 사랑은 언제쯤 끝나는 걸까  
병장 고동기   2008-10-23 15:31:14, 조회: 335, 추천:1 


달과6펜스
서머싯몸




 그녀, 블란치 스트로브.

 스트릭랜드는 거칠고 투박하게 생겼다. 눈의 표정은 초연하고 입은 육감적이며, 몸집은 크고 건장했다. 그는 야성적인 열정을 가진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나는 그에게서, 물질이 대지와 맺었던 처음의 관계를 잃지 않고 그 자체의 혼을 아직 지니고 있던 때, 그러니까 역사 초창기의 야성적 존재를 연상시키는 어떤 사악한 요소를 느꼈다. 그가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다면,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를 사랑하거나 증오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를 증오했다.
 그러던 것이 환자인 그를 돌보느라 매일 가까이 접촉하다 보니 야릇한 변화가 일어났다. 그에게 음식을 주려면 머리를 들어 올려야 했다. 손으로 떠받치는 그의 머리가 묵직하게 느껴졌다. 음식을 먹일 때면 그의 육감적인 입과 붉은 수염을 닦아주어야 했다. 몸도 씻겨주었다. 온몸이 털투성이였다. 손을 닦아줄 때면, 쇠약해지긴 했지만 단단한 근육질의 손을 볼 수 있었다. 손가락은 길었다. 무엇이든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은 유능한 화가의 손가락이었다.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아주 조용히 잤다. 죽은 듯이 보이기도 했다. 숲 속에 사는 짐승이 하루 종일 사냥을 하고 나서 휴식을 취하는 것 같다고 할까. 나는 그가 무슨 꿈을 꿀까 궁금했다. 사티로스의 열띤 추적에 쫓겨 그리스의 숲을 달아나는 요정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요정은 죽을힘을 다해 날렵하게 달아나건만 사티로스는 한 걸음 한 걸음씩 가까이 뒤쫓아와, 급기야 요정은 그의 뜨거운 입김이 목덜미에 훅 끼쳐옴을 느낀다. 하지만 요정은 한사코 말없이 달아나고 사티로스는 말없이 쫓아오는데, 그처럼 쫓고 쫓기다 요정은 마침내 붙잡히고 만다. 그때 요정의 심장이 그처럼 거세게 뛰었던 것은 공포감 때문이었을까 황홀감 때문이었을까?
 나는 무자비한 정욕의 손아귀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스트릭랜드를 미워하는 감정은 여전하였지만, 나는 그를 강렬하게 원했다. 지금까지의 생활이 죄다 허망하게만 여겨졌다. 지금까지 나는 다정하면서도 성마르고, 생각이 깊으면서도 분별이 없던 복잡한 여자였지만 이제는 딴사람이 되어버렸다. 바커스 신(神)의 무녀(巫女)가 되어버린 것이다. 욕망 덩어리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 찰스 스트릭랜드.

「난 그 여자에게 이렇게 말했지. 내가 나중에 싫증이 나면 그땐 당신이 떠나줘야 할 거라고. 그래도 괜찮다고 하더군. 그 여자는 몸이 아주 근사했소. 그래서 난 그 여자 누드를 그리고 싶었지. 그런데 다 그리고 나니까 여자에게 흥미가 없어지더군」
「그래도 블란치 스트로브는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했죠」
「난 사랑 같은 건 원치 않아. 그럴 시간이 없소. 그건 약점이지. 나도 남자니까 때론 여자가 필요해요. 하지만 욕구가 해소되면 곧 딴 일이 많아. 난 그 욕망을 이겨내지는 못하지만 그걸 좋아하진 않아요. 그게 내 정신을 구속하니까 말야. 나는 언젠가 모든 욕정에서 벗어나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내 일에 온 마음을 쏟을 수 있는 때가 있었으면 하오. 여자들이란 사랑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으니까 사랑을 터무니없이 중요하게 생각한단 말야. 그래서 우리더러 그게 인생의 전부인 양 믿게 하고 싶어 해요. 하지만 그건 하찮은 부분이야. 나도 관능은 알지. 그건 정상적이고 건강해요. 하지만 사랑은 병이야. 내게 여자들이란 쾌락을 충족시키는 수단에 지나지 않아. 나는 여자들이 인생의 내조자니, 동반자니, 반려자니 하는 식으로 우기는 것을 보면 참을 수가 없소」
「시대를 잘못 타고났군요. 여자가 가재도구이고 남자가 노예를 거느리던 시대에 태어났어야 하는데」
「이래봬도 난 아무런 문제가 없는 정상적인 인간일세. 여자는 사랑을 하게 되면 상대의 정신을 소유하기 전까지는 만족할 줄 몰라. 약해서 지배욕이 강하지. 지배하지 않고서는 만족하지 못해. 여자는 마음이 좁아요. 그래서 자기가 모르는 추상적인 것에는 화를 내는 버릇이 있어. 마음을 쓰는 건 물질 적인 것뿐이야. 관념적인 것은 시기나 하고. 남자의 정신은 우주의 저 머나먼 곳에서 방황하는데 여자는 그걸 자기 가계부 안에다 가둬두려고 하는 거요. 내 아내 기억나오? 블란치도 차츰 같은 수작을 하려고 하더란 말야. 자기 딴엔 무한한 참을성을 발휘해서 나를 함정에 몰아넣고 올가미를 씌울 작정을 하고 있었어. 나를 자기 수준으로 끌어내리고 싶었던 거지. 나 자신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었어. 내가 자기 것이 되어주기만 바랐지. 하기야 나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하려고 했어요. 내가 원하는 것 한 가지만 빼놓고 말이오. 난 혼자 있기를 바랐거든.
 목숨이란 아무런 가치도 없어요. 블란치 스트로브는 나한테 버림을 받아서 자살한 게 아냐. 어리석고 균형 잡히지 않은 인간이라 그랬지. 자, 이제 그만하면 그 여자 이야기는 충분하오. 전혀 중요할 것 없는 사람이니까. 갑시다. 내 그림을 보여줄 테니」

                            *

가엾은 블란치 스트로브. 나도 너처럼 사랑에 빠져 본적이 있다. 그놈에 사랑이란 건 쉽게 오지를 않아서, 사랑이 우연히 네게 손짓을 할 때, 그 때. 기회를 놓치면 안 돼. 난 아직도 그것이 옳다고 믿는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은 모든 면에서 나보다 뛰어났어. 그는 글도 잘 쓰고, 사진도 잘 찍었지. 그래서 나도 말이야. 네가 남편을 버리고 스트릭랜드를 택한 것처럼, 그 사람을 놓치기 싫었어. 그 사람과는 다행히 같은 모임에 속해있었고, 자연스레 술자리도 가지게 되었지. 서로 체면이라는 게 남아있어서 어색할 사이일 때는 술만한 묘약이 없잖아. 결국 나는 바커스 신의 힘을 빌려 그 사랑을 손에 넣었단다.

하지만 사랑이란 게 언제나 그렇듯 영원하지는 않더라. 찰스 스트릭랜드가 갑자기 널 떠났듯, 그 사람도 날 떠났어. 그 사람은 우리가 헤어지는 것이 서로를 위한 최선의 길이라 했지만, 닥쳐온 이별 앞에서는 의미 없는 수사일 뿐 아무것도 아니었지. 사랑도 처음이었고 이별도 처음이었던 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어. 그저 무작정 친구가 일하던 술집엘 갔지. 나는 그날 밤새도록 술을 마셨다. 결국 술로 시작해서 술로 끝을 맺은 거야. 웃기지 않니, 나도 다른 사람들과 별 다를 게 없었던거야. 그런데 그렇게 슬펐는데도 말야. 너처럼 수산(蓚酸)병을 들이킬 정도로 고통스럽진 않았나봐. 지루한 이 목숨은 끝까지 달라붙어 있더라고.

아마 다른 사람들은 스트릭랜드를 보며 이런 말을 할 거야. 당신은 인간도 아니라고, 어떻게 사랑했던 사람이 죽었는데 그렇게 뻔뻔할 수 있냐고 말이야. 솔직히 나도 처음에 찰스 스트릭랜드가 하는 말을 들었을 땐 화부터 났어. 다른 사람들처럼 어이가 없었지. 예술에 미쳐버린 천재적인 화가라는건 알고 있었지만 저 정도일 줄은 몰랐던 거야. 하지만 그게 맞는 거더라. 나도 모르게 나는, 헤어진 그 사람과의 기억을 아름답게만 추억하고 있었어. ‘그 사람도 가끔 날 생각하겠지’, ‘아무리 그래도 우리가 했던 사랑을 잊진 않겠지’, ‘가끔씩 나와 헤어진 걸 후회하기도 할 거야’ 하면서 말이야. 그런데 스트릭랜드의 말을 듣고 알겠더라. 같은 추억을 공유했던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라는 걸 말이야.

그래서 너에겐 미안하지만, 그런 찰스 스트릭랜드를 쉽게 비난하지 못하겠어. 네가 죽고난 뒤 몇 년이 흐르고, 찰스 스트릭랜드는 타히티섬으로 갔단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타’라는 여인을 만나 함께 살게 돼. 그들은 서로의 자식을 낳고 그 섬에서 죽을 때까지 행복하게 살아. 스트릭랜드의 생에서 그처럼 행복했던 순간은 없었을 거야. ‘여자들이 인생의 내조자니, 동반자니, 반려자니’ 하는 말을 들으면 참을 수가 없다던 스트릭랜드도 아타와 함께 죽을 때까지 함께 살더군. 네가 그 모습을 봤다면 어떤 생각을 했을까.

나와 헤어졌던 그 사람도 새로운 사람을 만났다고 했어. 나는 겉으로 태연한 척 했지만, 속으로는 질투심에 불타올랐지. 그 사람은 도대체 누굴까, 나보다 더 멋지고 잘생겼을까, 왜 그렇게 빨리 새로운 사람을 만난 걸까, 나와 헤어진 것이 그 때문일까, 하면서 말야. 헤어진 지 2년이 다 되어가지만 아직도 궁금해. 그 사람 얼굴이라도 한번 봤으면 소원이 없겠어. 그래도 나는 너와 달리 이렇게 살아있으니, 언젠간 그 사람도 보게 되겠지. 재수가 좋으면 두 사람이 같이 있는 모습을 보게 될지도 모르고. 아… 그때의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하게될까. 아직도 잘 모르겠다. 어쩌면 그땐, 내 옆에도 누군가 있게 될지도 모르겠다. 너와 찰스 스트릭랜드가 그랬고, 찰스 스트릭랜드와 아타가 그랬듯이 말이야.

                            * 

                           Epilogue

「이 딱한 양반, 이 세상 어딘가에 마누라 두고 오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우. 다 그런저런 사연이 있기에 이 섬까지 오게 되는 게지. 아타는 분별이 있는 아이라, 시장 앞에서 식을 올린다든가 하는 따윈 바라지도 않아요. 신교도라서 이런 일에 가톨릭같이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알지 않수」
「하지만 아타 생각도 물어봐야지」
「당신한테 호감이 있는 것 같습디다. 당신이 좋다면 자기도 좋대요. 그 앨 불러볼까요?」
 스트릭랜드는 킥킥 웃었다.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냉정하게. 아타는 블라우스 빨아놓은 것을 다림질하는 척 하면서 두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바짝 기울이고 있었다. 아타는 웃고 있었지만 조금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스트릭랜드는 그런 아타를 아무 말 없이 쳐다보았다.
「그래, 아타, 내가 남편감으로 마음에 드나?」
「아니, 이 딱한 양반아, 글쎄 내가 말했잖우. 저 애는 당신에게 호감이 있다고」
 스트릭랜드는 아타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너를 때릴 텐데」
 아타는 대답했다.
「그러지 않으면 사랑받는 줄 모르잖아요」
 아타는 아무 말 없이 수줍게 웃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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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8-12-08
20:36:32 

 

상병 이우중 
  아기다리 고기다리 던 동기님의 주옥같은 독서후기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에필로그에서 아타의 말을 가지고 오신 건 어떤 뜻에서죠? 궁금해서요. 2008-10-23
16:02:50
  

 

상병 김호균 
  잘 읽었습니다. 역시 고동기님! 2008-10-23
19:12:51
  

 

병장 이동석 
  허허허, 이건 정말 하나의 작품입니다. 

그리고 전 마지막 줄 좋군요. 스트릭랜드라는 인물에 동의한다는것은 아니지만, 
이 대목으로 마무리하는건 정말 최고의 에필로그입니다. 

그리고 마법의 문장에 홀려 깜빡할뻔했는데, 
그 마법에는 <가지로> 주문이 적절합니다. 2008-10-23
20:14:33
 

 

병장 이동석 
  저 정말 이모티콘이라도 쓰고 싶었어요. 어흑. 정말 간만에 마음이 동하는군요. 동기님은 꼭 술한잔 해야겠습니다. 허허. 2008-10-23
20:15:27
 

 

병장 고동기 
  블란치 스트로브와 찰스 스트릭랜드가 헤어지고 그렇게 사랑은 끝이났지만, 어쩔 수 없이 사랑은 계속될 수 밖에 없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아타와의 만남을 넣어봤습니다. 좋게봐주셨으면 좋겠어요. 

저는 처음에 아타가 하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답니다. '이렇게 사실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니' 하면서요. 정말 아타의 말이 맞아요.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맞았을 때, 그의 사랑을 느낄 때도 있더라고요. 

저 술 좋아합니다. 하하. 언제한번 회기동에서 다같이 모여야겠어요. 2008-10-24
08:57:28
  

 

병장 이현승 
  서머싯 몸 소설에는 여성에 대한 어떤 근원적인 불안함을 건드리는 게 느껴집니다. 
<달과6펜스>에서도 그렇지만, 다른 소설 <인생의 베일>에서도 사랑이라는 감정앞에 
얼마나 여성이 처절해 지는가를 보여주죠. 하지만 블란치와는 다르게 <인생의 베일>의 주인공에게 배신은, 남은 생을 살아가게 해주는 어떤 오기 같은 것은 품게 만듭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인생의 베일>이 좀 더 맘에 들었어요. 철저하게 농락당했던 블란치의 감정을 조금이나마 회복했다고 할까요. 

아무튼 이런식의 구성은 색다르고 좋았습니다. 기민님과의 독서후기와는 또다른 맛이군요. 두분 술자리에 술잔 하나 가지고 가도 될지 모르겠네요. 흐흐. 2008-10-24
09:53:17
  

 

상병 이우중 
  흐음. 그렇군요. 안좋다는 말은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여요. 

그나저나, 회기동에서 모인다면 저도 술한병 들고 꼽사리 끼고 싶은데요? 히히. 뭐 회기동 아니면 타히티라도(웃음) 2008-10-24
12:11:54
  

 

상병 전민기 
  고등학교 3학년 때 독서실에 앉아 새벽 3시까지 읽었던 달과 6펜스. 

새록새록 기억이 납니다. 

각색이 참 신선하네요. 2008-10-24
15:19:41
  

 

병장 정병훈 
  술잔하나 추가요. 하하 2008-10-25
07:4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