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베스트선정-독서후기] 다시, 지식인을 위하여  
병장 문두환   2008-10-12 14:08:39, 조회: 339, 추천:2 


   Jean-Paul Sartre,「지식인을 위한 변명」


   진리의 상아탑이라고 칭해지던 대학사회는 지식인의 요람이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사유하고 토론했으며 실천적인 행동을 고민하며 사회를 보다 인간적이고 우애에 기초한 곳으로 변혁시켜내기 위한 방법론을 탐구하였다. 그것이 질곡의 시대를 살아가야 했던-우리 사회의-지식인에게 던져진 ‘사회적 역할’이었는지도 모른다. 대학을 또 다른 말로 우골탑(牛骨塔)이라고 했듯이, 그들 전체가 그러했다고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그들은 가난한 농민과 민중의 아들 딸 이었음은 분명했다. 고등교육을 받은 인재가 귀했던 시절에 어찌되었든 대학에 진학하면 안락한 인생이 보증수표처럼 따라왔던 시절, 설혹 대학생을 일컫는 말로 ‘프티 부르주아’라는 말이 붙었을 지언정 그들은 ‘앎’과 ‘실천’사이에서 무수히 고민했을 것이다. 나는 이 점에서는 사르트르가 제시한 지식인론이 우리사회의 지식인의 상과 반드시 일치하거나 유효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식인이란 무엇인가? 지식인이란 자기 자신 속에서, 그리고 사회 속에서 실천적인 진리(자기의 모든 규범까지 포함한 실천적인 진리)에 대한 탐구와 지배 이데올로기(자기의 전통적인 가치 체계까지 포함한 지배 이데올로기) 사이에 벌어지는 대립을 깨달은 사람(P.53)이다.



   인간은 스스로 선택한 환경 속에서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주어진 물려받은 환경 속에서 역사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모든 죽은 세대들의 전통은 악몽과도 같이 살아있는 사람들의 머리를 짓누른다.
                                     (K.Marx,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中) 

   사회의 보편적 상식과 원칙의 기준은 그 사회에서 발생하며 사회마다 상이함은 부정할 수 없다. 사르트르의 말처럼 인간이라는 존재는 어쩌면 한 사회에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 그 사회에 ‘배정’된 존재인지도 모른다. 역사와 문화 풍습 모두 현재를 살아가는 세대들의 선택에 의해 전해온 것이 아니라 이전의 세대가 만들어 온 것이기에, 사회의 부조리, 비상식, 모순과 대결하기에는 버겁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지식인의 역할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지식인이란 단순히 식자(識者)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 행동을 겸비한 이들이며 자신의 모순은 물론 사회의 모순을 스스로 의식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지식인은 지배논리를 공고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존재해 왔으나 스스로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에 대한 고찰로 변혁을 주도해온 모순적인 존재이다. ‘지식인은 지배계급의 선택에 의해서 즉 지배계급이 전문가를 만들어 낼 목적으로 할당한 잉여가치의 몫에 의해서 탄생했기 때문’(P.56)이다. 지식인의 태생적인 한계라고 한다면 한계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다. 사르트르의 지식인론은 맑스주의에 이론적 기초를 두고 있기에 지식인을 부르주아와 프롤레탈리아의 중간계급에 상정하고 있으며 프롤레타리아의 자식들은 결코 가질 수 없는 교육의 기회를 그들은 가지고 있기에 그들은 상위계급이지만 부르주아의 필요에 의해 파생된 직업과 역할을 대리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은 종국에 중간계급에 속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지배계급에 의해서 실천적인 지식을 가진 전문가는 사회적 노동자로 거듭나지만 이 사회적 노동자는 동일한 모순을 여러 수준에서 겪게 된다. 때문에 지식인은 ‘분열된 사회의 산물’이고 사회의 분열을 자신 속에 내면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분열된 사회를 보여주고 있기에 지식인은 역사적 산물(P.54)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지식인을 근원적으로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는 관점을 견지하고 있기에, 사르트르의 지식인의 역할은 계급문제와 그것의 해소방안에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앞서 서술했듯이 지식인이 가지는 모순적 지위는 결국 지식인이 극복해야 할 과제이며 이를 위해 스스로의 모순도 극복해야 한다(P.92). 지식인의 계급적 특수성은 지식인의 이론가로서의 노력을 끊임없이 왜곡할 수 있기에 끊임없는 자기비판과 ‘혜택받지 못한 계급’을 위하여 끊임없이 실천적 행동을 이어나가야 한다. 그들은 ‘보편적인 시대’에서가 아니라 ‘보편화를 위해 노력해가는 시대’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또한 ‘상황속에 놓인 존재’이기에-인간은 피투된 존재, 때문에 본래적으로 ‘부조리한’존재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인간은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존재이며 이 절대적인 자유로서 스스로를 기투하는(할 수 밖에 없는)존재이기에-자신이 얻은 경험을 보편화를 향한, 노동자계급을 위한 실천적 행동을 이어가야 하는 것이다. 사르트르의 지식인의 역할론은 결론적으로 지식인과 노동자계급과 연대를 의미하며 그것의 방법으로서 지배계급의 착취와 억압에 맞서서 공동으로 투쟁하며, 나아가 노동자계급으로부터 자생적(유기적)지식인이 배출될 수 있도로 그들을 도와야 하는 사회적 소명을 가진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한 가지 인상깊었던 대목은 사르트르가 인용한 니장(Paul Nizan)의 「집 지키는 개」였다. 맑스주의에 경도되었고 알제리의 독립운동을 지원했던 그가 또한 경멸하고 경계했던 존재는 ‘사이비 지식인’이었고 니장은 기회주의적인 지식인을 비꼬아 ‘집 지키는 개’에 비유했다. 그의 말을 인용하면 사이비 지식인은 그들의 이익에 반대하는 것은 아예 모르는 척 하며 그들의 어법은 진정한 지식인처럼 ‘아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아니다…하지만”또는 “나도 잘 안다, 하지만 그래도…”라고 즐겨 말한다. 일례로 그들은 보편주의자의 입장을 가장하며 식민지와 피식민지간의 폭력행위에 대해 모든 폭력에 반대한다는 논리로 피식민지의 독립운동의 폭력을 반대하는 것을 들고 있다. 프랑스의 항독운동을 돌이켜보면 동일한 기준을 적용할 수 있는지가 의문이라는 것이다. 나 역시도 ‘폭력’은 어떠한 경우에도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과거 일제 강점의 역사를 돌아보면 쉽게 이해되는 일이다. 세상이 어찌 옳고 그름의 두 가지로 나뉘겠냐마는 얼핏 들으면 옳은 것처럼 들리는 아름다운 말도 한번 뒤집어 생각해 볼 여지는 있지 아니한가. 모든 문제를 ‘예, 아니오.’로 대답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자신의 주장 안에는 정당한 기준과 ‘왜곡하지 않은 근거’가 있어야 한다. 




   최근 정치의 풍향이 바뀐다 싶으면 지식인의 발언이 소연하다. 바람이 거셀 때에는 꼼짝않고 엎드려 풍향침만 노려보고 있다가 바람흐름이 조짐이 보이자 너도나도 뛰어나오는 것 같다. 텔레비전과 신문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언제부터 이 나라의 지식인들이 이렇게도 민주주의적 사고 행동 양식에 투철했으며 언제부터 이렇게 애증을 초월하여 화해와 타협과 관용의 미덕으로 살았었느냐 하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말하는 사람마다 옳고 글쓰는 사람마다 그른 것이 하나도 없다. 그 박학과 경륜에는 절로 머리가 수그러진다. 그런데 그 말이 너무 고매하고 글들이 슬기로워서 한편으로는 걱정스럽기도 하고 때로는 슬퍼지기까지 하는 것은 웬일일까. 
                                   (강준만 편저, 「리영희」, 개마고원, 2004, P.165~166)


   좋고 좋은 것이 좋은 것이겠지만, 사회에서 용납되어서는 안되는 것들이 있다. 나는 사람들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아도 진실은, 그리고 그것을 추구하는 과정은 결코 은폐되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것이 단 며칠이 아니라 몇 십년이 지나서야 밝혀지는 것들이라도 말이다. 스스로를 지식인으로 자처하는 이들이 많아지고 ‘지식인’의 도그마가 사회를 지배하며 부당한 권력이 상식을 강탈하려 할 때 한 사회가 위기에 빠지는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급변하는 시대라고들 한다. 정보화의 홍수에 나처럼 우둔한 머리를 지닌 이들에겐 어느 것이 진위인지를 구별하는 것도 버거운 일이다. 갈수록 심해지는 양극화가 하루 이틀 일은 아니었기 때문인지 번화한 아파트 단지와 폐선처럼 허물어져가는 빈민촌을 대비한 사진은 이제 구식처럼 여겨진다. 광우병 파동으로 떠들썩 했던 나라가 언제 그랬냐는듯 모두들 얌전하게 대형할인마트에서 즐비한 상품들을 눈여겨보며 쇼핑을 즐기고 있다. ‘식품안정성평가’를 도입해야 한다는 말이 학계에서 나온지 오래였으나 안전한 밥상을 받아 먹고 안전한 먹거리를 찾는 것은 요원해 보이기만 하다. 
   아직도 진위를 알 수 없으나 ‘황우석 신드롬’이 세계를 강타할 적에 그것이 지닌 ‘유사 파시즘’적 성향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었고 생물학도들은 논문의 허위여부를 가리고자 토론의 장에 나오기도 했었다. 하지만 ‘황우석 신드롬’은 어디까지나 조작된 것임을 극렬하게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펜으로 창을 만들어 부패한 자본의 심장을 찔러대는 이도 나타났으나 우국지사(憂國之士)의 심정으로 이 나라 경제를 걱정하며 경제정의는 뒷전인 이들도 있었다. 대중이 무섭다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들었던 시기가 이때였다. 어쩌면 대중이 가지는 가치판단의 기준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어쩌면 이기적인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다양한 가치가 존중되어야 하는 민주사회의 시민으로 자라나기에는 이 나라가 초등교육부터 제공해주는 교육은 지나치게 국제화 되었기 때문인지 우리의 가치규범이 등한시되어 그것들을 학교에서 배우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진실과 그것이 아닌 것들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탈가치화가 이루어져 상식의 선이 무너져 내리며 반인륜적 범죄가 갈수록 기승을 부린다고 하지만, 우리는 살아야 한다. 그렇기에 작금에 있어 지식인의 역할이 더욱 강조되고 새롭게 조명되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진실은 비판을 낳는다. 가장 진실을 잘 알고 있는 국민이 가장 국가를 위할 줄 안다(리영희). 시대가 바뀌어 과거의 기록이 ‘고전’이 되었다면 그 고전을 읽는 이들은 새로운 시대에 맞게 ‘고전’을 고쳐나가야 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가 이루어 낼 수 있는 것들을, 혼자 꾸면 꿈이지만 함께 꾸면 현실이 될 수 있는 것들을 찾아나가야 한다. 

    때문에, 다시, 지식인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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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8-12-08
20:35:33 

 

병장 이동석 
  아, 일단, 두환님께 경배를 

(구체적인 감상은 나중에) 2008-10-12
18:11:55
 

 

병장 이동석 
  다만, 첫 문단의 

[나는 이 점에서는 사르트르가 제시한 지식인론이 우리의 경우와 일치하며 반드시 유효한 것이라고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부분이 조금 잘못된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중간의 "~일치하며"가 
"~일치하지만"의 잘못인지, 
혹은 다른 의도가 있는것인지 궁금합니다. 2008-10-12
18:54:14
 

 

병장 문두환 
  헛...거시기가 또 거시기하게 되는군요. 동석님 말씀대로 문맥의 의미가 중의적으로 읽히네요. 저는 사르트라가 제시한 지식인론이 우리사회에서 형성된 지식인 그룹의 성향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는 의미였어요. 문장을 수정해야겠군요(웃음). 

그나저나 초등학교때 학교에서 숙제로 내준 '독후감'이후로 책을 읽고 처음으로 후기를 적어 보네요. 그래서인지 텍스트를 저만의 방식으로 해석하는 듯 해서 조금 찜찜한 구석이 있기는 하지만. 글이라는 것도 종종 글쓴이의 의도와 상관없이 독자들에게 '읽혀 지는'것이라는 것에서 위안을 찾아볼려고요. 허허허.. 2008-10-12
22:12:03
  

 

병장 이현승 
  인터넷 댓글은 우리에게 양비론을 가르칩니다. 

자꾸만 새로운 사실들이 툭툭 튀어나와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들죠. 물론 그 사실이 

모두 진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입니다. 

언제부턴가 자신의 주장으로 다수와 맞써는 애처로운 '돈키호테'는 찾아 보기가 

힘들게 됬습니다. '황희선생'이 가르치려던게 이게 아니었을 텐데 모두가 

'니말도 맞다, 그래 니말도 맞다'며 어중이 떠중이로 몰려 결국은 무엇이 최선의 답 

인지는 모르는 상황이 종종 발생합니다. 

그럴수록, 창 한자루 꼬나들며, 적진 깊숙히 덩침을 날려줄 용자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물론 언제 새로운 사실이 등장하여 그를 궁지에 빠뜨릴 지도 모르지만, 

깊숙하게만 찔렀다면 그 본의는 어긋나지 않겠지요. 

두환님// 점점 펜이 되어가는거 같아요. 마지막 부분 특히 좋고요. 글 잘 읽었습니다. 2008-10-13
10:53:24
  

 

병장 이동석 
  그런데, 정말 생뚱맞은데, 

두환님 이름의 '환'자는 항렬자인가요? 2008-10-14
06:16:45
 

 

병장 이동석 
  현승/ [점점 펜이 되어가는거 같아요] 
가 오타만은 아닌거 같아요. 허허. 2008-10-14
06:18:12
 

 

병장 김동욱 
  어설픈 중용을 내세우는 건 사실 이도저도 아닌 양비론으로 흘러가기 십상인 것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또 너무 한 쪽으로만 교조적으로 빠져버리는 것도, 현실이라는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그 반대편으로 쉽게 돌아설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린 자주 봐왔구요.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경중, 선후를 준별하고 다른 하나를 종속시키는 실천적 파당성'이 필요한 것 같아요 . 물론 그것만이 옳다는 독단적인 태도로 빠지지 않는다는 가정 아래서. 

계급이란 것이 은폐되어버린 건지, 그 개념이 흐려진 작금의 상황일지라도 - '모순'과 '실천' 이야기하는 사르트르의 외침은 어느정도 유효한 것 같아요. 물론 유럽에서는 리오타르의 지식인 종언론이니 해서 그의 근대적인 지식인론에 대한 반론들이 많은 것 같긴 해도. 아직까지 우린 빨간약을 먹어버릴까, 파란약을 먹어버릴까 그 고민 언저리에서 왔다갔다 하는 것 같거든요. 

지식인 이야기가 나올 때면 으례 그 개념에 대한 논의가 빠지지 않는 것 같아요. 지성인과 인텔리겐차 와의 차이를 운운하며.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두환님이 말하시는 지식인에 대해 궁금한 점이 몇가지 생겨요. 

개인적-이기적인 기준으로 가치판단을 내리는 '대중'이란 존재와 지식인이란 존재 사이에 어떤 차이점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시는지. 대학교육까지 일반화되어버린 현실 앞에서 소수의- 관문을 넘은, 소위 엘리트들에게 주어졌던 그 개념을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난점이 많은 것 같아요. 들어주신 예를 생각해봤을 때, 그렇다면 지식인이란 존재는 어떤 역할을 부여받는 것인가요? '틀린 것'을 바로잡는다는 것은 그것에 대한 명확한 답이 있어야 내려지는 것이고, 아니면 뭔가에 대한 비판을 한다는 것 자체가 자신 중요시하는 가치에 준거해서 행해지는 것일텐데 그렇게 되면 그것이 다른 이들에게는 하나의 '폭력'이 될 수도 있지 않나요. 

'지식인'이란 말에서 약간의 계몽주의적인 냄새가 난다는 사실 역시 부인하기 어렵구요. 

아아. 잡생각이 늘어만 갑니다. 
책가지까지 왔는데 너무 조용하기에 궁금한거 하나 덧붙였어요! 2008-11-19
23:06:37
  

 

병장 문두환 
  이런 댓글, 감사합니다. 안그래도 왜 이렇게 조용한지!라고 생각했거든요(웃음). 
잘 알지 못하면서 떠들어 댄 것 같아 찜찜하기도 한데 주위 반응까지 없어 
더더욱 뻘쭘했었거든요. 

저는 한 사람이 어떤 사회에 태어나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자신의 지적 영역을 확장해 나갈 수 있는 것은 결코 우연적이거나 자연발생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 사회가 축적하고 쌓아놓은 지식의 결정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는 모두에게 동등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니까요. 때문에 저는 지식인과 대중이 본원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만 지식인이 가져야 할 특별한 역할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엘리트주의를 이야기 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다만 그가 성장한 사회에 대한. 그의 의무. 를 이야기 하고 싶은 겁니다. 그 의무라는 것은 타인을 계도하여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아는 만큼-혹은 그러할 수 있었던 기회에 대한-의 실천이 요구된다는 의미라고 해 두겠습니다. 

가치판단이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요. (시민운동 자체가 선善을 지향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만, 시민운동이 사회적 공익을 추구한다는 의미에서)같은 시민운동 안에서도 서로 다른 가치가 충돌하는 경우는 근자에 들어 더 빈번해졌습니다. 이건 별개의 이야기로 가는 것입니다만, 저는 특정한 '가치'를 내재한 주장이 타인에게 폭력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에 몇 가지 요건이 추가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치지향적인 주장이 폭력적이라서 그것에 대한 논의가 차단되어야 한다면, 사회에서 어떤 담론도 형성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주관에 근거하여 세상을 바라보고 판단하니까요. 다만 타자와의 관계에서 권력의 문제, 사실근거, 왜곡의 여부와 공정의 문제는 발생합니다. 

사회를 둘러보면 여전히 '틀렸다'고 해야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독약은 약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독인 것처럼, 법이라고 할 수 없는 악법도 여전히 남아 있잖아요?(웃음) 인간이기에 인간답게 살아야 하지만 그런 기본적인 명제를 가로막는 현실적 문제들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20세기의 전쟁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고 인간사회에 따라다니는 폭력의 문제는 여전히 무시할 수 없습니다. 상대적 가치가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과 동시에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보편의 문제는 남아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직도 (실천적 행동을 포함한) 지식인의 역할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전환'의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하니까요. 전체적으로 의미가 범벅이 된 부분들이 많지만 동욱님이 궁금해 하신 부분에 대한 대답이 됐을지 모르겠군요. 허허. 2008-11-21
23:30:21
  

 

병장 김동욱 
  저도 두환님의 의견에 어느정도 동의합니다. 

다만 저는 지식인이라는 범주를 이야기함에 있어 그것이 대중과 분리되어 그들과는 본원적으로 다른 이들이다, 라는 식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경계(?)했습니다. 사실, 두환님의 말한 그 '의무'를 실현함에 있어서도- 지난번 촛불시위에서 볼 수 있듯- 굳이 어떤, 남과 구별되는 교육을 받는 것이 전제될 필요는 없습니다. 그 '결정結晶'이 교육을 통해 지적영역을 확장해감으로써만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아닐테니까요. (맥락을 제가 잘못 이해했나요? 그랬다면 따끔하게 지적해주시길!) 

지금, 여기서 발 딛고 서 있는 그 자체, 그로써 이곳의 모순을 느끼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들이 농민이든 부랑자든 교수든 정치가든 - 그래서, 그 모순을 시정하기 위한 행동을 실행하는 이라면 누구든 지식인이며 지식인의 역할을 수행하는 거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지금에 와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지식인'이라는 허울보다는 그 '지식인의 의무/역할'뿐이고, 그 의무/역할은 우리 모두에게 짐지워지는 것일 겁니다. 

물론 누군가에게 보이지 않는 모순이 다른 누군가에게 보인다면, 그것을 모두가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좀더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그리고 소외된 그들의 목소리를 더 대변해 줄 수 있는 이들이 있을 것이고, 이들이 아마 두환님께서 말한 지식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결국 우리가 경계(?)해야할 것은 다음과 같은 부분일 것입니다. 얼마 전에 읽은 글인데 어쩌면 너무 생뚱맞을지도 모르겠네요. 프레시안에 <촛불과 지식인들>이라는 칼럼을 투고한 김규항에 대해서 진중권은 다음과 같이 반론을 했습니다. 

"지식인만 정신 차리면 세상이 바뀔까? 택도 없는 소리다. 김규항의 낡은 머리속에 들어 있는 낡은 지식인은 이미 죽었다. 지금이 무슨 계몽주의 시대인가? 지식인이 글 못 읽는 대중을 위해 대신 발언해주며, 민중의 입을 자처할 수 있었던 그런 시대인가? 거리에 나와서 대중과 많은 이야기를 했다면, 자기의 머릿속에 든 생각이 얼마나 관념적인지 깨닫는 계기라도 됐을 것이다. 지식인이 주도하고, 지도하고, 선도하고, 영도했으면 뭐가 달라졌을 것이라는 생각 자체가 오류다." (시사in에서 재인용했습니다) 2008-11-30
00:34:43
  

 

병장 김동욱 
  예전에 나온 강수택(확실하지 않습니다) 교수가 쓴 『다시 지식인을 묻는다』와 얼마전 경향신문사에 펴낸 『지식인의 죽음』을 의미 있게 읽었고 기회가 된다면, 두 글에 대한 리뷰를 쓰고 싶은데- 그럴수 있다면 그때 더 이야기를 나눠봤으면 좋겠어요. 

그것과는 별개로 두 책은 매우 괜찮습니다! 전자는 그람시,바우만,사르트르,푸코 등등의 서양 지식인론을 되짚고 우리의 지식인 논쟁을 돌아본 뒤에 저자가 생각하는 '시민적 지식인상'을 이야기하는, 약간의 지식'사회학'적인 책입니다. 하지만 후자는 경향신문 연재글을 묶은 것이지만, 현재의 한국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평들을 내놓으면서 얼마전에는 <tv,책을 말하다>의 올해의 책에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이미 다 읽어보셨다면 낭패겠지만, 금전적 시간적 여유가 있으시다면 추천해드립니다! 2008-11-30
00:41:44
  

 

병장 문두환 
  고맙습니다(웃음). 

동욱님의 발자국이 보이길래 혹시나 해서 제 글을 다시 보니 역시 대답이 있군요. 흐흐. 
텍스트의 의미에 갇혀 그 이야기만 하다보니 동욱님과 같은 생각을 하면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였던 것 같습니다. 

제가 대학교 1학년이 끝나갈 무렵, 한 칠레 FTA가 있었습니다. 
FTA의 약자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당시에 그것을 막겠다고 국회 앞으로 갔더랬죠. 
70년대부터 경제성장이라는 미명아래 국가의 관심도 못 받고 신음하던 그들이 
90년대 우르과이 라운드를 겪고 멕시코 칸쿤에서 故 이경해씨가 몸으로 세상에 항거했던. 

아, 참 이런 이야기를 여기서 해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더 많은 이야기를 쏟아내고 싶은데, 신분이 신분인만큼 댓글에서는 언급을 아끼겠습니다. 

저 역시도 지식인의 영역을 제한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댓글을 달면서 제 마음속에 늘 
있는 '그 분'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쓰다보니 그리 들렸을지 모르겠습니다. 동욱님의 말처럼 제가 지난 몇 년간 자라온 과정에서 본 것은 현장에서 뛰는 '지식인'들과의 대화였으니까요. 조금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이 공간에서보다 시즌2의 공간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흐흐. 그리고 두 권의 책은 감사히 키핑하겠습니다. 2008-11-30
09:5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