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베스트선정-내글내생각] 나는 왜 클레에 열광 하는가.
병장 최도현 2008-10-30 09:46:57, 조회: 287, 추천:1
대학에서 인문학을 전공하든, 자연과학을 전공하든 전공이 아직 결정되지 않은 대학 초년생들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필수(또는 선택)교양 과목으로 역사학 개론(역사학 방법론) 또는 문학 개론(고전문학, 현대문학)을 수강한다. 지금은 이미 대학을 졸업한 지 오래전 일이라 부분적인 기억들만 간직하고 있긴 하지만, 나 역시 전공은 자연과학이었으나 교양 과목으로 역사학 개론과 문학 개론 수업을 들었던 것 같다. 특히나 문학 수업에서는 방대한 양의 고전 소설을 제한된 기간 내에 소화시켜 평론(評論)해야 하는 보고서 덕분에 잘 마시지도 않았던 커피를 입에 달고 다닌 적이 있었다. ‘서양문학 개론’ 수업을 들은 이후로, 얼마 전 ‘누군가’로부터 “왜 우리는 문학을 읽는 걸까요?”라는 질문을 받기 전까지 철학은 무엇인가? 역사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만큼이나 기본적인 이 질문을 한동안 잊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이란 것이 있다고는 답변하기 곤란하겠지만, 이 글은 되도록이면 가까워진 답변을 찾을 수 있도록 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 우리가 좀 더 넓은 마음으로 사물을 직시한다면, 진실 안에서만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류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진실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오히려 커다란 진실의 대부분은 인류가 저지르는 오류(죄의 본질)를 통해 드러난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인류가 저지르는 모든 오류에는 커다란 진실이, 즉 인간 마음속에 있는 깊은 욕구가 들어 있다. 그렇지 않다면 모든 세대들, 정말이지 수세기가 어떻게 그 오류에 빠지게 되었는지를 설명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 (H.제들마이어, p.185, ≪현대예술의 혁명≫)
우리는 왜 문학을 읽는지에 대한 물음에 앞서, 문학이라는 범주를 포괄하는 예술의 특성을 검토해 보는 것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회화와 건축 등의 조형예술은 현대로 오는 과정에서 의미로부터 스스로 해방되려 하였고, 모든 ‘윤리적, 종교적 상황을 외면한 채’ 완전히 자율적이고자 한 일련의 사건 또는 ‘혁명’을 겪는다. 이에 비해 언어예술(문학)은 현대성으로부터 그나마 가장 덜 훼손된 장르임을 밝히는 것이 비로소 왜 우리가 문학을 읽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이어질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대상 예술과 비대상 예술로 넘어가는 경계선쯤에 놓여있는 인물인 클레(Klee)를 통해, 현대예술이 전통과 인간을 버린 자리에 가져다 놓은 우리의 새로운 ‘우상’을 규정해 볼 것이다.
1. 새로운 타율성에 빠져든 현대예술
구시대 회화는 실제적이거나 상상된 세계에서, 또는 실제와 상상적 세계의 혼합에서 나온 물체를 ‘묘사’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그림 안에서 가시화된 대상은 무언가를 ‘의미’할 수 있었고, 거의 대부분 작업을 그렇게 진행했다. 그러나 현대회화에서는 대상이 되는 물체에 대한 묘사를 없애는 것이 중요할 뿐만 아니라, 부분적으로는 의미의 배제를 시도하였다. 묘사와 의미를 분리하는 일은 예술의 자율성으로 이어지지만, 그것은 바로 새로운 타율성에 빠져드는 결과를 낳았다.
회화는 하나의 새로운 ‘타율성’, 그러니까 가장 근원적인 ‘기하학’이라는 타율성에 종속되었다. 그런 경향의 그림은 더 이상 화가가 전형적으로 사용하는 도구로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설계사들이 쓰는 T자형 직각자, 삼각자 같은 기하학적 도형을 그리는 도구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색은 단순히 동질적인 면으로, 그 면의 각 부분에 ‘도색’되는 정도가 되었다. 회화를 지배하는 새 주인은 기하학이 되었으며, 그럼으로써 회화의 역동적인 요소는 그 자립성을 잃게 되었다. 미술사에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이다. (같은 책, p.83)
현대 예술은 존재의 질서와 가치의 질서에 이어진 연결을 끊었다. 그것은 모든 ‘윤리적, 종교적 상황을 외면한 채’ 예술을 ‘만들고자’ 했다. 예술은 완전히 자율적이고자 했다. (같은 책, p.109)
원래 예술에게 ‘목적’이었고, ‘임무’였던 요소는 회화적이며 조각적이고 장식적인 요소들이며, 상징적이고 우의적이며 위엄을 자랑하는 요소들이며, 의인(擬人)적인 요소였지만, 이제 현대 예술은 형이상학적인 요구를 자발적으로 포기한 것이다. 이제 ‘자율적인’ 예술은 오히려 기하학이라는 새로운 ‘타율’아래 놓이게 되는데, 그것은 그 동안 군림했던 어떤 타율보다 더 엄격한 것이었다. 프랑스 혁명이 해방된 개인들을 너무나 빨리 더 끔찍한 또 하나의 통치 아래로 밀어 넣어 버리고 말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모든 예술은 기하학과 구성이라는 우상에 종속됨으로써, 눈에 띄게 다시 가까워졌고 서로 연관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통합은 이전의 모든 타율성보다 훨씬 더 심각하고 생경한 새로운 ‘타율성’에 복종한 대가로 얻은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예술은 예술 외적인 것에 종속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같은 책, p.139)
현대예술은 이렇게 자체의 객관적인 법칙을 개발하며, 그렇게 해서 그 존재의 확실한 정당성을 갖고자 하였다. 색에게 ‘객관적인’ 가치를 부여해 보는 것은 색을 순전히 그 물리적인 질에 따라 사용하고 객관적으로 물리학적인 근거를 지닌 색의 미학을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위험한’ 방법이다. 이런 식으로 회화의 객관적인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러나 사실 그것은 더 이상 예술적인 요소는 아닌 것이다. 순전히 물리적인 색채론의 경험에 따라 예술 작품을 만든다는 것은 사실 예술과는 관계없는 단순한 모험일 뿐이다. 문제는 예술과 하나가 되어버린 과학과 기술의 유입이 그것들을 우상화함으로써 예술이 그 자체를 최고의 가치로 숭배하는 결과로 이어졌다는데 있다. 그 자체를 신성화하고 집착하는 경향은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1984년≫에서도 나타나 있다. 소설에서 그 끔찍한 주인공이 여주인공과 동침하기 전에 한 가지 확답을 요구하는 장면이 있다.
“당신 이거 좋아하지? 그러니까, 나를 좋아하느냔 말이 아니라 이것 자체를 좋아하느냔 말이야.” 그녀가 “전 그걸 숭배해요.”라고 답하자 비로소 그는 만족해한다. 에로스 없는 성적 욕망은 그것 자체를 원하지만 에로스는 그 연인에 대해 - 그녀 전체에 대해 총체적으로 - 즐거워하고 몰두한다. 그것 자체란 감각적 쾌락, 즉 자신의 몸속에서 일어나는 어떤 사건을 말한다. (C.S.루이스, ≪네 가지 사랑≫에서 인용)
이렇게 그 자체하고만 관계하는 순수한 예술은 아무런 윤리적 제약에도 얽매이지 않고, 종교적 제약에도 얽매이지 않는 곳에서, 자체의 객관적인 법칙에 복종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전례 없는 지적 완결성을 가진다. 동시에 그들은 모든 인간적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거기에는 형이상학적인 요소가 제거되었기 때문에 명예와 의무, 사회와 국가, 권리와 책임, 사회와 계층, 과학, 고상한 사상, 학문과 용감한 행동 등과 같은 인간적인 요소들을 상실하였다. 아마 소설 ≪미성년≫의 주인공 <베르실로프Versiloff>의 아래와 같은 논의도 이제는 전혀 의미가 없는 일로 전락하고야 말 것이다.
“명예라는 말은 동시에 의무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 사회의 엘리트들이 국가를 지배하면 그 나라는 견고해질 것입니다. 최고 계층은 항상 자신의 명예에 대해 생각하며, 그 명예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때로 바람직하지 못한 때도 있을지 모르지만, 구성원들을 항상 굳건히 결합시키는 역할을 하며 나라를 견고하게 안정시킵니다. 그것은 정신적으로도 유익하지만, 정치적으로는 더욱 유익하지요. 그러나 노예들, 즉 이 계층에 속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은 피해를 보는 것입니다. 그들이 피해를 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권리의 평등화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그처럼 실행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매우 유익한 방향이지요. 그러나 모든 경험에 비추어 판단하건대, 도처에서 (즉 유럽에서) 권리의 평등화가 이루어지면 동시에 명예심의 감소, 이에 따른 책임감의 감소가 생겼습니다. 이기주의가 이전의 공동체적 이념과 자리를 바꿨고, 모든 것이 개인의 개별적인 자유로 분해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개인의 자유를 느낀 사람들은 공동체적 의식이 없기 때문에 결국은 모든 사회의 결합력이 분실되었고, 그렇게 되니 모처럼 얻은 자신의 자유조차 지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 귀족의 특성은 유럽의 귀족 정신과 다릅니다. 우리나라의 귀족 계층은 특권을 상실한 오늘날에도 명예와 상류 사회, 과학, 고상한 사상 등의 수호자라는 모습으로 이 시대 엘리트 계층으로 남아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 계층이 이미 개별적인 신분 계급의 테두리 안에 머무르지 않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이미 사상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니 말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주 오래 전부터 이 계층에 들어가는 문이 열려 있었지만, 이제 그 문을 완전히 개방할 시기가 온 것입니다. 명예와 학문, 용감한 행동 등의 분야에서 공을 세운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나라에서는 누구에게나 최고 계층의 한 사람이 될 권리를 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그 계층은 저절로 이전 같은 특권을 가진 계급의 의미가 아닌, 진정한 의미에서 이 시대 최고 엘리트들의 모임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이 계층은 새로운 의미로, 아니 완전히 혁신된 면모로 계속해서 유지될 것입니다.” 그러자 공작이 언성을 높이면서 화를 냈다. “그렇게 되면 그게 무슨 귀족 계층이겠습니까? 당신이 구상하고 있는 것은 무슨 공제 조합원들의 비밀 모임 같은 것이지, 귀족 계층이 아닙니다.” (F.도스토예프스키, p.384, ≪미성년≫)
2. 클레(Klee), 의도적인 순수성을 추구한 경계인
그러나 스스로 기하학이라는 새로운 타율성을 선택한 현대 예술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곧이어 기술적 과학주의에 대한 극단적인 반응으로서 논리를 처단하는 ‘의도적인 정신분열’을 일으킨 것이다. 예를 들어 서로 관계가 없는 것들을 즉흥적으로 마구 절단 내어 갖다 붙이고, 사물을 왜곡시키고 잘못 놓이도록 함으로써 예술을 의도적으로 우스꽝스럽게 만들었다. 바스키야(Basquiatt)는 주위에 널려있는 온갖 너저분한 물건들(쓰레기, 못, 머리털, 차표 등)을 모으고, 구성을 하기 위해 그것들을 짜 맞추는 작업을 하였다. 이런 경향은 논리를 거부하는 사고, 구조와 의미를 부정하는 예술, 이제는 아무것도 아니게 된 윤리가 어떤 모습으로 세상에 출몰하는지, 즉 신을 철저하게 거부하는 인간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를 폭로한 셈이다.
이성을 잃은 혁명은 반항 속에서 “불행을 초래할 것이다. 결국은 자기 자신을 고수하기 위해서 말이다. 만약에 그가 그때 자기 자신을 고수할 수단이나 가능성을 찾지 못할 경우, 그는 파괴와 혼돈을 선택할 것이며, 아마도 스스로에게 고통을 쏟으려고 할 것이다. 그저 고집스럽게 자신의 입장만을 고수하면서 말이다. 그는 세상에 저주의 말을 퍼부을 것이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도 우리가 이성을 피할 수 없다고 말한다면, 그렇다면 인간은 더 이상 이성을 갖지 않기 위해, 그럼으로써 자신을 고수하기 위해 아마도 미쳐버리게 될 것이다.” (F.도스토예프스키, ≪지하생활자의 수기≫) (H.제들마이어, p.26, ≪현대예술의 혁명≫에서 인용)
여기 ‘근원적인 것’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찬 한 사람이 있다. 그는 세잔(Paul Cezanne : 1839~1906), 시냑(Paul Signac : 1863~1935), 고갱(Paul Gauguin : 1848~1903), 사르트르(Jean-Paul Sartre : ), 그리고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의류 브랜드인 Paul Smith와 이름이 같다. 성경에서는 ‘바울’이라 부르고, 불란서 사람이면 ‘폴’이라 발음하며 독일 사람이면 ‘파울’이라 부르겠지만, 거의 비슷한 시대의 사람들만 나열해 보아도 이렇게 많기도 많은 흔한 이름을 가지고 있는 클레(Paul Klee : 1879~1940). 우리나라 이름이라면 ‘철수’나 ‘영수’ 쯤 될 만한 촌스런 이름이겠다. 그 역시 예술형식에서 논리와 과학주의를 거부하고 순수성을 추구하지만, 그의 특징은 그 순수성을 근원적인 것에서 찾으려 하는데 있었다.
“이 세상은 나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 바로 죽은 자들과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들과 더불어 살고 있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보다는 창조의 중심(근원적인 것)에 더 가까이 있긴 한데, 그렇다고 아직 그리 충분히 가까이 있는 것도 아니다.” (같은 책, p.158)
창조의 중심에 가까이 있는 자는 어린아이처럼 뭔가를 만드는 사람일 것이다. 그의 창작품은 창작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스스로의 생을 펼쳐나간다. 오로지 순진한 사람만이 창조의 중심 가까이에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는 스스로 순진해지려 한다. 그가 창조한 것은 의식적인 순진성이다. 그러나 그렇게 될 때 그것은 이미 순진하지 않은 것이다. 예술을 통해서 신화와 종교를 다시 세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노력에는 어떤 숭고함이 담겨 있으며, 실패하는 데도 종종 어떤 대단함이 느껴진다. 클레는 의도적인 순수성을 통해 근원적인 것을 설명하려는데 의미를 두었고, 그것은 아직 실제로 비대상적이지는 않으며, 또한 아직은 완전히 ‘순수’한 것이 된 것도 아니었다. 의미를 지닌 비대상 회화는 아직 구시대 예술의 마지막 단계쯤에 놓여 있는 셈이다.
3. 우상 : 죄의 본질, 죄 그 자체
지금까지 예술의 자율성, 기하학이라는 새로운 타율성, 그리고 과학주의에 대한 극단적인 반응으로서 논리와 의미의 의도적인 해체, 의도적인 순수성 등을 통해 우리가 스스로 세워놓은 현대 예술에 드리워진 ‘우상’을 발견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 우상이 결국 죄 그 자체이며 죄의 본질임을 충분히 직관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생소한 혼합에서 깨끗해진, 완전하게 ‘자율적인’ 회화의 극치는 결국 ‘의미가 배제된 대상이 없는 예술’로서 정리된다.
“인간은 신을 부인할 자유를 얻었지만, 그 때문에 자신의 세계를 우상과 귀신을 동원하여 그를 대체할 수 있는 종교성을 소생시켜야 한다는 절박함에 직면했다.” 신에 대한 믿음의 자리에 이 땅위에 존재하는 특정한 물체에 대한 믿음이 등장했다. 거기에다 인간은 정말로 절대자의 모든 힘과 존엄성을 부여했다. 이런 우상 가운데 어느 것도 인간이 진정한 절대자에 의지하려는 마음을 충족시켜주지 못한다. 따라서 우상은 또 다른 것으로 옮겨진다. 제한적이고 유한한 현상에 무한한 가치를 부여하려는 모든 노력은 인위적으로 머물 수밖에 없다. 우상으로 지적된 모든 가치들을 두루 탐색하고 포기한 후에, 결국 모든 가치를 부인하는 허무주의가 나타난다. (같은 책, p.164)
4. 왜 우리는 문학을 읽는가?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우리는 왜 문학을 읽는가? 언어에서는 여전히 소리와 의미가 시적으로 결합하며 운율 속에서 소리와 관념을 일치시키는 기술을 유지하고 있는데, 이는 세상의 전체성을 그리는 예술의 가치를 담아내고 있다. 과학이나 기술도 언어의 형식, 언어적 현실을 근본적으로 와해시키지는 못한다. 절대적인 언어가 고안되지는 못했으나, 여전히 세계는 각 민족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창작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기존의 언어야말로 바로 그 기존성으로 “예술의 영원한 이념”을 읽을 수 있다. 현대 예술이 흥미로운 것만을 찾아 새로운 것을 좇아가는 서글픈 중독에 빠져있는 동안, 언어예술(문학)은 과거로부터 연결되어 있는 고전적인 인간의 측면을 탐구하였던 것이다.
“진정한 미래는 파괴하려는 힘과 유지하려는 힘이 만드는 공동의 결과일 수밖에 없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미래를 창조할 수 있는 것은 새로운 시대의 복음에 사로잡히는 나약한 정신이 아니라, 과거에 연결되어 있는 강인한 정신뿐이다.” (셸링) (H.제들마이어, p.204, ≪현대예술의 혁명≫에서 인용)
진정한 예술은, 신화와 우주의 이법을 한 곳에 담고, 또한 현대어로 말하면서도 고전적인 인간의 측면, 그러나 절대로 진부하지 않은 인간의 측면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진정한 예술은 인간에게 “전체적으로 항상 생생한 영혼의 깊은 층”이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는 환경을 선물한다. “진정한 예술을 찾아라. 그러면 너는 근원적인 것을 덤으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같은 책, p.161)
* 책마을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8-11-18 14:38)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8-12-08
20:35:13
병장 이동석
제가 멍-해서 (잠을 거의 못 잔 관계로) 독해가 벙-뜨는군요. 2008-10-30
11:52:06
병장 이동석
잠을 멀쩡히 다 잤다고 해서, 멍하지 않은것도 아니고, 멍하지 않다고 해서 독해가 쉬울리도 없겠지만. 2008-10-30
11:52:45
병장 이동석
여유를 가지고 찬찬히 읽어봤습니다.
우리가 좀 더 넓은 마음으로 사물을 직시한다면, 진실 안에서만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류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진실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오히려 커다란 진실의 대부분은 인류가 저지르는 오류(죄의 본질)를 통해 드러난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제가 다시 이야기 할수 있는 용기를 주는 구절이로군요-
그 뒤에 대한 감상은 차차- 2008-11-05
10:34:49
상병 이우중
이런 글이 여기 묻혀있었다니!! 2008-11-07
12:2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