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이 지나서 다시 읽은 <데미안>
사람은 언제부터 언제까지 자신의 삶을 고민하게 되는가. 가끔 이런 질문을 스스로 던진다. 그럴때면 마치 ‘고민의 역사’라는 무슨 역사책 제목처럼, 무언가 내가 세계를 자각했다고 믿었던 그 시작을 대강이나마 떠올린다. 성장기의 골목길에서 무릎에 새겨진 시퍼런 멍 같이 아릿한 고민들은 내 몸과 마음이 자라나는 과정에서의 자연스런 성장통이라 한 수 접어줄 수 있다. 허나, 20대의 목적지조차 뚜렷이 없는 이 방랑과도 같은 새로운 국면에 대한 고민, 세계와 사람들과 나의 외로운 투쟁과 같은 지금을 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 혹은 앞으로의 남은 나의 생 내내 떠안아야 할 삶에 대해서는 또 어떤 고민을 하게 될지 나는 자꾸만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다. 그 예감은 포레스트 검프의 초콜릿 상자처럼 그런 것이다. 다음에 집을 초콜릿의 맛이 달콤할지, 혹은 쌉싸름할지, 아니면 흔히 쓰는 말처럼 그야말로 달콤 쌉싸름할지, 어떨지 알 수 없는. 괜히 먹고 입맛만 버렸다는 생각이 종종 들기도 하는 그런 초콜릿의 딜레마.
미지의 영역에 있는 미래가 성큼성큼 현재로 걸어들어오는 당혹감은 낯선 사람이 내 방문을 벌컥 열고 구둣발로 나의 고운 양탄자에 얼룩을 내는 것처럼 낯설고 폭력적이다. 비록 그 불청객이 익히 알고 있는 내일이거나 모레이거나 하는 이름일지라도 그 사실은 변함없다. 우리의 삶에 대한 고민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다. 삶에서 만나는 온갖 변수들에 대한 고민, 나와 나를 둘러싼 세계, 그리고 나와 관계맺고 있는 세계의 각 지점에서 벌어지는 일을 우주의 티끌만 못한 내가 어지려니 힘들 수 밖에. 고백하자면 실은, 내가 지금 단정 지어 내릴 수 있는 명제는 거의 없다. -설령 내가 '내일 해가 동쪽에서 뜬다'라고 말할지라도 누가 아는가. 하루 사이에 경천동지! 우리 앞에 닥칠지. 하루 아침에 나타난 독재자가 이제는 동쪽을 서쪽으로, 서쪽을 동쪽으로 부르기로 한다는 '4방위 교체법(?)'을 발효시킬지도 모를 일이다- 허나, 고정된, 단정적인 진리는 없으나 그래도 내가 거의 옳다라고 감히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삶에 대한 고민은 언제나 계속 된다'는 것. 타이타닉을 보자와 보지말자로 친구들과 다퉜던 애국심에 불타오르던 고등학교 때의 그 어느 날의 까닭모를 열정과 마찬가지 맥락으로. 그때처럼 여전히 셀린 디온은 고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마이 고민 윌 고 온 앤 온.’ 가라앉은 타이타닉이 다시 복구되어 다시 또 가라앉는 그 어처구니 없을 그 날까지. 그래서 나도 그 후로 오랫동안 노래를 부르고, 모란이 피길 기다리듯 그렇게 고민했나보다.
데미안이라. 데미안이 대체 언제 적의 데미안이던가. 우리 시대의 고전, 불후의 명작, 모범적인 중,고교생의 필독서가 다름 아닌 데미안이다. 아마 그랬던 것 같다. 어쨌든 내가 데미안을 처음 ‘본’ 때는 아마 중학교 때였을 것이다. 내게 괜히 비호감이었던 우리반 반장이 읽고 있는 것을 보고는, 나도 읽을 수 있어라는 강력한 중학생적 오기에 덜컥 집어 들었던 기억이 솔솔 난다. 처음엔 제목만 보고, -음, ‘데미안’은 위인전이 아닐까-하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던 것 같다. 거기다, 공교롭게도, 그때 봤었던 극한의 공포영화 ‘오멘’의 주인공 악마 고놈 이름이 데미안이 아닌가. 머리로 인지하는 것보다 감정으로 느끼는 경험이 오래 지속되는 건 아마 사실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내가 스스로 그걸 증명하고 있으니까. 어든 감정적으로 느껴졌던 뭔가 모를 섬뜩함은 그렇게 데.미.안. 세 글자를 머릿속에 박아넣었다. 그래서 참 데미안을 감명깊게 잘 읽고 당시 성장기에 고민하던 방황하는 청소년인 나는 음지를 맴돌지 않고 스스로의 길을 착실하게 구축했다-라는 식으로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빛낼 수 있는 전개였다면 좋으련만.
반전. 실망스럽게도 그 당시에 내가 본 헤세의 ‘데미안’은 도무지 알 수 없는 소설이었다. 싱클레어와 데미안의 관계, 둘의 대화. 열 다섯 남짓 먹은-아, 그때는 싱클레어가 내 또래였군- 싱클레어의 방황이란게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문학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다보니 별의별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주인공이 나왔구나 생각했다. 퇴마록의 주인공들이 홍수를 막느냐 못막느냐가 더 관심사고, 에반게리온 비디오를 빨리 구하고 싶은 것이 소망인 중학생인 나에게 얘는 대체 왜 이러는 걸까하는 생각만 들었을 뿐이다. 그래도 그나마 알 수 있었던 내용은 크로머에게 소위 삥을 당하고 협박을 당하는 데서 오는 스트레스가 고민이 될 수 있겠다는 부분 뿐이었다. 실제로 그런 얘기들이 곧잘 들렸으니까. 선배들의 전설이랄까. 결코 겪을 수 없을 것 같은 일들이 있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이 내게 녹록치않은 위협이 될 수도 있다는 것. 데미안을 읽을 즈음, HOT의 ‘전사의 후예’를 틀어놓고 교실 뒤켠에서 춤을 추던 친구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훗.
‘데미안’을 두 번째 읽은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 나의 그 시기는 문학을 읽어야 되는 환경이 조성이 되었고, 억지춘향격으로 집어든 문학책들이었지만 나름대로 쏠쏠한 재미를 느낄 그런 때였다. 거기다 적당한 감정의 격한 흐름들이 내 안을 휘젓고 있었으며,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들에 도무지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 날들이 지속되고 있었다. 즐겁기는 했으나 직업란에 학생이라고 적어놓기에는 내가 학생으로서 하고 있는 일이라는 건 죄다 나중에 뭐하기 위해, 무엇이 되기 위해 따위의 수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딱 고만큼. 그래서 문학에 재미를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책은 나를 다른 세계로 옮겨 나르는 날개였다. 비록 교복으로 몸을 감추고 학교의 책상에 무거운 엉덩이를 붙이고 주저앉았으나, 상상은 끊임없이 나를 날아오르게 만들고, 나의 현실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그렇게 붕뜬 나날들 속에 도서관에 있던 헤서의 전집을 보게 되었다. 그때 다시 만난 데미안은 내게 또 다른 세계로 향하는 길을 제시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사스>
너무도 유명한 이 구절은 나를 둘러싸고 있던 강력한 알의 존재를 지각하게 했고, 내가 깨뜨려야 할 나의 세계가 있음을 분명히 인식시켜주었다. 새가 새라는 이름을 얻어 자신의 속성대로 날아오를 수 있는 첫걸음은 갓 부화되기 시작한 아기새에게 주어진 가녀린 힘, 젖을 먹은 적도 없기에 미력한 힘이나마 다해야 한다는 것. 그래야 비로소 무언가 시작될 수 있다는 것. 정말 지금은 나의 진정한 신성을 발휘할 수 있는 시기가 아니라는 걸 말이다. 나만의 압락사스까지는 이르지 못했을지라도 세계와 알과 깨뜨림, 그리고 길을 의식하게 되었던 것은 작지만 중요한 깨달음이 아니었을까 싶다. 지금의 현실이 나답게 산다는 것에 강력한 장애물이었다는 것도. 모든 일이 그렇듯이 그 당시에는 그 중요성을 크게 깨닫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Let it all out. 이승환은 그렇게 노래했고, 나는 그를 따라 외쳤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길의 추구, 오솔길의 암시다. 일찍이 그 어떤 사람도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본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노력한다.>
얼마 전에 다시 읽은 <데미안>의 가장 첫 부분에 나오는 싱클레어의 독백이다. 첫 번째 데미안을 읽은지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두 번째 데미안을 읽은지도 6년이 넘게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나의 삶을 두고 고민한다. 언젠가 나의 이 고민이 어느 지점에서 끝이 날 것이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지만, 이제 나는 삶을 두고 생각 속에 적어대는 고민이라는 것은 결코 그 끝을 드러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은 무얼까. 세상 속에서 나를 나답게 만드는 그 어떤 요소가 완전히 발현되면 그때 나는 완전히 내 자신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은 나를 떠나 다시 나에게로 돌아와 나를 만나는 회귀이자, 발견의 여정이라고 생각한다. 그 여행은 죽음이라는 삶이 맞닿아 있는 다른 영역에 들어서서야 끝이 날 것이다. 아니, 어쩌면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또 다른 시작일지도 모른다. 그건 정말 모르는 일이다. 단지 한번 그 영역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은 돌아올 수 없었기에, 누구나 가는 곳이지만 결국 누구도 알지 못하는 곳이 되어있을 뿐.
헤세는 자연 속에 동등하게 존재하는 창조자로서 모든 사람은 신성을 가지고 있고, 그 신성은 서로를 잇는 가늘지만 질긴 연계를 상상하는 근거가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때문에 집단과 <데미안>에 등장하는 많은 이야기들은 하나의 점으로 수렴된다. 그 점은 세계와 나의 관계에서 어떻게 나의 자리를 잡아갈 것인가 하는 원초적인 고민이 집중되어 있는 점이다. 스피노자가 말한 것처럼 헤세는 자연 안의 모든 것은 똑같은 신성을 지닌 자연의 창조자이자 피조물이라고 말한다. 싱클레어는 유년의 알을 깨고 코밑에 거뭇한 수염이 자라는 시기까지 끊임없이 방황하고, 고민하고 체념하고 다시 북받쳐오르기를 반복한다. 인생은 아마도 이런 지리한 반복의 무한급수이리라. 그러나 그러는 동안에 비바람이 거대한 바위를 고운 모래로 풍화시키듯한 변화가 나에게도 일어날 것이다. 과거를 딛고 현재에 서서 미래를 바라보자라는 식의 고운 말을 남기고 싶지는 않다. 허나, 다만 의미가 있으리라 믿는 부분은 알을 깨야한다는 것이다. 나를 둘러싼 세계가 단지 하나의 알일지도 모른다는 끝없는 의심, 그리고 날아오르게 될 푸르른 하늘 저 너머에는 아마 삶에 대한, 세계에 대한 자그마한 깨달음 정도는 나를 위한 선물로 준비되어 있지 않을까.
결국, 이십대가 넘어서 읽은 <데미안>이 속삭인 것은 나이를 먹어도, 경험을 쌓으며 시간이 흘러도, 세상과 진리에 대해 알 듯 말 듯한 착각에 빠진다 해도, 여전히 고민은 계속된다는 것이다. 누구나 그렇듯 자기 자신이 되려하지만 내가 내 자신이 되는 길은 아직 멀고도 험하다는 것이다.
결국 제자리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제는 내가 고민한다는 사실을 숨쉬듯 자연스럽게 받아 들일 수 있을 것 같다.
이제서야.
* 병장 김동환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6-03-08 08:42)
병장 노지훈 (2006/02/22 05:41:41)
조회수1의 달콤함.
데미안을 군대와서야 처음 읽고 약간의 식상함을 느꼈던 것은 어렸을 때의 치열함이 사라졌기 때문일까나? 아직 머리도 안컸으면서 그런 것 쯤은 이제 필요없어,라는 어설픈 과신 때문일까나. 어쨌든 <알 듯 말 듯한 착각에 빠진다 해도 여전히 고민은 계속된다는 것이다>. 인정합니다.
좋은 칼럼, 좋은 토론도 재밌지만 좋은 독서후기가 있기에 책마을이죠. 글 잘 읽었습니다. 추천 버튼 만들어주세요~
병장 한상원 (2006/02/22 07:22:14)
지훈씨, 첫 클릭으로 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올려놓고보니 이상해서 몇 부분 쪼~끔 수정했어요.(웃음)
일병 홍지욱 (2006/02/22 08:42:32)
처음 접한 시기, 2번째 접한 시기가 저랑 비슷하네요. 그래도 워낙 좋아하는 책이라 데미안은 가끔 침대 위에서 읽곤 하네요. (입대전..) 그 책을 보면, 싱클레어와 비슷한 절차를 밟고 있는 저를 발견하지요. 그렇기에 아직도 저의 데미안을 기다리고 있네요. -이미 만났을 지도 모르지만...-
병장 김태경 (2006/02/22 08:44:32)
누구나 읽었고, 누구나 쉽게 명작으로 꼽는 데미안이지만, 실제로 얼마나 받아들이고 데미안을 추천하고 읽었다고 하는건가 싶어요. 상원님처럼 대부분 중고등학교때 처음 읽을텐데, 그때 읽었었다고 평생 데미안 얘기가 나오면 '난 그거 읽어봤는데 괜찮어, 명작이잖아. 너도 읽어봐'라고 말하겠지요. 청소년의 필독서로 지정된게 오히려 아쉽다고 해야할까요.
너무 흔한 데미안이지만, 저에겐 소중한 책이예요. 독서후기 잘 읽었습니다.
병장 심형철 (2006/02/22 08:52:49)
저도 중3때 벼룩시장에서 단지 '표지가 이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천원짜리 한장 턱 내고 집어왔던 책인데, 고등학교 와서 읽었습니다. 시험기간이었는데, 모든 공부를 접어두고 밤새도록 읽었습니다. 그때까지 살아오면서 책으로 충격받긴 처음이었습니다. 저와 싱클레어, 또는 데미안의 일부가 너무나도 닮았거든요. 다시 읽어보고 싶은 책입니다.
병장 김동환 (2006/02/22 09:38:07)
하하. 저도 오멘의 그 꼬마앤줄 알았는데!
고등학교때 켈로그사의 신제품 현미프레이크에 열광하며 데미안을 읽었던 기억이 있군요.(땀)
상병 김강록 (2006/02/22 09:38:28)
저도 처음에 '오멘'의 그 꼬마애인 줄 알았었어요. (으하하) 고등학교 때랑 재수할 때랑 두번 읽었었는데, 읽을 때마다 느낌이 많이 다르더라구요. 처음엔 굉장히 유년기의 서정을 담은 뭐 그런 침착하고 관조적인 느낌으로 읽었었던 것 같은데, 갈수록 오히려 광기가 느껴지는 책이었습니다.
"새는 알을 깨고 태어난다─이하"는 정말 오래도록 울궈먹은 레파토리였습니다. 지금도 '아프락서스'는 제가 장차 미래에 건설할 당구장 이름 후보 중 당당히 3위, 인가 4위인가 정도 되구요. 저는 자꾸 이 대사가 생각나더라구요. 싱클레어가 피스토리우스(?)였나 하는 그 교회에서 피아노 치던 남자에게, "당신에게선 골동품 냄새가 난단 말이오!"
병장 손동철 (2006/02/22 13:09:14)
데미안, 델리스파이스의 차우차우란 곡처럼 자신의 내면 깊은 바닥으로 내려가게 하는 책이죠. 고등학교 때 이 책을 처음 읽었는데 한 동안 내면에 너무 깊이 침잠한 나머지 멍하게 살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다가 근래에 다시 읽어 보게 됐는데, 그때와는 달리 유난히 정신분석과 니체가 보이더군요. 예상치 못한 즐거움이었습니다. 헤세가 융의 정신분석에 깊은 관심이 있었다죠? 내용 중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연상시키는 싱클레어가 아버지를 죽이는 꿈, 책 내용 전반에 걸친 꿈에 대한 내용들, 크로머에게 시달리는 싱클레어에 대한 데미안의 상담, 지나친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는 싱클레어, 집단무의식 등을 보며 정신분석을 연상했습니다. 니체 역시 비슷하게 보이더군요.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기자신에게로 가는 길”이란 구절은 Amor Fati 운명애를, “우리들 속에는 모든 것은 아는 사람이 있다”는 더 큰 자아를, 데미안이 말하는 “언제는 물어야 한다는 것”, “새는 알에서.....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는 흡사 니체의 위버멘쉬와 도덕비판을 연상시킵니다. 게다가 마지막 부분 “두려움에서, 무서움에서, 당황에서 만든 공동체”란 구절 역시 니체의 무리본능에 대한 비판을 떠올리게 합니다. 똑 같은 책이 이렇게 새롭게 보여서 굉장히 신기했습니다.
어쨌거나 그래도 상원님이 말하신 자기 자신에 이르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기는 여전히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책에서 자신에게 이르는 길 중 하나를 알려 주는 구절을 봤는데 “내 속에서 솟아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란 구절이었습니다. 어두운 내면으로 빛이 확 들어오는 느낌이었는데, 정말인지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운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길을 가면 완전히 혼자가 된다는 두려움 때문에 그런 걸까요? ....... 외로운 투쟁을 도와줄 자신만의 데미안....... 찾을 수 있을까요?
상병 홍석대 (2006/02/22 13:14:37)
이번나들이때 최우선순위로 매수(?)할겁니다 핫핫
일병 김주성 (2006/03/11 21:17:27)
'온전한 나'를 찾은 분들이나 찾는 분들을 보면 오히려 제가 외롭더군요...진짜 외로운건 '온전한 나'를 찾는것이 가장 바른 길인걸 알면서도 행하지 못하는 제 모습이라는 생각이듭니다..
상병 권현규 (2006/06/28 14:18:29)
저도 중학교 때 읽고 도통 내용을 알 수 없었던 작품이었습니다.
후임에게 빌려서 읽으려고 생각 했었다가 깜빡했는데 이 글을 보고 다시 생각났네요.
어서 읽어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