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찬씨의 『'신자유주의 비판' 비판』 그리고 원익씨의 『신자유주의는 나쁘다, 그러나 참여 민주주의는 ‘더’ 나쁘다』. 그리고 그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면서 약간 제 생각 자체도 정리가 되었군요. 우선 예찬씨가 던져주신 과연 ‘신자유주의란 무엇인가?‘라는 물음. 항상 저도 그게 불만이었습니다. 무엇인지도 확연히 정의되지 않은 채, 단지 한쪽의 반대급부로만 구성된 실체에 대해 과연 어떤 싸움이 가능할까? 하는게 제 고민이었거든요. 제가 근래에 정리한 ‘신자유주의’에 대한 생각은 이렇습니다.

 ‘모든 것의 가치판단 체계를 오로지 경제적 이익에 근거한 효율성으로 바꾸어 놓는 것.’

 굉장히 추상적인가요? 아니 저는 오히려 너무나도 구체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경제체제에서 무조건 자유방임을 몰고가는 것이라고 정의를 내려보려고 했죠. 하지만 경제가 아닌 다른 분야에서 퍼져나가는 흐름이 너무도 맘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바로 이 정의입니다. 가치판단 체계가 오로지 경제적 이익에 근거한 효율성으로 바뀜에 따라 우리도 인식하지 못하는 많은 것이 바뀌었죠. 사소한 예를 들어볼까요? 집을 짓는다고 칩시다. 
 그런데 그 때, 어떤 사람이 이의를 제기합니다.

 ‘아 이렇게 하는게 좀 더 보기 좋고 편할 것 같은데?’

그렇다면 요즘 사람들은 이렇게 답하겠죠. 

 ‘아 그게 돈이 많이 들어서’ 
혹은 
 ‘어쩔 수 없어. 저게 돈이 젤 적게 되는 디자인이야.’

여기서 다시 우리는 대부분 이렇게 반박하게 됩니다.

 ‘별로 돈이 많이 들 것 같진 않은데?’


 잠깐.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이러한 구조를 살펴보다가 문득 불편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우리의 반박 자체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대부분 경제적 이익에 기반한 효율성을 근거하게 됐다는 것을 느꼈거든요.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아 이렇게 하는게 좀 더 보기 좋고 편할 것 같은데?’

라는 흐름에서 정상적인 반박은 사실,

 ‘아니야, 내가 생각하기에는 다른 식으로 하는 게 더 좋고 편할 것 같아.’

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경제적 효율성을 끌어들여서 이의를 말하게 되죠. 그리고 더 심각한 것은 어쩌면 논점에 어긋났다고도 볼 수 있는 이의에 대한 반박도 당연하다는 듯이 

 ‘별로 돈이 많이 들 것 같진 않은데?’

경제적 효율성을 받아들이고 그를 반박하는 형태를 취한다는 것입니다. 사소한 예를 들었지만, 저는 곧 이것이 사회전반 모든 문제에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근래에 문제가 되고 있는 ‘세종시’문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모든 논의가 경제적 이익에 기반한 효율성에 쏠려있죠. 그것이 아름다운지, 사람들에게 편한지, 그런 문제는 논의의 틈에서 약간의 비웃음만 살 뿐이죠. 하지만 그게 정상적인 것일까요?
그래서 저는 이런 묻혀져 버린 가치들을 복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거창하게 말하자면,
【문화, 정치, 예술이여. 커밍아웃하라】
입니다. 무언가를 논의할 때, ‘아 그건 좀 아름답지 않을 것 같은데?’ 같은 말들이 비웃음을 받지 않고.

 ‘음...그럴 수도 있겠군. 그게 문제일 수도 있겠는데?’

라는 말을 받는 기반이 갖추어져야 비로소 우리는 환상적인 환상의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싸울 무기를 갖추는 일로 비유할 수도 있겠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들어가선 안된다."라고도 말하고 싶고요. 호랑이를 하핫. 잡을 때, 호랑이는 이빨이 별로 크지도 않고, 발톱도 별로야 라고 말하거나, 우리 칼이 더 날카로워. 이러는 것보다 말이죠~ 그 날 저녁에 즐겁게 춤을 추면서, 호랑이는 춤도 못 춰, 노래도 못 불러. 짜식~ 별 것도 아니야. 이러는 느낌으로 나가야 한달까요? 하하. 그리고 그것을 모두가 믿는다면 그것은 진실이 되는거죠.

그냥 낙서입니다. 끄적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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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마을을 지켜가는 것은 우리 모두의 몫입니다. 올바른 글을 사용합시다. 2010-01-26
08:23:52 

 

김예찬 
  그렇다면 일단 "왜" 모든 것의 가치판단 체계를 오로지 경제적 이익에 근거한 효율성으로 바꾸어 놓는 신자유주의 혁명이 일어났는지 탐색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또 다시 제기되어야할 문제는, 그렇다면 "모든 것의 가치판단 체계를 오로지 경제적 이익에 근거한 효율성으로 바꾸어 놓는 것"이 과연 신자유주의 고유의 것인지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볼 필요가 있을테구요. 혹시 이러한 작업은 신자유주의보다, 그 이전에 19세기 자유주의적 시장이 형성되면서 이미 이뤄졌던 것은 아닐까요? 

신자유주의가 맹위를 떨치기 수십년 이전인 1940년대, 극단적 자유주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신자유주의가 이론적으로 기초되고 있을 때 그 반대편에 서서 출판되었던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은 이미 "인간과 자연환경의 운명이 시장 메커니즘에 좌우되어 가고 있다"라고 썼죠. 그 훨씬 이전인 1848년, 청년 막수가 발표했던 <선언>에서도 이미 노동, 예술, 사상, 정치, 문화 등 인간의 모든 것이 돈으로 환원되는 시대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이 등장하구요.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과연 '신자유주의'가 우리의 적인가? 라는 당연한 질문에 대해서 한번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자유주의'를 비판할 때, 신자유주의가 아닌 다른 대안들 - 이를테면 케인즈, 폴라니, 장하준, 사민주의 등을 쉽게 꺼내들며 - 을 이야기할 때 마음대로 꺼내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지 않느냐는 것이죠. 신자유주의가 창궐하기 이전부터 이미 '모든 것의 가치판단 체계를 오로지 경제적 이익에 근거한 효율성으로 바꾸어 놓는' 과정이 일어났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면, 그렇다면 정말 우리의 적이 되어야 할 것은 '신자유주의'가 아니라 사실 그 상위, 혹은 근원에 놓여있는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되어야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우리가 정말로 믿고 싶어하는 정치체제로서의 자유민주주의 역시 사실은 자본주의와 공모관계에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아야하지 않을까요? 이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지 못할 때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은 계속 어떤 한계 속에서 맴돌게 될 것 같습니다.. 2009-11-26
12:22:53
 

 

민해기 
  전에도 한번 언급되었던 것처럼, 어쩌면 신자유주의란 어떤 거부하거나 할 수 있는 흐름이 아니라, 자유주의적 시장경제 흐름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하게 되는 거부할 수 없는 형태일지도 모릅니다. 예찬씨의 글에서는 그런 느낌이 많이 묻어나요. 확실히 저는, 
"모든 것의 가치판단 체계를 오로지 경제적 이익에 근거한 효율성으로 바꾸어 놓는 것" 
이 신자유주의의 고유한 것인지는 확신하기가 힘이 듭니다. 하지만, 완성되어서 맹위를 떨치고 있다는데 대해서는 이견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은 예찬씨의 

그렇다면 정말 우리의 적이 되어야 할 것은 '신자유주의'가 아니라 사실 그 상위, 혹은 근원에 놓여있는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되어야하지 않을까요? 

란 말과도 닿아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은 신자유주의적 조류를 몰아내자! 라고 막연히 주장하는 것은 <원래의 정상적인 자본주의>가 있었던 것 마냥. 환상을 품는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뭐 그랬던 적이 있나요. 다만 저는 어떤 새로운 체제나 사상으로 바라보지 않더라도, 
【문화, 정치, 예술이여. 커밍아웃하라】 
라는 입장에서 진행되는 활동들이 그 자체의 현상에서 무언가를 끌어내올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저는 패러다임 이론을 완벽히 따르고 있는지도 모르죠. 
  패러다임의 흔들림→패러다임의 붕괴→혼란→→신 패더라임의 등장→신 패러다임의 생성 
이라는 구조 속에서 저는 일단 '흔들림'이라는 포지션에서 붕괴로 가는 과정을 먼저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009-11-26
13:27:00
 

 

민해기 
  그리고 첫번째 왜 라고 물으신거에 답변하자면. 
자기이익의 추구라는 보수의 가치관과 그리고 자연적 질서를 사회적 질서라고 믿기 때문에, 하나의 단일한 규율을 성립시키길 원하는 움직임에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닐까...하고 레이코프씨의 말을 약간 응용해봅니다. 2009-11-26
13:29:42
 

 

오학준 
  '자본주의'라는 게 다양한 변종들이 있지 않을까요. 신자유주의도 자본주의 내의 변형으로 이해한다면, 자본주의 자체의 모순점을 그대로 가진 동시에, 기존의 접근법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하는 배치를 가진다는 점을 인정할 수 있지 않을까요. 2009-11-26
16:13:56
 

 

병장 박원익 
  음... 저는 "패러다임의 흔들림→패러다임의 붕괴→혼란→→신 패더라임의 등장→신 패러다임의 생성"이라는 일반적인 순환 구조와 다른 역사적 과정을 상기해야 옳다고 생각합니다. 아직은 애매한 말로 밖에 표현할 수 없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