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 괴수론에 대한 일발의 카운터블로  
병장 양동훈   2009-11-13 10:41:14, 조회: 21, 추천:0 

아마, 난, 종보씨처럼 착해질 순 없는 거겠죠?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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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깜짝 놀랐다는 말이 아마 맞을 것 같다. 진호씨의 글에 있는 ‘-훈’이라는 사람은 백번 생각해봐도 나를 지칭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는 나에게 당혹스러움을 가져다주기도 했지만, 물론 그것으로 끝나지는 않았다. 아마도 이번에 있었던 정치성 논란 때문에 내 이름이 얼떨결에 저기 끼게 된 것 같은데(사실 예찬씨나 원익씨나 명교씨와 묶였다는 사실은 나에게는 일종의 영광이기도 하긴 하지만), 그냥 오직 ‘그것 때문’이라고 쉽게 자기합리화를 해 버릴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도 왜 내 이름이 저기 끼어있는지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호씨는 reply를 달면서, 자신이 자의적으로 상정한 괴수와 서민의 구분을 ‘글을 잘 쓰는 사람’과 ‘글을 (그만큼) 잘 쓰지 못하는 사람’으로 분류했다. 이는 무척이나 당혹스러울 만한 일인데, 왜 그런가 하면 애초부터 ‘글을 잘 쓴다’라는 것의 정의가 어떻게 되어있는 지 판단할 수가 없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진호씨의 말대로라면, ‘어려운 글 = 잘 쓴 글’이 되어버린다. 가슴아픈 이야기이지만, 누가 봐도 이 정의는 뿌리부터 틀린 것이 아닌가?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진호씨에게 ‘한두 개의 글만 보고 판단하지 말고, 그 사람이 썼던 글들을 최소한 다섯 개라도 읽어보고 말씀하시면 좋겠습니다.’라는 이야기를 날리고 싶다. 기실 어려운 글이란, 내용이 어려운 글이 아니고 배배 꼰 글이기 때문이다.

  ‘나는 왜 글을 쓰는가.’라는 이야기는 분명 많은 논란이 있어야 할 부분이다. 책마을에 글을 올리는 사람들이 왜 글을 쓰는가에 대해서 생각해보자면 대략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는 ‘스스로의 공부’가 될 것이다. 글을 쓰는 과정을 통해 자신이 보고, 읽고, 머릿속으로 생각한 것들을 정리하는 것은 분명 엄청난 도움이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소통에의 욕망’이다. 내가 이러이러한 글들을 썼을 때 상대방의 사유를 통해 조금 더 다양한 판단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 그리고 내가 어떠한 난제에 부딪혔을 때 그 실마리를 상대방의 사유를 통해 잡아낼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이 욕망의 저변에 깔려있게 되는 것이다. 세 번째는, ‘인정에의 욕구’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어떠한 글을 썼을 때 다른 사람들이 ‘글 잘 쓰시네요.’라고 말해주는 것은 분명 글을 쓰는 사람의 기운을 북돋워주는 어떠한 일종의 기재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 이 쯤에서, 원익씨의 글을 조금 끌고 와 봐야겠다. 덤으로, 내 글도 같이 끌고 오겠다.

  사실을 글을 쓴다는 것에 수반되는 '쾌감'이 무엇인지를 알면 거기에서 헤어나오기가 힘듭니다. 책마을 중독현상이라는 것도 이와 비슷한 것일텐데요. 그런데 이 쾌감의 정체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부유하는 사고의 편린들을 일단 글로 적어두고 형식화하다보면 그것이 이전부터 그랬다는 듯, 그럴듯한 정합성을 띠게 되고, 마침내 그것이 타인으로부터 어떤 '반응'이 오기 때문에 그것이 궁극적으로 '나의 것'으로 귀속되는 환각에 가끕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텍스트 이면에 나의 사고라는 건 별 게 아니며 심지어 그러한 사고과정 자체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다는 게 맞지요. 대신 텍스트가 저 대신 사고를 하며, 말을 한달까요. 내가 처음에 무슨 문제의식으로 글을 쓰고 무슨 말을 하든 간에, 그것이 결국 어쨌든 타인들이 알아서 찰떡같이 알아들어주며, 자동적으로 서로 이심전심의 상태가 되는 그런 즐거움으로 넘어가고 맙니다. 저는 이런 가공할만한 도착적 과정에 매혹되는 건 정말 쉬운 일이며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는 단연, '글'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면 저항해야할 유혹이지요.
  - 병장 박원익,「글쟁이의 자기기만」中 

‘내 말도 옳고, 네 말도 옳다.’라는 것은, 스스로 옳다라고 인식하는 것에서 옳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나의 말이 남의 인식에서는 옳지 않을 수 있으며, 심지어 나의 말이 나의 인식에서도 옳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자기기만’ 이겠지요. 가슴 아픈 일이지만, 진정한 나 자신과 글을 쓰는 나 자신은 때때로 같은 사람이 아니기도 합니다. 그런 텍스트야말로 진정으로 지양되어야 하는 텍스트일 겁니다. 하지만, 그러한 텍스트들을 써갈길 수밖에 없는 것은, 원익씨의 말 대로 진정 두려운 것이리라 보여집니다.

  원익씨의 이 글이 진정 큰 울림을 가지는 건, ‘언어의 마술사라는 것도, 결국 자기기만에 능한 능력자들이라는 뜻이지요.’라는 부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극히 자신의 치열한 고찰에 한정된 ‘흥미를 끌지 못할 만한’ 글은, 사람들의 반향을 이끌어내기가 무척이나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공론장에서 글을 쓰는 글쟁이들은 ‘상대방의 반응’을 원하기에, 상대방이 반응할 만한 방향으로 글을 적어 내려가게 됩니다. 이것은, 결국은 자신이 말하고자 했던 바를 퇴색시키고, 흐리게 하며, 심지어는 완전히 뒤집어버리기도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으로 글을 쓰는 모두가 경계해야 될 만한 일입니다만, 저 역시도 진정으로 이것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 가슴이 쓰립니다.

  내가 보기에 상대의 말이 분명히 ‘그르다’라고 생각된다면, 그러한 부분에 대한 깊이 있는 생각을 통해 그 말에 다가가고, 다가가며 느낀 점을 말할 권리가 우리에게는 존재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저 권리이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 모두는 그러한 부분에 ‘책임감’을 느껴야하지 않을까요?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공론장이 있는 이유이며, 우리가 이 공론장에 존재하는 이유여야만 할 것입니다.

   - 병장 양동훈,「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가」中 

  자. 이것이 바로 그 ‘어렵다’라는 원익씨의 글이다. 왜 원익씨의 글이 어렵다고 느끼는가? 에 대한 답을 나는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은 ‘부유하는 사고의 편린’, ‘형식화’, ‘정합성’, ‘귀속되는 환각’, ‘도착적 과정에 매혹되는’ 과 같은 일상 생활에서 흔히 쓰지 않는 단어들이 많이 등장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사실 그 것은 이유가 되지 않는다. 저 단어들은 결국에는 ‘해석되어질 수 있는’ 단어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익숙하지 않은 단어가 거치적거릴 수도 있고,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진지하게 생각해 보자. 거치적거린다는 이유만으로 외면한 적이 있지 않은가? 이 질문에 ‘나는 없다!’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존재할 것인가?

  하필이면 이 글의 이 부분을 끌어오게 된 이유는, 진호씨의 글에 있었던 ‘무플에의 두려움’이라는 언급 때문이다(원익씨의 글이 생각만큼 어렵지 않다는 것을 부연설명 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누구나 이러한 공개적인 장소에 어떠한 글을 쓸 때에는, 되도록 많은 반응과 피드백을 원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찌보면 자연스럽게 자극적인 내용의 글쓰기로 흘러가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진호씨와 내가 하나로 묶여있는 일종의 ‘공통분모’가 아닐까 한다. 그러나, 이는 두려워해야 할 만한 일이 아닌 극복해야 할 일이다. 피드백은 소중하고, 반응은 글쓴이의 자세에 큰 영향을 미치지만 그것을 두려워해서 ‘쓰지 못한다.’라고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기기만일 것이기 때문이다. 자극적이지 않더라도, 깊이가 부족하더라도, 재미가 덜하더라도, 글쟁이들 사이의 진심은 분명 통한다. 때로는, 내가 도저히 덧붙일 말이 없어서 피드백을 제공하지 못하는 글도 있다. 하지만 그런 글은, 이미 읽었다는 것만으로 우리들의 진심이 공유된 것이다.

  ‘겁이 나서 글을 쓰지 못한다.’라는 것이야말로, ‘인기영합적인 글을 쓰는 것’보다 몇 배는 기만적이다. 조금 과격하게 표현하자면, 그것은 일종의 ‘글에 대한 히키코모리’와 같다.

  어떠한 억압적인 틀은, 깨어지기 위해 존재한다. 그리고 그 자유는, 깨어부수려고 노력하는 자에게만 허락되는 자유이다. 좀 무시당하면 어떻고, 좀 반응이 없으면 어떻고, 좀 얻어맞으면 어떤가. 그것이야말로 ‘이 치열한 사유의 장’속으로 뛰어드는 어떠한 현란한 몸짓이 아니겠는가?

  그 다음은, ‘괴수’들의 글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위에서 원익씨의 글이 ‘어렵지 않다.’라는 것을 간단하게 이야기했는데, 그 것에 동의하지 못하는 사람이 분명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원익씨의 글은 분명 어렵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개소리냐면, 심지어 자신이 쓴 글도 때때로 어렵다고 느껴지는 판에, 남이 쓴 글이 어렵지 않다면 그것이야말로 비정상이라는 것이다. 어떤 글이건 간에, 독해에는 어떠한 일련-의 난점이 있게 마련이다. 어떠한 개념에 대한 구사의 방식과 정의가 사람마다 다르고, 어투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더 간단하게 말하자면, 진호씨가 ‘괴수’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진호씨와 똑같은 만큼의 ‘독해의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이다. 이는, 어떠한 ‘부족함’의 문제가 아니라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리고 그 자연스러운 ‘어려움’을 뚫고 나오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수적이다. 어떠한 글이라도, 집중해서 읽으면 읽지 못할 글은 없다. 적어도 책마을 사람들의 글이라면,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나도 어떻게든 낑낑대다보면 읽어낼 수 있는 글이기 때문이다. 이는, 독자의 ‘정성과 노력’의 문제일 뿐이다.

  물론, 내가 이곳에서 어떠한 일련의 ‘정성’을 강요할 수는 없다. 나처럼 하루에 8시간, 당근 때는 24시간을 컴퓨터 앞에 눌러앉아서 키보드를 두들길 수 있는 사람이 있는 반면, 광부의 숲속에서 글 하나하나 읽는 것도 살 떨리며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가입은 했지만 컴퓨터를 만질 기회가 거의 없어 사실상 열람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이러한 모두에게 ‘참여’를 강요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나만큼은 아니더라도, 하루에 두세 시간 씩은 글을 쓸 수 있는 여건 하에 있는 사람이 분명 존재하지 않을까? 그런데, 그들은 모두 어디에 있을까?

  ‘괴수들의 글이 너무 어려워요’라고 말하는 사람들 중, 진정으로 그 글을 독해하기 위해 노력해 본 사람이 있는가? 그저 휠을 드르륵 드르륵 돌리면서 스윽스윽 눈으로 훑으면 이해되는 글만을 바란 것은 아닌가? 그러한 글을 바란다면, [내글내생각]이라는 말머리조차 아깝지 않겠는가? 광부들의 눈을 속여 가며 몰래 프린트해서, 개인정비 시간에 밑줄을 슥슥 그어가며 세 번이고 다섯 번이고 연거푸 읽는 정도의 노력을 해 본 적이 과연 있는가? 그 정도 노력도 하지 않았다면, 글이 어렵다고 칭얼댈 자격도 없는 것이 아닌가?

  나는 소망한다. 나는 괴수가 아니라 그냥 파이터일 뿐이다. 그리고 나는 언제나, 기다리고 있다. 물론 이 곳에서 기다리는 것은 며칠 남지 않았지만, 언제 어디서건 나는 파이터의 자세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언제 어느 곳에서라도, 내가 끼어들 만한 글과 말과 자리에는 끼어들 것이고, 언제 어디서라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왜, 나처럼 멍청한 사람도 할 수 있는 일을 ‘지레 겁먹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것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하기 싫다면 어쩔 수 없지만, ‘할 수 없어요.’라니. 일단 해 보고, 그러고도 안 되면 그 때 다시 이야기하자.

  말은 거칠지만, 나는 가슴은 따뜻한 사람이다. 또 이 글을 보고 지레 겁먹는 순수한 주민분들은 없기를 바란다. 제발. 일단, 부딪쳐 보고 시작하자. 그리고, ‘자신의 그릇이 이만큼이나 넓다.’라는 것을 우리의 앞에 찬연하게 펼쳐 보이길 바란다. 책마을에서 ‘괴수’라 불리는 자들은, 레이드몬스터가 아니다. 그저, 옆에 살고 있는 친숙한 이웃일 뿐이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11-13
13:15:11 



일병 장민섭 
  낄낄. 이러니 괴수라고 하지요. 안그런가요? 뭐 정 그렇다면 동훈씨 바람대로 '괴수급 파이터' 쯤 하면 되려나요. 
나에게 있어서 괴수란 어려운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냥 자기 이야기를 잘 풀어내는 사람이랄까요. 물론, 뱀발입니다. 

하루에 두세 시간 씩은 글을 쓸 수 있는 여건 하에 있는 사람이 분명 존재하지 않을까? 그런데, 그들은 모두 어디에 있을까? 

이 말이 참 꽂히네요. 여러가지로. 다들 한목소리로 '반성해!!'라고 외치는 것 같아 심히 뜨끔뜨끔합니다. 

에라이. 가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