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티엔 발리바르는 누구인가?

- 프랑스 정치철학자 에티엔 발리바르는 1965년, 스물네살의 나이에(지금 제 나이 때군요.. 허허.) 그의 스승 루이 알튀세르와 함께 <[자본]을 읽자>라는 책을 써서 프랑스의 대표적인 막수주의자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1980년대 후반 부터 스피노자를 수용하기 시작하여, 기존 막수주의자들이 제대로 다루지 않았던 국가와 시민권 문제 등에 대하여 독창적인 이론을 발표하기 시작했습니다. 발리바르는 굉장히 광범위한 분야에 대하여 지적 작업을 전개해 나갔는데, 특히 '시민권'을 기반으로 한 그의 논의들이 최근 한국에 활발히 소개되고 있습니다. 

발리바르, '철학의 새로운 실천'

- 발리바르의 스승이였던 알튀세르가 처음 제기한 '철학의 새로운 실천'이라는 문제는 발리바르의 정치철학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살펴 보아야할 부분입니다. 알튀세르는 극작가 브레히트와 막수를 다룬 글에서 '철학의 새로운 실천'을 주장했습니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브레히트는 연극의 전통적인 방식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그 안에 정치적인 변화를 도입했고, 이를 '연극의 새로운 실천'이라고 불렀죠. '연극의 새로운 실천'은 아예 새로운 '실천의 연극'을 창시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기존의 예술을 새로운 정치적 무기로 가다듬는 것이죠. 알튀세르는 이를 높게 평가하면서, 이 '연극'의 자리에 '철학'을 넣어, '철학의 새로운 실천'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발리바르는 정치와 철학의 관계를 이야기 하면서, '정세conjoncture'의 개념을 가져옵니다. 정세란, 정치 전술을 적용해야 하는 주어진 순간의 구체적인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이죠. 정치적인 개념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는데요, 그렇다면 과연 철학을 이야기하는데 '정세'가 무슨 의미를 가지는가, 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철학은 정세와 무관하게, 어떤 '초월적 진리'를 찾는 작업이 아닌가요? 초월적 진리는 역사적 상황이나 상대주의적 관점과는 무관한 것이 아닌가요? 

그러나 발리바르가 정세라는 관점을 도입하는 것은, 전통적인 철학, 진리관에서 진리가 역사 속에서 실존하는 방식을 제대로 사고하지 못한다는 문제 의식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특히 발리바르는 특정한 시간관('시간의 역사적 수렴')에 기초한 근대 역사철학을 비판하기 위해 정세를 끌어옵니다. 근대 역사 철학은 역사를 진화주의적이고 목적론적인 것으로 해석합니다. 역사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발전하는 것이다, 역사는 특정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라는 관념이 바로 그 것이죠. 그리고 이러한 역사관은 전통 철학의 진리관과 상응하는 것입니다. 전통적인 철학에서는, 어떤 '절대적 진리'를 가정해 놓고 그동안의 철학사를 철학적 오류를 점차 제거해 나가는 '전진적 통합 과정'으로 여깁니다. 이러한 진리관을 따르자면, 우리는  기존의 다양한 철학적 논의들을 종합하여 어떤 방향성으로 나타낼 수 있겠지요.

발리바르는 이러한 진리관에 반대하여, 역사는 변덕스러운 운명의 여신(Fortuna)에 의해 지배된다는 이미지를 제시한 마키아벨리를 참조점으로 삼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정세'를 중요시했던 철학자인 마키아벨리는, 역사가 특정한 방향으로 수렴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분기점(정세)에서 '분기'하는 것이라는 통찰을 내세웠습니다. RPG 게임의 예를 들자면, 역사는 패키지 게임이 그렇듯 어떤 '엔딩'을 향해 게임이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자유도가 무한한 MMORPG처럼 예상할 수 없는 다양한 플레이가 가능한 엔딩 없는 게임인 것이지요. '정세'라는 것은 순간 순간 다양한 세력 간의 대결과 모순, 투쟁에 의하여 규정되기 때문에, 그 결과를 선험적으로 예정할 수도 없으며, 방향성을 설정할 수도 없습니다. 기존의 역사관, 진리관에 따르면 이와 같은 정세적 변화를 전혀 포착할 수 없겠지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기존의 철학을 정세에 맞추어 적합하게 바꾸는, '구체적 상황들에 대한 구체적 분석', '개개의 상대적 진리 속에 현존하는 절대적 진리의 계기'를 중요시한 것이 바로 레밍주의적 진리관입니다. 여기서 진리라는 것은 정세의 효과입니다. 이처럼 진리관이 변화하면서, 철학관 역시 그렇게 변화하게 되구요. 이제 철학적 사고의 중심에 놓이게 되는 것은, 기존의 정세와 단절하여, 전혀 새로운 사고와 행동을 만들 수 있는 '사건'(분기점)과, 그러한 사건을 역사 속에서 산출해야 할 '진리 효과'입니다. 이때 '사건'이란 당대의 담론들을 특정한 '합의'에 복속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것은 하나의 '쟁점'으로, 기존 담론들과 갈등하고 분열하는 이단적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건은 이제까지의 갈등과 투쟁을 종식 시키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새로운 수준의 갈등과 투쟁을 제시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정세를 사고하고, 그 것에 개입하는 철학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발리바르에 따르면 그 것은, 기존의 철학적 범주와 체계를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철학과 담론들을 계속해서 해체시키면서, '완성된 철학'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결론을 내기를 지연시키서 끊임 없이 미완성의 과정을 달려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연'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정세에 대해 추측conjoncture을 시도합니다. 이때 추측이란 기존의 개념들을 새로운 형세에 맞게 조정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지요. 발리바르는 이러한 관점에서 시민권, 공동체, 갈등, 권리, 주권, 대표/대의, 주체, 경계/국경 등 기존의 '오래된 개념'들을 지금의 정세 속에서 매번 새롭고 독특한 것으로 재발견해 나갑니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철학은 '정치적 개입'의 관점으로 새롭게 이용됩니다. 철학이 모든 사태가 종결된 황혼녘에 날개를 펴는 '미네르바의 올빼미'였다면, 발리바르가 요청하는 철학은 사태가 한창 진행 중인 '정오의 그림자' 속에서 내려지는 '결단'과 '선택'의 그 것이 되어야 하는 것이죠. 

한마디로 발리바르의 철학은 '지연'과 '결단'의 철학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 두 단어는 얼핏 모순되어 보이지요. 특정한 정세에서 긴급히 개입하기 위하여 빠른 선택(결단)이 필요하지만, 또 이런 선택에 의해 버려진 가능성들이 새롭게 나타나는 정세에서 다시 필요할 수도 있기 때문에 완결된 철학을 내놓을 수는 없습니다. (지연) 철학이 불변의 진리를 보유하는 완전한 교리나 체계가 아닌, D임없는 정정의 과정이라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발리바르와 '근대 정치의 위기'

-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발리바르에게 철학은 본질적으로 정치적이고, 철학은 정세를 사고하고 정세에 개입하려는 지적 노력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발리바르가 강조하는 '정세'라는 것은 현재 어떻게 나타나고 있을까요?

그 것이 바로 '근대 정치의 위기'입니다. 이 것은 책마을에서도 이야기 되었던, 제도와 이데올로기, 갈등과 운동 등의 이율배반이 포함되는 것이죠. 발리바르는 '막수주의의 위기'를 계기로 이를 본격적으로 사고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에게 있어서 '막수주의의 위기'는 바로 '근대 정치의 위기'로 이어지는 것이었죠. 막수주의가 대표했던, 계급X쟁이나 사회적 적대, 착취와 압제에 반대하는 해방과 변혁의 이상, 그리고 집단적인 실천과 대중정치 등의 문제들이 사실 근대 정치의 근간 그 자체였기 때문이죠.

실제로 현실사X주의의 붕괴 이후 막수주의 역시 그 힘을 잃어가던 1990년대 이후, '이데올로기의 종언'과 '역사의 종언'이 이야기 되면서 많은 보수주의자들은 이 것이 '국가 정치의 유토피아'로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투쟁과 갈등이 억압되면서 국가의 통일성과 권위가 강화될 것이라는 진단이었죠. 그러나 오히려 막수주의가 위기에 빠지면서 국가 역시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고삐 풀린 신자유주의의 등장으로 인하여 사회 자체가 안정성을 잃어 가기 시작했기 때문이죠. 그리고 유럽 대중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불안 속에서 인종주의와 네오파시즘이라는 과거의 망령이 부활하기 시작했죠. 이처럼 운동의 위기와 국가의 위기, 그리고 대중들의 동요가 결합되는 정세가 발리바르가 문제시하고 있는 작금의 정세입니다.

근대 정치에서 서로 대립 되는 두 가지 거대 이데올로기였던 민족주의와 유토피아적 세계시민주의cosmopolitanism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과정에서 양 쪽 모두 위기를 겪게 됩니다. 세계화와 민족주의의 위기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쉽게 알아챌 수 있지만, 세계시민주의와는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는 의문스러울 수 있습니다. 발리바르는 세계시민주의를 근대의 모든 진보 사상의 지평이라 평가합니다. 아담 스미스, 칸트, 막수 등 서로 다른 성향의 사상가들 모두 궁극적으로 세계시민주의를 목표로 하고 있었죠. 그들은 각자 생각하는 바는 달랐지만 고유한 문명들끼리의 교류가 세계적 수준으로 확대되어, 하나의 단일한 공간 안에 인류가 통합된다면 민족적 적대가 해소되고 불평등과 압제가 제거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현실로 나타난 세계화는 이러한 유토피아적 세계시민주의의 전망을 돌이킬 수 없이 파괴해버렸죠. 국민 국가 사이의 불평등, 국내적 불평등과 양극화의 확대에서 자연스럽게 등장할 수 밖에 없는 갈등과 배제를 관리하거나, 이를 회피하려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극단적인 폭력들과, 배제된 지역에서 발생하는 생태적 재앙과 질병들, 그리고 배제를 위한 '강제적 이주'와 배제에서 벗어나려는 '엑소더스'를 막기 위한 '초超국경'의 탄생, 지역적 분할에 따라 자연스레 우등인간과 열등인간의 분할이 생겨나고 이들끼리 상호증오하는 국민적, 관국민적 인종주의의 등장과 이를 제도화하는 국가 등의 문제가 바로 이러한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태의 지속은 이 상황을 타개할 집단적인 정치적 주체가 생성되는 것을 억압하고 있지요. 이처럼, 세계화의 도래와 함게 초래된 혼란스러운 정세가, 발리바르가 그 원인과 대안을 사고하려는 정세라고 하겠습니다.


'시민권'을 다시 생각하기

- 발리바르가 이러한 정세 하에서 대안을 찾아나설 때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삼는 것이 바로 '시민권'입니다. 오랜 기간 '막수주의자'로 활동했던 발리바르가 보통 막수주의자들에게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로 폄하되는 '시민권'을 중시하는 것은 상당히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시민권 개념은 필연적으로 '제도'의 문제를 수반하는 것인데, 이 것은 '국가의 최종적 소멸'을 명제로 하는 막수주의의 반 제도적 경향, 혹은 이론적 아나키즘과 화해할 수 없는 것이지요. 따라서 발리바르가 시민권 개념을 적극적으로 들고 나선다는 것은, 기존 막수주의의 아나키즘적 경향에 대한 반성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발리바르는 이와 같은 '반성'의 필요성을 1920년대에서 1940년대 유럽이라는 구체적인 역사적 공간에서 찾습니다. 잘 알고 있다시피 이 시기는 대공황이라는 자본주의의 위기와 1차, 2차 대전이라는 전쟁의 시대이기도 하면서, 사회 ㅎ명의 움직임이 들끓던 시대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의 흐름은 유럽, 특히 독일에서 나치즘이 등장하면서 국가 제도가 상징적으로, 또는 물질적 붕괴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만약 국가 제도가 아나키스트들의 주장처럼 경제적 하부 구조에 대한 인위적, 기생적 구조에 불과한 것이라면, 하부 구조가 균열을 일으킨 이 시기에 국가의 붕괴는 프롤레타리아들의 힘에 의하여 해방되었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태는 정확히 그 정반대로 나타났죠. 법적 권위와 억압적 장치로서 국가 제도의 붕괴는 히틀러, 혹은 무솔리니와 같은 카리스마적 인물로 대표되는, 개인들의 대중적 자기 승인 욕구를 낳았습니다. 계급화 되지 않고 정치적 '대중'이 되어버린 각 개인들은 결국 파시즘을 소환하게 되었죠. 발리바르는 막수주의자들이 이 점을 제대로 사고하지 못했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는 현 정세, 곧 자본주의 및 근대 정치 제도와 이데올로기가 위기에 빠지면서 거대한 착취와 배제, 무권리 상태가 일반화 되는 가운데, 다시 한번 대중들이 인종주의나 네오파시즘에 끌리는 상황이 도래하는 정세에 대해, 오늘 날 막수주의 역시 대부분 무능한 상태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에서 입증됩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 제대로 사고하지 못했던 것은 비단 막수주의 뿐만은 아니었습니다. 자유주의적 인권 이념, 특히 자연권 이념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발리바르는 바로 이 지점에서 한나 아렌트의 '인권' 비판에 주목합니다. 아렌트는 발리바르와 마찬가지로 1920~1940년대의 유럽에서 파시즘이 출현하던 위기의 시대에 자유주의, 나아가 근대 정치 이데올로기 전반이 근본적으로 무력했던 이유를 반성하면서, 시민권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그녀는 이 시기에 발생했던 거대한 '무국적 난민'들의 비참한 상태를 관찰하면서, 근대 국민 국가의 이데올로기적 기초인 인권 이념이 사실 허구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근대적 인권 이념에서, 시민권이라는 것은 그에 앞서 존재하는 자연적이고 보편적인 인권을 제도화 한 것이며, 인권은 시민의 권리와 정치적 제도에 대해 보편적인 정당성을 제공해 줍니다. 따라서 인권은 시민권 보다 광범위하고, 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인권은 국가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 역시 권리를 보장 받을 수 있게 해주는 기초가 될 뿐 아니라, 그런 사람들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점점 더 중요해집니다. 하지만 아렌트가 볼 때 사태는 전혀 그렇지 않았죠. 인권이 시민권의 상위 개념이 되어야 할 터인데, 오히려 시민권이 제거되거나 역사적으로 파괴될 때면 인권 역시 파괴되었습니다. 사실, 인권이 시민권을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권이 인권을 기초하기 때문입니다. 국가나 제도가 보장하지 않는 자연적 권리란 실존하지 않는 다는 것, 이 것이 아렌트의 주장이였고 발리바르는 이를 '아렌트의 정리'라고 부릅니다. 발리바르는 아렌트의 이 같은 지적이 단지 경험적인 것이 아니며, 실은 권리라는 통념 자체의 내생적 성격을 간파한 것이라 말합니다. 권리란 일차적으로 개인적 주체들이 개개적으로 가지는 '성질'이 아니라, 오히려 개인들이 공동체를 이룰 때 서로에게 부여해주는 성질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발리바르 식으로 말하자면 '관개체적transindividual'인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에게 자연적으로 '인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개개인이 어떤 공동체를 이룰 때 등장하는 '시민권'이 자신의 뿌리를 만들기 위하여 '인권'이라는 개념을 가상으로 설정했다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봉기와 제도의 변증법

- 그런데 이렇게 '시민권'을 강조하는 것에 대해서는 곧바로 반론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인권의 자연성에 대한 비판은 사실 프랑스 혁명을 비판했던 영국 보수주의자 에드먼드 버크 시절 부터 제기되었던 전통적인 것이죠. 그리고 버크의 비판은 '제도주의' 진영, 한마디로 정치적 보수파들이 '국가'를 강조하면서 계속해서 써먹었던 레퍼토리입니다. 따라서 '시민권'을 강조하는 발리바르의 입장은 막수주의적 입장을 버리고 투항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의심'은, '아렌트의 정리'가 제도가 인간의 권리들, 따라서 인간들 자체를 어떻게 파괴하는지에 대해 치밀히 분석한 <전체주의의 기원>이라는 책에서 펼쳐졌다는 사실을 충분히 감안하지 않은 것입니다. 아렌트는 제도 외부의 권리(자연적 인권)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지만, 바로 그 순간에 이 제도(국가)가 그 스스로 보장했던 권리들을 스스로 파괴하는 이율배반에 주목했고, 이 것에 어떻게 맞서야 할 것인가에 사고의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무조건적으로 제도의 중요성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죠.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과연 그렇다면 시민권이라는 개념이 어떤 조건에서 '정당'할 수 있는가, 라는 것입니다. 제도는 어쩔 수 없이 타락할 수 밖에 없는 경향을 내포하고 있다면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제도 외부의 초월적 정당성(자연적 인권)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유일한 해법은 제도가 보장하는 권리들을 확장하고, 제도의 타락에 맞서 그 것을 개조하거나, 혹은 다시 만드는 차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발리바르는 이와 같은 차원을 '봉기'라고 부르고, 이러한 원리를 집약하는 것이 바로 '평등한 자유'의 이념이라고 말합니다. 

'평등한 자유'는 역사 속에서 수없이 되풀이 되었던 이념이지만, 근대에 들어서 발명된 '보편주의적' 시민권 개념에서 가장 전형적인 형태로 나타납니다. '시민'의 개념이 '소수의 남성 자유인'에서 '평등하고 자유로운 인민 대중'으로 확대된 것은 혁명적인 일이 아닐 수 없지요. 원리상 절대적 개방성과 확장성을 가지고 있는 평등 자유의 이념은 권리의 보장에 있어서 제도적으로 어느 정도 한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심지어 이는 평등 자유의 이념을 정당성의 기초로 삼아 설립된 제도들, 오늘 날 민주주의 체제와도 끊임없는 긴장과 갈등을 빚습니다. 제도와 이념 사이의 이러한 갈등이 증폭될 때 마다 계속해서 평등 자유 이념이 소환되는 '봉기'가 일어나는데, 이러한 봉기의 가장 극적이고 가시적인 순간은 물론 'ㅎ명'이지만, 꼭 'ㅎ명'이 아니더라도 다양한 형태로 '봉기'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봉기'들은 '갈등과 투쟁'을 기본 요소로 합니다. 따라서 민주주의적 시민권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는 '봉기에 대한 권리', '갈등과 투쟁의 권리'가 됩니다. 이 것은 프랑스 혁명의 골자였던 [권리 선언]에 '압제에 대한 저항의 권리'로 명문화 되기도 했었죠. 

발리바르는 이와 같은 '봉기의 권리'와 구성/헌정constitution 사이의 긴장, 다시 말해서 '투쟁'과 '제도' 사이의 긴장을 근대 정치의 가장 중요한 동력이자, 모순점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긴장에서 어느 한 쪽을 중심으로 다른 쪽을 억압하는 것은 '시민권 없는 민주주의'와 '민주주의 없는 시민권'이라는 두 가지 불가능성에 이르게 될 뿐이죠. 발리바르는 양자의 긴장을 생산적으로 전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는데, 그는 그러한 사고를 마키아벨리의 정치철학에서 찾고 있습니다. 마키아벨리는 <로마사 논고>에서 혼합 정체/헌정mixed constitution라는 개념을 이야기합니다. "평민과 원로원의 대립이 로마 공화국을 자유롭고 강력하게 만들었다."라고 서술하면서, 이를 평민과 귀족이라는 두 거대한 사회 계급들 사이의 적대가 (폭력적 반란과 억압을 경과한 후) '호민관'이라는 제도적 해법을 통해서 해결되었고, 이 것이 로마 '공화국'의 번성을 가져왔다고 말한 것이죠. '혼합 정체'라는 개념 속에는, 이러한 갈등 요소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발리바르는 이를 '마키아벨리의 정리'라고 부르죠. 국가를 지속시킬 수 있는 정부/헌정 형태인 '혼합 정체'는 호민관 제도를 매개로한 계급 투쟁과 법 사이의 함수 관계를 그 핵심 원리로 합니다. 이는 마키아벨리 뿐 아니라 스피노자나 몽테스키외, 게다가 막수까지 이르는 다양한 정치 사상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바 입니다.


'시민권'의 역사

- 이러한 관점에 입각해서 발리바르는 근대 시민권의 역사를 분석합니다. 이 때 그가 주목하는 가장 중요한 개념은 '사회적 시민권'입니다. 사회적 시민권은 노동의 권리와 '사회적 보호'의 권리를 쟁점으로 하는 것이죠. '사회적 시민권'은 이제까지 존재했던 시민권 개념의 역사를 계승하고, 또 새로운 문제 의식을 제기하는 개념입니다.

일단 사회적 시민권은 빈곤층에 한정한 '지원assistance'이 아닌, 모든 시민과 모든 사회층을 포괄하는 사회적 연대의 '보편성'을 중시하고 있습니다. 이는 '시민'을 수동적인 정책적 대상이 아닌, 보편적 권리를 지닌 주체로 보는 관점이라 할 수 있죠. 두번째로, 세계 대전과 러시아 혁명이라는 정세적 조건 속에서 사회적 시민권은 불안정성에 대한 대비라는 소극적 의미를 넘어, '불평등의 축소'라는 적극적 이상을 추구하는 것으로 기능합니다. '교육의 대중화'(시민적 역량 형성에 대한 보편적 접근)나, 소득에 대한 비례세와 같은 것들이 적용된 것을 그 예라 할 수 있겠죠. 마지막으로, 이러한 권리들이 '국가'로 부터 '하사'된 것이 아니라, 불평등에 맞선 대중들의 투쟁에 힘입어 '획득'된 것이고, 또 계급투쟁의 방향에 따라 권리들이 확대되고 축소되는 역동성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사회적 시민권'은 곧 '투쟁의 권리'와 연결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사회적 시민권이란, 국가나 시장의 자동적 논리에 따라 도출 된 것이 아니라, 갈등과 투쟁의 요소를 통해서, 당대의 역사에서는 'ㅅㅎ주의'의 개입을 통해서 비로소 가능했던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ㅅㅎ주의는 20세기 시민권의 역사에서 '호민관'의 역할을 수행했으며, 이로써 국가의 관료적 작동에서는 찾을 수 없을, 정치적 영역의 자율성을 확보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사회적 시민권이 특정한 한계 안에서만 받아들여졌다는 사실 역시 잊지 않아야합니다. 사회적 시민권이 가장 잘 실천된 북유럽의 경우에도, 그 것이 자본주의적 사회 관계의 재생산을 받아들이고, 역사적으로 형성된 자본-노동의 세력 관계를 고착하는 한에서 사회적 시민권이 기능할 수 있었지요. 그러나 이러한 지적은 기존 막수주의 진영에서 계속해서 나왔던 이야기입니다. 발리바르는 조금 다른 부분에서 사회적 시민권의 한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발리바르는 사회적 시민권이 근대 국민 국가에 고유한 시민권과 국적의 등식 - 즉, '국민'에게만 '권리'를 준다는 - 을 수용했다는 점이 하나의 한계라고 이야기합니다. 발리바르가 20세기의 국가를 단순히 '사회 국가'가 아니라, '국민-사회 국가'라고 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이 같은 한계는 국경을 넘어 시민권을 확대하려는 국제주의적 운동을 억압하고, 국적에 따른 시민권의 차별과 제한을 정당화했으며, 특히 이주자들을 '침략자'나 '적'으로 표상하게 만드는 상상적 원천으로 작용하고 있지요. 그 뿐 아니라 국내적으로 '다수자'와 '소수자'를 제도적으로 분할하고, 차별한다는 한계 역시 중요한 문제입니다. 성년과 미성년, 노동자와 빈민/실업자, 남성과 여성, 엘리트와 대중, 장애인과 비장애인 이라는 다양한 분할과 상대화가 제도적으로, 정책적으로 적용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우리는 이러한 질문을 제기해 볼 수도 있겠지요. 미성년자는 투표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한계는 과연 누가 정한 것인가? 아니, 성년과 미성년을 가르는 기준은 과연 무엇인가? 사회적 시민권은 이처럼 분할 위에서 제도화되었으며, 따라서 시민권의 평등하고 자유로운 권리 향유에서 배제된 채 한 편으로는 단지 '지원의 대상'으로, 혹은 치안적 관리의 대상에 머물게 되는 다양하고 이질적인 주민들이 국민 국가 안에서 실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분할은 단지 제도적인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차별과 배제의 재생산을 낳아 상이한 분할 계급 끼리 서로 공간적으로, 감정적으로 갈등하고 증오하게 되는 결과를 낳고 있죠. 

이와 같은 한계는 사회적 시민권의 물질적 구성/헌정 안에 구조적으로 명시되어 있습니다. 이는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로 대표되는 사회적 시민권에 대한 반동적 움직임을 불러 일으키고, 동시에 대중들을 움직이는 민주적 이념의 보편적 호소력을 소진시키는 근거로 작용하기도 했습니다. 발리바르는 이와 같은 상황에서, 사회적 시민권을 위협하는 외부적 요인과 내적 모순을 분석하고, 사회적 시민권을 지켜낼 뿐 아니라 더욱 더 확장할 수 있는 실마리를 검토하고 있습니다.


* 세계 정치, 그리고 관국민적 시민권

세계화, 신자유주의, 시민권의 위기

사회적 시민권을 제도적으로 보장했던 '국민 - 사회 국가'는 70년대 이후 장기불황이 시작되면서 비판 받게 되고, 신자유주의라는 위기를 맞게 됩니다. 케인즈주의적 타협에 의하여 억눌려 있었던 자본의 이동과 투자의 자유가 회복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 시민권'에 의해 부분적으로 제어되었던 '프롤레타리아화'가 새롭게 진행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새로운 산업예비군이 조직되어, 이들이 노동 시장 안으로 진입됨으로써 노동자들 간의 경쟁을 유발되었고, 이러한 경쟁은 노동자들의 단결과 집단적 힘을 파괴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그 전까지 '사회적 시민권'은 노동자들의 갈등과 '프롤레타리아화'를 제어하는 기제로 작동했습니다. 물론 외국인 노동자 - 해당 국민 국가 안에서 오랫동안 거주하고 노동하며 문화적으로 기여한 이주노동자 - 들은 '국민-사회 국가' 내에서도 시민권을 체계적으로 차별 당했고, 그 것은 내국인 노동자들도 묵인해 왔던 사회적 시민권의 사각 지점이였죠.

그러나 불황 속에서 이주노동자들을 저렴한 노동력의 산업예비군으로 조직하려는 생각을 품은 지배계급은 노동의 이동을 체계적으로 전진시키게 됩니다. 그 뿐 아니라, '노동 수입국'과 '노동 수출국'의 경제적 격차를 완화한다는 명분을 내세운 세계적 합의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죠. 이주노동자들은 산업예비군이라는 '본연의' 역할에 머무르도록, 경제적/정치적/법적으로 열악한 상태에 머물게 됩니다. 그리고 이주노동자들과 내국인 노동자들 사이에서 연대가 이루어지지 않도록 양자의 분할과 차별은 더욱 정교하게 제도화 되었구요. 이러한 상황 하에서, 이주노동자 - 내국인 노동자, 내국인 노동자 사이에서도 정규직 - 비정규직이라는 노동 경쟁과 갈등이 격심해졌고, 이는 전반적으로 노동자들의 '프롤레타리아화'를 가속화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이 것이 수십년간 이루어졌던 '세계화'의 핵심적 내용 중 하나라 할 수 있겠지요.

이처럼 세계화가 심화되고 이주가 증가하면서, 국민-사회 국가의 근본 원리이자 한계인 '시민권=국적'의 등식이 흔들리게 됩니다. 요새 들어 급격히 진행되고 있는 유럽의 이슬람화가 대표적인 예가 되겠지요. 2008년 기준으로 EU 가입국 전체 인구 중 무슬림이 차지하는 비율은 5%를 상회합니다. 그리고 이는 최근 30년간 무슬림 인구가 두 배 이상 급증한 결과이고, 또 앞으로 30년 후에는 그 비율이 20%로 급증할 것으로 예상되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시민권 = 국적'의 위기는 국민으로 동일화된 대중들에게 심각한 정신적 동요가 초래하는 것이죠. 발리바르의 나라인 프랑스의 경우 이미 그 흥미로운 사례가 나타난 바 있는데, 프랑스 혁명기 부터 공화국 프랑스는 세속과 종교의 정교 분리를 그 특징으로 하고, 특히 교육에 있어서 종교적 영향을 축소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여담이지만 알랭 바디우 역시 <사도 바울>의 서문에서 자신의 부모들이 교직에 있었기 때문에 어릴 적부터 종교와는 관련 없는 삶을 살아왔다고 밝히기도 했지요. 그러한 국가적, 국민적 전통에 따라 프랑스는 무슬림 여성의 브루카(이슬람 여성 고유 의상)가 특정 종교색을 드러낸다는 이유로, 혹은 여성 차별적 문화를 상징한다는 이유로 공립 학교에서 브루카 착용을 금지해야한다는 여론이 있었고, 이에 프랑스 내에 그 인구가 적지 않게 증가한 무슬림들이 격렬히 반대함에 따라서 부르카 착용 문제는 국가적 논란으로 번지게 되었죠. 이주 노동자의 증가에 따른 국민적 동일성이 동요하게 된 대표적인 사례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뿐 아니라 금융 자본을 비롯한 자본 이동이 국가적으로 통제되지 못하고, 자본이 유출되고 그 자리를 외자가 매우는 경제적 상황들은 국민들 사이에서 '불안전'의 감정을 일으키게 됩니다. 해외 자본의 SK 인수 시도나, 론스타 사건 등에 대한 국민적 불안을 생각해 볼 수 있겠지요. 지배 계급은 이 같은 정신적 동요를 활용하여 한층 더 반동적인 전략을 실행하고, 이로써 세계화로 인해 불균형해진 세력 관계는 더욱 비대칭적으로 변화하게 됩니다. 이때 핵심이 되는 것은, 이주자들을 '국민 우선' 따위의 제도적 인종주의에 따라 공격함으로써 정주 노동자들이 상대적으로 안정된 지위에 있는 것처럼 안도하게 만드는 한 편, 이주자들에 대한 권위적 억압을 통해 자본 이동과 사회적 시민권의 후퇴 등으로 인해 허약해진 국가의 '주권'을 상상적으로 보충하는 '허구적 권력 정책'을 실행하는 것이지요.

이 과정에서 시민권은 '신분' 개념으로, 즉 국가라는 권위에 의하여 부여되는 것, 또는 모종의 문화적 동질성을 갖는 자들에게 배타적으로 부여되는 것으로 퇴행하게 됩니다. 또한 이주노동자, 이방인이라는 범주는 '적'이라는 범주로 바뀌게 되며, 이들로 대표되는 문명권은 - 특히 유럽적 맥락에서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이슬람' - '적'으로 가정되어 국내외적으로 적대적인 정책이 시행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적대적 정책은 상대 문명권에도 반감을 불러 일으켜, 테러라는 보복으로 돌아오는 악순환으로 이어지게 되지요.

사회적 시민권 및 그를 지탱하던 세력 관계를 재편하기 위해 지배계급이 수행한 핵심 전략이 세계화라면, 또 다른 중요한 전략으로 신자유주의가 있습니다. 신자유주의는 사회적 시민권이, 이른바 '복지병'에서 잘 나타나듯, 국가에 대한 시민들의 의존을 강화시키고 개인들의 자율성과 책임성을 약화시킨다면서 사회적 시민권을 체계적으로 공격하고 해체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유의할 것은, 신자유주의가 경제나 시민 사회에 대한 국가 개입의 축소, 혹은 철수를 주장하는 소극적 전략이 아니라, 국가 개입의 목표와 방식을 근본적으로 변경하는 '국가 개조'의 적극적 전략이라는 점입니다. 많은 경우 신자유주의의 이러한 점이 옹호자나 비판자 양자에게 모두 인식되지 않고 있는데, 신자유주의의 핵심은 '국가의 개입 철수를 통한 자유화'가 아니라 '국가의 개입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신자유주의는 실리주의적 계산에 모든 관심을 쏟는 시민들, 이른바 '호모 에코노미쿠스'라는 행위자를 산출하고 주체화한다는 목표 아래, 국가의 정책을 개혁하고 특히 NGO로 대표되는 비국가적 기구들과 '협치governance'를 통해 '비용-수익' 따위의 시장적 기준과 사고를 사회 전반으로 확대시키는 것입니다. 이 것은 정말로 '정치적인' 것인데, 신자유주의에서 말하는 정치란 '정치라는 시장'에서 '권리=이익'을 획득하는 제로섬 게임의 형태를 취합니다. 이러한 형태에서 사라지는 것은 지배라는 관념, 따라서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의 구조적 적대와 이념적 갈등의 필연성이며, 이는 사회적 개인들이 '착취자/피착취자'가 아닌 '경쟁자'의 위치에 선다는 환상을 낳는 것이죠. 이는 '갈등과 봉기'라는 근대 정치 이데올로기의 근간을 무너뜨리는 것이고, 이런 의미에서 신자유주의는 탁월한 '反 정치적 정치'라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신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율성과 책임성 강화라는 근대적 개인주의를 전면에 내세우지만, 그것은 개인주의라는 근대적 정치 기획 자체를 파괴하는 '부정적 개인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자유주의는 '사회적 시민권'을 비롯하여, 시민들의 개인화, 개성화를 가능케 했던 모든 물질적 조건을 파괴하면서, 개인들에게 개인이 되기를 강요하는 역설적 기획이기 때문이죠. 예컨대 (신자유주의에 고유한 배제 형태인) 공동체와의 '절연'에 노출된 개인들 - 대표적으로 청년실업자나 이주자들 - 은 자립을 가능케할 모든 집단적 조건을 사실상 부인당하면서, '자기 경영' 역량을 보일 것을 끊임 없이 요구 받습니다. 

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는 이처럼 참을 수 없는 상황에 맞서 '다른 세계'에 관한 이념을 제시하고 이를 위해 저항하는 것 자체를 극히 곤란하게 만드는 이데올로기적 기획이기도 합니다. 신자유주의는 개인과 집단들의 행동 -  '폭력'도 포함해서 - 이 '이익'이라는 유일무이한 기준에 따라 측정되는 사회적 조건을 창출함으로써, 봉기라는 관념은 말할 것도 없고, 갈등이라는 것 자체를 무력화시킬 뿐 더러, 이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오늘날 '파업' 기사가 뜰 때 마다 '국익 손실'이 자동적으로 따라 붙는 신문 기사들을 생각할 수 있겠죠. 심지어 '파업' 까지 가지 않더라도, 일단 '노조' 자체에 경기를 일으키는 경제신문들이란! 이처럼 사회적, 정치적 적대를 무력화시키는 것을 핵심 목표로 삼고 있고, 이를 다양한 ('정치'를 통해 구성된 국가가 아닌, 국가에 의한 '관리'의) 수단들을 통해 물질적으로 뒷받침한다는 사실은, 신자유주의가 왜 근대 정치 자체를 파괴하는 것인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날 정치적 대표제의 위기가, 의회적 대표제의 위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적 기능을 위하여 자신들의 권력을 대표자들에게 위임하고, 권력을 타인에게 위임하는 그 만큼 권력을 획득하는,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의 역량이라는 일반적 의미에서 '대표 일반'의 위기로 심화되는 것 역시 신자유주의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신자유주의는 대표 원리 그 자체를 평가절하합니다. 대표란, 신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불필요하거나 비합리적이며, 특히 그것이 사회적 갈등과 '다른 세계'에 대한 이념을 대표하려는 경우 탈선과 손해를 낳는 해로운 것으로 여겨집니다. 우리는 몇 년전 대표자가 남겼던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라는 말에서, '대표' 자체의 위기를 목도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사회적 시민권을 비롯한 권리들을 체계적으로 박탈 당할 뿐 아니라, 갈등과 저항을 정치적으로 대표하는 것 조차 차단 당할 때, 대중들은 다른 형태로 자신들의 불만을 표출하거나 혹은 '자발적 예속'의 상태로 빠져듭니다. 한 편으로는 절망과 자기 파괴적 폭력이 나타나고, 다른 한편에서는 이러한 끔찍한 세계에서 자신을 보호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상상에 기초한 보상적 공동체들을 요구하는 쪽으로 이끌리게 되는 것이죠. 이 것은 작게는 지역 갱단에서 부터, 종교적, 민족적 상상에 기초할 경우 범지역적으로 거대하게 나타나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식이든, 근대 정치의 위기는 한층 심화되는 것이구요.


세계정치를 위하여

-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회적 시민권에 대한 반격은 '시민권=국적'이라는 국민 국가의 성격을 자본에 유리한 방향으로 활용하는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또 세계화의 진전은 기존 정치를 통해 해결하기 힘든 문제들을 양산하고 있구요. 이 것에 대한 해결책으로 발리바르는 세계화라는 상황에 걸맞도록 시민권을 재정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세계정치'에 걸맞는 시민권 개념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물론 '세계정치'에 대한 논의는 지금까지 끊임없이 계속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 것은 유토피아주의로 끝나기 마련이였죠. 발리바르는 이러한 유토피아주의와 결별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유토피아라는 개념은 세계정치 이념의 구체적인 내용을 떠나서 일단 현실주의/비현실성이라는 양자택일 속에서 정치적 상상력을 가둘 뿐 더러, 오늘날의 세계화 속에서 이미 고전적 유토피아의 토대들 자체가 근원적으로 파괴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유토피아주의에 고유한) '미래에 대한 상상'이 아니라, '현재에 대한 상상'이 되어야하며, 동시에 이는 제도적 창조의 장 속에서 사용되어야 합니다. 발리바르는 이러한 관점에서 몇 가지 쟁점들을 제시합니다.


1) 공동체 없는 시민권과 '정치체에 대한 권리' droit de cite

'시민권=국적'의 등식, 혹은 시민권의 영토적 표상은 오늘날 사회적 시민권의 유지를 위협하는 가장 주요한 장애물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이는 세계화 시대의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라고 할 수 있는 이주자들을 시민권에서 배제하고, 이에 따라 이주 노동자와 정주 노동자를 분할 시켜 노동 운동을 비롯한 사회 운동의 힘을 약화시키는데 체계적으로 활용되고 있지요. 그 뿐만 아니라 이 것은 시민권이라는 것을 하나의 '국가로 부터 부여 받는 특권'이라는 착각을 불러일으켜, 근대적 봉기를 통해 설립된 민주주의와 시민권의 변증법 자체를 파괴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같은 '착각'은 근대 국민 국가와 그 민족 문명의 기원이라 여겨지는 '신화'에 의하여 뒷받침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신화의 서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근대 국가의 설립 이전에 야만인들의 대이주가 있었으며, 이로부터 초래된 혼란에 맞서 지역 내에 존재하는 유목적 공동체들이 해체되고, 종족적 실체를 갖는 정주 민족 공동체로 다시 태어납니다. 그리고 이러한 정주 민족 공동체는 '공동체들의 공동체', 곧 국가라는 형상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죠. 이러한 '국가 탄생의 신화'는 민족 공동체를 위협하는 야만적인 이주자 무리를 등장시키고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유럽적 맥락에서 이는 '훈 족'이 될 것이고, 중국적 맥락에서는 한漢족의 중원을 침략하는 유목 민족들이. 그리고 한국적 맥락에서는 국사 교육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여진족, 왜나라, 후금 등이 그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신화'는 시민권을 강화하기 위한 전제가 공동체의 실체적 동일성과 상징적 권위를 강화하는 것이라는 착각을, 또는 공동체의 실체적 동일성을 약화시키는 것으로 간주되는 이방인들, 그리고 그들과 협력하는 '내통자'들을 권위주의적으로 억압하고 배제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를 뒷받침하는 것이죠. 

상황이 이렇다면, 민주적 시민권의 축소에 맞서 이것의 확대를 꾀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국가의 '신화'에 맞설 대안적인 서사를, 대안적인 '신화'를 구축해야한다는 난제가 주어집니다. 여기서 우리가 고민해야할 문제가 바로 '공동체'의 문제죠. 아렌트가 파기해버린 자연권 따위의 관념론에 의지하지않는 한, 시민권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공동체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고 넘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시민권에 대한 억압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 역시 '공동체의 동일성'이기도 하구요. 이와 같은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발리바르가 던지는 질문은, 공동체 개념을 모종의 종족적/문화적/이데올로기적 실체와 분리시킬 수 있겠는가, 다른 말로 '공동체 없는 공동체'라는 개념이 가능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예를 들자면, 한국 사회에서 '시민들'이 '한국인/한국어사용자/한민족' 따위의 물질적/관념적 실체와 분리 되는 것이 가능하느냐, 의 문제라 할 수 있겠지요. 그 뿐 아니라, '이산적diasporic 시민권', 즉 하나의 공동체에 배타적으로 속하거나 다른 공동체에 귀화하지 않고, 여러 공동체에 흩어져 있으며, 그 공동체 사이를 떠도는 이들 - 세계화 시대에 더욱 더 많아지고 있는 이주 노동자나 정치적 망명자들, 혹은 강제 이주자들 - 의 시민권이라는 개념이 가능한가의 문제도 있습니다.

발리바르는 여기서 '운명 공동체'나 '미완의 시민권'이라는 개념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이는 네덜란드 정치학자 휜스테렌이 주창한 개념인데, 그는 이러한 개념들을 통해 반反 민주주의적이고 배타적인 '국가의 탄생 신화'에 맞설 수 있는 대안적인 허구 또는 상상을 제시하고, 이를 구체적 실천과 제도들로 연결 시키고 있습니다.

휜스테렌에 따르면 '공동체 없는 공동체'는 가능한 것일 뿐만 아니라, 사실 모든 공동체의 근본적 조건이며, 이는 세계화 시대의 공동체들에서는 더욱 그러한 것입니다. 휜스테렌의 '운명 공동체'는 초월적이거나 오랜 세월에서 비롯된 '숙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불확실하고 갈등적인 마키아벨리적 '운'Fortuna, 곧 예견할 수 없는 조건들을 만들어내는 역사의 변덕스러움에 맞서야 하는 개인과 집단들의 공동체입니다. 운명 공동체는 함께 살아가는 것을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상호의존하며 살아가야하는 집단들이 서로 만나게 되는 현실의 공동체입니다. 운명 공동체에 속한 개인과 집단들은, 마치 오늘 날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그렇듯이 서로에 대해 완전한 적도, 동포도 아닌, 차라리 '이방인'에 가까운 존재들이죠. 이 같은 이방성은 어쩔 수 없이 차이와 갈등을 만들어내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와 갈등을 미리 정해져있는 '합의'의 강제로 제거하려 드는 것은 가공할 만한 정치 폭력이며, 운명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상호파괴 및 자기 파괴로 몰아넣는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오늘날 흔히 말하는 것과 정반대로 '합의'는 갈등의 대안이 아니라, 그 원인이자 수단이라 할 수 있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대안은 '합의'가 아니라, '갈등의 꾸준한 섭취'를 통해 상호/호혜적 정치 관계를 설립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대안의 핵심 수단이 바로 '미완의 시민권'입니다. 시민권이란 어떤 실체적 공동체 - 이를테면 '국가' - 가 그 구성원에게 위로부터 부여해주는 완전하고 안정된 신분/지위가 아니라, '시민'이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지속적이고 미완결적인 '시민-되기'의 과정이 되어야 합니다. 시민권은, 더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공유할 수록 줄어 드는 '특권'이 아니라, 더 많이 공유할 수록 더 많은 시민의 능력을 형성하고, 공동체를 강화하는 것이 되어야한다는 이야기죠. '참여'와 '나눔', '협력'과 '연대'라는 시민적 가치들을 실천하면서 시민권의 범위를 확대해 나가는 것, 그리고 그럼으로써 오히려 자신이 누리는 시민권을 강화하는 것, 그 것이 '미완의 시민권'의 의미라 할 수 있겠습니다.

발리바르는 이러한 개념을 통하여 현 정세에서 가장 긴급히 요청되고, 또 현 정세에 맞게 쇄신된 시민권의 형태로 '정치체에 대한 권리 droit de cite', 또는 '이산적 시민권 diasporic citizenship'을 제시합니다. 여기서 핵심은 이주자들로 대표되는 이방인들이 특정 국가의 시민으로 배타적으로 동화되면서 시민권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 = 이방인'이라는 형상에 따라 주어진 정치적 단위 안에서 점점 더 많은 양의 평등한 시민권을 획득하는 것입니다. 이동권의 인정, 국내 거주권의 인정, 머물고 있는 국가 내에서 정치적 권리의 인정 등. '자신이 속한 모든 곳에서 권리를 인정 받을 수 있는 권리'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바로 그 것이죠. 여기서 그 필수적 전제가 되는 것이 '국경의 민주화'라 할 수 있겠습니다. 국경을 넘어 이동할 수 있는 권리를 국경을 맞댄 국가들 뿐 아니라, 시민과 이주자 단체, 국제 인권 기구들이 공동 관리하는 것이 바로 '국경의 민주화'라 할 수 있겠습니다.

발리바르는 이와 같은 새로운 형상의 '시민권'이 사실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로마 공화정의 '시민권' 개념을 다시 가져온 것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로마 공화정의 '시민'들은 '로마의 시민들'이 아니었습니다.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시민들'이였죠. '시민들의 통일성'이라는 관념에서 벗어나, '동료-시민들'이라는 관계를 만들어 갈 때, '주권 국가'의 국가관을 벗어나 '연방'의 국가관을 상상할 때, 오늘 날의 관국민적 공동체를 대안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번역'의 보편성, 또는 새로운 '문화혁명'

- 앞서 살핀 바와 같이 오늘날의 정치는 서로가 서로에 대해 '이방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상호이해를 가능하게 할 수 있는 보편성이 주어져있지 않다는 뜻이죠. 여기에 대해 근대 국민 국가가 특정한 문화적 전통과 규약, 언어를 강제하는 것은 사태를 악화시킬 뿐이지요. 그렇다면, 서로 다른 문화와 언어를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시민들 사이에 소통이 가능하겠느냐? 라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방인들의 개별성과 차이를 억압하지 않으면서 서로를 매개할 수 있을 보편성이란 무엇인가, 라는 문제가 되겠지요.

발리바르는 '번역'을 그 해법으로 제시합니다. 여기서 번역이란, 서로 다른 '의미 공동체' 사이에서 교통을 매개함으로 상호이해를 확대하는 과정이라는 넓은 의미를 가지는 것이지요. 사실 국민어가 선험적으로 존재한다는 관념  자체가 어떤 환상에 가깝습니다. 국민적 동일성의 핵심을 이루는 '국어'는 원래부터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번역의 실천을 통해서 구성된 것입니다. 오늘 날 흔히 사용하는 용어들 - '사회' '국가' '민족' 따위의 - 은 서구적 개념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죠. 만약 우리가 타임머신을 타고 200년 전 조선으로 떨어진다면 과연 일반인들과 언어 소통이 가능하기나 할까요? 우리에겐 200년 전의 조선인들 보다, 지금의 미국인들과 더 의사 소통이 쉬울지도 모릅니다. 이 것은 '민족의 동일성을 형성하는 언어'라는 것이 사실 별 의미가 없다는 증거라 할 수 있겠죠.

그러나 현재 지배적인 번역은 여전히 '국민어'라는 한계에 갇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현재 대중교육체계 안에서 외국어 교육의 형태로 제도화되어 있는 번역 같은 경우, 국가에서 '표준'으로 여기는 문화적, 계급적. 정치적 기준에 따르고 있죠. 오늘 날 한국에서도 많은 인기를 얻고 있는 미드들만 하더라도, 사설 자막과 더빙판의 차이는 상당히 크다 할 수 있습니다. 더빙판이 국가에서 요구하는 '표준' 번역을 따르고 있다면, '사설 자막'은 상대적으로 문화적 특성과 차이를 반영하고 있는 번역이라 할 수 있겠지요. 조악하게 말하자면, 발리바르는 '표준 번역'에서 벗어나 '사설 자막'의 다양화와 증대를 요구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기존의 지배적 번역에서 배제되었던 집단과 개인들이 기존의 지배적 번역에서 배제 되었던 텍스트들에 대한 번역에 접근하고 동참하는 것, 동일성을 강조하는 국민 공동체에서 벗어나는, 다양한 '의미 공동체' 사이의 소통과 이해의 난점을 타개하는 것, 이러한 '번역의 새로운 실천'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발리바르는 '내부의 이방인들'에게서 이러한 '번역의 새로운 실천'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내부의 이방인들'은 두 범주가 있다고 할 수 있겠는데, 하나는 상대적으로 고급 교육을 받은 유학생들이나 고국을 떠나 망명 상태에 있는 작가들, 이른바 다중국어자들이 있고, 다른 한 편으로는 일반적으로 분업 및 고용 구조에서 하위직에 있는 이주노동자들, '익명의 이주자'들이 있습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후자인데, 전자에 비해 후자는 심하게 억압 받으며, 여기에 소통불가능성과 이해불가능성이, 그러나 역설적으로 새로운 교통과 이해의 가능성이 집약 되기 때문이지요. 이들 사이의 간격을 줄이면서, 기존의 번역과 언어의 실천을 개조하는 것이 발리바르의 주장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뿐 아니라 발리바르는 오늘 날의 대중교육이 '표준'에서 벗어나 다자적이고 다문화적인 번역의 체제를 구축하고, 일부 엘리트가 아닌 시민 대중들이 새로운 번역의 실천에 접근할 수 있도록 변해야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제 생각이지만 물론 국공립 교육 과정에서는 이 것이 가능할리가 없겠지요. 그러나 오늘 날 다양한 취미 분야에서 등장하고 있는 '번역자'들의 존재는 낙관적인 전망을 갖게 해줍니다. 번역 엘리트를 넘어서는, 대중 번역자들의 등장이 확산되어야 하겠지요. 이는 새롭게 출현하는 관민족적 정치 공간이 엘리트들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대중적으로 참여되는 관국민적 '공적영역' - 언어적, 행정적 국경과 경계를 가로질러 시민들 스스로 착상과 기획들을 낼 수 있을 - 으로 변화하는데 가장 중요하게 기여하는 물질적 조건이 될 것입니다.

더 생각해 보아야 할 것들

- 이상에서 발리바르가 최근 관심을 두는 시민권과 그 관련 작업들을 간략하게 살펴 보았습니다. 그의 작업은 정세에 대한 개입이고, 그러므로 그가 주로 염두에 두는 것은 유럽의 정세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현실에 바로 적용하기는 어렵겠지요. 그가 대결하려는 정세가, 전세계로 확대된 근대 정치 제도와 이데올리기의 위기이며, 오늘날의 우리도 이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점에서 발리바르의 작업은 많은 시사점을 줍니다. 그리고 근대 정치의 위기를 다루는 것이 근대 정치, 정치 자체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시민권, 공동체, 갈등, 권리, 동일성 등의 내재적 모순과 이율배반을 반성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므로, 위와 같은 범주에서 정치를 사고하고 실천하는 모든 이들은 발리바르의 작업에서 많은 단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발리바르의 철학은 이렇게 '단서'를 제공하는 것으로도 그 역할을 다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철학은 사고를 기존의 체계에서 해방하고 이로써 대안의 가능성을 여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고 과정의 끝에서 비로소 얻어지는 해법을 주는 것은 아니라 할 수 있지요. 철학이 단지 관념적 체계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사고와 실천을 낳고, 여기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며 소멸하고, 또 기존의 사고와 실천이 위기에 빠질 때 그 모순으로 부터 다시 부활하는 것이야 말로, 역사 속에서 철학이 실존하는 방식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발리바르를 통해 우리는 다시 '철학의 부활'을 요청할 때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병장 박원익 
  "발리바르에게 철학은 본질적으로 정치적이고, 철학은 정세를 사고하고 정세에 개입하려는 지적 노력이 되어야 합니다." 

이 구절에 주목하게 되는군요. 감사합니다. 발리바르의 <대중의 증오>를 결국 구입했습니다. 페이퍼를 참고서 삼아 잘 읽겠습니다. 더불어 레밍의 1917년의 편지들을 같이 읽어야 하지 않을까요. '정세적 개입'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가히 전범적인 사례를 보여준 텍스트이니 말입니다. 2009-11-07
09:32:18
  



병장 홍명교 
  1917년의 편지들뿐만 아니라 NEP 이후의 반성적 선회가 정말 중요하죠. 당시로서는 그 스스로가 처절한 심정이었음이 확실한 정황에서 쓴 자기반성의 결정판이니까요. 그리고 아주 가깝게 '정세적 개입'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1997년 이후의 한국학생** 논쟁사(그것은 곧 붕괴史이기도 하죠.)를 살펴보는 것도 굉장히 흥미롭고 괜찮은 참고가 되는거 같아요. 소위 P*진영의 네다섯개 그룹들 사이의 격렬하고도 자멸적인 논쟁. 고대 생활도서관을 잘 뒤지다보면 짱 박혀있는 책들이 있을듯. 


일병 조문희 
  글을 읽다가 갑자기 든 생각인데(뭐 지금 정리되지는 않지만) 
제도와 국가, 봉기, 국민, 포섭과 배제의 과정에 '민족주의'라는 기표를 도입해 볼 수는 없을까요? 책마을에서 그리 이야기되는 주제가 아닌 것 같지만 아마도 근대 국가의 형성과 민주주의, 시민 등의 주제에서 실질적으로 공동체 감정이나 국가 이미지의 물질적 전화 등을 이야기하려면 이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일단 자주 이야기되는 네이션 등의 용어에 대해서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을 것 같구요. 제가 책마을에 익숙지 않은 독자라서 그렇게 느끼는 것 뿐일까요? 
그래도, 주권의 행사와 실행에 있어서, 국민-민족의 대의와 표상의 문제에 있어서 '민족주의'에 관한 논의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타자의 문제나 제도/운동에 있어서도 민족 담론을 응용해 볼 수 있겠죠. 아마도 언젠가 예찬님이 작성하셨던 외국인 학생과 학생 사회 에 관한 글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2009-11-09
20:31:57
  



병장 김예찬 
  민족주의의 문제를 빼놓을 수 없겠죠. 발리바르 역시 근대 정치의 위기를 이야기할 때 무엇보다도 '민족주의'의 문제를 핵심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대중들의 공포>는 상당 부분 유럽 민족주의를 다루고 있기도 하구요. 

발리바르 같은 경우 '민족은 상상의 공동체'라는 분석이 무력한 것에 지나지 않다고 보고, 이를 지양합니다. 그러한 주장을 자유주의적이고 서구 중심적인 '설명'에 불과하다고 여기고 있지요. 이러한 설명에서 '독자적 개인성을 가진 개개인'이 '상상의 공동체' 속에서 '국민적 동일성'으로 묶인다고 본다면, 발리바르는 근대 국민 국가 하에서 '독자적 개인'과 '국민적 동일성'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국민적 개인'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상당히 흥미로운 주장인데, 발리바르의 민족주의 개념에 대해서 진태원씨가 따로 작성한 글이 있으니 시간 나는대로 한번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언젠가 지승인님이 제안하셨듯 '책마을 사전'이 필요한게 아닌가, 싶기도 한데 차기 3인의 소사분들이 취임(?)하시면 제가 할 일이 없어지니 한번 작업해보도록 할게요. 흐흐. 2009-11-10
08:19:31




일병 오학준 
  헥헥. 이제 서평을 다 썼으니 읽을 여유가 있겠군요. 잘 읽겠습니다. 

책마을 사전이라, 전에 댓글에 개념놀이를 해보자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이게 조금 더 멋있군요.(!) 한번 적극적으로 추진해 보심이 어떨까요. 헤헤. 


상병 양제열 
  감사히 잘 읽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