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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예찬] 불안을 해체하기 - 오학준 

1. 

오늘 날 성행하는 자기계발담론은 언제부터 생겨난 것일까? 개인의 능력을 계발하고 성실과 근면의 덕목을 장려하는 말들은 거슬러 올라가자면 그 시작을 찾기 어렵겠지만, 그 것이 '자본주의'라는 역사적 체제와 결합해 본격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은 새뮤얼 스마일스의 <자조론>이 처음이 아닐까 싶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유명한 문장이 바로 <자조론>에서 등장하는 것이다. 할 수 있다는 의지와 참고 견디는 근면함으로 역경을 이겨내고 자수성가한 인물들의 삶을 조망하는 책인 <자조론>은 그야말로 '기회의 평등'과 '자유로운 경쟁'을 모토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이 책의 출발이 주경야독하는 야학생들을 대상으로 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아무리 현실이 힘들고 어려워도, '자조 selp-help'를 통하여 스스로를 바꿔나간다면 인생의 승리자가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자기계발담론들은 제각기 이야기는 달라도, 결국 새뮤얼 스마일스의 주장을 변주한 것이라 볼 수 있겠다. 

2. 

그런데, 개인의 노력과 의지를 통하여 성공할 수 있다는 '자조'의 논리는 한편으로는 '가난'을 구조적 원인이 아닌, 개인의 게으름 때문으로 돌리는 사회 정당화의 논리라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가난은 개인의 죄악이 되고, (“능력주의 체제에서는 가난이라는 고통에 수치라는 모욕까지 더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근대 이전까지 '공동체의 일원'이었던 인간은 공동체의 도움 없이 '개인과 개인'으로 경쟁하게 된다. ("모든 비개인적/사회적 보조가 사라지고 개인적 자조로 환원되는 상황") 자조의 논리에서는 애초에 출발점부터가 다르다는 현실 사회의 불평등 구조는 은폐되는데, 자유와 평등을 그 이념으로 하는 '자유민주주의'라는 기표가 세계화(과잉)된 만큼, 실제로 '자유', '평등'을 찾아보기는 어려워지고 있다. '모두가 쓰고 있다'는 사실은 결국 '어떻게 쓰여도 상관 없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서로 계약을 맺을 수 있는 존재로 평등한 만큼, 계약 이후의 불평등은 개인이 자초하는 결과로 환원된다." 


3. 

좌절과 결핍이 사회가 아닌 '개인'에서 온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오늘 날의 개인들은 '나로 인하여' 언젠가 실패하고 몰락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끊임없이 시달릴 수 밖에 없다.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는 경쟁에서 이길 수 있을 만한 능력을 길러야 한다. 능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나 자신에게 시간과 돈을 투자해야 한다. 나에게(혹은 자식의 성공을 위해) 투자할 시간과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여유를 부릴 수 있을 만한 위치까지 올라가야 한다. 그 위치로 오르기 위해서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끊임 없이 계속되는 불안 속에서 사람들은 지속적으로 쫓겨다닐 수 밖에 없다. 심지어 오늘 날 우리에겐 자유롭게 게으를 권리도 사라졌는데, 그런 게으름은 '잉여'라는 단어로, '쓸 모 없는 인간'으로 지칭된다. 이제는 나 개인의 불안이 아니라, 누군가가 나에게 던지는 불안 때문이라도, 우리는 별 일 없이 살 수가 없다. 

4. 

이러한 불안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는 몇 해 전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을 읽고 주위 사람들이 생일을 맞이하게 될 때면 이 책을 선물해주곤 했다. 나의 책 선물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는 사람들도 대부분 <불안> 만큼은 정말로 '잘' 읽었다고 이야기하는데, 이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모두가 불안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나 불안해 하고, 또 그 불안을 불안해 한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불안을 불안해 하지 않을 수 있을지 고민하는데, 그럴 때 가장 손쉬운 해결책이 <불안> 같은 책을 읽는 것이다. 보통의 해박한 인문학적 교양과 매끄러운 문장은 책을 읽는 동안 자신이 무언가 '불안'에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우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어 준다. (그의 베스트셀러인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 역시 책을 읽는 동안 스스로 '사랑은 과연 무엇인지' 탐색하는 구도자의 길을 걷고 있다는 생각을 심어주는 것을 보면, 과연 알랭 드 보통은 그만큼 자신의 매력이 무엇인지 아는 작가다.) 그러나 결국 <불안>을 다 읽고 나면 또 다시 '불안'에 시달릴 수 밖에 없는데, 결국 실컷 우리가 왜 불안한지에 대하여 이야기하지만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하는가에 대해서는 별 이야기가 없기 때문이다. (학준님 역시 이 부분에 대해 명확히 지적하고 있다. "보통은 지위를 결정하는 변수가 경제적인 것에 걸리게 된 현실을 묘사하고 분석하는 데에는 탁월했지만, 인간이 그 자체로 변수가 되었다는 사실까지는 나아가지 않았다." ) 그렇다면 우리가 불안의 악순환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5. 

학준님이 폴라니를 인용한대로, "공동체 속에 묻혀 있던 인간을 꺼내 개인으로 정초"하며 인간을 상품화하고, 보통이 <월든>을 언급하면서 쓴 것처럼 자연 역시 상품화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그리고 심지어 그러한 현실에서 오는 '불안'마저도 상품이 된("공포 마케팅") 오늘에, 불안을 극복하려는 기획은 "하나의 제도나 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총체적인 사회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할게다." 불안에서 진정으로 자유로워지려면, 개인의 심리에 눈을 돌리는 것 보다 우선 우리가 불안할 수 밖에 없는 구조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내야한다. 물론 '바꾸어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꾸어야 한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다른 이들에게 바보 같은 사람, 이상주의자, 스스로 인생을 망치는 사람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바꾸는 것이 불가능한 이유는, 바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불가능한 것이다. 불가능하다고 계속 되뇌이고만 있다면, 불안의 악순환은 언젠가 당신을 정신분열자로 만들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덮치는 '불안'이, <불안>에서 묘파해내는 것처럼 어느 순간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만들어진' 것은 '소멸할 수' 있다는 것 역시, 잊지 않아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