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장 정근영   2009-09-06 00:50:38, 조회: 119, 추천:0 

「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1 잃어버린 것들에 대하여

이 책을 읽는 내내 지독한 상실감과 아픔에 시달렸다. 그것이 내가 저지른 불효에 대한 슬픔이었다면 오히려 좋았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내 마음 한 구석이 아릿한 이유를 알지 못했다. 솔직히 말해서 6~70년대의 어려움을 담은 이 이야기에는, 지금의 20대가 공감할 여지가 거의 없었으니까. 80년대 후반의 풍요 속에서, 빽빽한 빌딩숲을 가로지르며 자로 잰 듯 가지런한 아파트와 유치원과 학교를 오가던 우리들에게, 춥고 가난하고 배고팠던 시절에 산과 논과 들판을 쏘다니며 놀던 아이들의 이야기는 그저 먼 나라 이야기일 뿐이니까. 명절 때 시골에 가면, 약주를 한 잔 들이키신 할아버지, 할머니의 입에서나 가끔 튀어나오는 낯선 이야기. 너무도 오랜 시간이 지나, 이제는 기억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빛바랜 추억들. 아니, 추억의 조각들. 이 책을 온전히 받아들이기에는, 이미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그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등장인물들에게 감정이입을 한 뒤, 절정의 순간에 눈물 한 방울을 찔끔 쥐어짜내고, 이런 이야기에 슬퍼할 수 있는 자신의 감성을 대견해 하는 것 뿐. 그리고 부모님께 저지른 불효를 뉘우치는 척 하며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고, 앞으로 부모님께 잘해야겠다는, 채 하루도 가지 못할 뻔뻔스런 다짐을 하는 것 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책을 읽으면서 아파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가 태어난 그 순간부터 숙명적으로 떠안게 되는 원죄 때문이다. 한 때는 새초롬한 미소를 머금고 누군가의 가슴을 설레게 했을, 지금의 우리처럼 ‘사랑’이 마치 삶의 전부인 마냥 행복해하고, 불현듯 찾아오는 ‘이별’이란 손님에 울며 밤을 지새웠을 한 여인에게 ‘엄마’라는 굴레를 씌어야 했던, 그것은 그 어떤 것으로도 용서받을 수 없는 ‘자식’이라는 이름의 원죄.






라고 끝난다면 참으로 바람직하고 모범적인 독서후기라 할 수 있겠지만, 나는 아직 할 얘기가 더 남아있다. 그리고, 나는 아직 제목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았으니까.

사실 평소에 내 글쓰기 성향을 생각해 볼 때, 이 글은 이렇게 끝났어야 했다. 다분히 감상적이고 낭만적인 과거의 내 글들에 비추어 볼 때, 적당히 감동적이고 교훈적인 이 결말은 그야말로 적절했으니까. 그러나 더할 나위없이 전형적이고 누구나 공감을 할 법한 결론이었지만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처음부터 이런 식의 독서후기를 쓰리라 다짐하고 책을 읽었기 때문인가? 아니, 아니다. 그렇다면 어머니의 희생과 자식의 원죄라는 진부한 클리셰 때문인가? 그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왜, 왜 나는 평소였으면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러워 했을 이 글에서 뭔지 모를 불편함과 찝찝함을 느꼈는가? 책마을의 욕망과 라캉의 욕망을 이야기한 박원익의 글([내글내생각] 책마을의 욕망과, 라캉의 욕망 : <세미나 11>)을 읽으며 나는 불현듯 그 불편함의 근원을 찾아냈다.


#2 자식들의 욕망, 독자들의 욕망

박원익은 위의 글에서 책마을에서 끊임없이 사유와 소통에 대해 이야기할수록 결국 도달하는 것은 사유와 소통에 대한 불가능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사유와 소통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것에 대해 더욱 열정적으로 논한다는 것이다. ‘엄마를 부탁해’를 읽고 난 뒤에 내가 느꼈던 감정과 박원익의 이 말에서 나는 기이한 동질성을 느꼈다. 쉽게 말해서, 우리가 이 책을 읽고 감동받은 뒤 이제부터는 정말로 부모님께 효도해야겠다고 다짐하면서도, 여전히 어머니의 속만 썩인다는 것. 결국 부모님께 효자 노릇을 못 할 것을 알면서도, 지금 이 순간에는 열정적으로 엄마에 대한 사랑을 노래한다는 사실. 나는 이 지점에서 자식들과 독자들이 공유하고 있는 기묘한 욕망을 발견했다. 책을 읽고 난 뒤의 감동과 슬픔에 젖어있었다면 절대로 발견하지 못했을 욕망을.

이 책을 읽고 슬프고 안타까운 감정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치자. 문제는, 그 슬픔이 전제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박원익은 우리가 사유와 소통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억압되어야 하는 것은 1차 텍스트 그 자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책을 읽고 슬퍼하기 위해서 억압되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머니에게 효도하는 것 그 자체이다. ‘다른 모든 것들은 허용되어도, 그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남아야 우리들의 슬픔을 지탱할 수 있는’것이다. 바로 이것이, 자식들과 독자들이 공유하고 있는 욕망이다. '효도'라는, 보다 본질적인 가치를 희생하면서까지 그저 슬프고자 하는 욕망.

바로 여기에서, 신경숙의 이 가슴아픈 이야기는, 독자들에게 울림을 주어 어머니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고자 했던 그녀의 의도는, 자신들의 원죄에 대한 자식들의 반성과 참회로 전이된다. 그저 그뿐이다. 눈물로 가득한 그들의 속죄는, 지나간 과거를 향한 것일 뿐, 미래에 대한 다짐은 아니다.


#3 어머니라는 이름이, 더 이상 슬프지 않기를

언제부터 ‘어머니’라는 이름에서 슬픔을 느꼈는가. 왜, ‘어머니’라는 고맙고 사랑스러운 이름에서 우리가 아픔을 느껴야 했나. 그것은 ‘어머니’만이 할 수 있는 숭고한 희생 때문인가. 진정 그런가. 아니다. 그것은 자식들 스스로 자신이 태어남으로써 어머니에게 저질러야 했던, 아니 저지른다고 믿었던 원죄 때문이다. 앞으로도 영원히, 결코 벗어나지 못할.

그러나, 원죄라 함은, 스스로 부채의식을 만들어, 우리들이 어머니에게 저지른 불효를 합리화하는 것일 따름이다. 자식들은 태어난 그 순간부터 어머니에게 너무도 큰 죄를 저지른다는 말은, 살아오면서 그녀를 아프게 했던 수많은 잘못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을 에둘러 말한 것에 다름아니다. 자신이 극복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으로 적당히 자아비판을 하면서, 실제로 어머니의 가슴을 미어지게 만들었던 자신의 잘못들로부터 도망치는 것은 얼마나 역겨운 일인가. 진실로 중요한 것은, ‘원죄’가 아닌 것이다. 아니, 자식들을 낳으면서 그 어느 순간보다 기뻐했을 그녀에게, 그 순간을 이르러 ‘원죄’라 칭하는 것은 너무도 잔인한 일이 아닌가.

이 책에 대해 한 가지 불만이 있다면, 바로 ‘엄마를 부탁해’라는 제목이다. 도대체 누구한테 부탁한다는 건가. 내 엄마를, 우리 엄마를, 이 세상 하나뿐인 우리 엄마를. 부탁한다는 말은 하지말자. 그녀를 짊어져야 할 사람은 다름아닌 우리 자신이 아닌가.

나는 이 책이 베스트셀러라는 사실이 유감스럽다. 그것은 이 책을 읽고 공감하는 사람이 그만큼 많다는 얘기고, 바꿔 말하면 슬퍼지고 싶은 욕망에 휘둘려 여전히 어머니들을 아프게 할 사람이 많다는 것을 뜻하니까. 그러니까, 사실 나는 이 책이 좋은 작품으로 인정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비록 지금은 많은 사람들을 눈물겹게 만들지라도, 언젠가는 어떤 소년이 ‘엄마, 이 책은 왜 이런 얘기를 하고 있어? 왜 ‘엄마’에 대해 말하면서 슬퍼하는 거야?’라고 의아한 듯 묻는 날이 오기를. ‘한국의 가장 아름다운 작품들’이라는 목록에 포함되는 일이 없기를. ‘어머니’라는 이름이, 부디 슬프지 않기를.

신경숙이 진정 원한 것은, 독자들이 그녀의 책을 읽고 슬퍼하면서 감동적인 독서후기 따위를 쓰는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소중함을 깨달은 이들이, 당장에 달려가 엄마에게 전화를 해서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것. 집으로 돌아가 엄마의 손을 잡고, 엄마의 엄마는 어떤 분이셨어요? 하면서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거는 것. 젊었을 때의 엄마는 어땠는지, 당신도 환희로 가득찬 사랑을 해봤는지, 슬픔과 절망의 밤을 지샌 적이 있었는지를 물어보는 것. 머리를 싸매며 글을 쓰는 것보다 백만배쯤은 쉬운, 그러나 아직도 우리가 쉽사리 하지 못하는 소박한 일들을 시작하는 것. 아마도 이런 것들이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우리가 이 책을 읽고 응당 해야할 일은,
자신이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를 읽고 슬퍼할 수 있다는 것을 대견해하는 것 따위가 아니라,
당장에 달려가 전화기를 붙잡고,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지금 느끼고 있는 이 슬픔보다 수천배는 고통스러울 아픔이 삶을 뒤덮을 그 날에,
되돌릴 수 없는 아득한 절망 속에서,
그 흔한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 전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기 전에.

다행스럽게도, 나는(그리고, 아마도 우리는) 아직 늦지 않았으니까.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10-01-27
13:29:55 



일병 온건웅 
  백 점 만점에 백 점 드리고 싶은 독후감이에요. 
저도 열렬히 바래요. 어머니라는 이름이, 부디 슬프지 않기를. 2009-11-04
06:1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