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병 홍명교   2009-09-03 22:00:58, 조회: 232, 추천:0 

<성>, 프란츠 카프카 

"그는 다시 앞으로 걸어갔지만, 길은 길게 뻗어 있었다. 도로, 즉 마을의 큰길은 성이 있는 산으로 나 있지 않았다. 성이 있는 산에 가까이 다가가는 듯하다가, 마치 일부러 그런 듯 구부러져 버렸다. 성에서 멀어지는 것도 아니면서 그렇다고 가까워지는 것도 아니었다."
- F. Kafka의 <성> 中

카프카의 <성>을 다시 읽었다. 마을 도서관에 꽂혀있던 걸 벼르고 벼르다가 올해 초에 읽었더랬다. 누가 그랬더라? 지젝이었나? 아무튼 무지 끝발날리는 어떤이가 '카프카 읽기'에 대해 말하길, "기존에 갖고있던 서사를 대하는 태도로는 전혀 극복불능한 소설"이므로, "전혀 다른 이해 체계를 바탕으로 접근을 시도"할 것! 따라서 기존의 근대소설들의 서사 체계에 익숙해진 우리에게 카프카는 또 하나의 난관이 될 것임이 분명하다. 아니, 이미 그래왔으며 그때문에 우리는 쉽사리 책을 놓거나 두번째 읽기를 시도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그의 소설 <변신>이 무척이나 유명하고 널리 읽혀지긴 했으나 사실 <변신>이야말로 가장 이해하기 쉬운 타입의 작품이고, 그의 고독 3부작이라고 불리는 <아메리카>, <소송>, <성>은 전혀 다른 차원에 놓여져 있기에 문학의 거처를 묻고있는 모든 이들에게 요청하길, '다시', 카프카를 읽자는 것이다. 두번째 읽는 <성>, <소송>, 그리고 <아메리카>야말로 카프카의 진면목이며, 세번째는 분명 또 다른 차원을 제시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나는 아직 세번째 읽기는 해보지 못했다.)

분명 카프카에 대해서는 어떤 설명을 부여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것처럼 인식되어왔다. 특히나 <성>이나 <소송>, 그리고 그의 짧은 텍스트들은 어떤가. <성>이나 <소송>은 기존의 소설적 서사체계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 또 짧은 이야기들은 담화나 우화, 에피소드랄 수도 없는 독특한 세계를 구성하고 있다. 그것들은 하나로 묶여 카프카 세계의 '총체성'을 이룬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카프카의 소설들에서 우리는 총체성이 해체된 상황 자체를 목도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소설 일반의 언어체계에서 확고한 규칙처럼, 하나의 무의식 체계처럼 상존하는 시공간의 통시성 자체가 카프카의 소설에서는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이라는 소설 한 편은 총체성이 해체된 상황 그 자체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첫번째 시도에서 독자는 어떤 의미에서 실패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성>은 어떤 이해불가능한 세계 자체에 대한 소설이다. 따라서 서사 자체도 이해불가능성을 지향하고 있다. 우선은 K라고 명명된 주인공 자체가 정체가 불분명한 유령같은 인물이다. 그가 어디서 왔는지, 대체 왜 왔는지, 무엇을 하던 사람인지, 어느 곳으로 가고 있었는지 조차 제시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우연처럼 주어지고 K에게는 직설적이고 사실적이면서도, 동시에 모호하고 불분명하게 요구된다. 그런데 K는 왜 그 부당한 요구와 질문들에 충실해야하는가 자체에 대한 의문을 품지 않는다. 마치 당연하다는듯 모든 요구와 질문들에 충실하게 답변하거나 반박하고, 또 굴복하거나 반항한다. 아마 의식이 충만한 이성의 세계에서는 그 기이한 물음들이 오가는 언어체계가 불합리하고 반이성적인 것이 아니느냐고 따질 것이다. 그러나 카프카 세계에서는 그것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이 세계에 대해 의문을 품는 독자를 '낯설게하'며 K는 그 참담한 질문의 세계에 담담하게 가담한다. 

매 장마다 새로이 등장하고 또 사라지는 인물들은 마치 오직 K만을 위해 '거기' 그 장소에 있었던 것처럼, 그곳으로 온 것처럼 행동하고 말한다. 이는 이야기의 분위기 자체를 대단히 기이하게 만드는 효과를 유발하는데, 이런 점은 브레히트의 서사극 중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을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인물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를 버겁게 해나가듯 자신의 '임무'를 충실하고, 융통성없게 관철시키려 한다. K의 조수인 예레미아스와 아르투스는 성의 관료 갈라터에 의해 임명된 후로는 충실히 그의 조수로서의 임무를 다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그 임무의 우스꽝스러움과 그들이 벌인 우스꽝스러운 놀음에 대해 의심하면서도 '임무'였기에 충실했다고 고백한다. 

"그랬더니 그가 말했어요. '그건 가장 중요한 게 아니야. 필요하다면 그가 자네들에게 가르쳐줄거야. 자네들이 그의 기분을 좀 흥겹게 해주는게 가장 중요해. 내가 받은 보고로는 그는 만사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한다는거야. 그가 이제 마을에 들어왔어. 실제로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로서는 큰 사건이지. 자네들으 그에게 그 점을 일러줘야 해.'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 <성>의 제20장 올가의계획 중 예레미아스의 말 중

그렇다면 그들에게 '임무', 과업은 왜 중요한가? 그/녀들은 하나같이 왜 그렇게 해야하는지에 대해서는 자문하지 않으면서 이미 '성'을 절대화,신격화시킨 상태에서 절실하게 자신의 역할에 대해 떠들어댄다. 왜 그토록 주어진 역할에 절실한 것처럼 임무수행에 매달리는가? 운명이기 때문인가, 아니면 당도한 비극에 대해 희극적 전소를 노리는 것인가? <성>을 읽는 내내 반복적으로 이 질문을 던지게 된다. 잠시 벗어나서 얘기하자면 이런 역할게임은 고다르의 영화 <여자는 여자다>, <작은 병정>, <미치광이 삐에로> 등을 떠올리게 한다. 그는 서사가 해체된 상태에서 오직 상황으로서 던져지는 인물들에게 카프카의 그것과 동일한 방식의 역할게임을 부여했던 것이다. 나는 이런 역할게임이 담당하는 바가 일종의 운명론적 유물론 같은 것이라고 본다. 어떤 해결 불능한 상태로까지 치달은 난관 앞에서 인간이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임무는 이런 식의 운명적 자각 같은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

그럼 다시 <성>으로 돌아와보자. <성>에서 K가 직면한 상황은 거대한 권위, 헤게모니, 비이성적 권력아래에서 무능력해지고 우스꽝스러워지는 인물들의 세계이다. 이런 지점에 대해 프란츠 카프카의 정치적 성향이나 태생적,시대적 배경 따위를 고려하지말자는 말은 아예 불필요하다. 요컨대 그런 외재적 해석의 여지를 환원론적으로 되돌리는 것이 문제였지, 그런 외재적 근거를 작품에 내재화된 형식으로부터 거꾸로 분석해나가는 것은 이야기 안에 투사된 작가의 욕망을 끄집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성>은 다름아닌 '욕망'과 '충동'의 서사가 아닌가. 인물들은 '성'의 무수한 관리들 중에서도 하급관리인 클람의 비서의 심부름꾼 따위가 되길바라는 방식으로 제각각 '성'쪽을 향해 욕망하고있다. 또한 그들이 K에게 설명하는 자신들간의 모든 헐거운 관계들은 충동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어딘가 조금씩 비뚤어지고 왜곡되어있지만 말이다. 여기서 카프카의 삶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에는 무리가 따르므로 과감히 생략하기로 하고, <성>을 읽을때 카프카의 욕망에 주목하는 것이 주효한 독해법을 낳지않겠느냐는 제안을 던지는 정도에서 멈추겠다. (사실은 잘 시간이 다가오고, 내일 설탕 출발의 압박을 느낀다.)

"우리는 그곳을 다른 마으로 인식할 수도 있다. 그것은 탈무드의 전설에 나오는 어느 마을이며, 이 전설은 랍비가 던지는 '어째서 유태인은 금요일 저녁에 향연을 준비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들려주는 전설이다."
- 발터 벤야민, <성>의 서사적 배경이 되는 '마을'에 대해

두서없이 결론을 맺자면, '성'은 <성>이라는 소설이 그리는 세계의 '외상적 중핵'이다.(동시에 마을의 전체 형상에 대한 왜상이기도 하다.) K로서는 오직 유일하게, 절체절명의 임무처럼 주어진 '성'으로의 행보가 지속적으로 좌절을 겪으며 점점 멀어지게 되는 가운데, 유일한 해결로서의 전진이 서사가 전재되면서 점점 더 큰 '불가능성'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모든 인물들이 떠벌이는 말과 말, 행위와 행위, 질문과 대답 사이에는 간극이 존재하며, 그들은 끊임없이 다른 중간목표, 부차적인 목표지점을 제시하며 대상으로서의 '성'을 간지럽히지만, 이것은 성으로의 도달이라는 서사적 해답 자체에 대한 전면적 폄훼 행위에 다름아니다. 요컨대 '성'은 그 자체로 부재하는 원인이며 동시에 미지의 X인 것이다. 긴장을 해소할 방법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뱀발 : 불완전하나 일단 이 상태로 올리고, 나머지 이야기는 두번째 글에서 하도록 하겠다. 머리가 나뻐서 설탕 다녀오면 다 까먹을 것 같아서 우선 되는대로 적어보았다.

예고 : 설탕 다녀와서 <소송>을 마저 읽고 다시 카프카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겠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카프카의 짧은 글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을 본 후에 쓴 단편영화 시나리오를, 그 다음에는 <인디언이 되고싶은 소망>에 대한 심상, 끝으로 <오드락>에 대한 지젝의 아포리즘에 대한 서평. 
여러분, 잠시 빠이빠이.
* 책마을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9-10-21 10:58)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10-01-27
13:27:54 



상병 정성근 
  크허헉.양념만 쳐놓고 도망가기인가요. 덕분에 똥줄이 탈 지경입니다.(낄낄) 2009-09-03
23:12:31
  



상병 박원익 
  오우, 같은 텀에 나가게 되는군요. 잘 다녀오시길. <성>에 대한 서평이라니, 매우 기대됩니다. 2009-09-04
10:20:09
  



병장 김태완 
  흠. 허무함과 무의미의 연속인가요. 2009-09-04
15:29:16
  



상병 진수유 
  좋은 시간 되시길 바래요. 잘 읽었습니다. 2009-09-07
15:18:10
  

상병 홍명교   2009-09-11 19:25:22, 조회: 120, 추천:0 

1. 외상적 중핵

며칠 전에 올린 글의 마지막 부분에 결론으로 어설프게 마무리한 '외상적 중핵으로서의 성'이라는 설명에 조금 더 첨언하는 것으로 글을 시작하려고 한다.

"우리를 경멸하는 자들의 생각을 모조리 바꿔놓을 모양인데 그것은 힘든 일일거예요. 모든 게 성에서 비롯되는 일이거든요."
- p295, 제17장 아밀리아의 비밀 中 K의 계획에 대한 올가의 반박

<성>에는 좀처럼 '인물관계도' 따위의 쉬운 도식을 거의 그려내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하고 복잡한 이해관계를 지닌 무수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아말리아나 소르티니, 여관주인처럼 K를 향해 '방해'하는 자들도 있고, 올가나 바르나바스처럼 K를 도우려는 자들도 있으며, 프리다처럼 이율배반적으로 관계의 설정 자체를 번복하는 자들도 있지만 그런 구분이 적과 아의 구분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올가의 말처럼 모든 것은 성에서 비롯되며, 따라서 '외상적 중핵'으로서의 성에는 허무주의적으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폄훼되는 것과는 엄연히 다른 것이라 하겠다. 모두가 그곳으로부터 모든 문제가 시작되었음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 문제의 줄기에는 문서가 문서들을 만들어대는 문서공장 덩어리의 관료제 체제도 있고, 파고들면 들수록 도리어 멀어지는 쾌락의 존재태로서의 성의 형태도 존재한다. 성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 거의 불가능한 일에 가까운 것임을 일찍이 간파하고 수긍해버린 K는 이 불가능한 게임의 두번째 표피에 도전하는데 그것은 바로 성의 관리인들 중 하나인 클람과의 면담이다. 그러나 이는 '성' 그 자체에 진입하는 거소가 마찬가지로 '외상적 중핵'의 두번째 껍질에 불과하며, 껍질이 그것이 가리고 있는 핵심과 다르지 않은 것임을 알아가는 좌절의 과정에 다름아니다.


2. '성'에 대한 적절하지도, 부적절하지도 않은 해석들

이 '성'에 대해서 해석자들은 무수한 해석들을 낳아왔다. 막스 브로트(그는 카프카의 친구이자 카프카의 유언을 거부하고 카프카의 유고를 정리해서 출판한 후원자이자 편집자였다.)는 '성'을 "카프카의 파우스트"라고 부르며 그것이 신의 심판과 은총, 신과의 실질적 단절, 원죄의 문제를 중심이라고 보았다. 이는 종교적 차원의 해석이며 마냥 틀린 말은 아니다. 체코 프라하 게토에서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난 카프카에게 종교라는 테마는 분명 그의 정신세계를 구성하는 주요한 근원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둘째는 '성'을 작가인 카프카가 자신의 부친에 대해 갖는 콤플렉스를 창조의 원천이라고 보는 심리학적 해석이다. 카프카의 아버지 헤르만 카프카는 프라하 게토 외곽의 자수성가한 장신구 가게 주인이었다. 그는 유대인 사회와 거리를 두면서 스스로 체코인이라고 공식선언을 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유대인 전통으로부터 아예 결별한 것도 아니었고 유대교 성전에 가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이 아버지 헤르만 카프카는 아무래도 어린 프란츠 카프카에겐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어린시절 아이의 두려움은 대상 자체보다는 자기 스스로에게 그 두려움을 돌리는 증상으로 되돌려지게 되는데, 이런 것이 카프카의 콤플렉스를 낳지 않았을까? 
아버지가 보기에 약골인데다 기대에 못미치는 존재였던 아들 프란츠 카프카는 어린시절에 늘 아버지의 몸이 세계지도를 대각선으로 가로지르고 있다고 상상하곤 했다. 

"저는 아버지의 몸으로 덮이지 않거나 아버지가 손발을 뻗어도 닿지 않는 곳에서만 살 수 있어요. 하지만 아버지가 워낙 거대해서 그런 곳은 별로 없죠."
- 아마도 <카프카의 편지> 중

카프카가 <성>에서 드러내는 권력 앞의 공포는 아버지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겠냐, 는 것이 카프카 연구자들의 주류적인 해석이다.

셋째는 극한 상황에 처한 현대인이 거대한 악마적 존재와의 대결에서 패배하고 좌절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라는 실존주의적 해석이다. 이는 우리가 실존주의 문학의 거장으로 부르는 장 폴 사르트르와 알베르 카뮈가 동시적으로 내린 평가이다. <성>에서 K가 격는 확실성과 불확실성, 희망과 불안, 이성과 비이성의 세계 속에서의 부조리한 권력과의 투쟁은 '존재의 본질' 앞에서의 불가해한 진실을 밝히는 투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 실존주의의 진정한 근거가 아닌가. 

그리고 네번째로 고향을 잃은 실향민으로서의 유태인 카프카가 K안에 자신의 욕망을 투사하고 있는 것이라는 시온주의적 차원의 외재적 해석도 있다. 카프카가 말년에 시온주의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 것, 그리고 카프카의 출생 배경과 프라하 게토 안에서 오래된 카발라적 전통의 유구함으로부터 이런 해석이 가능하다 하겠다. 


3. 카프카의 시간

<성>에서의 시간의 개념은 너무도 산만하고 복잡해서 좀처럼 가늠되지 않는다. 이것은 명백히 당대 유럽근대국가들을 지배했던 역사주의와 다원주의의 중요한 시간 관념으로서의 '진보적 시간 의식체계'의 해체이다. 물론 이 소설에서의 시간은 그 자체로 연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우리들이 통상적으로 의식적 세계 안에서 갖고있는 시간개념으로는 결코 분석이 불가능하다. 카프카의 세계에서는 아침 식사를 마치고 잠깐 있었는데 갑자기 성과 마을이 어둠에 잠기고, 겨울과 봄, 여름이 순식간에 교차하기도 한다. 이런 체계는 내게 카프카의 소설들을 무의식의 차원에서의 읽기를 도전케 한다. 
무엇을 읽든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보다 '대체 이것은 어떻게 쓴 것인가'에 관심이 가는 나로서는 작가의 창작 배경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무엇이 이처럼 시간성 자체의 혼돈과 해체로 이끌었는가? 그리고 작가의 욕망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명백한 정답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카프카를 포함해 아무도 없다. 다만 이제까지 무수한 카프카 연구자들은 이에 대해 무의식, 신화적 세계, 카발라 전통의 판타지성 등으로 명명해왔다. 확실히 이런 방식의 다각적인 작가론적 연구가 카프카의 작품세계가 구성하는 독특한 시간대를 설명할 수 있긴 하지만, 어느것 하나로 모든 것을 해명하는 것은 타당하지 못하다. 이런 차원에서 카프카는 해석 자체를 불허한다. 다만 우리는 카프카의 시간은 그가 겪은 음울하고 불안으로 가득찼던 어린 시절 프라하 게토에서의 삶, 유대인으로서의 불안한 정체성, 체코에서 독일어를 쓰며 독일 문학의 영향을 받은 불분명한 문화적 정체성의 형성, 그리고 밤셈족주의와 시온주의, 카발리스트와 랍비의 문화까지. 다방면의 문화적 시류가 어린 시절의 카프카의 정신세계에 많은 영향들로 구성되었음을 '짐작'할 수는 있겠다. 

Josefov로 알려진 카프카의 '좁고 동그란 세계'는 프라하의 구시가지 광장 변두리에서부터 강가까지 이어지는 어두침침하고 구불구불한 골목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이 인구 밀집지역은 몇개의 유대인 성전과 바로크 양식 건물들이 있었고 골목마다 쥐가 들끓었다고 한다. 또 그의 고향에는 하시디즘 학자들과 비밀스런 카발리스트, 천문학자, 점성가, 미친 랍비를 비롯한 신비주의자들과 몽상가들의 뼈와 정신이 묻혀있었다. 이런 축적된 시간대의 정신이 카프카의 작품세계에 녹아들어가 서유럽의 근대문학이 받아들인 역사주의와 진화주의의 의식체계가 카프카에게 와서는 완전히 해체된 것이 아닐까? 이후에 벤야민을 비롯한 '모더니즘'의 계열 위에 선 철학자들이 카프카를 들어 모더니즘 운운하는 것은 그의 작품이 그리고 있는 괴상하면서도 유쾌하게, 그리고 동시에 자기비하를 일삼는 그 독특한 공포의 언어세계가 그려내는 기괴한 세계 때문일 것이다. 카프카 이후에 카프카 문학에 대해 해석하는 여러 덮개들이 껍질을 벗으면서 최종적으로 카프카의 시간이 열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시간'은 모호할뿐더러 불확실하다. 사람들은 흔히 이 세계에 대해 '카프카스럽다'(kafkaesque)는 형용사를 붙이기도 한다. 이것은 뭐라고 꼭 집어 설명하기 어려운 이상한 분위기, '묘하게 으스스한'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지니는데 바로 이 모호함이 카프카적 리얼리즘의 세계를 드러내는 것은 아닐까? 
게오르그 루카치는 카프카를 일컬어 "미학적으로는 호소력이 있지만 퇴폐적인 모더니즘"이라고 비판했지만, 바로 그 비판의 이면에 당대 사xx의 리얼리즘 미학이 갖는 교조성이라는 진실이 벗겨지는 것은 아니었을까? 카프카 읽기의 위험함은 모더니스트로서의 카프카가 아닌 리얼리스트로서의 카프카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 '퇴폐적'이라는 모함이 더이상 그것의 질적 하락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은 카프카로부터 시작된 카프카적 리얼리즘의 효과가 아니었을까. 지금도 카프카의 시간은 시간대의 틈새들이 벌어질때마다 공공연히 표면 위로 부상한다.

4. 정치성

또한 <성>에서는 개인으로서의 K의 삶 자체가 정치로서 표면화되기도 한다. 정치적인 것의 대중화(일상화)가 아닌, 삶 자체의 정치화가 꾀해지는 것이다. 작품을 통해 역사와 세계에서 고립된 개인의 실존적 고통, 즉 근본적으로 비정치적이거나 혹은 반정치적인 삶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성>에서는 욕망과 권력의 관계에 대한 천착으로서만 그것이 드러난다. '성'은 권력의 중심이며 성 아래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포기하고 그것의 권위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다. 마을 사람들의 외적인 모습에서도 맹목적인 복종의 태도가 보인다. 마을에 도착한 다음 날 벌써 K는 마을 농부들의 모습에서 무기력과 고통의 기색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K마저도 마을 사람들과 다름없이 무의식적으로 권력에 종속되어 있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사실 나에겐 힘이 없어요. 우리끼리 말하자면 정말 아무런 힘이 없어요. 그래서 힘 있는 사람에겐 분명 당신 못지않게 존경심을 갖긴 하지만, 나는 당신처럼 솔직하지 못해 항상 그런 사실을 시인하려 들지 않을 뿐입니다."

권력 휘두르는대표 인물로 성의 관리인 소르티니가 등장할때 그는 공허하고 추하고 불공정하고 무자비한 권력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이에 저항하는 인간을 멸시하고 고립시키는 힘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일종의 관료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게 되는데, 아말리아가 성의 관리 소르티니의 요구를 거절한 사실이 마을 사람들에게 알려지자 오랫동안 다정하고 친했던 이웃들이 그녀의 아버지에게 맡긴 일감을 되찾아가고 그를 마을 소방대원 자리에서 쫓아내게 된다. 마을 사람들은 성의 명령없이도 자진해서 자발적으로 아말리아와 그녀의 가족을 멀리함으로써 성에 복종하게 된다. 작품이 내재한 스타일 자체로서 성과 마을이라는 시스템,이데올로기에 굴종하는 대중들의 자발성을 이처럼 절묘하게 (음울하며 잔인할 뿐만 아니라,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드러낸 소설이 있을까? 서사나 내용 안에 포섭된 목소리로가 아니라, 형식으로서 구사되는 이 지점이 바로 카프카의 모더니즘으로 지칭되는 또다른 특징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것은 카프카의 세계 안에 들어있던 중세적 전통들과 조우하게 된다.

5. 섹스공포와 자기혐오

<성>에는 기이한 사랑나눔의 장면이 등장하기도 한다. 이는 <소송>에서 K가 레니의 애무를 받는것과 비슷한 뉘앙스를 풍긴다. 요컨대 K가 헤렌호프에서 프리다와 함께 있을때, 

"그런데 측량사는 어디갔지요?" 주인이 물었다. 
(중략)
"그 측량사를 깜빡 잊고 있었군요." 프리다는 이렇게 말하며, K의 가슴에 그녀의 작은 발을 올려놓았다. "아마 벌써 나가 버렸을 거예요."
"거의 계속 현관에 있었지만 그 사람을 못봤어요." 주인이 말했다.
"하지만 이곳에는 없어요." 프리다는 쌀쌀맞게 말했다.
"아마 어디 숨어버렸을 겁니다. 내가 받은 인상으로는 그가 몇가지 일은 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주인이 말했다.
"하지만 그런 일을 할 정도로 대담해 보이지는 않았어요."라고 말하며, 프리다는 K의 가슴 위에 올려놓은 발을 더 세게 눌렀다. 아까는 전혀 깨닫지 못했는데, 그녀의 본성에는 자유로운 점이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느닷없이 웃음을 터뜨리며 이런 말을 했을때 그런면이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아마 이 밑에 숨어있을지도 모르죠." 그녀는 K쪽으로 몸을 굽혀 슬쩍 키스를 한 뒤 다시, 벌떡 몸을 일으키고는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여기에는 없어요."
(중략)
주인이 방에서 나가기가 무섭게 프리다는 벌써 전등을 꺼버리고 카운터 밑의 K 옆으로 왔다.
"내 사랑! 달콤한 내 사랑!" 그녀는 이렇게 속삭였으나, K의 몸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그녀는 사랑에 정신을 잃은 듯 벌렁 드러누운 채 두 팔을 쫙 벌렸다. 그녀의 행복한 사랑으로 시간은 한도 끝도 없는 것 같았고, 그녀는 노래를 한다기보다는 탄식하듯 소 가곡을 불렀다. 그러다가 K가 조용히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것을 보고 그녀는 화들짝 놀라 일어나더니, 마치 어린애처럼 그를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나오세요, 이 밑에 있다가 숨이 막혀 죽겠어요!"
두 사람은 껴안았고, 그녀의 자그마한 몸은 K의 손에서 불타고 있었다. 두 남녀는 두서너 걸음되는 거리를 정신없이 굴렀다. K는 계속 정신을 차려 이런 상태에서 빠져나오려고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둘은 클람의 방문에 쿵 하고 부딪힌 다음, 맥주와 그 밖의 오물이 흥건한 바닥에 누웠다. 거기서 두 사람의 호흡과 심장이 고동이 하나가 된 채 몇 시간이 흘러갔다. 그러는 동안 줄곧 K는 길을 헤매고 있거나, 또는 자기보다 앞서 아직 누구도 가본적이 없는 먼 타향에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공기조차 고향의 공기 성분과는 아주 다른 타향이었다. 그곳에서는 너무 낯설어 숨 막혀 죽을 지경이면서도 그곳의 어처구니 없는 유혹에 빠져 계속 가면서 길을 잃고 헤맬 수밖에 없다는 기분이 들었다.
(중략)
그러자 이 말을 확인이라도 하듯, 프리다는 K위에 쓰러지더니 마치 방에 두 사람 외에는 아무도 없다는 듯이 그에게 마구 키스를 퍼부었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K의 몸을여전히 껴안은 채 울면서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K는 두 손으로 프리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면서 여주인에게 물었다.

이처럼 <성>이나 <소송>에 등장하는 섹스는 K(또는 요제프K)를 숨막히게 할뿐만 아니라 기괴하기까지 하며, 여성주도적이다. 이런 점은 인물이 항상 남성의 시점으로 관찰되며, 여성의 행위가 대상화된다는 차원에서 페미니즘의 암시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면서 카프카는 신경증적으로 섹스묘사를 표현했는데, 이런 두 가지 특징에서 카프카가 여성이나 성으로부터도 공포나 혼란이 있는 세계를 드러냈음을 알 수 있다. 카프카 작품 속의 여성들은 스스로 어떤 '자아'라 할만한 주체성을 견지하진 못한채로 다만 K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유혹하는 존재이다. 요컨대 그녀들은 K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서만 상상적으로 존재(등장)한다. 섹스는 불쾌한 것이며, 혐오스러운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것은 끊임없이 다른 가면으로 위장하여 K를 유혹한다. 그리고는 사후에, 자기혐오를 낳는 것이다. 

6. 단절

K는 이제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모조리 끊어져버렸고 물론 과거 어느때보다도 자유롭게 되었으며, 보통때는 들어올 수 없는 이곳에서 얼마든지 내내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다른 사람은 얻기 어려운 자유를 쟁취한 듯 생각되었다. 또 아무도 그에게 손대거나 그를 쫓아낼 수 없고, 그에게 차마 말도 걸 수 없을거라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이런 확신도 강했는데 --- 이와 동시에 이러한 자유, 기다림, 신성불가침이야말로 가장 부질없고 절망적인 일이라 생각되기도 했다.
-p163, <성>


p.s.
아. 쓰면서 든 생각인데, 너무 큰 욕심을 벌인 것 같다. 온갖 상념들은 가득한데 궁 안에서 바쁘게 살다보니 이 고민들이 도무지 정리가 안된다. 다음주는 올빼미 놀이하러 멀리 가므로 셋째주를 기약하며.
* 책마을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9-10-21 10:59)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10-01-27
13:28:17 



병장 이 원 
  명교// 

프린트 했어요. 쳇. 좀더 읽어볼래요 (웃음) 2009-09-12
08:0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