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후기] 박원익, <근대문학의 종언과 환상문학의 종언> 읽기  
병장 김예찬   2009-08-13 14:38:55, 조회: 120, 추천:0 

택민님의 요청에 따라(예찬// 어제 첫 글을 올리고 나서 오늘까지 주로 원익님의 글을 읽었는데, 능력되시는 분들께 정리좀 부탁드립니다. 독해력이 딸려서인지 무지해서인지 반만 이해하고 넘어가는 부분들이 허다해서.. ) 이제까지 미뤄오고 있었던 작업을 한번 시작해보겠습니다. 제가 '능력 되시는 분'이라고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그나마 원익님의 글과 관련한 책들을 읽은 것이 좀 있으므로 조잡하게나마 정리가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 중입니다.


왜 이 글로 정했냐, 라고 물으신다면 현재 책마을에서 가장 흥미를 끌 수 있을만한(이미 흥미를 끌기도 했지만) 글이면서도 가장 오독 될 수 있는 글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원익님 본인은 스스로 이 글에 대해 그리 만족하지 않는 눈치인 것 같긴 하지만..


생각보다 작업이 빨리 끝난고로 그냥 묶어서 한번에 올려놓겠습니다. 이 글은 어디까지나 원익님의 <근대문학의 종언과 환상문학의 종언>이라는 글에 대한 제 스스로의 해석임으로, 오독과 오해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http://26.1.1.40:2007/bbs/zboard.php?id=02191&page=2&sn1=&divpage=2&category=2&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7540


(특히 2번 챕터, 고진의 칸트 독해에 관한 부분은 저 스스로 매우 편협한 이해만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아마 빼놓고 읽으셔도 무방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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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근대 문학의 종언'이 과연 무슨 뜻인가? 이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근대문학'이 어떻게 형성된 것인지 짚고 넘어가야한다. '근대문학이라는 자명한 대상 같은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런 뜻이다.

이를테면 일본의 국민작가이자, 근대 문학의 대표 주자라고 말할 수 있는 나츠메 소세키는 사실 생전에 일본 문단에서는 통속 작가로 취급받았다. 즉 그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순문학' 작가가 아니라 '대중문학'작가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수십년이 지난 오늘, 소세키는 일본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익히 알려진 근대 문학의 주류 작가다. 

이 것은 단지 나츠메 소세키 개인에 한정된 이야기는 아니다. 모든 근대문학은 사실 오늘 날 말하는 '서브컬쳐'에서 시작되었다. 근대 문학이 오늘처럼 '예술'로 인정받은 것은 고작 19세기에서 부터 가능해진 일이다. 한국 근대 문학 역시 마찬가지인데, 춘원 이광수가 <문학이란 하오>에서 말했던 것은 당시 주류 예술이었던 한문학에 대한 한글문학의 항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문학 역시 주류문학으로 힘을 발휘했던 것은 '과거 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제도적으로 장려되지 않았던 야담이나 고전소설은 때로는 정부에 의해 핍박받기까지 했던 서브컬쳐였고, 한글문학은 이러한 '이야기'와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한글문학이 오늘 날 '근대 문학'으로 올라설 수 있었던 것은 조선이 망하고 과거제도가 폐지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한 말에서 일제 강점기 동안 외국 사조의 유행과 더불어 발전한 한국의 '근대 문학'은 해방 이후 고등교육 제도와 성공적으로 결합하여 오늘 날 주류 예술로 우뚝 설 수 있었다. 결국, 오늘 날 우리가 '근대 문학'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결국 '역사적 생성물'인 것이다. 그리고 거칠게 봐서 '역사적 생성물'인 이상 그 것은 자신이 가진 일정한 역사적 역할을 마친다면, 또 역사의 흐름에 따라 '종말'을 맞을 수 밖에 없다. 이 것이 고진이 말하는 '근대문학의 종언'이다. 그러나 오늘 날 한국의 문인들과 지식인들은 고진의 이러한 주장이 마치 일본 문학의 위기 때문에 생겨난 즉흥적인 감흥이나, 혹은 전통적인 서사의 몰락과 새로운 매체의 등장 등과 관련한 포스트모던한 유행에 따라 이야기되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참고로 고진의 '근대 문학의 종언' 테제를 제대로 수용하고, 한국 문단의 이러한 태도에 문제 제기를 하고 나선 비평가가 바로 '조영일'이다. 그는 이미 고진의 이론을 토대로 <가라타니 고진과 한국 문학>, <한국 문학과 그 적들>이라는 두 권의 비평집을 펴냈고, 근간으로 한 권의 비평집을 더 내 총 '3부작'의 비평집을 완간할 계획이다. 


2.

<트랜스크리틱>은 가라타니 고진의 주저 중 하나다. 고진은 이 책에서 칸트의 철학과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독특하게 재해석해내며 '트랜스크리틱' Transcritiq을 실천한다. 고진이 해석하는 칸트의 문제의식은 '취미판단의 보편성'부터 시작한다. 이 것은 미에 대한 각기 다른 가치기준을 가진 복수의 주관들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모두에게 타당한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는가, 에 대한 질문이다. 여기서 대립되는 두 가지 견해가 마주치게 된다. 

하나는 고전주의다. 고전주의는 아름다움에 어떤 선천적이고 경험적인 규칙이 존재한다는 생각이다. 이를테면 다비드 상의 황금 비율이나, 원근법 같은 형식적인 부분이 모든 사람에게 타당하게 납득 될 수 있는 미의 기준과 연결된다는 이야기다. 그 반대의 의견은 낭만주의다. 이들은 예술에 있어서 각자의 자유로운 감정 표출이 우선시되어야하며, 그 어떤 규칙도 아름다움을 독단적으로 규정할 수 없다고 보았다. 실체적인 규칙을 거부하고 개개인 복수의 주관만을 미의 기준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은 단지 '아름다움과 예술의 영역'에 국한 된 것이 아니다. 이 것은 각각 보편성/합리론과 개별성/경험론이라는 인식론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로 제기되는 질문이다. <트랜스크리틱> 96p에는 "칸트가 초월론적 주관X를 말하는 것은 데카르트의 '동일적인 자기는 존재한다'는 명제(합리론)와 흄의 '동일적인 자기는 없다'는 반대명제(경험론)가 초래하는 이율배반이다."라는 문장이 있다. 칸트의 '초월론적 주관 X'는 바로 합리론과 경험론,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보편성과 개별성의 문제를 사유하면서 나타난 것이다.

칸트는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판단력 비판>에서 '취미판단의 보편성' 문제를 이야기하는데, 이는 '보편성'이란 결코 경험적인 방식으로 획득될 수 없다는 결론으로 향한다. 아름다움을 정의할 때 고전주의는 '경험적으로 확증가능한 규칙'을 찾고, 낭만주의는 '개개인의 경험'을 아예 미의 기준으로 삼는다. 둘 다 '경험적'으로 미의 기준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칸트는 이처럼 경험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일반성'을 이끌어 낼 수는 있어도, '보편성'에는 이를 수 없다고 말한다. 경험적으로 검증된 일반성의 규칙은 항상 '반증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칸트의 고민은 '보편성'을 어떻게 사유하느냐로 나아간다.

"중요한 것은 칸트가 '보편성'을 추구했을 때, 불가피하게 '타자'를 도입해야 했다는 것, 그리고 그 타자는 공동주관성이나 공통감각에서 나와 동일화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러한 [초월론적인] 타자는 '상대주의'를 초래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만이 보편성을 가능하게 한다. 그것은 초월적인 타자(신)가 아니라 초월론적인 타자이다." - <트랜스크리틱> 99p 

여기서 고진은 '타자'를 '보편성'의 필요조건으로 제시하고 있다. '공동주관성'이나 '공통감각'은 쉽게 말해서 '공유된 언어 게임의 규칙'이다. 따라서 같은 규칙을 공유하지 않은 상대만이 진정한 '타자'로 나타난다.  (이 부분에 대해서 나는 < [6월베스트-독서후기] 그저 사랑하기 - 공자, 예수, 붓다, 소크라테스의 경우>라는 글에서 이미 정리한 바가 있다. 물론 이 글에 대하여 박원익님의 훌륭한 지적<[독서후기]김예찬,1421번글<그저 사랑하기>에 대해>을 참조하는 편이 좋겠다.)

또, 고진은 '초월적'과 '초월론적'을 대립시킨다. '초월적 타자'는 말 그대로, 절대적 진리(신)이다. 만약 이러한 '초월적 타자'를 보편성의 근거로 삼는다면 철학이 아니라 신학일 것이다. '초월론적'은 그와 다른 개념이다. 초월론적 태도라는 것은 '우리가 의식하지 않는, 경험에 선행하는 형식을 밝은 곳으로 드러내는 일을 의미한다.' 고진은 뒤샹의 '샘'을 예로 드는데, 우리가 흔히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양변기는 미술관이라는 전혀 새로운 장소에서 등장함으로써 변기가 아닌, 예술품 '샘'이 된다. 변기에 대한 일상적 관심을 괄호에 넣기 때문에(초월론적 환원) 변기는 예술품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인데, 고진의 주장에 따르면 이 '괄호에 넣었다는 것' 자체가 잊혀지고 있다.  

이제 우리는 이 글에 대해 다시 읽어볼 재료들을 다 갖추게 되었다. "미적/과학적/도덕적으로 엄밀하게 나누어진 영역의 '대상'의 자명성은, 단지 그 대상과 무관한 것으로 보이는 요소들을 환원하는 어떤 반성적 태도에 의해 존립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칸트는 '영역'이라는 것 자체가 초월론적 환원(괄호넣기)에 의해 존재한다고 말한다.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칸트는 예술성이 객관적인 대상에 존재한다는 것(고전주의)도 의심하고, 한편으로는 예술성이 주관성에 존재한다는 것(낭만주의)도 의심했다. 칸트가 가져오는 주관성은 이러한 '의심'에서 시작되고, 그 것은 끊임없이 규범화되는 예술을, 예술을 예술이게 하는 원초의 장으로 돌려놓는다. 칸트가 인정하지 않는 것은 미적 '영역'이라는 것이 그 자체로 존재한다는 사고이다. 우리는 사물을 판단할 때 최소한 세 가지 판단을 동시에 행한다. 인식적/(참, 거짓), 도덕적(선, 악), 미적(쾌, 불쾌)라는 세 가지 판단인데, 이 판단들은 혼합되어 있기 때문에 확연히 구별되지 않는다. 이 때, 우리는 이 세 가지 판단 중에 한 가지를 제외한 다른 영역들을 괄호에 넣음으로(생각하지 않음으로) 하나의 '영역의 대상'을 떠올릴 수 있게 된다. 마치 변기가 예술품이라는 대상이 되는 것 처럼. 이 것이 바로 초월론적 태도=반성적 태도이다.

다시 정리하자면, 칸트의 '주관성'은 경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것은 無와 다름 없다. 그러나 이런 無는 어떤 작용으로 존재한다. "이러한 태도를 초래하는 혹은 강제하는, 유일무이한 단독적 상황 내지는 타자성他者性", "물物자체Thing itself"는 바로 그 '작용', 혹은 '명령'과 연관되는 것이다.


3.


가라타니 고진이 <근대 문학의 종언>을 이야기하게 된 것은 앞서 말한 '초월론적'의 개념과 무관하지 않다. 고진은 근대 문학이 현실을 사유하고 재구성할 수 있는 역사적 힘을 상실하고 나서부터, 사례를 들어 말하자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등장에서 부터 근대 문학의 종언을 예감하게 되었다. 하루키 소설은 하루키 본인이 이야기하듯("내가 여기에 써보일 수 있는 것은 단지 리스트이다. 소설도 문학도 아니며 예술도 아니다") 그저 '풍경'에 불과하다. 하루키의 많은 소설이 60년대 일본 학생 운동과 시간적 배경을 공유함에도 불구하고, 하루키에게 있어서 60년대라는 시간적 배경은 어떤 역사 의식의 표현이 아니라 단순히 '풍경'으로 전도된다. 물론 하루키가 60년대가 가지는 의미를 모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의미를 잘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이야 말로 하루키의 장기다. 하루키는 메인컬쳐와 서브컬쳐, 정치적 사건과 풍속적 사건을 우선 순위 없이 나열하며 시대를 '모르는 척'한다. 그렇다면 하루키는 이런 '모르는 척'을 통해 무엇을 얻어내는 것일까? 


하루키의 소설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나'다. 하루키의 '나'들은 무의미한 것에 이유 없이 열중하면서 의미나 목적을 가지고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는 타인을 조소하고, 경멸하면서, 스스로 자조하는 인물들이다. 하루키의 '나'들은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을 괄호에 넣는다. 이를테면, '초월론적 자기'인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다시 칸트로 돌아온다. 칸트의 '괄호 넣기'는 대상을 출현시킨다. 시 문학에서 흔히 등장하는 '낯설게 하기'란 바로 친숙한 사물을 괄호에 넣음으로, 새로운 시적 대상을 가져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괄호 넣기'가 일상화되면 우리는 괄호에 넣는다는 작용 자체를 잊어버리고, 마치 대상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해버린다. 하루키는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을 괄호에 넣어버림으로, 정말로 중요한 것들 - 이를테면 역사/사회/윤리 등의 것들 - 마저 그저 '풍경'으로, 어떤 미적 감상 대상으로 만든다. 그러한 하루키 문학의 유행이야 말로 '근대 문학'이 담지했던 '역사적 역할'이 소멸했다는 증거고, 고진은 이러한 이유로 '근대 문학의 종언'을 이야기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하루키 소설의 '풍경' 자체는 근대 문학의 기원에서 부터 존재했던 것이다. 근대 문학이 그 이전의 것들과 가지는 결정적인 차이는 '리얼리즘'의 등장이다. 게오르그 루카치는 저 유명한 <소설의 이론> 첫 문장을 통해 리얼리즘의 등장을 예고한다. 책마을 (예) 황민우님의 글을 인용해보자.



" '별이 총총이 떠있는 하늘만을 바라보며 나아갈 길을 알 수 있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 시대인가.'

별은 신성(신들의 섭리)를 말합니다. 신들이 보낸 여행자들을 위한 길잡이지요. 그러므로 별을 보고 자신의 길을 찾는 사람은 신에게 자신을 맡기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러므로해서 나는 그들(별 - 신과의 교감 - 즉 총체성)의 도움으로 영웅의 도약을 할수 있고 길을 잡을 수 있는 행복함에 젖을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시대는 그야말로 '총체성'의 시대입니다. 그리스문화처럼요.

하지만 우리는 어떻습니까? 별이 총총이 떠있는 하늘을 보고, 별자리의 운행을 생각하여 지금이 몇시인지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것은 현대의 우리들의 자화상입니다. 신들로부터 결별한 인간들의 '상실의 세기' 루카치는 이 단 한문장으로 총체성의 모든것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 책마을 (예) 황민우 푸른꽃의 문학기행 - 루카치와 <소설의 이론>



중세적 세계관에서는 '현실이나 세계의 일상적 사건이나 개물에는 어떤 보편적 의미'가 존재한다는 알레고리적 사고 방식이 존재한다. 이러한 사고관에서 '별은 신들이 보낸 길잡이'다. 세계의 모든 것에는 무언가 의미가 있는 것이고, 알레고리(우의)는 그 것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근대의 리얼리즘적 세계관에서는 그렇지 않다. 근대 리얼리즘 문학은 어떤 '의미'를 다루지 않는다. 어떠한 가치 판단도 없이 그저 개개의 사물이나 인물, 배경과 같은 디테일한 부분들을 담담히 서술함으로써 그 것으로 일반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재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것은 대한민국의 고등교육 문학 과정에서는 "문학은 독자들이 작품 속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나가는 탐색 과정이며,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사회를 바라보는 눈과 지혜를 얻어나간다"는 교양으로서의 문학으로 취급 받는다. 이미 리얼리즘이 가지고 있었던 혁신성은, 한국 고등교육에서 일반화 되고, 보수적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근대 문학'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혹은 가진다고 생각하는) 작품들은 일상을 재현하며 가치 판단에 괄호를 넣는 리얼리즘 작품들이 아니다. 정말로 리얼Real한 것은 엄밀한 사유를 통한 알레고리로 보여지는 작품들이다. 오에 겐자부로나 카프카, 브레히트의 서사극은 이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오에 겐자부로의 작품에서는(대표적으로 <만원원년의 풋볼>) 이를테면 이름, 지명, 시간과 같은 고유명이 사라진다. <만원원년의 풋볼>의 공간적 배경은 그냥 '골짜기 마을'이다. 그러나 이 '골짜기 마을'은 특정한 지역을 말한다기 보다는 하나의 작은 우주(세계의 축소판)라고 보아야할 것이다. 두 주인공 미쓰사부로와 다카시라는 이름은 고유명으로 주어진 것 같지만, 사실 한자 뜻을 파헤쳐 보면 고유명이라기 보다는 타입명이라고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한국어 이름으로 치자면, '김소심'과 '이대담'이라는 이름은 고유명이라기 보다는 타입명이 아닌가?) 작품의 시간적 배경은 1960년대이지만, 이러한 시간대는 1860년대와 겹치면서 작품의 시간적 배경은 특정 시간 그 자체라기 보다는 '역사'로 나타난다. 오에 겐자부로는 이런 수법으로 리얼리즘 문학에서 일탈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러한 일탈은 직접적으로 '역사'나 '의미'로 다가가기 때문에 오히려 요즘 문학에서는 '촌스러운' 것으로 치부되기 일 수다. (그래서인지 잘 안팔린다.)


오늘 날 기성 문단이 취급하는 '순문학'은 이러한 일탈을 허용하지 않고 예술 본위의 심미적 태도로 돌아간다. 이러한 태도는 세계를 유의미한 사건들의 총체가 아닌, 작중 개인들이 그저 살아가고 있는 '풍경'으로 대한다. 물론 심미적 태도의 작품들도 나름의 개성을 가지고, 낭만적 로맨스를 보여주기도 하고, 때로는 사회적 메시지를 던지기도 하면서 다양한 문학 작품들을 보여준다. 그러나 여기엔 근대 문학이 그 기원에서 보여주었던 힘은 사라져있다. 그 힘은 나츠메 소세키가 보여주었던 '나'(내면)의 발견이다. 소세키는 현실에서 발생하는 개인적, 사회적 모순에서 자신의 '내면'을 발견했고, 세계를 바라보는 창으로서 문학을 통해 그 모순에 대항해 나갔다. 오에 겐자부로는 형식화되고 제도화되는 리얼리즘 문학에 대한 반발로 '알레고리'를 되살렸지만, 하루키 이후의 문학에서는 오에가 보여주었던 '세계와 나'는 사라지고, '(세계) / 나'만 남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더 문제적인 것은 이러한 태도를 낳았던 시대적 사건들이 망각되고, 이러한 심미적 태도가 '원래의 순문학'으로 여겨지면서 제도화로 나타나는 전도 과정이다. 이러한 한에서 순문학에 대한 관심은, 그저 국가적으로 권장되는 보수적인 의미에서 '교양으로서의 문학' 이상의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왔다고 해서 <근대문학의 종언>이라는 고진의 테제를 곧바로 기성 문단 해체의 깃발로 삼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오히려 출판자본과 고등교육 제도, 문단이라는 삼각 고리로 연결된 지금의 문학제도야 말로 쉽게 변경되거나 제거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여기서 <근대문학의 종언>이라는 선언이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지금의 문학제도를 대체할 무언가를 제시할 필요가 있다.



4.


여기서 이야기를 되돌려, 맨 첫 글에서 이야기했던 비평가 '조영일'로 돌아가보자. 가라타니 고진의 테제를 받아들여 '한국 (문단) 문학'에 대해 가열찬 비판을 전개하고 있는 조영일은 그의 두번째 비평집 <한국문학과 그 적들> 서문에서 다음과 같은 요지의 이야기를 한다. 


조영일 said

"(첫 글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문단문학이 한문학을 제치고 한국문학의 장에서 주도권을 잡은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그 전까지는 지금의 근대 문학 역시 서브문학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문단 문학이 계속해서 헤게모니를 쥐고 있으리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오늘 날 종언에 이른 것은 '문단 문학'이지, 한국 문학 전반은 아니다. (조영일의 생각에는) 한국문학은 1)문단문학(순문학), 2)비문단문학(서브문학/장르문학), 3)번역문학, 4)에세이의 네 가지 형태를 하고 있다. 여기서 위기를 맞은 것은 1)문단문학이다. 문단문학은 제도적으로 막강한 문화적 권위를 행사하면서 2),3),4)의 영역에 대해 너무나 무관심했다. 이제 1)의 시대는 끝났다. (역시 조영일의 생각에는) 그러나 기존 문단 시스템과 무관한 곳에서 각자의 활동 영역을 만들어가고 있는 젊은 문학도들(이른바 서브문학 씬)에겐 기대를 걸만 하다. 만약 내기를 한다면 '문단문학의 부활'보다 '서브문학의 도약'에 베팅하겠다. 그리고 서브 문학이 도약하기 위해선, 기존 문단 시스템에 자신을 적응시킬 것이 아니라 자신들에 걸맞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자신들만의 문학공간(동인지든 잡지든 웹진이든)에서 자신들만의 시스템을 만들어라. 지금 오고 있으며, 또 앞으로 올 그대들이여, 한국문학은 당신들의 손에 있으니, 한국의 문학청년들이여 단결하라!"


한마디로 '지금의 문학제도를 대체할 무언가'로 '서브 문학의 새로운 젊은 문학도들'에게 기대를 걸겠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박원익님의 이 글은 상당 부분 조영일의 이러한 주장에 대한 비판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그 비판의 근거로 '책마을'의 환상 문학 논의를 꺼내든다. 



책마을에서 벌어졌던 환상문학에 대한 논의(이는 라이트노벨까지 포괄하여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를 잘 살펴 본다면, 우리들은 환상문학에서도 동일한 종언론이 이야기되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다. 원익님의 이 글이 거의 6개월 전에 쓰여졌다는 것을 고려하면 상당히 재미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홍령건님의 '[내글내생각]환상문학에 대한 생각-3-, -4-'을 잠깐 인용해보도록하겠다. 



"앞서 말한 5대작가들은 저마다의 활동을 나름대로 펼치고는 있었으나, 그들의 인기는 그들의 작품에만 유효할뿐, 판타지 시장에는 크나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판타지 시장에서도 나름대로의 좋은 판타지 소설들(필자가 생각하기로는 그때 당시 윤현승의 하얀늑대들등이 있었던것 같다)이 있었지만 역부족이었다. 만약 초창기 시대, 호평을 받았던 하얀로나프강이나, 바람의 마도사, 옥스타칼니스의 아이들 등을 집필했던 작가들이 계속해서 글을  썼다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궁금한 점이 있다. 결국 판타지 시장은 하향세를 이루게 되고 점점 몰락의 길을 접어들어가 이제는 본연의 목적을 잃어버린 글들이 넘쳐나고 있는 것 같다. 옛날 그때로 돌아갈수만 있다면 돌아가고 싶지만, 이미 너무 안드로메다로 와버린 만큼, 필자는 오늘도 이영도의 작품을 기다리면서 옛 향수에 젖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보니 이렇다 저렇다 할 비평의 여과기를 통과할 여유 없이 재미를 위주로 무섭게 판타지들이 양산되기 시작하고, 판타지는 어느새 가볍게 읽어버리는 소설로 변하고 말았다. 당시 판타지는 주류문학이 아닌(물론 지금도 아니지만) 주류로 편입하려는 비주류 문학이었는데 이러한 사태가 발생함으로서 완전히 비주류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어느새, 판타지 소설들은 옛날 그 휘황찬란하던 판타지 시대가 아닌 라이트 노벨류로 편입이 되버리고 이제는 자신의 정체성까지 잃어버린 소설이 되어가고 있는 것만 같아 안타깝기만 하다." 



                                                      - 홍령건, [내글내생각]환상문학에 대한 생각-3-, -4-



령건님은 이미 '이영도/전민희 - 초창기 작가군 - 사이케델리아/검마전 - 판타지물의 양적 성장(거품) - 몰락기(라이트노벨로 흡수에 대한 안타까움)'라는 도식을 세워두고 글을 전개하고 있다. 이는 원익님이 위에 서술한 바와 거의 유사한 바다. 


"다음과 같은 불평들. 우선, 오늘날 생산되는 범용한 텍스트들이, 가령 이영도의 그것과 같은, 전범적인 작품들에 미치지 못한다. 첫째 문제의식은 이렇다: <즉 획일적인 방식으로 재생산된 고착화된 세계관 속에서, <환상문학>은 기원적인 장르적 힘을 상실했으며, 앞으로의 충실한 독자층들을 상실할지도 모른다는 생각.>그러나 다음과 같은 포기할 수 없는 대의야말로, 문제를 더욱 난국으로 몰고간다: <'장르' 그 자체의 잠재성은 여전히 유효하며 결코 포기될 수 없는 것이며, 이는 문명과 인간조건에 대한 일정한 사유를 담지 못하는 시드 노벨이나 기타 추리, 공포 장르와 변별되어야만 한다.>"


이는 '근대 문학의 종언'을 받아들이는 입장과 그대로 포개진다.  " '문단'을 가지지 않은, 그 대신 아나키적인 웹진과 사이버 공동체를 가지고 있는 <환상문학> 공동체(?) 내에서조차, 동일한 <종언담론>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은 꽤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이러한 '환상문학의 종언'에 대해 원익님은 자신들의 문단(권위)을 가지고 있지 못한 아나키한 환상 문학 공동체의 '불만'을 읽어낸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새로운 권위에 대한 상상'을 대안점으로 제시한다. "권위 바깥의, 전복적 권위를 유효하게 창출해낼 수 있는 집단적인 '힘'만이 그러한 아나키를 단순히 이성적일 뿐만이 아니라 현실적인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얼마전 원익님이 쓴 글([추천글-내글내생각] 대한민국의 88만원 세대여 단결하라!)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새로운 권위의 창출', 아버지(문단)의 권위가 사라졌다면 '아들'(서브문학)이 권위를 가져오면 되는 것이 아니겠냐는 주장과 연결된다.


이처럼 조영일이 기대를 걸고 있는 '문단 외부' 역시 동일한 종언 담론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원익님은 조영일(혹은 다른 비판자들)의 문제제기 -  혹자들은 아직도 기성문단이 불합리한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그것이 유일한 문제인 양 얘기한다. - 에 대해 '자유주의적인 어리석음'이라고 일갈한다. 그리고 이는 '가라타니 고진의 사유 자체와 무관한 것'이라고 말한다. (고진-조영일의 일개 독자인 나로서는, 원익님의 이토록 담대한 선언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조영일은 고진의 주저들을 번역한 이른바 '고진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원익님에 있어서 '온전한 문학'이란,  기존의 문단 문학을 대체할 만한 권위와 제도를 갖춘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것이 부재한 지금 '문단 문학' 뿐 아니라 한국 문학의 그 어디에도 '베팅할 만한' 것은 없다. 게다가 '문학적 사유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라이트노벨이라니! 이 것은 그저 상품일 뿐 아닌가. (조영일은 최근 문단 문학의 선수인 박민규보다는 일본의 마이조 오타로를 비롯한 라이트노벨 작가들에 대한 모종의 기대감을 언급하고 있다.) 


원익님이 보기에 조영일(혹은 그 외 누군가들)의 착각은 '근대 문학의 종언'을 이야기하면서도, 결국에는 '모든 것은 문단 문학 때문이다'라고 책임을 전가하며 '새로운 문학의 등장'에 기대를 건다는 점이다. 이러한 태도는 결국 문학에 대한 오래된 믿음(문학은 살아있다!)을 변주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문학은 벌써 죽었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해 심각하게 다시 사유해 보아야 할 것이다.




상병 정택민 
  한번 썼던 댓글이 로그아웃되면서 지워졌습니다. 이거 주의해야 겠군요. 다시 씁니다. 
매듭을 한번 푼 것 만으로도 글이 한결 이해하기 쉬워졌습니다. 아주 재밌는데요. 

'그러나 오늘 날 한국의 문인들과 지식인들은 고진의 이러한 주장이 마치 일본 문학의 위기 때문에 생겨난 즉흥적인 감흥이나, 혹은 전통적인 서사의 몰락과 새로운 매체의 등장 등과 관련한 포스트모던한 유행에 따라 이야기되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그러니까, 제 역할을 다하고 자연스레 스러져 가는 노장(老將)에게 신무기를 들먹이며 패배자의 낙인을 찍는 느낌이군요. 이거 억울한데요. 
왠지 모르게 어제 우리가 이야기했던 동석님과 저와 박작가의 글쓰는 스타일이 생각납니다. 동석님과 저는 스스로 종언의 길을 걷고 있었는데 뜬금없이 박작가가 나타나서 우리를 아류로 만들어버린 듯한 느낌? 아하하하. 저에게, 원익님의 글은 예찬씨의 도움으로 인해 재미가 한껏 증폭되었습니다. 캄~!사합니다. 2009-08-12
16:29:15


상병 홍령건 
  그렇군요. 종언이란 역사의 흐름과도 관련이 있었던거군요. 근대문학이 종말을 맞으면 다른 문학이 등장하는 거겠죠? 2009-08-12
18:40:51
  

상병 박재현 
  그렇지만 그 발언에 실린 고진의 어조며 뉘앙스는 분명 쓸쓸하고도 쓸쓸했죠... 2009-08-13
07:18:50
  

병장 김예찬 
  문제는 그 '다른 문학'이 지금 어떤 상황이고, 어디까지 올 수 있을까의 문제겠죠. 원익님이 결론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손 쉽게 '다른 문학'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2009-08-13
09:39:20


병장 김예찬 
  '초월론적'의 개념에 대해 보충 설명하자면, 수학은 분석 판단이 아니라 '선험적 종합판단'이라고 이야기하는 칸트의 주장을 참고 할 수 있겠습니다. 

'7+5=12'에서 주어는 '7과 5의 합'이고 술어는 '12'라고 했을 때, 수학을 분석판단이라고 한다면 '7+5'라는 주어 '속'에 이미 '12'라는 결과가 필연적으로 잠재되어 있다. 그러나 '5+7'이 12라는 것이 가능하긴 하지만, 이는 우리가 12를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어린 아이의 입장으로 되돌아가서 생각해 봤을 때, 어린 아이에게 '5'와 '7'은 '모르는' 것이다. 선험적인 직관 능력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숫자를 인식하고 배울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직관 역시 경험적이고, 실체로서 관찰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 것은 경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 것들은 무無지만, 그러나 그것들은 어떤 '작용'으로 존재한다. 2009-08-13
08:42:41


상병 홍령건 
  음 머릿속에 문자의 폭풍이 휘몰아치네요. 그러니까 예술을 보는 입장에서 칸트는 초월적 태도, 죽 어떠한 작용을 하는 것을 중요시 여긴다 인가요? 음 어렵네요. 2009-08-13
10:05:31
  


병장 김예찬 
  간단히 말해서 예술 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물을 볼 때 우리는 '초월론적' 태도를 취하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고진이 해석하는) 칸트가 밝힌 것은 바로 이러한 초월론적 구조구요. 우리가 어떤 사물을 보고 이 것이 무엇이다, 라고 판단하게 되는 것은 이러한 초월론적 구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죠. 

"선험적인 직관 능력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숫자를 인식하고 배울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직관 역시 경험적이고, 실체로서 관찰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 것은 경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 것들은 무無지만, 그러나 그것들은 어떤 '작용'으로 존재한다." 

이 것이 바로 초월론적 구조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8-24
18:22:03 



병장 차종기 
  으헤, 잘읽을께요. 2009-08-13
14:40:58
  



일병 심현주 
  읽던게 어디로 사라졌지 했더니 합본이 탄생했네요. 잘 보겠습니다. 2009-08-13
14:52:38
  



상병 양제열 
  잘 읽었어요. 몇 가지 드는 생각이 드는데... 

우선, 서브문학이 기존 문단을 대체할만한 권위를 갖추려면 두터운 작가층이나 다양한 작품도 중요하겠지만, 평론가들의 지원사격이 필수적일 것 같거든요. 평론가들이 나츠메 소세키나 이광수를 '순문학 작가'로 정의하고 지원해주는 활동을 하지 않았다면 이들은 '대중문학 작가'로 풍속사에 이름을 올리는 것에 그치지 않을까요. 

환상문학 씬의 위기는 작가는 많은데 평론가는 거의 없는 구조 때문은 아닐까요. 고만고만해 보이는 작품들 가운데 가능성 보이는 작가를 지원해 주는 과정-독자들에게 작가를 소개하고, 왜 이 작가의 작품이 좋은지 설명하는-에서 작가와 평론가가 같이 커갈수도 있고, 그 과정에서 권위가 생길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어쩌면 또다른 이어령이나 황석영을 얻을 수도 있겠죠. 

덧붙여, 원익님의 제안, 즉 [아버지(문단)의 권위가 사라졌다면 '아들'(서브문학)이 권위를 가져오면 되는 것이 아니겠냐]에 대해서 질문을 하나 드립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권위를 가져오는 게 제가 보기엔 부친살해를 생각나게 하거든요.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권위를 가져온 아들은 또 다른 아버지가 되지 않을까요. 아버지처럼 안 살겠다고 이 악물고 다짐하던 아들이 결국 아버지를 닮아가는 것처럼요. 물론 우리의 후대는 또다시 아들이 되어 제 나름의 권위를 세울테지만... 결국 같은 패턴의 반복이 아닐지 궁금하네요. 2009-08-13
15:40:24
  



상병 양제열 
  아, 근데요... 그, 그리스 신화 초창기 이야기가 막 머릿속에서 맴도는데 정확히 기억이 안납니다. 할아버지(?)-아버지(?)-아들(제우스) 삼대로 이어지는 이야기였는데 할아버지, 아버지 이름을 모르겠어요. 아버지가 시간의 신이었던 거 같은데.... 아시는 분??(웃음) 2009-08-13
15:43:00
  



병장 김예찬 
  제열 // 저도 마찬가지의 생각입니다. 서브 문학에서 '비평가'가 나와야하고, '이론'이 생겨나고 '담론'이 만들어져야겠죠. 문제는 '분석'에서 '비평'으로 넘어가는 지점이 쉽지 않다는 것에 있는 것 같습니다. 

두번째로, 근대 문학은 분명 어떤 역사적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습니다. 그리고 역사는 어떤 방향으로 굴러가긴 해야하는 것이겠죠. 아니, 어떤 방향으로든 굴러갈 것입니다. 아버지가 사라졌다고 그저 (오타쿠) 소년으로 남을 수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어떤 아버지가 될지는 몰라도, 어쨌든 새로운 아버지 상을 만들어내야하지 않을까요. 


원익님의 글을 다시 빌리자면.. 

"사실 거대서사가 종말하고, 아무도 근대민족국가의 기획이나 혁명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건, '대타자'(우리에게 외적인 권위로 경험되는 각종 담론과 상징적 제도들)라는 상징적 영역이, 혹은 대타자를 지탱했던 "아버지"의 권위가 붕괴했다는 이야기나 다름 아닙니다. 대타자가 붕괴하다고 해서 주체가 해방되는 건 아니지요. 오히려 대타자는, 라캉이 말한 '실재'에 곧바로 노출됩니다. 문제는 "거대서사"가 붕괴했다는 또 다른 거대서사에 탐닉하면서, 은연 중에 오타쿠라는 남성 집단을 특권화하고, 일본이라는 민족적 특수성에 우위를 은밀하게 부여하는 게 아니라, 정확히, 그러한 거대서사를 가로지를 수 있는 '행위'가 무엇인지를 모색해보는 것이지요." 

- 한 줌의 도덕, 동물화하는 책마을 2009-08-13
15:52:09




상병 홍령건 
  와 제글이 인용됐습니다.허헛 그건 그렇고 이렇게 한번에 쭉 정리된 글을 읽으니 머릿속에서 헝클어졌던 실타래가 풀어지는 듯한 느낌이네요. 분석에서 비평으로 넘어가는 시점 중요하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장르문학에서는 그렇게 되지 못했다는 점이 아쉽네요. 여러 시도가 있었지만 말입니다. 좀 더 그런 시도가 활발해지고 힘을 얻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2009-08-13
18:54:31
  



상병 양제열 
  답변 감사합니다. (오타쿠) 소년으로 남을 수는 없지 않느냐는 말에 가슴이 뜨끔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