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 지승인과 홍명교의 욕망을 위해, 88만원 세대의 욕망을 위해.  
상병 박원익  [Homepage]  2009-08-10 15:54:19, 조회: 238, 추천:6 

1. 세대담론을 넘어서기

  최근에 한겨레21에 실린 한 우울한 기사를 읽었습니다. <사랑은 88만원보다 비싸다>라는 제목의 기사였는데요. 본래 청춘남녀의 내밀한 사적영역이었던 연애조차 각종 알바와 스펙 쌓기의 뒷전에 밀려나버리는 현상이 전면화되었다는 겁니다. 오늘날 연애는 감당하기 힘든 '비용'이 되어버렸습니다. 연애 불능으로 대표되는 "초식남"과 "철벽녀"라는 신조어는 신자유주의적 경쟁에 의해 식민화된 젊은이들의 삶의 징후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가난하다고 사랑마저 가난할 수 있겠는가"라는 싯구는 이제 옛말이 되었다는 것이죠. 사실 저는 이러한 기사의 내용이 얼마나 우리에게 동정적이든 간에, 그 자체로 허위라고 생각합니다. 혹돈한 시련 앞에서도, 우리들의 연애전선에 이상이 없다는 게 아니라, 그 정도 시련으로 이상이 생길 연애전선이라면 애초에 지킬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연애는 예나 지금이나 물론 중간계층의 전유물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히려 지금은 그것의 물적 토대가 탄탄한 편이지요. 그리고 연애의 물적토대를 갖춘 사람들에게조차도 '연애'가 사치가 되고 비용으로 계산된다면, 그것이 실로 오늘날의 문제라면, 저는 가차 없이 그러한 중간계층은 구제불능이라고 단언하고 싶습니다. 그들이 '신자유주의'라는 어떤 사회경제적 구조에 의해 고통받든 거기에 대해 일말의 동정심도 없는 것이지요.(물론 정말로 경제적 궁핍 때문에 헤어지거나 파탄에 이르는 커플들의 곤궁을 모르는 척하는 건 아닙니다) 그동안의 어떤 이미지와 달리, 사실 이게 저의 정확한 입장입니다. 

  그렇다면 누군가 "20대, 20대만을 규정하고, 20대의 목소리다. 20대의 단결력이다, 이런것을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생각됩니다. 또다른 매몰일 뿐이지 않겠습니까."라고 저에게 말한다면, 저는 이러한 반문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88만원 세대'나 '20대'라는 세대 규정 자체가 원래 사회적인 매몰과정으로부터 탄생했다고 분명히 말했기 때문입니다. 세대담론이란 원래 그러한 매몰의 징후입니다. 그러므로 '20대'라는 자명한 범주를 가지고, 세대담론으로의 매몰을 논하는 것은 그 자체로 자기연민으로 가득 찬 악순환을 반복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 분은 "우리의 하나하나의 목소리가 묻히지 않고 뭉치는" 게 관건이라고 말했지만, 저는 이것이야말로 최악의 세대담론이라고 생각합니다. 88만원세대라는 범주 자체는 허위적인 저널리즘적 범주에 불과합니다. 마치 우리의 연애를 연민하는 저 기사처럼 말이지요. 우리가 그것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그 이름을 궁극적으로 '부정'하는 것입니다. 아마 그 분에게는, 제가 하고자 했던 말이 "불쌍한 20대여 뭉쳐라!"라는 감상적 구호로 들렸나 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20대 혹은 88만원 세대라는 선정적인 용어를, 궁극적으로 다른 이름으로 대체하는 것입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가령 막수에게 있어 '프롤레타리아'는 결코 사회학적-저널리즘적 연구에서 금방 유행했다가 사라지는, 급조된 조어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우연한 사회적 정황과 자리들, 그리고 희화화된 연애풍속과 무관한, 궁극적으로 보편적인 주체의 '진리'인 것이지요. 

  물론 우리 세대 대다수는 프롤레타리아라는 개념과 한참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주체를 도래하게 하기 위해, 88만원 세대라는 '급조된 기치' 아래 모인 우리와 같은 어중이 떠중이들이 당장 할 수 있는 게 무엇이냐는 겁니다. 사실 저희에게 대단한 역사적 사명 같은 게 있는 건 아닙니다. 다만, 우리를 둘러싼 프레임이 있다면 그것을 어떻게 넘어서느냐가 문제이지요. 


2. 스펙타클이란 무엇인가?-지승인의 스펙타클

  사실은 저는 지승인 님과 홍명교 님의 대화에 대한 <독서후기>를 작성하기 위해 글을 시작했는데, 다소 엉뚱한 방향에서 시작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전혀 무관하지만은 않은데요. 지승인님이 말한 '스펙타클'이라는 것은, 사실 달리 말해 88만원 세대라는 선정적인 담론과 위와 같은 기사들입니다. 뭔가 대단한 걸 숨기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공허한 것이지요. 지승인 님은 <이것은 내 글이 아니다>에서 '스펙타클'이라는 용어로 자신의 사유를 전개합니다. 

  "분리된 생산이 분리된 것들의 생산으로서 성공한 데 힘입어 원시사회에서는 핵심과제에 속했던 기본경험들은 이제 체제의 발전이 최고조에 달한 현 시기에 무노동과 비활동에 의해 대체되는 과정에 놓여있다. 그러나 이 비활동은 결코 생산활동으로부터 해방되어있지 않다. 비활동은 생산활동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것은 생산의 필수품들과 결과물에 대한 어색하면서도 감탄섞인 굴복이다. 다시말해 비활동 자체가 생산의 합리성의 산물이다. 활동의 외부에는 어떠한 자유도 있을 수 없으며, 스펙타클의 맥락에서는 모든 활동이 부정된다."<지승인, 이것은 '내' 글이 아니다 - 그러나 당신이 나를 읽기 바란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대중문화나 상품소비 영역에 만연한 이미지들이 대표적으로 '스펙타클'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이 거짓 '신성성'이나 총체성을 체현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오늘날의 상품은 결코 스스로를 경제학에서 말하는 '재화-용역'이라는 무미건조한 용어로 스스로를 내세우지 않습니다. 자기가 스스로 상품이라고 정직 말하지 않지요. 말하자면 자기는 상품 이상이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 상품은 오늘날 자기에 대해 '말합니다.' 자기언급적인-자기PR적인 상품이 되는 것이지요. 각종 된장남-된장녀 잡지들을 보면 뭐랄까 일종의 상품소비의 '담론'이라는 게 분명히 보입니다. 상품이 상품과 대화하고, 서로를 비평하고, 성찰하고, 욕망하고, 그럼으로써 상품은 자신의 조건을 초월합니다. 막수는 상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마치 저희들끼리 뭐라고 소곤거리는 소리마저 들린다고까지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분히 "사회비평적" 관점들을 내면화하며, 심지어 '자본주의 너머'의 영역을 암시하고 환기하는 꿈 같은 만화경같은 세계를 연출합니다. 거기에는 과거의 이상적인 공동체의 전통과 풍습(안동마을의 서당의 관광상품화), 인간의 손길 너머의 자연(사파리), 아득한 미래에 대한 전망(엑스포 박람회), 같은 것들이 집약되어 있습니다. 스펙타클은 요컨대 단순히, 물질적으로 생산되고 교환되는 것 이상을 환기하는, 일종의 환등상의 역할(발터 벤야민)을 합니다. 게다가 이러한 소비세계의 스펙타클이 연출하는 광경은, 다분히 '비판적'인 혹은 '반성적인' 외관을 취합니다. 가령 장기하와 얼굴들과 이에 연관된 88만원 세대담론들이 그것입니다. 이것의 가장 궁극적인 사례는 아마, 체게바라의 도상이 찍힌 티셔츠나 스타벅스 커피일 겁니다. 

  그래서 그런지 지승인 님은 여기에 대해 굉장히 비관적인 어조로 논의합니다. 코엑스 몰과 같은 '아케이드'라든가 각종 '박람회'라든가, 각종 매체에서 등장하는 스펙타클의 거짓 아우라는, 물질적 생산조건으로부터 독립해 있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  그것은 "결코 생산활동으로부터 해방되어있지 않습니다. 비활동은 생산활동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것은 생산의 필수품들과 결과물에 대한 어색하면서도 감탄섞인 굴복입니다. 다시말해 비활동 자체가 생산의 합리성의 산물입니다. 활동의 외부에는 어떠한 자유도 있을 수 없으며, 스펙타클의 맥락에서는 모든 활동이 부정됩니다." 그렇다면 지승인 님의 글에서, 우리가 거기에 대해 어떻게 왈가왈부해도 그러한 자본주의적 총체성의 '스펙타클'에서 아무래도 벗어날 수 없다는 위기감 같은 게 묻어나옵니다. 가령 거기에는 아무리 봐도 진정한 삶, 혹은 활동성 같은 건 없습니다. 모든 것이 미리 규격화되어 있고, 계산되어 있고, 모든 것에 대한 마케팅 조사가 이미 완료되어 있죠. 그러한 삶 속에서 '진정한 삶'에 대한 열광적인 동일시조차도 (저의 알랭 바디우에 대한 열광도) "실제로 삶을 지배하는 파편화된 생산적 전문화를 보상 받아야만 하는 텅빈 겉치례 삶의 동일시 대상입니다."


3. 홍명교와 두 개의 스펙타클 사이에서

  그런데 홍명교님은, <'승인씨'의 글이 아닌 글을 읽었던 '나'>에서 지승인 님의 고민에 답하며, '스펙타클'에는 그것의 역사성으로부터 독립한 나름의 지속성이 있다는 관점에서 시작합니다. "요컨대, 우리가 크고 작은 사건들이나 헤게모니적 시기의 스펙타클을 생각해볼때, 어떤 권력의 종결 이후에는 그것보다 조금 더 늦게 끝맺어지는 스펙타클이 있지 않던가?" 말하자면 총체적인 '현혹연관'으로서의 스펙타클이 언제나 우리를 기만한다는 게 문제가 아닙니다. 거기에는 나름의 진실이 담겨 있지 않겠냐는 것이죠. 그런 맥락에서 그는 스펙타클을 단순한 상품소비의 이미지들이 만들어내는 일상적 스펙타클과, 사회적 폭력의 양태로 폭발하는 스펙타클을 구분합니다. 가령 TV로 보도된 쌍화차 사건을 본다면, 그것은 버라이어티 쇼에서 담아내는 장면들에 비해 훨씬 더 극적인 그러나 동시에 일그러진 진실들을 담아내곤 합니다. 전자에 비해 후자가 언제나 흥미로운 것은, 그것이 그것을 만들어낸 사회에 대한 예기치 못한 진실을 암시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스펙타클의 이면에는 우리가 고도의 '추상력'를 가지고 접근해야만 하는 또 다른 '현실'이 있다는 것입니다. 가령 막수는 상품의 외관에 현혹되지 않기 위해, 그것 이면에 있는 교환의 추상적인 형태들을 추출해내야만 했습니다. 단순한 물질적 신진대사의 일부로서 뿐만이 아니라, 추상적인 '가치형태'로서도 그것을 사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겁니다. 물론 그러한 상품의 '진실'은 허구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라캉이 말하듯 '진실은 언제나 허구의 구조'를 지닙니다. 그리고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가령 명교 씨는 승인 씨의 알튀세르 독해에 결정적인 뒤틀림을 가하는데, 가령 "노동의 가치"를 "노동력의 가치"로 대체해서 바꿔서 생각하자는 알튀세르의 제안은 승인 씨가 생각했던 것처럼, 노동자들의 구체적인 삶이 지닌 인간적인 가치를 옹호하는 휴머니즘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는 것이지요. "노동력의 가치가 무엇이냐는 질문은 회피할 수 없는 심급의 문제를 담고 있다. 요컨대, 그것은 ‘잉여가치’의 문제이다. 바로 그 잉여가치가 자본이 스스로의 동력으로 삼는 에너지가 된다는 핵심을 경유할 뿐만 아니라, 바로 이 잉여들이 엄밀히 승인씨가 지속적으로 언급하는 상품들과 상품성의 “스펙타클의 본질적 운동 그 자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막씨 이후의 수많은 오해들이 누적되면서 어느 한 순간(아마도 그것은 레밍 사후라고 보여지지만!) 경과하기 시작한 이 문제를 우리들은 아주 오랫동안 모른 체 하고 지나갈 수 있었던지!"

  결국은 노동력이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표준 노동시간과 실제로 노동력이 투여된 시간 사이의 격차, 이것이 '잉여가치'이고 이 격차를 어떻게든 벌리려 하는 게, 자본의 속성, 자본의 강박이라는 겁니다. 물론 이 격차는 언제나 '과잉생산'의 모순을 낳지요. 그렇다면 '스펙타클'은 이 모순을 은폐하기 위해, 즉 노동자가 필요 이상으로 더 많은 시간을 자신의 노동에 금욕적으로 투여하기 위해서라도, 아이러니하게 그가 그러한 '잉여'를 욕망하도록 길들이기 위한 허위 이미지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더 없이 객관적인 생산과정에서 소외될수록, 우리의 욕망과 시각적 충동은 더 없이 허망하고 만화경 같은 이미지들을 지향하게 된다는 이 모순! 그렇다면 자본주의 총체적 '스펙타클'은 단순한 기만적인 이미지들의 현란한 집합이 아니라, 어떤 한 사회적 생산양식에 있어서 '필연적 객관성'을 띤 기만, 혹은 '필연적 허구'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게 명교씨 지적했듯 사람들이 너무나 자주 놓치곤 하는 '정확한' 막수 씨의 요점입니다. 


4. 우리가 지향해야 할 궁극적인 욕망

  명교 씨는 마지막에 놀랍게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욕망 운운, 스펙타클 운운하는 것 역시 모든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과 같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굉장히 놀라운 발언이고, 모두가 공유해야할 어떤 의제를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다름 아니라, 우리들은 흔히 '욕망의 주체'로 인정받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욕망에 관해서는 우리는 정말로 많은 배려와 동정을 받곤 합니다. 위의 저 <사랑은 88만원보다 비싸다>라는 기사처럼 말이지요. 그런데 명교 씨는 단호하게 우리가 '욕망 운운'하는 건 "아무 것도 이야기 하지 않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어떤 섹스를 할 것인지, 어떤 술집에서 무슨 수다를 떨 것인지, 또래들과 만나서 어떤 놀이를 할 것인지, 하는 것들이 '정치적 주제'로 번역되어야 한다는 숱한 문제제기들이 이뤄진 이 시점에서(사실 저도 여기에 어느 정도 한 몫 했었지요), 저는 명교 씨의 제안이야말로 가장 '전복적'이고 멀리 나아간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물론 '욕망에 대한 미시정치'가 지닌 폭발력(사실은 1917년 러시아에서 '평의회'라는 뜻을 지닌 각종 soviet들은, 학생, 농민, 근로자, 지식인들의 온갖 욕망의 미시정치학을 폭발시키지 않았습니까)을 부인할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그 이전에 우리가 '욕망'에 대해 자명하게 맺고 있던 관계들을 전복하지 않다면, 이러한 폭발이 도무지 일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명교 씨의 이러한 선언은 조금 급작스러운 감이 없지 않은데, 다시 '스펙타클'에 대한 주제로 돌아가자면, 그는 궁극적으로 그러한 스펙타클의 외관에 현혹되어서는 안된다는 표준적인 비판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은 조금 이상해 보이는데, 왜냐하면 그는 첫머리에서 분명히 지승인 씨에 대해, 스펙타클을 구분할 걸 제안하며, 어떤 스펙타클은 분명 역사적 조건에서 독립한 '지속성'을 지닌다고 분명히 이야기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제가 궁극적으로 명교 씨의 논의를 보충한다면, 자본주의의 상품물신의 시각적 총체로서의 '스펙타클이'은, 명교 씨의 말대로 '이중화'doubled되는데, 하나는 단순히 상품의 소비문화적 이미지로서의 스펙타클과, 다른 하나로 그 이면의 '잉여가치'의 착취를 추동하는 자본의 강박 그 자체를 비유적으로 보여주는 '징후적' 스펙타클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잉여가치를 낳는 객관적 생산과정에 그 자체로 다가갈 수 없다는 것이지요. 정작 생산과정이 일어나는 관계 내부로 들어가 보더라도, 정작 당사자들 역시 거기에서 일어나는 게 뭔지 알 수 없습니다. '잉여가치'란 지극히 추상적인 개념이고, 일상적으로 경험할 수 없는 구조입니다. 그렇다면, 오히려 우리는 반동적으로라도, '잉여가치'야말로 '허구'라고 말할 수는 없을까요. 그러나 저는 오히려 '진리'야말로 '허구'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라캉의 단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다시 여기서, 우리는 명교 님의 "욕망은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는 제안에 반하여서, 중요한 건 다른 욕망 혹은 다른 스펙타클을 향한 강박의 수로를 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진리', 즉 추상적인 허구로서의 진리에 다가갈 수 있는 통로를 여는 것입니다. 이러한 스펙타클 이면의 진리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전적으로 스펙타클을 횡단하지 않을 수 없다는 아이러니는 라캉주의 정신분석에서 고민했던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는 궁극적으로 우리들이 고민해야할 문제이지요.



5. 정신분석가의 욕망, 그리고 우리의 욕망

  언젠가 라캉이 프로이트의 '무의식'을 재독해하면서(라캉의 <세미나11>), 놀랍게도 그는 '무의식'이라는 게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만큼 '자명'한 게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사실 이 점은 지금 꿈 해석 강의를 진행하는 안영수 님이 접수하길 바라는 논점이지요) 그것은 '분석가의 욕망'과 무관하지 않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피분석 주체들이 분석가들을 위해 보여주는 '증상'과 '꿈'들은, 사실은 정확히 분석가에 대한 '증상'과 '꿈'입니다. 어쩌면 분석가라른 주체의 욕망이 없었다면, 무의식이라는 건 없다고 무방해도 좋을 것입니다. 라캉은 프로이트의 다음과 같은 유명한 발언을 인용합니다. "그것(무의식)이 있었던 곳에, 나는 가야만 한다!" 이것은 프로이트만의 독특한, 혹은 정신분석이라는 유래 없는 학문의 독특한 욕망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근대적 주체들의 욕망이기도 하지요. 명교 님이 스펙타클을 보며 그것이 '잉여가치'의 고유한 기능이라고 말한 것은, 이와 유사한 욕망의 발로이기도 합니다. "잉여가치가 있었던 곳에, 나는 가야만 한다!"라는 결의가 없다면, 우리에게 있어서 대체 잉여가치(무의식적 강박)는 무엇일까요? 그러한 욕망이 없어도 (막수와 프로이트를 진지하게 안 읽어도) 물론 우리는 스펙타클에 대해 비판을 얼마든지 할 수 있지요. 저널리즘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건 물론 이런 비판입니다. 그러나 어떤 특유한 '욕망' 없이는, 이러한 비판은 언제나 스펙타클의 일부, 즉 비판적인 꿈해석은 일상적인 백일몽의 일부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나게 될 겁니다. 라캉이 자신이 세미나에서 강조했떤 것은 바로 이 점입니다. 저는 이 점을 <꿈해석 강의>를 진행하고 있는 안영수 님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궁극적으로 가져야할 욕망은 스펙타클을 추동했던 '무의식'에 도달하기 위해, 그것이 있었던 곳에 우리가 도달하기 위한 욕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컨대 우리가 막수와 프로이트를 단순한 학문 이상으로 받아들여야 할 이유이지요.  

  놀랍게도 이러한 욕망 혹은 그것에 대한 강조는, 철학의 유명한 인물들 다수가 공유하고 있습니다. 가령 들뢰즈의 스피노자와 니체는 어떨까요? 그들 역시 우리가 스펙타클에 종속되어 있음을 매우 엄격하게 확신합니다. 가령 스피노자의 경우, 우리는 언제나 외부의 무한하게 복잡한 인과의 계열에 종속된 채, 슬픈 정서를 지니고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우리는 정확히 우리의 슬픔을 불러일으킨 조건과 원인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 한에서, 그러한 슬픔에 빠져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스피노자의 생각은, 혹은 그의 사유의 결정적인 반전은 매우 단순합니다. 그는 수 많은 정서들을 언급하지만, 또한 이들과 구분되는 아주 특이한 정서passion 혹은 열정을 언급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뭔지 모를 복잡한 메커니즘으로 이루어진 외부의 영향에 종속될 수 밖에 없지만, 적어도 그러한 메커니즘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탐구할 때, 다시 말해 '진리'를 사랑하기 시작할 때, 그는 그러한 메커니즘에 대한 슬픈 정서(니체라면 원한의식이라고 말할 정서)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에서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다시 그 메커니즘을 발생시킨 역량과 동일화되며, 자유로워지고 기쁜 정서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스피노자는 고통스럽게 '신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것의 실체가 무엇인지에 대한 온갖 '공리'와 '정식'들을 고안해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그를 그답게(사실 스피노자도 니체도 원한이 강한 찌질한 사람이었죠) 만든 초월적 원인들에 접근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를 잘못된 분노와 즐거움으로 이끄는 거짓 원인들, 혹은 그럴싸한 인과적 설명, 비판적인 척하는 담론들, 혹은 스펙타클들마저도 '필연적'인 것으로 만드는 가장 중요한 '원인'cause이 무엇인지를 탐구했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어딘가에 있다고 스피노자는 확신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확신을 이끄는 욕망을 우리가 어떻게 계승할 수 있을까요?

  이러한 철학자의 욕망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줍니다. 가령 제가 철학에 입문하게 된 계기는 단순하게 말해서, 여자 친구가 없다는 우울함을 극복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라캉에 입문하게 되었지요. 왜 제가 여자와 잘 수 없는지에 대한 온갖 장애들을 음미하면서, 저는 그것으로부터 어느 정도 초월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보통의 여자애들과 연애 하나 제대로 못하게 만드는 저의 진정한 "역량"을 알게 된 이후부터, 그것을 몰랐던 때 사로잡혔던 '원한의식'에서부터 자유롭게 되었고, 궁극적으로 저는 저만의 여자친구를 사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약간의 인문학적 자기-개발서 식의 농담을 뒤섞어 보았는데요(마지막에 제가 '여자친구를 사귀게 되었다'는 말은 그냥 농담으로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그건 우리의 진정한 욕망과 무관한 사항이지요). 결론은, '스펙타클'에서 벗어나기 위해 욕망에서 초연해져야 한다는 게 아니라, 전혀 다른 욕망을 '발명'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의 슬픈 혹은 기쁜 정념들을 완전히 비워내는 어떤 다른 욕망을 만들어내지 않는다면, 우리는 절대로, 88만원 세대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8-24
17:00:17 



병장 이 원 
  음.. 제가 볼때는 원익씨의 글이 점점 재미있어 지는군요. 2009-08-10
20:10:30
  



상병 박원익 
  캄사합니다~ 저는 잘 모르겠지만... 2009-08-11
08:23:56
  



병장 김예찬 
  원익님을 볼 때 마다 이미 어느 정도 자율적인 비평가의 레벨을 달성한 듯하여 미칠듯한 질투를 느낍니다. 승인님과 명교님의 글을 꼼꼼하게 독해하면서, '꼬여 있는 부분들'을 풀어내는 능력은 정말 감탄을 금치 못하겠군요.. 

즐겁게(혹은 슬프게) 읽었습니다. 한겨레의 그 기사는 '88만원 세대'라는 개념이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또 활용되는지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였던 것 같습니다. "'급조된 기치' 아래 모인 우리와 같은 어중이 떠중이들이 당장 할 수 있는 게 무엇이냐"는 질문과 더불어, "전혀 다른 욕망의 '발명'"에 지지를 표합니다. 가지로 추가. 2009-08-11
09:04:53




상병 박원익 
  사실, 승인님과 명교님의 글을 즐겁게 읽었기 때문에 꼼꼼히 읽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오히려 저는 예찬님의 독해력이 더 부러운걸요(...) 
다음 글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2009-08-11
09:48:08
  



상병 홍명교 
  잘 읽었어요 원익씨. 
한겨레의 합리주의는 항상 이런 식이더군요. 설명하기 어려운 그 무엇. 사실 제일 짜증나죠. 2009-08-14
06:34:22
  



병장 김태완 
  오랜만에 원익님의 글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전혀 다른 욕망의 발견'에 대해 생각하다 무료감이나 성욕같은 것을 운동이나 각자의 취미활동으들로써 대체하려는 듯한 궁인들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대체로 그들은 자신이 하고있는 일에 노력하는 모습을 띄거나 초연한 모습을 띕니다. 
그럼으로써 마치 순간적으로 성욕을 잠재운 듯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나 정작 어두운 밤, 수다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간이 되어 서로의 진솔한 대화가 오갈 때 쯤이 되면 그들은 슬슬 늑대로 변하며 울부짓기 시작합니다. 
욕망과 본능에 충실한, 어찌보면 본질적인 얘기들이 오갑니다. 
선정적이고 거침없습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저도 어쩔 수 없이 대화에 끼어듭니다. 

인류 존재의 이유를 번식이라 주장하는 학설이 있습니다. 번식 때문에 인간은 그 어떤 욕망보다 높은 쾌락탐닉욕망을 내재하고 있다고 합니다. 원익님께서 다른 욕망의 발명을 제시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왠지 무의식에서든 본능에서든 근본적으로 사랑으로 반영되는 원초적 욕망을 뒤로할 수 있는 어떠한 본능이 과연 있는지 의문이 드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