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 이것은 '내' 글이 아니다 - 그러나 당신이 나를 읽기 바란다.  
일병 지승인   2009-08-07 10:45:11, 조회: 209, 추천:0 

*온갖 텍스트의 혼합물이다. 출처도 불명확하다.
따라서 이건 내 글이 아니지만, 정확히는 내 노트다.
정확히 내 소유는 아니지만, 내 생각이다.

*확실시 되는 텍스트들 : '신보수주의로 미국문화읽기(?)' '신자유주의와 문화', 강내희 
                                 '노동의 종말','소유의 종말', 제레미 리프킨
                                 '스펙타클의 사회', 기 드보르*
                                 '혁명을 팝니다', 히쓰 어쩌고와 그 친구

1.
공감을 원하는 이가 위태로워 보이는 이유는 그만큼 우리가 공통의 충격적인 사건이 없기 때문이다. 달리말하자면 동의할 수 있는 전체 사회상이 부재한다. 항상 조물딱거리는 이야기는 개개인의 일상사. 비슷했던 대학.연애.궁.

*분리는 스펙타클의 처음이자 끝이다. 사회적 분업의 제도화, 즉 계급의 형성은 최초의 관조 바로 이 권력이 애초부터 자신의 몸을 휘감는 신화적인 질서를 낳았다. 신성성은 주인들의 이익에 부합하는 우주질서와 존재질서를 정당화했다. 바로 이같은 신성성이 사회가 할 수 없던 것을 설명했고 윤색했다. 그리하여 모든 분리된 권력은 스펙타클적인 것이 되었다. 그러나 하나의 부동의 이미지에 대한 모두의 집착은 곧 현실의 사회활동이 지닌 빈곤함의 상상적 연장을 다함께 승인했음을 뜻할 뿐이다. 이같은 상상적 연장은 아직도 대체로 통일적인 조건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와는 반대로 현대의 스펙타클은 사회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표현하고 있지만 이같은 표현 속에서 허용된 것은 가능한 것과는 절대적으로 모순된다. 스펙타클은 존재조건들의 실천적 변화내에서의 무의식의 보존이다. 스펙타클은 그 자신의 생산물이며, 또한 그 자신의 규칙들을 만들어 냈다. 그것은 사이비 신성체이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 자신의 모습, 즉 부단히 기계의 독립적인 운동에 의해 지배되고 계속 확장되는 시장을 위해 작동하는 꾸러미로 강화시킴으로써 이루어지는 생산성 향상 속에서 발전해가는, 발전을 본질로 하는 분리된 권력이라는 모습을 보여준다. 모든 비판적 감각은 이같은 운동의 와중에 해체되어 있고, 분리과정을 통해 성장할 수 있던 세력들이 현재 아직까지는 이 운동속에서 재결합되지 못하고 있다.

2.
우리는 언제나 할 수 있다. 하지만 가능과 허용은 다르다. 우리는 언제든 뭣도 아닌 대학을 때려칠 수도 있다. 그건 개인의 자유다(그렇게 말해진다) 그러나 그 결과를 개인의 선택으로 탓할 수 있을까. 도전이라는 단어는 리스크를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고 그 원인이 되는 사회적 폭력을 무마한다. 정당화한다. 그 단어를 받아들이는 이 역시 (인식하든 못하든) 그 폭력에 대한 암묵적인 동의와 적극정인 동참을 표명한다.

언젠가, 네 줄짜리 빨간 모자가 1500명의 라면 배식중에 쿨하게,그러나 권위적으로 자못 진지하고 엄숙하게 말했다. “너희는 라면을 먹을 권리가 있고 조용히 할 책임이 있다”라고-.

아니다. 우리가 가진 권리는 라면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이다. 권리는 오직 나의 목소리에서만 나올 수 있다. 

알튀세르는 『자본을 읽는다』에서 맑스가 이룩한 위대한 이론적 업적은 고정 경제학이 제기한 ‘노동의 가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노동력의 가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전환시킨데 있다고 밝힌 바 있다. 力. 한 글자 차인데. 알튀쎄가 뭔 생각으로 말했는지는 텍스트 전체를 읽어보지 않아서 모르겠고, 마음대로 오독하자면, 생산의 요소적 성격을 가지던 노동에서 노동하는 주체를 향한 방향전환이 아닐까. 즉, 노동은 ‘살아있는’ 인간이 지닌 능력임을 제시한 것임에 나는 포인트를 맞추고 싶다. 

살아있는 인간의 의미는 단순한 생존을 뜻하지 않는다. 우리가 건강한 노동을 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제반 사항들이 갖춰져야 한다. 물, 전기, 가스 따위의 (생존에 필수적인) 공공재부터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 감정적인 안정감, 정서적 유대감까지. 이 모든 조건들이 충족될 때 인간은 살아있게 된다. 만족감에서의 충족이 아니라 필수적인 욕구로서다. 그리고 여가와 휴식을 통한 양분을 흡수할 시간이 필요하다. 이런 시간을 통해서 노동력은 재생산 될 수 있다.

우리는 살아있는가하는 의문을 제기했을 때,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다. 
- 우리는 죽어가고 있다.

새만금에 어머니 아버지들(단어가 마땅찮다)은 지금도 죽어가고 있다. 누군가는 보상금이 있지 않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노을이 져가는 갯벌에서 노래를 부르며 웃고 떠들던 시간도 공간도 이제 어디에도 없지 않은가. 롤랑 바르트는 이같은 이미지의 차용에 허둥대겠지만, 무튼, 그 건강했던 바다와 함께 그들의 삶 역시 메말라가고 있다. 그리고 새만금으로 대표되는 수많은 약탈당한 곳들의 주민들 역시. 마찬가지로.

흉흉한 괴담에 백성들이 혼란스러웠을 그 당시. 핵심 키워드 중 하나가 ‘민영화’였었다. 

살아있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들은 누구나 닿을 수 있는 곳에 위치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들이 상품으로 전환되는 순간에 과연 모두의 삶이란 가능한 것인지.

자연을 자본으로 완벽히 전환한 인간은 다시 눈을 돌려 자2의 자연, 즉 문화적 자연을 강간한다. 서비스라는 거대한 이름하에 인간은 스스로 몸을 구겨 자본 안으로 쑤셔넣고 있다. 모든 세상은 자본의 눈으로 더욱 명료하게 보이며(결코 우리 스스로 인식하는게 아니라) 명료화 된 대상들은 순수한 자본의 거울 이미지, 자기 복제와 증식의 결과물이다.

* 분리된 생산이 분리된 것들의 생산으로서 성공한 데 힘입어 원시사회에서는 핵심과제에 속했던 기본경험들은 이제 체제의 발전이 최고조에 달한 현 시기에 무노동과 비활동에 의해 대체되는 과정에 놓여있다. 그러나 이 비활동은 결코 생산활동으로부터 해방되어있지 않다. 비활동은 생산활동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것은 생산의 필수품들과 결과물에 대한 어색하면서도 감탄섞인 굴복이다. 다시말해 비활동 자체가 생산의 합리성의 산물이다. 활동의 외부에는 어떠한 자유도 있을 수 없으며, 스펙타클의 맥락에서는 모든 활동이 부정된다. 그에 상응하여 현실적 활동은 이같은 결과의 전반적 구축을 위해 완전히 점령되어있다. 그리하여 현재의 ‘노동으로부터의 해방’, 즉 여가의 증대는 결코 노동내에서 이루어지는 해방이 아닐 뿐만이 아니라, 이같은 노동이 창조하는 세계로부터의 해방도 아니다. 노동 속에서 상실된 활동이 노동의 결과에 대한 굴복 속에서 회복될 수는 없다.

*노동자는 자신을 생산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일종의 독립적인 힘을 생산한다. 이 생산의 성공 그것의 풍요는 생산자에게 박탈의 풍요로 되돌아온다. 그의 세계의 모든 시간과 공간은 그의 소외된 생산물의 축적으로 인해 그에게는 소원한 것이 된다. 스펙타클은 이 새로운 세계의 지도, 그 영토를 면밀히 포괄하는 지도이다. 우리로부터 빠져나간 바로 그 힘들이 자신의 모든 위력을 우리에게 뽐낸다.
세상. 세계는 더 이상 인간이 직접 인식할 수 없다. 누군가 긍정이라는 단어를 노이즈라고 말한다면, 마땅하다. 긍정은 하나의 소비될 이미지일 뿐이며 언어를 상품으로 포섭한 자본을 구성하는 노이즈 중 하나니까. 긍정 같은 잡음에 우리는 어떤 것이 진짜 소리이고 가짜 소리인지 구별할 수 없고, 놀라운 빛의 공격으로 더 이상 무엇이 진짜 눈에 보이는 것으로 인식해야 할 것인지 혼란스럽다. 우리의 세계는 빈틈없이 꽉꽉 채워져서 마침내 모든 감각바로 앞까지 채워버려서 마침내는 온전히 인식하고 직시할 수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3.
06년은 누군가에게 최초의 충돌이었다. 강력한 동인, 무력감과 분개. 그러나 나는 그 자리에 없다. 없을 뿐만 아니라 알지도 못한다. 눈을 감아 외면한 것도 아니다. 진정 몰랐어라.
- 변명이 아니다. 뉘우침도 죄책감도 들지 말자.
불모지였다.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다. 내 아비는 머리띠를 매어 본 일이 없다. 순수한(순수하게 기만적인) 악수를 할 뿐이었다. 언제난 적잖은 피로와 함께 쓰러지듯 들어오던 사람이었다. 텔레비전은. 당시 나는 매체의 선동과 호도를 불신하며 자본을 읽으며 냉소했다면 그건 거짓말이고, 눈이 아팠다. 안방의 텔레비전은 그나마 또 흑백이었으니까.

09년 쌍차.
이 따위로 멍청한 완장을 차고 멍청하게 서서 텔레비전을 바라본다.
방관자들은 동조자로 변한다-역사적 순간이 아니라 시대적 반복.
그렁한 건 인정하고 싶지 않다. 맑은 눈으로 세상을 직시하자고 다짐하길 수 십 번.
믿는다. 우리가 세계를 완곡하게나마 인식할 수 있는 유일한 잡음은, 
이 소리 없이 글썽이는 작은 것 뿐이라는 걸, 나는 이제사 인정한다.

부활을 몇 번씩이나 하며 카메라 앞에서 손을 흔드는 그는, 10여년전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공기업도 팔아야한다는. 진보적인 마인드의 소유자이셨다. 우라질, 썩을 놈의 진보. 끔직한 이야기. 주술을 풀어버릴 또다른 속박의 주문. 우리도 분열한다. 우리가 살려면 우리를 팔아치워야 한다는 기막힌 논리는 애초부터 우리라는 말이 균열을 덮어두는 수단이었다는 사실을 수줍게 털어놓고 만다.

‘우리’는 수없이 팔려왔다. 처음에는 문제를 덮을 목적으로 (우리에게) 팔려왔다가, 그 당시에, 그리고 지금까지도 누군가의 더부룩한 생존을 위해서 ‘우리’는 팔려나간다. 노예. 분열. 분리. 상품. 말장난.


4.
산책을 하고 있었다. 경주 시내는 나지막하다. 그녀는 카길의 간판을 보고 분개했다. 글썽였다. 러다이트. 근대를 비웃는 자들을 비웃는다. 나는 러다이트의 시대적 인식을 믿는다.
-적어도 그들은 거부할 줄 아는 진실되고 용기있는 이들이었다. +발췌


나는 그 모든 ‘발전’을 거부한다.

*가장 오래된 사회적 전문화, 즉 권력의 전문화가 스펙타클의 뿌리를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스펙타클은 다른 모든 활동들을 대변하는 하나의 전문화 된 활동이다. 그것은 위계 사회의 외교적 대표자 역할을 독점한다. 이 위계사회에서는 모든 다른 표출들은 금지된다. 여기서는 가장 현대적인 것은 또한 가장 ‘낡아빠진 것’이다.

18,19세기 낭만주의 시대에 예술가는 저항적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대중에게 뿌리를 내렸다. 예술가는 계몽주의 철학에 의해 억눌리고 산업시장의 요구에 짓눌려 온 감정과 욕망을 표현했다. 현대성의 이면을 상징하는 존재가 되었다. 객관성 대신 주관성을 앞세우고 근면성 대신 창조성을 내세웠다.

1920년대, 보헤미안 예술가들과 지식인이 기존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마찰을 빚으며
<순간의 삶, 향락주의 자기표현 육체미 무종교 사회적 속박으로부터의 자유, 머나먼 곳에 대한 동경>등을 추구했다. 그들의 감수성은 자본주의라는 지배체제를 거부하는데서 출발했다.

그리고 현재의 우리가 볼 때 그것들은 완벽한 자본주의다.

과거의 자본중의가 창조성, 자기충족, 쾌락과 유희를 억누르기에 급급했다면, 새로운 자본주의는 이 억눌린 심리적 욕구를 예술이라는 분출구로 해방시켜 거대 소비 문화를 창출했다. 공동체가 공유하는 가치를 전달하던 예술은, 이제 광고회사와 마케팅 전문가의 볼모가 되어서 생활 양식을 파는 데 동원된다.

예술과 예술가를 시장에 빼앗긴 문화는 공유하는 문화를 스스로 해석하고 생산하고 창조할 강력한 목소리를 상실했다. 이러한 문화적 고사상태의 의미를 사람들이 처음으로 절감하게 된 것은 1960. 앤디 워홀이 캠벨사의 수프 통조림같은 상품을 그려서 예술 작품이라고 내놓았을 때, 이미 전통은 소비문화로 이행을 완료.

한때는 시장이 추구하는 가치에 강력한 반기를 들었던 예술이,이제는 시장이 내세우는 가치의 가장 중요한 전달자, 가장 충실한 하수인이 되었다.

말하고 싶다. 예술이라고 틀 지워진 그 모든 것들이 얼마나 비예술적인지를.
혐오스러워야 했을 복장들이 그런지룩이 되어 팔려나갈 때
체게바라 티셔츠를 입은 이가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며 제 3세계를 착취할 때
박노해를 노래하던 멍청이가 오필승코리아 멍청이가 되었을 때.
타이거JK가 힙합의 표상이 되었을 때.
광주가 아이콘이 되었을 때.

그럴 때는 이미 자살 직전의 커트 코베인 같은 거다.

성공한 흑인, 마이클 조단은 위대하다. 그는 쌈박질도 안하고, 마약도 안하고, 음란하지도 않으며 화목한 가정의 성공적인 아버지이다. - 모든 흑인이 그를 가슴에 품는 날에는 끝장이다. 그리고 실제로 끝장이다.


* 유명인사, 즉 살아있는 인간의 스펙타클적 표상은, 그럴듯한 역할의 이미지를 체현함으로써 이런 진부성을 체현하고 있다. 스타가 된다는 것은 ‘겉치레로 살아가기’에서 전문가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스타는 실제로 삶을 지배하는 파편화된 생산적 전문화를 보상 받아야만 하는 텅빈 겉치례 삶의 동일시 대상이다. 유명인사들은, 다양한 스타일의 사회적 삶과 사회관을 실행하기 - 아무런 구속없이 자유롭게 ‘전세계적으로’ 자신을 표출하기- 위해존재한다. 유명 인사들은 누구도 접근불가능한 사회적 노동의 결과물을 체현한다. 이때 그들은 사회적 노동의 부산물을 그것(노동)의 목표인양 그것 위에 투사시켜 극적으로 표현한다. 이같은 부산물이란 바로 ‘권력과 휴가’, 그리고 결정과 소비인데, 그것들은 논의되지 않은 과정의 처음과 끝이다. 어떤 경우에는 소비의 스타가 모든 살아있는 것들 위에 군림하는 사이비 권력으로서 선출되기도 한다. 그러나 스타의 활동이 진정으로 전인적이지는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이런 권력들 역시 진정으로 가지각색인 것은 아니다..

5.
나는 사실 한 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부족한 글을 쓰고 지우는 일은 이제 그만하련다.쓰고 쓰고 또 써서 채워나가는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이건 내 글이 아니다. 내 공책에 있는 누군가의 글이다. 친절한 글을 쓰고 싶었지만, 동의를 강요하는 글을 쓰고 싶진 않다. 더 잘 쓰고 싶지만, 말처럼 뱉어야 성에 찰 듯하고, 시간이 지나 뱉는 모든 말이 무효하니까 일단 뱉어보자.

이해하지 못해도 좋다. 동의할 수 없어도 좋다. 그러나 대답을 하자.

-난 널 사랑해
-....
-난 널 사랑해
-....

고백한 사람이 가장 슬퍼지는 순간은 그것이 아무 응답도 없는 공허한 외침이 되어 울려퍼질 때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8-24
16:58:52 



병장 양동훈 
  이건. 
읽을 만한 글이 아닙니다. 
씹어 먹겠습니다. 와작와작. 
잘먹을게요 승인씨. 
시간이 좀 걸리겠군요. 2009-08-07
10:48:20
  



일병 심현주 
  일단 이처럼 처음으로 리플달고 싶은 글도 간만인데, 놓쳐버렸네요. 
일단 다른 내용은 다시 읽어봐야겠지만, 
'고백한 사람이 가장 슬퍼지는 순간은 그것이 아무 응답도 없는 공허한 외침이 되어 울려퍼질 때다.' 
이 부분은 참, 훗. 2009-08-07
10:52:40
  



병장 박주현 
  첫 문단에 동의할 수 있는 아닌가요?, 아니라면, 아 어렵다 (허허) 2009-08-07
11:27:05
  



일병 지승인 
  동훈님, 씹어먹지만 말고... 

현주님, 정말인데. 그거슨 진리라고.(나에게는) 

주현님, 제가 잘못썼네요. 글을 쓸 땐 항상 흥분상태라서. 
컴퓨터로 옮겨쓰면서도 확인을 안했군요. 역시 흥분상태라서. 
수정했습니다. 2009-08-07
11:39:47
  



병장 이 원 
  후후후 재밌네요. 

승인씨의 생각을 조금은 알겟어요. 
그리고 저도 현주씨 댓글에 동감이요. 

아 참... 그만큼 비참한 일도 드물죠 후후 2009-08-07
12:55:56
  



일병 박준우 
  소위말하는 악플보다 무서운 무플이라는 뜻인가요? (글은 다음기회에 읽고 리플달게요..) 2009-08-07
13:46:00
  



상병 박원익 
  사실은, 아도르노가 수행했던 "문화비판"(그러니까, 상부구조-하부구조라는 고전적인 도식을 가지고서, 상부구조란 말 그대로 허위에 불과하니까, 하부구조에 대한 분석에 천착하다보면 승부는 거기서 날 거라는 어떤 믿음과 달리, 하부구조 자체의 모순은 상부구조에서 나타나는 징후들을 통해 유효하게 비판할 수 있다는 견해)이 한 동안 유행이 되었을 때가 있었지요. 그런데, 이러한 유행들(자본주의에 대한 문화적 비판)이 놓치는 게 한 가지 있다면, 사실 여전히 상부구조를 어떤 기만과 허위의 장소로만 파악한다는 점이지요. 이와 반대로, 아도르노나 벤야민과 같은 사람들의 진짜 견해는, 자본주의의 상부구조를 형성하는 소비와 기호의 영역에는, 하부구조에는 부재한 진정한 유토피아의 흔적들이 뒤틀리고 왜곡된 방식으로 축적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벤야민이 상품들이 쌓여 있는 파리의 아케이드를 거닐면서, 그곳에서 팔리지 못한 채 방치되어 마모되어가는 상품들에서 상실된 유토피아의 아련한 흔적들을 찾듯이 말이지요. 강막수가 '상품' 자체는 물질적 신진대사의 순환의 일부에 불과하지만, 상품을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다보면, 어느 순간 신학적인 궤변과 수수께끼로 가득찬 게 된다고 이야기할 때, 그의 의도도 사실은 그러한 궤변과 수수께끼의 피안에는 그것이 암시하는 유토피아적 차원이 아니었을지... 저도 비슷한 느낌이 들 때가, 옛날에 잘 나가던 시절의 쌍용차의 광고들(지금은 거의 무용한 광고)을 볼 때였습니다. 2009-08-07
14:08:01
  



일병 지승인 
  사실 무엇이 먼저인가는 질문 자체가 우문일 것 같습니다. 상부구조와 하부구조라는 도식자체가 성립하는지도 의문이고요.(하부구조에만 천착하면 된다는 게 아니라 그런 구분자체가 무의미하지 않을까 싶네요) 물론 저는 그 고전적인 도식조차 정확하게 이해하고 비판하는 건 아니지만. 그런 도식으로 이해할 수 있을만큼 단조로운 세상이라면. 허. 

'자본주의의 상부구조를 형성하는 소비와 기호의 영역에는, 하부구조에는 부재한 진정한 유토피아의 흔적들이 뒤틀리고 왜곡된 방식으로 축적되어 있다'는 말에 동의하지만, 한편으로 또 억누르면서 질문하고 싶은 건 그렇다면 과연 이 연쇄적인 운동을 어떻게 끊어낼 수 있을까하는 문제가 아닐까 싶네요. 

*인간활동 속에 유동상태로 존재하던 모든것을 흡수하여 그것들을 산 가치로 부정하는 정식화에 의해 배타적 가치가 된 응결상태의 사물들로 장악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스펙타클의 본질적 운동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숙적인 상품을 인지하게 된다. 상품은 어떻게하면 자신이 첫 눈에 평범하고도 명백한 것으로 보일지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실은 이와 반대로 그것은 너무나 복잡하며 형이상학적인 모호함으로 가득 차 있다. 

짧은 책인데 짧은 문장으로 기막히게 잘 설명했다는 생각이 자꾸들어서. 일단 또 발췌. 
비슷한 말씀 아닌가 생각해봐요. 맥락에선. 2009-08-07
14:46:36
  



병장 이기범 
  글이 참. 
쏟아지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뭐랄까.. 방금 막 구워진 붕어빵 같은 느낌? 

전 여기있어요. 
이미 알고 있었지만, 더 분명해 졌네요. 크크 

끊임없이 확인하고, 외쳐봅시다 2009-08-07
14:58:17
  



상병 양제열 
  굉장히 많은 이야기들이 들어 있네요. 한 문장으로 한 편의 글, 아니 한 권의 책을 쓸 수 있을 정도로... 

저항의 상징들이 타락해 가는 일을 지켜보는 건 참 슬픈 일이죠. 우리가 수행했던 저항이 실은 복종에 포섭되어 있었음을 깨닫는 일도 씁쓸한 일이고요... 하지만 항복을 외치고 투항 해서는 안 되겠죠. 

저도 발췌언으로 답할게요. 이탈로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의 마지막 구절입니다. 
(읽은 지 오래되서 정확하진 않아요.) 

"지옥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스스로 지옥의 일부가 되어 지옥과 자신이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동화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지옥 안에서 지옥과 다른 영역을 만들고 그것을 끊임없이 확장하는 것이다." 2009-08-07
15:25:43
  



일병 지승인 
  기범님, 오래간만입니다! 저는 슈가때 후배들(거의 모르는) 만나서 어떤 이야기를 할까 항상 생각해보고 있어요. 비슷한 맥락으로 글을 짜보고 술마시면서 무아지경으로 토하면, 
왠지 이전 세대보다는 낫지 않을까하는 자뻑. 그렇지만 기존의 문제도 그들 나름대로 힘든감이 있네요. 이번에 눈물흘리는 사람보고 왔더니 기분이 썩.하하. 

제열님, 멋진 발췌네요. 그렇지만. 지옥안에서 확장하면, 언젠간. 사실 안에서라는게 마음에 안들지만. 아 무지 슬퍼지네요. 안에서,라. '코끼리는 생각하지마'를 보면서 프레임의 거부와 불참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같은 의미일까요. 2009-08-07
15:35:46
  



상병 윤정기 
  어, 그러니까 이것은 사실 제 답글이 아닙니다.(웃음) 

1. '현대의 스펙타클은 사회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표현하고 있지만 이같은 표현 속에서 허용된 것은 가능한 것과는 절대적으로 모순된다.'라는 말에 '공감'이 됩니다. 

'그리하여 모든 분리된 권력은 스펙타클적인 것이 되듯이' 우리는 그러므로 위태롭고, 비판으로부터 분리된 권력속의 세계를 살아가고 있겠지요. 분리형성된 계급속에서 우리들의 '권리'를 잃어가는 사회, 그래서 우리들의 '선택'이 '사이비 신성체'에 의해 와해되는 사회. 

2. 
'세상. 세계는 더 이상 인간이 직접 인식할 수 없다. 누군가 긍정이라는 단어를 노이즈라고 말한다면, 마땅하다. 긍정은 하나의 소비될 이미지일 뿐이며 언어를 상품으로 포섭한 자본을 구성하는 노이즈 중 하나니까. ......(중략)마침내 모든 감각바로 앞까지 채워버려서 마침내는 온전히 인식하고 직시할 수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이 부분에 대해선 약간 충격입니다. '상품화'라는 물결이 언어를 잠식하고, 긍정이라는 명사가 시뮬라크르라는 그림자(의 그림자)에 의해 잠식당하는 현실.. 큭. 

3. 
진보라는 단어는 '우리의'진보라는 공동체적 결속성을 함의하기를 원하는 것일까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한 번도 '운동'해 본 적이 없으며, 썩을 놈의 진보와 꼴통보수를 외쳐본 적도 없습니다. 더불어, 당연하게도 야당이든, 여당이든 날라차기와 이단옆차기, 머리끄댕이 잡아당기기 스킬 등이 난무하는 국회의사당의 모습에도 저는 약간의 조소마저 흘려본 적이 없습니다. 무관심은 아닙니다. 그것은 어떤 종류의 '배격'입니다. 
그들이 '진보'하든, 내가 '보수적'이든 그것은 '우리'라는 이름으로 묶여 강간당할 '대타자'적 욕망의 대상마저도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4. 왠지 R.butt(가명)가 소변기를 예술작품이라고 내놓았던, 그 광경이 떠오릅니다. 
예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겠지요. 소비하고 상품화하는 자본이라는 거대한 물결에서 예술이라는 장르는 점점 그 '힘'을 상실해간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그런 슬프지만 어찌할 수 없는 현실에 관한 화장실 소변기냄새의 은은한 역겨움 같은 것들. 혁명마저 변태시켜 거리로 내모는 상품이라는 유령. 

5 & 마무리. 
저 역시 요즘 다른 분들의 글을 읽으며, 사실 '읽는데' 치중하고 있습니다.(읽을 시간도 별로 없습니다만. 흐흑) 
'왜' 나는 글을 쓰는가. 그리고 이 글이 보여주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들을 많이 하는 요즘입니다. 그러다보니 허공에 혼자 손 흔들더라도, 그것이 아주 진중한 '손짓'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논리에, 왠지 침잠하고 있습니다. 

덧붙이자면, 승인님은 왠지 체제에 대한 반테제적 '거부'를 그 표면에 흘리고 있으면서 형식은 포스트모더니즘의 그것을 보여주고 있는것 같습니다. 약간은 독특한 이러한 특징이 지금 제가 읽고 있는 '이 상'의 분위기와도 일치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