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베스트-독서후기] 한 줌의 도덕, 동물화하는 책마을  
상병 박원익  [Homepage]  2009-07-29 18:25:05, 조회: 287, 추천:6 

  한 동안 파견을 나가 있었습니다. 파견이라기보다는, 설탕이나 다른 없는 파견이었는데, 이제 그 달콤한 하니문도 바야흐로 끝나가게 되어가는군요. 결국 남는 건 책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우연성 보편성 헤게모니>에 대한 서평이 끝났고 혹자 중 어떤 분들은 모종의 잡지에서 어디선가 제 이름을 보시게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도르노의 <미니마 모랄리아>,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라캉 세미나11>, 그 외에도 아직 읽어야 할 책들이 한 참 남아 있네요. 일단 지금까지 읽어온 독서에 대한 후기로 이후에 도래한 복귀인사를 대신하고 싶습니다. 사실 이 글은 온전한 의미에서의 독서후기라기보다는 독서후기에 대한 일종의 예감이지요. 다소 이르지만, 몇 가지 의제들을 공유하기 위해 화두를 던져볼까 생각합니다. 

  유대인이었던 아도르노가 2차대전 이후 미국 망명기에 썼던 <미니마 모랄리아>, 직역하자면 <한 줌의 도덕>을 일었는데, 지금 어수선한 상황을 보면서 읽자니 기분이 적잖이 심란하더군요. 결코 즐거운 독서는 아니었습니다. 그나마 쉬운 축에 속한 그의 에세이적인 글쓰기라고 해도, 그의 사유의 호흡이란 결코 따라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의 독서가 요구하는 정신적 긴장감이란, 사실 '라캉'을 읽는 것과 같은 생산적인 성격의 긴장감(겉보기와 달리 그는 결코 주목받기 위해 허튼소리를 하는 법이 없는 매우 금욕적인 글쓰기를 구사하는 사람입니다)이라기보다는, 저자의 상처어린 내면을 투영하고 유추해야만 하는 경험이었기에, 아도르노 개인이 무슨 상처를 입었던 뭣 때문에 우울해하는지에 대해 별 관심도 애정도 없는 저로서는 또한 이중으로 고통스러울 수 밖에 없는 독서였지요. 아도르노는 호르크하이머와 함께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이론> 1세대로 자리매김하는 학자입니다. 물론 이들이 기초하는 마르크시즘적 방법론은 후일 68혁명의 단초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아도르노 자신은 68혁명 때 학생들에게 봉변을 당했었지요. 사실 그는 문화적으로 매우 보수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글도 보면 알겠지만 반항적인 젊은이의 형상에 아무런 기대도 걸지 않았고, 무엇보다 청년운동에 나치가 파생했다는 그의 경험도 작용했고요. 아무튼 그는 그 사건으로 아마 커다란 상처를 입었을 것이고. 결국 심근경색으로 가까운 시기에 별세합니다. 이 점도 라캉과 비교해보면 재미있는 부분입니다. 68혁명에 반대했던 라캉은 그를 포위했던 학생들에게 "혁명가인 자네들은 주인을 원하고 있어, 자네들은 그것을 곧 얻게 될 걸세"라며 차갑게 응수했다고 하네요. 남자라면 이 정도면 되야지 않을까 저는 생각합니다.

  각설하고, 하지만 고통스럽게 읽은 글이면서도 얻은 게 있다면 크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이들 각각을 저는 그의 저서를 읽는 데 핵심적인 공략지점이라고 제안하고 싶습니다. 

  우선 첫째, "헤겔"의 변증법에 그가 경도되어 있는 모습들은 커다란 발견이었습니다. 그의 비판이론과 헤겔의 변증법적 사유가 접합되는 부분들을 읽어나가는 것도 하나의 기쁨이랄까요. 앞서 이야기했듯 헤겔의 방법론은 칸트보다 더 "비판적"이라는 게 아도르노의 암묵적인 생각인듯 합니다. 왜냐하면 여전히 사물에 개념이 다가가야 하며, 그것을 '매개'하는 것(그는 그것을 상상력의 도식화 작용이라고 불렀지요)이 필요하다고 여전히 생각했던 칸트와 달리, 헤겔은 바로 그 직접적인 '사물' 자체가 이미 모종의 개념에 의해 '매개'되어 있다는 점을 완고하게 고수합니다. 말하자면 사물은 날 적부터 개념에 노출되어 '사전조정'된 것이지요. 가령 자연적인 여성성이란 이미 남성의 가부장적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근본적인 상실의 경험 속에서 정립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헤겔은 칸트처럼 가부장제 '너머'의 있는 여성성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습니다. 그것을 미리 알 수는 없지요. 이것이 헤겔의 비판적 철저함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철저함은 아도르노에게도 답습되어, 자본주의의 물화된 현상들을 문화적인 영역에서 비판하는 데 중요한 축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또 하나, 그의 사유를 일관되게 관통하는 '막수주의'의 전통적인 유물론적 포지션이었습니다. 저는 막수주의의 기본 문제의식이 언제나 저 상부구조-하부구조라는 악명 높은 사회의 이중구조를 향해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아도르노 역시 다음과 같은 점을 통찰했던 것이지요. 한 개인은 거대한 경제적 틀 속에서 소외된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지만, 정확히 그렇게 소외된만큼 자질구레한 감성적 소품과 문화적 가상(상부구조)에 목숨을 겁니다. 이러한 사태는 단순히 하부구조를 참조하면서 해결되는 게 아니라,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어버립니다. 자본주의적 사회 속에 실존하는 개인에게 어떻게 그가 살아가고 있는 정치-경제적 현실을 감성적으로 보여줄 수 있을까요? 완벽한 노동분업체계를 살아가는 한 개인에게 "자신의 삶을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시간"과, "실제로 수행한 노동시간" 사이의 격차를 보여준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게다가 이 둘의 차이에서 뽑아져 나오는 "잉여가치"를 보여주는 건 더욱 더 그렇지요. 이러한 '추상화'는 또한 근로자로 하여금 자신의 타성적인 삶에서 내적으로 단절할 것을 요구하는 계기가 되어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언제나 일어나는 일은 아니지요. 이것이 진정한 문제인 것입니다. 이런 문제의식은 루카치든 벤야민이든 브레히트든 저마다의 방법으로 사유했던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것의 맹아는 이미 <자뽕론>의 저 유명한 "상품물신"의 문제에서도 이미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네오' 막수주의라든지, '포스트' 막수주의라든지 막수주의 앞에 붙는 접두사들이 도대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그게 대체 의미가 있기나 한 것인지에 대한 일련의 의문들을 앞에 두고, 저는 아도르노의 글을 읽었다고 해야겠습니다. 사실 아도르노는 통상적으로 마르크시즘을 문화영역으로 확장한 지식으로 평가되는데, 저는 그런 정작 마르크스 자신은 자본론을 쓸 때 요구되었던 그만의 "경제적" "유물론적" 통찰은 셰익스피어와 괴테 그리고 루크레티우스에서 온 게 아니냐고 반문하고만 싶습니다. 아도르노도 그렇지만, 유물론적 전통은 '하나'입니다.

  마지막으로 아도르노에게 흥미로운 점이 있다면 그의 '반-키취' 성향, 혹은 '반-낭만주의' 성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서 이미 암시했다시피, 자본주의는 모든 영역의 삶을 경제의 문제로 환원시키만큼이나, 딱 그만큼 삶의 모든 영역의 무차별적인 심미화로 귀결됩니다. 아도르노가 비꼬았듯이, 삶은 착취당하는만큼 아름다운 법이지요. 저는 아도르노가 포착한 이러한 아이러니한 곤경이 또한 88만원 세대를 사로잡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아도르노가 질식할 것만 같다고 느겼던 <문화산업>의 감수서은, 책마을(책마을의 문제만은 아니지만)에서 뿜어져 나오는 감성의 딱 그 정도가 아닐까요? 사실 우리들은 우리의 삶 전체를 경제적인 문제로 너무나 쉽게 환원하면서 바로 딱 그만큼 그러한 삶에서 반짝거리는 낭만을 찾곤 하지요. 다음과 같은 라디오 사연이 들릴 법도 합니다. 한 소년 소녀가 심야 편의점 알바를 하면서, 동시에 몰래 음악을 듣고 노트에다 일기를 끄적이다가 심야방송에 음악을 신청합니다. 제가 아도르노에게 전적으로 공감하는 부분이 있다면, 만약 저라면 이러한 자그마한 훈훈한 에피소드에서 세대 간의 작은 공감의 계기를 보기보다는, 오히려 보편화된 지배를 볼 것입니다. 이게 사리에 맞냐 아니냐는 문제보다 중요한 것은, 아도르노는 사태를 그렇게 보겠다는 결의로 무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삶의 전면적인 심미화는 또한 삶의 전면적인 소외와 잇닿아 있습니다. "소통"이라는 게 항상 기만적일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이겠지요. 따라서 저는 아도르노가 왜 그토록 미국으로 망명을 와서 절망했는지를 알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따라서 여기에 대한 애정의 목소리로 이야기하자면, 저는 아도르노가 진실하게 절망했던만큼 저 역시 <책마을>과 우리 세대에 절망하고 싶습니다. 그러한 절망이 "아직 지옥에도 숨 쉴 공기가 남아 있다"는 희망을 전해주는 한에서 말이지요.   

  비슷한 맥락에서, 다시 읽은 아즈마 히로키의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도, 오타쿠적 삶의 감수성에 대한 일련의 이론적 해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사실 그의 논의는 헤겔이 말한 절대지의 도래, 즉 <역사의 종말> 이후의 두 가지 삶의 형태를 논한 알렉산드르 코제브의 헤겔주석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유형은, 생산의 완전한 자동화와 소비문화의 고도화로 인해 동물화되어 버린 미국사회를 말합니다. 말하자면, 섹스와 음식섭취와 같은 기본적인 생리적 욕구의 수준에서조차 작동해야만 했던, 기존의 시민사회에서 필요했던 연대감과, 동류의식 그리고 예의범절 같은 '매개의 수단'이 완전히 소멸한 미국사회는, 사실은 동물의 사회입니다. 사람들은 매미처럼 콘서트를 열고, 벌처럼 기념비를 짓고, 동물처럼 사랑을 나누겠지요. 여기도 아도르노의 절망이 또 한 번 감지될만한 부분입니다. 문제는 그가 또 다른 형태로 <일본>을 언급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극단적인 <스노비즘>으로서, 역시나 역사의 종말의 한 형태입니다. 일본에서도 실질적으로 미국과 같은 동물적인 환경(자판기 문화, 러브 호텔 문화, 편의점 문화 기타 등등)이 도래했음에도 불구하고 차이가 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식'에 대한 이상한 탈역사적 집착이 존속한다는 것이지요. 가령 '다도'만 보더라도 굳이 캔음료수를 들이키면 될 것을 굳이 격실을 차리는, '에도 시대'의 풍습이 남아 있달까요. 원래는 거기에는 어떤 역사적 맥락이 있었지만, 그것이 사상되어버리고 형식으로만 남아 있습니다. 그게 일본의 특이한 규범주의, 즉 <스노비즘>인 것입니다. 

  거두절미하자면, 아즈마 히로키의 분석은, 오타쿠는 바로 이 두 차원, 즉 즉물적인 동물적 차원과 형해화된 규범이라는 두 층위 사이에서 분열증적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생리적 욕구와 성적인 차원에서 오히려 그들은 어떤 '매개'도, 즉 어떤 규범적 형식에도 구애받지 않는 게 보통입니다. 즉 그들에게는 '콤플렉스'가 없습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그들의 소비행태에 그대로 반영됩니다. 오타쿠들이 소비하는 문화상품들은 대개 '탈역사적'이고 '즉물적'인, 무의미한 시뮬라크르들의 연쇄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전혀 다른 관념적인 차원에서, 그들은 역사적 맥락과도 무관하고 그들의 물질적 실존과도 절연된 전혀 다른 가상적 정보의 집합을 이루고 공유합니다. 말하자면 그럼에도 그들에게는 그들 나름의 세계관 즉 "데이터베이스"가 있는 것입니다. 흔히 어떤 캐릭터의 결정적인 매력 포인트인 "모에요소"로 표상되듯, 각종 캐릭터들은 임의의 모에요소의 조합으로 해체되고 재구성되는 혼란스러운 과정을 보이지만, 기저에는 모에요소들의 조합 가능성을 규제하는 엄밀한 "데이터베이스"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표리부동한 사태가 나타납니다. 말하자면 오타쿠의 소비 속에서, 그러한 모에요소의 조합으로 나타나는 캐릭터에는 즉물적으로-동물적으로 반응하지만, 정작 '모에'가 경험적으로 성립되기 위한 선험적인 조건들에 관해서는 그들은 한 없이 진지하고, 규범적으로 변합니다. 동물과 스노브의 공존이지요. 아즈마 히로키는 나아가, 이러한 '분열증'이 오타쿠의 모습만이 아니라, 우리의 일반적인 포스토모던의 조건이기도 하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소녀시대에 즉물적으로 열광하고, 그 뒤의 거대 엔터테인먼트에 대한 짐짓 진지하게 비평하는 우리들의 '해리증적인' 행태역시 '오타쿠'와 마찬가지이지요.

  저는 기본적으로 유물론자의 가장 큰 즐거움이란, 아즈마 히로키 류의 포스트모던 거대서사가 마땅히 제 발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꼴을 감상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령 히로키는 이러한 오타쿠의 동물화 현상이 리오타르가 말하듯, "거대서사"가 종말한 탈근대적 현상이라고 단언합니다. "거대서사"는 수 많은 "작은 이야기"들 배후에서, 그 종말론적-구원론적 메시지를 던지는 무언가로 경험됩니다. 가령 민족주의나 혁명론은 다들 "거대서사"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지요. 아즈마 히로키의 독특한 점은, 그러한 근대적 거대서사가 종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동물화된 소비사회 속에서 (장 보드리야르가 말했던 것처럼) 파편적인 시뮬라크르와 허상들만 남는 게 아니라, '거대서사'가 자리잡았던 '배후'에 여전히 무언가가 존속한다는 논점입니다. 그리고 적어도 오타쿠들에게 그것은 모에요소의 무의미한 다발들로 구성되는 '데이터베이스'입니다. 저는 아즈마 히로키가 견지하는 "포스트모던 거대서사"라는 자기배반적 기획에 느끼는 곤란함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분명 이론적 가치가 있는 견해라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저는 아즈마 히로키가 했던 이야기는 이미 수십 년 전에 '라캉'이 했던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저는 라캉에 입문하기 위해, 아즈마 히로키를 라캉적 시나리오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히로키는 라캉의 아류에 불과합니다. 

  사실 거대서사가 종말하고, 아무도 근대민족국가의 기획이나 혁명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건, '대타자'(우리에게 외적인 권위로 경험되는 각종 담론과 상징적 제도들)라는 상징적 영역이, 혹은 대타자를 지탱했던 "아버지"의 권위가 붕괴했다는 이야기나 다름 아닙니다. 문제는 아즈마 히로키는 라캉과 동일한 통찰을 공유하고 있다는 겁니다. 대타자가 붕괴하다고 해서 주체가 해방되는 건 아니지요. 오히려 대타자는, 라캉이 말한 '실재'에 곧바로 노출됩니다. 말하자면 기존에는 일관된 서사에 의해 조직되었던 인물유형들이나, 서사양식들이, 수 많은 임의적이고 비일관적인 모에요소와 캐릭터리티의 다발들로 붕괴해버리고 맙니다. 가령 문학에서는 '햄릿형' 인물이나 '돈키호테형' 인물로 식별될 수 있었던 문학의 요소들은, <디지캐럿>에서처럼 임의의 모에요소들이 과장되게 돌출된 캐릭터로 붕괴해버리는 것이지요. 라캉이 "실재의 틈입"이라고 말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사태에 다름 아닙니다. 이로써 주체들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동일한 혹은 더 나쁜 증상에 시달리게 됩니다. 오타쿠는 바로 그 시대의 징후이지요. 

  그렇다면 라캉을 읽을 때, 우리는 히로키보다 더 멀리 나아가야 하는 것이지요. 문제는 "거대서사"가 붕괴했다는 또 다른 거대서사에 탐닉하면서, 은연 중에 오타쿠라는 남성 집단을 특권화하고, 일본이라는 민족적 특수성에 우위를 은밀하게 부여하는 게 아니라, 정확히, 그러한 거대서사를 가로지를 수 있는 '행위'가 무엇인지를 모색해보는 것이지요. 자크 라캉이 말했던 "분석가의 윤리"는 분명 오타쿠의 윤리는 아니었을 겁니다. 

p.s.     

  한 가지 소식을 공유하자면, 8월 1일에 가라타니 고진의 <네이션과 미학>이라는 책이 출간된다고 하는군요. 반드시 달려가보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아직 읽지 않은 책이지만 일독을 권하겠습니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8-24
15:43:41 



상병 이동열 
  아... 난 언제쯤 이런 경지에 올라갈지.. 

이 곳은 진짜 이런 글을 쓰시는 분들이 많은것 같습니다.(후덜덜) 2009-07-29
18:46:37
  



병장 양동훈 
  으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일단 프린트 할게요. 2009-07-29
19:19:23
  



상병 이 원 
  음. 전 그냥 헤겔을 다시한번 읽어보겟습니다. 

뭐 입문으로 들어갈만한 책한권 소개해주실래요?(후덜덜) 2009-07-29
20:52:36
  



병장 김예찬 
  개인적으로 찌릿찌릿한 부분이 많은 글입니다. '거대서사가 붕괴했다는 또 다른 거대서사에 탐닉'하는 것은 저를 비롯한 많은 인문학 소비자들이 발을 디디게 되는 함정 같습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e 스포츠 스타 리그'에서 새로운 서사 구조의 탄생을 목격하며 유의미(한듯)한 즐거움을 느끼기도 하니까요... 

원익님의 글을 통해 진정한 '비평'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항상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리고 제가 할 수 있는, 혹은 해야만 하는 일은 무엇인가도 고민하게 되구요. 잘 읽었습니다. 

<네이션과 미학>이 번역되면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은 개정증보판이니 일단은 고진의 저서가 다 소개되는건가요? 이번 나들이를 한 주만 미뤄서 다녀왔으면 좋았을텐데.. 라는 아쉬움이 드네요. 2009-07-30
08:24:29




상병 이 원 
  어제 많이 읽어봤는데 (웃음) 
와 사실 제 머리로는 잘 이해가 안되요(지식이 없어서,,,,) 
하지만 원익님이 이글을 쓰신건. 
지금 우리사회에서도 이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고 
사회현상으로 까지 빚어지면서 나타나는 일명 냄비현상이죠 
글쎄요. 우리 책마을(사실 들어와서 활동한지 한달도 채 안돼지만)이 
어떤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는 조금 더 신중히 생각해 봐야할 문제 같습니다. 2009-07-30
12:30:36
  



일병 지승인 
  그나마 '가지로-'는 외치지 않아서 다행이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추천이 세 개. 

어떤 말도 덧붙이지 못하겠네요. 양질의 글 계속 기대합니다. 커트 코베인의 귀환. 함정일지라도. 최근에 나오는 잡음들이 사실은 0으로 수렴하는 느낌이네요. 우웩. 2009-07-30
12:52:22
  



상병 박원익 
  이동열/'경지'라고 할 만한 건 없습니다. 다만 절실함이 문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원/"헤겔 정신현상학 강의"라고 해서, 제목이 정확히 맞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우리나라 사람이 쓴 "정신현상학" 입문서가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인이 쓴 입문서가 으레 그런 것과 같이 허접하기는커녕, 굉장하다고 하네요. 저도 사실은 이제서야 읽어봐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미니마 모랄리아> 자체에도 헤겔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김예찬/사실 히로키는 일본인들(아시아인들)의 근시안을 보여주는 한 사례라고 봐요. 그에 비하면 고진은 정말 세계 어디에 내놔도 손색 없는 지식인이지요. 사실 저는 고진에 대해 문명사적인 자랑스러움마저 느끼게 됩니다. 철학적인 "대동아공영권"이 바야흐로 실현되는 시기랄까요? 하하하하 

지승인/ 저는 제 글이 이해되고 반향을 일으켰으면 싶사와요...... 2009-07-30
17:00:50
  



상병 이 원 
  원익님// 

소개감사합니다. 사실 제가 역사철학을 위주로 공부한다고 해도 
사실 너무 어려운게 사실이거든요 허허 
어떻게 공부해야할지 감이 안잡힙니다. 미니마 모랄리아는 한번 꼭 읽어보겟습니다. 
요즘 철학이야기가 나오면 막 공부하고는 싶은데 
어떤식으로 접근해야할지 많이 난감해요 허허 2009-07-30
19:58:41
  



상병 홍명교 
  원익/ 

간만에 머리 꽝 때리는 글이었습니다. 다시 돌아가야할 것 같네요. 최근엔 지극한 암울함이 오히려 삶의 에너지가 되는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너무 맘에 드는 상태네요. 
저도 그간 읽은 글들을 천천히 돌려놓고 싶은데 너무 바뻐서 진지하게 글을 쓸 여유가 없네요. 2009-07-30
20:25:26
  



일병 오학준 
  이미 몇몇 서점에서는 7월 30일에 네이션과 미학이 출판되어 있더군요... 2009-08-01
06:48:09
  



병장 김태완 
  이번엔 오타쿠군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