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글-내글내생각] 우리들의 ‘방’을 말한다.  
상병 윤정기   2009-07-15 14:44:32, 조회: 259, 추천:0 

* 스크롤의 압박이 있습니다.
* 이 글은 최근 책마을에서 논의되었던, '공간'에 관한 생각들에서 유추된 것으로, '인간에게 가장 본질적인 공간은 무엇인가?'라는 모자란 물음에서부터 시작하였음을 알립니다.



1. At least, ‘방’과 ‘방어 메커니즘’

오래전, 지금은 음악을 하는 내 친구의 미니홈피 게시판에서 이런 글을 본 적이 있다. 
‘At least. 여기까지입니다. 이게 최소한의 배려라고 생각합니다. 친해지고 싶은 마음도 없으면서 다가오는 것은 싫습니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대략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그것을 처음 본 나는 약간의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분명 ‘담 쌓기’였고, 인간관계의 부분적인 ‘단절’을 의미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실질적인 만남이나 행동에 있어서 그 녀석은 그런 행동들을 드러내놓고 보이는 부류가 아니었다. 오히려 누구보다 활발했으며, 속칭 ‘분위기 메이커’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그 게시판에는 친구 녀석이 올린 시, 글, 음악 등속의 많은 자료들도 대부분 ‘공개’된 채 있었다는 사실이다. 폐쇄적인 성격을 가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그들이 가진 인간관계의 내면에는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고자 하는 욕구가 강하다. 자기정체성이 타인에게 지배당하는 것을 참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녀석의 경우엔 그런 모습들마저 거의 없었고, 약간 장난 섞인 자만심이 좀 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타인에게 배타적인 면은 별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물론, 이것은 나의 해석이다. 나는 그 녀석을 겨우 몇 년 간 보아왔고, 게다가 녀석의 속이 파란색인지 빨간색인지 구분할 만한, 이른바 ‘관심법’같은 통찰력은 없었던 것이다.  

정신줄 놓기 딱 쉽게 흘러가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사회의 강물 속에서, 우리는 자신만의 공간, 자신만의 ‘방’을 갖기를 원한다. 경제력, 사회적 계층구조, 도덕적 관념 등에 의해 지배당하는 자신을 지켜내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아무것도 지배당하지 않고, 아무것도 지배하지 않는’ 나만의 방을 원하는 것이다. 사실, 그것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우리들의 부모님에게도, ‘사장님 나빠요’를 입에 달고 살아가는 힘든 이주노동자들에게도, 궁에서 1학년을 처음 달았을 때의 우리들 자신에게도 그것은 필요한 것이었고, 지금 이 순간 또한 필요하다. 
이것을 ‘자기방어 메커니즘’ 이라고 부르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방’과 ‘방어 메커니즘’의 의미는 좀 다르다. 자기방어 메커니즘은 자신의 정체성이 공격을 ‘당한’, 혹은 ‘당할 것 같은’ 경우에 발동한다. 그것은 마치 북쪽 나라의 미사일 공격에 대비하기 위한 ‘대공방어체계’와도 같은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방은, 방어의 입장에서만 생성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살아온 궤적, 가치관, 그리고 자신만이 가진 고유한 특성들로 채워진다. 더불어 방이라는 공간적 의미는 결국 그 자체로 어느 정도의 ‘폐쇄성’을 담보할 수밖에 없기도 하다. 하지만, 단순히 자기정체성의 보호 차원과 달리, 방의 그 구조적인 함의는 오히려 우리들의 ‘얼굴’과 같은 모습을 지닌다. 첫째로, 방은 자기정체성과 같이 후천적인 학습과 노력의 결과로 이루어지지만, 그 구조는 외려 ‘실존’에 기인한다. 둘째로, 방어 메커니즘이 방어라는 反공격적, 反체제적 테마에 의존한다면, 방은 어머니의 ‘자궁’과 같은 태생적, 본능적인 공간의 카타르시스에 의존한다.   
이렇듯, 우리에게 방이라는 공간은 우리가 이 세계를 접한 태초의 공간속에서부터 생성되기 시작한다. 그것은 일종의 ‘보이지 않는 얼굴’이다. 인격의 분열로써의 ‘지킬&하이드’ 같은 다른 얼굴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인격의 총체와 본질로써의 얼굴이다. 쌍둥이들마저 미세한 차이를 가진다는 얼굴이라는 ‘실존적 나르시시즘의 이름’, 그것이 우리가 말하는 방이라는 공간일지도 모른다. 더불어 방은, 타인으로부터의 ‘방어’를 위한 폐쇄적 공간만이 아니라, 자신만의 고유한 바코드를 가진 - 하지만 자기 외부의 공간에 대한 가능성을 견지한 - 부분적으로 오픈된 공간이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것은,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방이라는 공간에는 ‘문’이라는 사회적 광장에로의 ‘통로’가 존재한다는 보편적인 사실과, 인간이 자신을 나타내는데 있어 ‘얼굴’이라는 개념이 가지고 있는 ‘기표’로써의 사회적 인식에 근거한 것이다. 

그렇다면, 내 친구의 저 단호한 한 마디는 자신의 방을 침범하는 타인에 대한 경고였을까, 아니면 그저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방어 메커니즘이었을까? 나는 여기서 'at least(최소한)'라는 단어에 주목해본다. 자신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공간, 그것은 ‘적어도 이곳만은 건드리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주요한 사실은, 그 녀석의 다른 게시판에는 이른바 ‘댓글’이 달려 있었지만, 그 글만은 댓글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그곳이 폐쇄적 장소임을 뜻하며, 더불어 ‘방’으로써의 개방성을 없애려 했다는 것을 동시에 말해준다. 
여기, 한 관음증 환자가 있다고 치자. 그는 친구 녀석의 수많은 역사를 탐닉하다가 그 글에서 턱, 하고 멈춘다. “이건 뭐지?” 그러자 친구 녀석이 암묵적으로 대답한다. “여긴 안 돼.”라고. 마치 처음으로 밤을 같이 보내는 여관의 두 남녀 같지 않은가. 그것은 어떤 면에서 자신을 허락하는 ‘단계의 미학’을 가지지만, 결국 자기방어라는 폐쇄적 기제를 탈피하기 힘들다. 나의 결론이 얼마나 해석상의 정확성을 가질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친구는 그저 삶 속에서 자신만의 한 줌 공간이 가지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마치 방이 가진 최소한(at least)의 통로처럼 말이다. 


2. 범주의 문제 : 우리들의 ‘방’은 몇 평일까?

“······굴 같은 방으로 한 발 걸어 들어가자 벽 가까이서 촛불을 등지고 누워있는 소양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머리맡엔 박쥐같은 것이 웅크리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그것은 까만 우산이었다. 방안에서 까만 우산을 쓰고 누워있는 모습은 괴이하기까지 했으나 촛불 때문인지 신비하게도 보였다.······(중략)”

                                                                                                          강석경, <숲속의 방> 中

80년대 강석경의 소설 <숲속의 방>에는 시대와, 자신 속에서 방황하는 소녀, 소양이 나온다. 그녀는, 80년대라는 극단적인 시대적 상황 속에서 자기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찾아 헤매며, 회색주의를 지향하고 살아간다. 하지만 남자친구라는 개인적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것은 기계적인 섹스일 뿐이며, 아버지는 그녀를 성인으로 인정하지 않고 그저 사회적 남성성의 눈으로 그녀의 생각과 행동을 비난한다. 이런 것들은 그녀로 하여금 점점 자신의 ‘방’속으로, 자신의 세계 속으로 침전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그녀는 결국, 회색지대를 인정하지 않는 극단의 사회적 분위기에 대한 저항과, 자신의 방을 제대로 찾지 못하고 자신 속으로 깊숙이 가라앉지도 못하는 부유(浮遊)적 상태 즉, 자기인식의 방황 속에서 ‘자살’이라는 ‘자기 방어적이자 동시에 자기 파괴적’인 역설적인 결정을 내리고 만다. 
‘촛불을 켜고 까만 우산을 쓴 채 자신의 방에 누워있는’ 소양의 모습은, 결국 우리로 하여금 세상 속에서 자신의 방 한 칸을 가지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더불어, 나의 입장에선 한 개인에게 있어 ‘방’이라는 의미의 존재유무도 중요하지만, 그 공간의 ‘규모’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일종의 ‘자기인식의 범주(영역)’이라고 얘기할 수도 있는 이러한 방의 평수는, 개인과 개인이 만날 때, 혹은 개인에게 정체성과 자기인식의 정도가 얼마나 되는지를 알려주는 지표가 된다.   
우리는 대부분 학교를 다니고 있다. 그리고 언젠가 졸업을 할 것이고, 졸업을 한 후엔 직장을 다닐 것이다. 그리곤 결혼을 할 것이고, 집을 살 것이다. 그리고 결국 소양처럼 우리는 고민할 것이다. 집이라는 곳, 즉 세분화해서 우리에게 방이라는 공간은 괴로운 사회로부터의 개인적 도피처이자 휴식처인지, 내 자아의 발전을 위한 장소인지, 그게 아니라면 그저 집(방)이라는 공간이 자신에게 대체 얼마나 ‘커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것은 한 개인에게 방이 과연 “얼마만큼이나 필요한가?” 에 대한 답으로 귀결될 수 있다. 힘든 현실을 살아가면서, 자신만의 공간이자 내재적 발전을 위한 공간이 얼마나 필요한가는 결국 한 개인을 둘러싼 사회적 환경과 필연적으로 연관된다. 소양의 경우, 그것은 자신의 ‘존재’와 관련된 삶의 공간이었다. 자신만의 정체성과 ‘중간자’적 입장을 위한 일종의 ‘자궁’과 같은 태초의 회색 공간. 물론, 이는 너무 폐쇄적인 경향이 강하며, ‘까만 우산’은 자기방어 매커니즘의 전형적 도구로 나타난다. 이 경우, 소양의 ‘방’이라는 곳은 마치 빛이 들지 않는 깊은 동굴 - 이것이 여성의 질을 상징한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겠다 - 의 가장 끝 부분에 존재하는 압축된 공간이다. 이러한 압축되고, 협소한 방의 범주에서는 타인과의 배타적 상호관계 - 소양의 실제 인간관계처럼 - 를 형성할 수밖에 없으며, 실재적인 자기인식의 영역에서 또한 타자의 존재범위를 좁혀나가는 역할을 수행한다.     
그렇다면, 만약 소양의 경우처럼 ‘아주 좁은 방’이 아니라 ‘아주 넓은 방’을 가진 경우라면 어떨까? 당연하게도, 방이 무조건 넓다고 모두에게 좋은 게 아니듯 자기인식의 범주가 넓기만 한 것은 오히려 ‘자만’이나, ‘나르시시즘’같은 극단적 ‘자기에게로의 고립’을 낳기도 한다. 이것은 결국, 방이라는 공간이 너무 좁거나, 너무 넓다면 자기에게로의 환원만을 강조하는 ‘자기 환원주의’의 입장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결론적으로, 방이라는 공간은 앞에서 말한 최소한의 (at least) ‘소통’의 통로와, 자기 자신에게 걸맞는 ‘맞춤 범주’가 필요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그러므로 우리는 집을 고를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방을 ‘만들기’에 앞서 이곳의 교통수단은 어떤지, 집의 평수는 어느 정도가 적절한지, 그리고 그 집이 과연 ‘살기 좋은’ 곳인지에 대한 고민을 먼저 해야 할 것이다. 


3. 타인의 방과 만나다 : ‘노크’에 대한 우리의 자세 

잠 못 드는 오늘 밤, 하지만 우리는 ‘내일 출근해야 하고’ '주변의 이웃들은 자야할 시간'이다. 
‘벽을 쳤다간 아플 테고,’ ‘갑자기 떠나버릴 자신도 없다.’ 
[브로콜리 너마저]의 나지막한 노랫말처럼, 우리들은 자신의 ‘방’에서 타인의 ‘방’을 만나기도 한다. 그것은 때로 유쾌하기도 하지만, 어두운 자신의 방이 타인의 방까지 어둡게 하는 걸 타인이라는 ‘객체’는 용납하지 않는다. 그 또한 ‘주체’로써, 다른 ‘객체’의 침범을 용서치 않는 것이다. 이것은 앞에서 다루었던 ‘방의 범주’와도 결부되는 문제이다. 결국 우리는, 우리의 방 한구석을 ‘타인’이라는 존재를 인정하기 위해 남겨둘 수밖에 없다. 
‘타인의 이해’에 관한 문제는 어쩌면 아주 오래된 농담처럼 우리들 내면을 잠식하고 있다. 그것은 어쩌면 ‘주체’라는 어려운 개념의 인식 이전에, 우리에게 ‘주체’라는 개념을 심어주기 위해 필요한 일종의 ‘충분조건’의 역할을 하는 ‘선지식’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얼마나 이기적인가. 자본주의라는 패러다임은  우리에게 어떤 눈으로 세상을 보게 하는가. 인간의 이기심이란 결국 인간으로 하여금 서로에게 적당량의 피해와 적당량의 배려를 낳게 하는 것은 아닌가. 이러한 인식 속에서 우리는 오늘도 타인이라는 발열체와 인사하고, 농담하며, 담배를 피우고, 화를 내기도 한다. 물론, 지금의 논의는 단순히 타인이라는 존재를 만남이 아니라 타인의 ‘방’이라는 ‘본질적 공간’을 만난다는 전제를 통해 전개하고 있지만 결국 ‘방’이라는 공간은 우리의 ‘표현’을 통해 그 본질이 조금씩 발현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그 표현이란 대부분 초자아라는 일종의 ‘필터’를 거쳐 나타나겠지만, 무의식적 행동 - 이드의 발현 - 이 존재하듯 그것은 기능적으로 여과장치를 거치치 않는, 그야말로 ‘본질’의 영역이라고 본다.   
우리는 결국 타인의 본질의 영역에 다가서기 위해 ‘표현’이라는 표면적 상황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서로 사랑하는 연인사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오히려 더 중요시된다.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하려고 노력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타인에게서 수용하는 눈빛, 표정, 말투, 말의 억양 등의 직·간접적 표현을 통해, 우리는 타인에게 자신의 표현을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하고, 판단한다. 하지만 이러한 표면적인 상황에서는 ‘타인의 방’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없다. 그것은 결국 수박 겉핥기일 뿐이며, 친밀도 이상의 관계적 상황을 진전시킬 수 없는 것이다. 
이기적 인간이라는 우리의 본성 앞에, 우리는 결국 잠시 멈춰 설 수밖에 없다. 타인의 방은 우리들의 방과 마찬가지로 그냥 문을 열고 쉽게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타인이 방 속에서 무엇을 하는지,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지 우리는 정확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에겐 ‘노크’가 필요하다. 

“똑똑. 들어가도 되겠습니까?”라는 인사는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도 흔히 보는 이른바 ‘예의바른’ 모습이다. 고3수험생의 방에서부터, 사장님의 방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방에 우리는 ‘허락’을 구하고 들어간다. 당연히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이며, 들어가는 이가 누군지 인식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조금은 도덕적인 룰에 매여 있는 듯 보이는 이러한 행동이 중요성을 가지는 이유는 바로 ‘타 존재의 긍정’에 기인한다. 그것은 이른바 ‘차이의 인정’이다. 너와 내가 다르다는 것, 그리고 그것의 인정에서 머물지 않고 타인 속으로 향하고자 하는 자신의 대타자적 욕망을 긍정하는 것. 그리고 더불어 그 긍정을 타인에게도 넘겨 자신을 허락할 수 있는 선택을 향유하게 하는 것. 그것이 내겐 ‘노크’라는, 지젝이 말한 일종의 ‘이론적 실천’이며, 긍정의 이데올로기다. 

오늘도 노크를 통해 수많은 방의 문이 열리고, 닫힌다. 우리는 타인의 노크에 반응하며, 우리 자신 또한 타인의 방문을 열기위해 노크한다. 이렇게 수많은 방이 만나고, 수많은 공간이 겹쳐진다. 방이라는 이름의 동심원들이 만나 조금은 짙어진 부분집합의 공간을 만들어내며, 그것은 무한히 확장되어 한없이 투명하고, 때로는 한없이 짙은 동심원들의 세계를 이어나간다. 우주는 이렇게 부분집합을 가진 수많은 동심원들로 소통하는 것은 아닐까.


4. 개인적 ‘방’과 사회적 ‘광장’의 연결

“······여기는 꿈이 아니야. 날개는 없고 몸뚱이만 있는 더러운 땅이야. 새가 아니고 나비가 아니고 땅을 전신으로 문지르고 다니는 뱀이야 날개는 환상이야.
깨어지면 아프고 괴롭고 추한 몸뚱이야.······”(중략)
                                                                                                          강석경, <숲속의 방> 中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시 처음의 논의로 돌아가야만 한다. 우리에게 ‘방’이라는 공간은 최소한의 개방성, 즉 사회를 향한 통로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에게 맞는 범주를 필요로 하며, ‘노크’라는 소통의 방식을 통해 타인과 무한히 관계한다. 하지만 앞서 나온 소양의 죽음과 같이 우리에게는 우리의 ‘방’이라는 공간이 개인에게 있어 무한히 ‘확장’되지 못하고 언제나 사회적 체제라는 커다란 장애물에 부딪혀 좌절되곤 한다. 이것은 비단 근대적 문제를 다룰 때 뿐 아니라, 21세기라는 ‘비현실적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하나의 사회적 ‘담론’의 역할을 하고 있다. 
위의 글은 소양의 마지막 유언이다. 날개는 환상일 뿐인 현실의 세계에서 거의 불교적 인식에 가까운 이러한 낮은 중얼거림이 사회라는 시끌벅적한 이야기 속에 묻혀버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개인과 개인의 소통, 그리고 개인과 사회의 소통은 사실상 그 맥락을 같이 한다. 하지만 단순히 개인의 집합이 사회는 아니듯, 개인과 사회의 소통에서도 그 의미가 개인과의 소통에서 이루어지는 것과는 다른 측면이 존재한다. 그것은 결국 사회라는 거대한 집단 - 이미 개인이 종속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 필연적 공간인 - 에 개인이 ‘참여’하기 위한 만남의 장(場), 또는 그러한 소통방법의 부재에 기인한다. 결국 개인의 방은, 사회라는 거대한 ‘광장’에서 홀로 ‘군중속의 고독’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고독은 ‘자기 방’으로의 환원을 가져오며,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또 다른 ‘사회를 위한 나의 방’을 만드는 계기로 작용한다. 그 방은 오로지 사회적 존재로서의 자신만을 강조한다. 그리고 사실 지금의 우리들, 20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대부분은 이러한 사회로의 진입 ‘과정’을 거치게 된다. 

······‘내’ 방은 휴식, 내밀성, 은밀하고 사소한 행복의 의미작용을 가진다. 방은 개인에게 있어, 비밀스러운 닫힌 공간인 것이다. 집에 관한 바슐라르의 명제를 변형한다면, ‘방은 인간존재 최초의 세계’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김애란의 ‘자기만의 방’은 이보다 더 절실한 사회적 차원이 개입되어 있다. 그곳은 ‘신빈곤’ 시대의 20대들, 청년실업과 비정규직 양산이라는 엄혹한 시대상황 속에서 처절하게 입사식(入社式)을 준비하는 공간이다.······(중략)

······ 세상의 모든 몸들이 조금씩 상처를 가진 것처럼, 그 방들은 조금씩 아프다.······(중략)

                                                                                          김애란, <침이 고인다> 작품해설 中

아프냐? 나도 아프다······(중략)(?)

김애란의 방은 소양의 방보다는 덜 폐쇄적일 것이다. 그녀의 방은 소양과는 달리 체제로의 순화, 즉 사회라는 체제 속으로의 진입을 위한 ‘아픈 방’을 전제하고 있으니까. 소양처럼 자살하지도 않으며, 자신 속으로만 움츠리지도 않는다. 그녀는 다만 한발자국, 그 아픔을 승화시키는 자신만의 방을 가지기를 바란다. 누구나 조금씩 상처를 가지고 있다고, 그걸 너무 아파하지 말라고 말이다. 김애란은 그렇게 개인적 아픔을 사회라는 거대한 틀에서 환유하여 독자들에게 그 아픔을 다시 조금씩 나누어준다. 

언젠가, 이우혁 작가의 홈페이지인 ‘혁넷’에 이런 제목의 글을 쓴 적이 있다. ‘꿈과 현실의 연결고리.’
그 글은 모 게임과 관련된 ‘꿈이냐, 현실이냐’에 관한 선택을 다룬 내용이었고, 나는 그 글에서 그 연결고리는 바로 ‘나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미묘한 결론을 내어버리고 말았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사실, 마찬가지다. 나는 결국 사회와 개인의 관계맺음에 있어, - 그것이 ‘방’과 ‘광장’이라는 본질적 공간이라 하더라도 - 우선순위는 언제나 ‘개인’이어야하고, 사회라는 ‘광장’은 그 관계맺음의 공간과 소통의 방법을 마련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견지하고 있다. 개인vs개인의 관계에서 ‘노크’라는 이론적 실천이 사용되었듯이, 사회vs개인의 관계에서도 ‘서로를 두드리는’ 제도적 장치와, ‘방’이라는 특수한, 그리고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이 ‘광장’이라는 무한히 개방적인 장소와 만나기 위한 소통의 ‘방식’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사회로의 진출, 나의 방과 내가 만나는 사회라는 광장은 너무도 큰 괴리로 인하여 나의 몸과 마음에 날카로운 발톱으로 상처를 남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꿈으로, 환상으로 은유할 줄 아는 시적인 삶의 자세와, 그리고 고통에 몸부림치는 뱀에게 다리를 그려줄 수 있는 회화적(혹은 해학적)인 삶의 ‘용기’를 가져야 하지 않을까.
춤추는 자세. 나는 약간의 춤추는 자세를 우리들이 가졌으면 하고 바란다. 춤추듯, 가장 원시적인 우리들 몸의 율동과, 머릿속을 비우는 리듬으로 우리들의  방이 가진 아픔을 승화시켰으면 한다. 김애란의 말처럼, 조금 아프지만 그것은 ‘지나가는’ 과정이며, 그렇게 오늘도 우리의 방과 사회를 연결하는 레인 위를 소리 없이 ‘지나가고’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8-24
15:44:13 

 

상병 김정민 
  역시 모니터로 보는 글을 익숙치 않아요. 
이런 글은 프린터로 뽑아서 봐야 제맛을 느낄 수 있어요. 

인쇄해서 봐두되죠? (하하) 2009-07-15
15:28:50
  

 

병장 손근애 
  개인으로서만 가지고 있던 방과 '사회'라는 거대한 방과의 만남은 어쩌면 필연적으로 아픔을 동반할 수 밖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사춘기라는 시기가 신체와 어린아이적 사고를 벗어나는 데서 아픔이 동반된다면, 이것은 좀더 커다란 '세계'를 직접적으로 맞닥뜨리게 되는 데서 필연적으로 거치게 되는 '현실의 확장'의 아픔이겠지요. 2차 사회화, 혹은 2차 사춘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수 많은 생각들에 혼란스러운 것도 당연하겠지요. 하지만, 확실한 것은 어쨌든 거쳐야 하는 길이라는 사실일겁니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이 과정을 거치면서 현실이라는 감각에 너무 쉽게 '용기'와 '희망'을 잃어버립니다. 이건 세계를 맞닥뜨리면서 자신의 '공간'을 확장한 것이 아니고 그 거대한 감각에 먹혀버린 거겠죠. 

각자에게 주어진 공간의 모양과 크기는 모두 다르겠지만, 어쩌면 우리는 같은 공간에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좀 더 치열하게 사유하고 좀 더 치열하게 애써 봅시다. 그러면 언젠가는 우리의 사고도 확장되리라 생각합니다. 

자신의 공간을 잃어버리지 않고, 확장하여 세계만한 그릇으로 키울수 있도록. 

그리고, 가지로. 2009-07-15
15:33:46
  

 

병장 양동훈 
  아악. 제기랄. 
일단. 아무 말도 붙이지 않을게요. 
가지로- 

일단 보내야겠다는 생각은 들었는데, 무슨 말을 더해야 할까 모르겠네요. 더하면, 이 글이 상할까 봐. 2009-07-15
15:39:59
  

 

상병 김정민 
  정신줄 놓기 딱 쉽게 흘러가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사회의 강물 속에서, 우리는 자신만의 공간, 자신만의 ‘방’을 갖기를 원한다. 

그것은 결국 사회라는 거대한 집단 - 이미 개인이 종속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 필연적 공간인 - 에 개인이 ‘참여’하기 위한 만남의 장(場), 또는 그러한 소통방법의 부재에 기인한다. 결국 개인의 방은, 사회라는 거대한 ‘광장’에서 홀로 ‘군중속의 고독’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이러니네요... ... ...... 2009-07-15
16:05:15
  

 

상병 윤정기 
  근애 / 예. 자신을 잃지 않고, 자신의 세계화를 이룩하는 것이 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자기계발 모토가 되어야 하겠지요. 근애씨가 '주어진 공간의 모양, 크기가 다르지만, 어쩌면 우리는 같은 공간에 있다'고 말한 것이 와닿네요. 

동훈 / 아아악. 감사합니다,만 이 글은 사실 상하라고 냅둔 홍어회 같은 겁니다.(웃음) 급하게 쓴 글이라 모자란점이 많을 겁니다. 

정민 / 예. 아이러니지요. 자신의 '방'을 그토록 갈망하지만, 사회라는 '광장'과 자신의 '방'이 쉽게 소통하지 못하는 이중적인 현실은, 결국 김애란이 말한 소통의 아픔을 우리에게 남기곤 합니다. 하지만 마지막에 언급했듯, 우리는 자신의 방을 사회로 무한히 '확장'시키려는 노력과, 소통의 방법에 대한 사유, 그리고 아픔을 승화시키는 '용기'로 재무장할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지요. 2009-07-15
16:36:41
  

 

일병 박준우 
  아악... 저도 마침 쓰려고 했던 주제인데, 먼저 올라왔군요. 
본의 아니게 또 따라쓰게 되겠군요 흑흑... 2009-07-16
04:46:53
  

 

병장 차종기 
  사실요, 저는 광장과 방을 연결시키지 못하고 있었어요. 
방은 그저 광장에 나가 상처받고 회피 혹은 휴식을 위한 공간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물론 방에 문은 있지만 광장으로 바로 통하는 문은 아니라고 생각했었습죠.네네. 
(사실 댓글이 날아가버려서 슬쩍 짜증이 난다는, 당근 끝물인데 젠장.) 

문은 여러개 열고 드러가야 비로소 방이 나오는 겁니다. 폐쇄성을 전제로 한 방이요. 
부분적으로 오픈된 방은 한칸 앞 방이겠죠. 완전히 폐쇄된 방을 하나씩 다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조금 오바였나. 흠흠. 

그냥 읽으면서 내내 이런 생각이 떠나지 않았어요. 분명 완전히 폐쇄된 공간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 그건 방이 아니라 방어적매커니즘인가, 
여전히 혼란스럽네요. 그래서 가지로는 조금 늦게 보내드릴께요. 흐흐흐. 2009-07-16
05:48:32
  

 

병장 차종기 
  아아, 덧붙이자면, 소양의 방과 김애란이 말하는 방이 다를지도 모른다는 말이지요. 
소양의 방은 완전히 폐쇄된 방이고, 김애란이 말하는 방이 부분적으로 오픈된 방이다. 
라는 말입니다. 아니아니, 그냥 제 생각이 그렇다구요. 흐흐흐. 당근끝물이라, 
정신이 혼미해져서 괜한 생각하는 거일지도... 2009-07-16
05:51:26
  

 

상병 윤정기 
  준우 / 흐흐. 주제가 같다고 내용도 같은건 아니지요. 아마 모자란 이글보다 훨씬 나은 텍스트를 완성할 수 있으실 겁니다. 

종기 / 음, 물론 개인은 타인에게 절대로 노출시키지 않고 싶은, 자신만의 '방'을 가질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개인은 여러개의 '방', 즉, '단계적'인 방어기제를 가질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한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방이라는 공간이 결국 타인의 방, 그리고 나아가서 사회라는 거대한 광장을 만남에 있어 - 그런 만남이 인간이 삶을 살아감에 있어 필연적인 것이므로 - 서로의 '소통'을 위한 통로를 확보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것은 결국 방이라는 공간이 '복수'로 존재함을 지향해야 할 것이 아니라 '단수'이되, 무한히 확장해 나가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본문 내용에도 있듯, 그것은 동심원이 서로 부분집합을 가지면서 무한히 연결되는, 소통의 연결고리를 형성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소양의 방과 김애란이 말하는 방의 차이는 일부, 본문 내용에도 있습니다. 

'김애란의 방은 소양의 방보다는 덜 폐쇄적일 것이다. 그녀의 방은 소양과는 달리 체제로의 순화, 즉 사회라는 체제 속으로의 진입을 위한 ‘아픈 방’을 전제하고 있으니까. 소양처럼 자살하지도 않으며, 자신 속으로만 움츠리지도 않는다. 그녀는 다만 한발자국, 그 아픔을 승화시키는 자신만의 방을 가지기를 바란다. 누구나 조금씩 상처를 가지고 있다고, 그걸 너무 아파하지 말라고 말이다. 김애란은 그렇게 개인적 아픔을 사회라는 거대한 틀에서 환유하여 독자들에게 그 아픔을 다시 조금씩 나누어준다.' 

이렇듯, 김애란의 방은 사회로의 진입, 그리고 그것을 위한 한발자국 소통의 길을 마련하고자 할 때의 아픔, 그리고 그것을 치유하고 승화시키는 의미로서의 방을 말하고 있습니다. 소양의 방처럼, 자신 속으로 침잠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세계에 대한 '자신과의 차이'를 인정하고 손을 내미는 자세를 취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2009-07-16
09:25:47
  

 

병장 차종기 
  아하,! 명쾌한 댓글 감사합니다. 히히. 
가지로 외치러 왔습니다 호호호. 
가지로. 2009-07-17
08:00:25
  

 

상병 진수유 
  잘 읽었습니다. 2009-07-17
10:58:40
  

 

상병 김태완 
  저도 아프네요. 아직 많이 아파보진 않았지만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