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후기]1458번 진수유 님의 발췌언에 대해, 주권론과 근대성  
상병 박원익  [Homepage]  2009-06-19 14:31:26, 조회: 76, 추천:0 

동시에 분할될 수 없는 자연적 삶이라는 조건은 그러한 법이 가장 강력하게 작용할 수 있는 취약점이자, 법 자체의 취약점이기도 하다. 체계는 언제나 비체계에 빚을 진다. 근대성의 원리가 그러하듯, 질서라는 말에는 항상 비질서라는 말이 은폐된 채 따라다닌다. '주체'라는 구성岵?개념이 개념을 통해 대상들을 질적으로 평준화시키고 수량적으로(시공간적으로) 재배치하는 것, 그렇게 하려는 무한한 의지가 근대성의 원리에 대한 단순한 설명이라면, 그것은 나누기 위한 대상을 언제나 필요로 한다. 아도르노가 요청한 개념적 '자연'이 바로 그것이 될 수 있다. 동시에 인간의 자연성 자체 - 인간의 원죄로 '추정'되는 - 가 바로 그러한 대상이 된다. 근대성의 원리를 이끌어가는 주체 자체가, 근대성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역설.

  주권은 바로 거기에 있다. 질서는 언제나 질서 바깥의 무언가에 의해 기초가 세워진다. 수학은 증명될 수 없는 자명한 공리에서 연역해 나가며, 사회적 질서는 질서 자체로는 창출될 수 없는 추동력, 즉 주권에 의해 세워진다. 주권이 '예외상태'라는 말은 사회적 질서를 창출하는 힘이면서도 질서 자체에는 귀속되지 않는 꼭지점이기 때문에 나타난다. 동시에 그 꼭지점이기 때문에 주권은 질서를 파괴할 권능을 가진다. 신이 신의 권능을 드러내는 방법이, 신이 창조한 질서의 파괴에 있다는 것 - 주권은, 슈미트에 의하면 세속화된 신의 권력이다. '세속화', 신의 권능이 인간에게로 옮겨지는 것은 완전하지 못하다. 인간은 스스로 주권을 발휘하는 동시에 그 주권에 의해 다스림을 받아야 하는 자연적-정치적 인간이기 때문이다.

[독서후기] 난외각주, 『사람의 아들』, 일병 오학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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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학준님의 주권론은 잘 읽었습니다. 여기에는 슈미트와 아감벤의 주권론이 나오고 있습니다. 즉 주권은 그 자체로는 한 국가 전체의 총의를 재현하지만, 사실 그 자체로는 아무 것도 재현하지 않는 하나의 예외지점을 가지고 있다는 통찰이 여기에 들어있습니다. 근대적 주권은 과거에 자연과 신에 의해 적법성을 부여받은 중세적 권위가 이제는 아닙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모종의 이성적 원리에 의해 정당화되어야만 하는 근대적 재현의 논리를 따르게 됩니다. 그게 국민의 총의이든 입법가들의 토론에 의거하든 무관하게 말입니다. 말하자면 주권은 모든 자연적 행위들을 규율하는 보편적인 프레임이 됩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주권은 그 자신에 대해서는 일종의 '자연상태'와 가까운 것이 되고 맙니다. 아감벤이 말했듯이, 수용소라든지 국경의 경계에서 흔히 발생하는 이 자연상태 속에서, 누구나 '벌거벗은 삶'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주권의 역설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에 관해, 아도르노도, 아감벤도 슈미트도 여기서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일종의 '신비주의'에 빠져버리고 맙니다.

   저는 이것을 김예찬 님과 김소망님이 전에 논했던 근대성 논의와 연결시켜보고 싶습니다. 여기서 저는 하나의 이율배반을 보았습니다. 물론 그것은 모호한 채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과연 근대성의 외부는 있는가, 혹은 근대성만이 절대적으로 유일한 가능한 좌표인가, 이런 질문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김소망님의 자신의 글을 통해, 그것의 역사적 기원과 폭력성을 드러냈고, 김예찬 님은 바우만과 아도르노를 통해서 흥미로운 지점을 이끌어냈습니다. 근대성이란 동일성과 타자성을 끊임없이 재생산해내는 강박으로 추동되는, 자신을 비완결적인 기획으로 정초지으련느 충동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러한 지적들이 과연 수행적으로 어떤 지점을 가리키는지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결국 이진경이나 자율주의 학파에서 흔히 말하는, '근대성의 외부'를 암시하는 건지, 혹은 슈미트나 아감벤의 모호한 체념적 신비주의에 가까워지는 건지 알기 힘듭니다. 

  김예찬님이나 김소망님이 논의했던 근대성을, 이러한 '주권론'에 연결시켜본다면,(사실 지금까지 근대적 비극으로 이야기했던 수용소나 굴락 그리고 아우슈비츠는 어떤 의미에서 '주권' 없이는 의야기될 수 없는 것입니다) 

  언젠가 스티븐 호킹 박사가 '빅뱅 이전의 우주의 기원이란 존재하는가?'라는 꽤나 형이상학적인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 적이 있습니다: "저에게 빅뱅 이전의 우주를 상상하라는 것은, 마치 지구의 남극점에 도달해서는 '이보다 더 남쪽으로 갑시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말하자면 저는 근대성 논의와 주권론에 관하여 호킹 박사의 그러한 언급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근대성에 대한 오늘날 많은 논의들은 분명 어떤 '광학적 허구'(남극의 지점에서 더 남쪽으로 가려는 근대성 외부론)에 정박되어 있는 게 아닌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설사 그것이 이념적으로 혹은 당위적으로 유용한 광학적 허구라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방금 말했던 주권론의 아포리아라든지, 근대성의 파국적 결과들이라든지 하는 아포리아적 사례들이 우리가 준거하고 있는 근대성의 '극'적인 지점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인정한다면, 우리는 바로 이 '극점'에서 더 이상 어떤 작업을 할 수 있는 것일까요.

  그에 관해서 저는 최근 라캉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라캉의 성차론에 대해서 말이지요. 언젠가 라캉은 상징계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누구나 '성별화'라는 대가(거세작용)를 치를 수 밖에 없다고 단언했습니다. 이에 더 나아가 애초에 언어와 상징적 제도 속에서 가능해지는 담론도 '성별화'될 수 밖에 없다고까지 이야기합니다. 말하자면 여성적 담론과 남성적 담론이 있다는 것입니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남성적 담론은 "누구나 다 거세작용에 종속된다. 단, 거세작용에 종속되지 않는 단 하나의 예외가 존재한다."입니다. 물론 거세작용에 종속되지 않는 단 하나의 예외는 거세작용 그 자체입니다. 여기서 '예외상태'로 치닫는 주권론의 은밀한, 그러나 상징적 우주 속에 존재하는 이상 벗어날 수 없는 야만적 도착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성적 담론의 논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모두가 거세작용에 종속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어떤 예외도 없다."입니다. 저는 기호논리학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놀랍게도 라캉이 발견한 이 담화논리는 형식논리상으로는 남성적 논리와 전혀 다르지 않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캉은 여기에 결정적인 성적 적대가 존재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다시 말해, 상징적 우주 속에는, 혹은 남성적 담화논리로 표상되는 근대적 우주 속에는, 혹은 주권의 질서 속에는 어떤 심각한 '적대'가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러한 성적 적대는 앞서 말한 주권의 '예외'와는, 혹은 근대성의 외부나, 동일성에 대한 타자성과, (근대적 주권이 타자성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이들은 다 사실은 비슷한 범주들입니다) 조금도 비슷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 여성적 담화논리에서 근대성의 극복이나 근대성의 외부적 대안과는 전혀 다른, 혹은 달리 말해서 호킹 박사가 말한 (주권론의) '극점'보다 더 멀리 나아가는 것이 가능해지는 지점이 있다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근대성 내부 속에서 가능한 어떤 돌파인 것입니다. 거기에는 어떤 '예외'나 '타자성' 혹은 그와 비슷한 것들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어떤 해방적 논리가 존재한다는 기대를 거는 것이지요.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8-24
18:16:43 

 

일병 오학준 
  잘 읽었습니다. 글을 읽으면서 궁금한 것이 하나 있는데, "누구나 다 거세작용에 종속된다. 단, 거세작용에 종속되지 않는 단 하나의 예외가 존재한다."와 "모두가 거세작용에 종속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어떤 예외도 없다."의 차이점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가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근대성 내부 속에서 가능한 어떤 돌파'라는 말을 조금 더 풀어서 설명해주셨으면 하는 생각이 드네요. 

일단은 저는 전자와 후자의 차이를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전자가 부동의 동자, 주권 같이 어떤 하나의 예외상태만을 전제해 놓고, 그외의 모든 것이 그로부터 나오는 질서 속으로 편입된다는 식의 말이라면, 후자는 그러한 질서 자체가 '보편'이 아니라는 것, 질서를 만들려는 시도를 거꾸러트리는 속성들이 그외의 모든 것들에 항상 내재한다는 식의 말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아도르노가 '자연'의 총체성을 인간의 '계몽'의 기획을 거꾸러트리는, 역사로 환원될 수 없는 극점으로 두는 태도는 전자에 속하는 것인가 후자에 속하는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제가 이해하는 바가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덧붙여서 말하자면 주권은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어떤 시간-공간적 한계 내에서 보편적이려는 시도입니다. 동시에 그것은 정적(靜的)인데, 그것이 성립하는 어떤 찰나를 빼고서는 언제나 주권은 그 '보편'이라는 이름에 대한 도전에 직면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테러'라는 폭력의 사사화 현상처럼, 주권이 폭력을 '독점'하는 상황은 오로지 이상적인 '계약'의 순간에만 실질적으로 가능할 뿐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주권 자체가 동적인 변화에 매우 취약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단순히 '타자' 뿐만 아니라, '시간'도 주권을 이해하는데 필요하지 않은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홉스든 슈미트든 바로 이 '시간'이라고 하는 역사성의 부분 대신에 '신'이라고 하는 비역사적인 속성을 그대로 세속화시켜놓은 것이 '신비주의'에 빠지게 되는 이유는 아닐까요...? 2009-06-20
07:35:28
  

 

상병 박원익 
  일단은 선언적인 글이고(사실은 여건상 제가 책마을에서 쓸 수 있는 글은 선언적 글 뿐입니다), 두 논리의 차이를 어떻게 사고해야할지는 앞으로 남겨진 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런 차원에서 어떤 문제를 '선언'한 것이고요. 

오학준 님의 견해는 아직은 근대성의 '외부'를 상정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홉스든 슈미트든 바우만이든 '자연'이나 '신'과 같은 것을 상정하는 것도 그와 같은 시도와 어떻게든 공모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근대적 주권의 권능은 그것이 그만의 한계와 취약성을 가지고 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오히려 절대적이고 폐쇄적인 악순환으로 귀결된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더욱 그렇습니다. 한 마디로 오학준 님은 근대적 주권은 어떤 역사적 한계에 머물러 있는 현상이고, 그런 지점에서 그것을 비판할 수 있다는 것인데, 제가 봤을 때 슈미트도 심지어 홉스도 그것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겁니다. 오히려 '비판'이라는 것은 제가 봤을 때 그것이 역사적인 상대성이나 한계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에 준거하고 있기보다는(이것이 통상적인 Post 담론의 특징이지요), 오히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것이 넘어설 수 없는 것인지에 준거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강막수의 정치경제 '비판'처럼 말입니다. 제가 근대적 주권이 가지고 있는 '예외지점'이란 마치 천체물리학에서 말하는 (빅뱅이 최초로 시작된) '특이점'이라고 생각한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입니다. 우리는 심지어 우주에 관해서 '시작'을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호킹 박사가 말했듯이 우리는 그 시작 이전의 상태에 관해서, 심지어 그 시작이 전혀 다르게 전개되었을지 모르는 다른 대안적 가능성에 대해서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보편성'에도 어떤 한계가 있다는 오학준 님 말씀에는 동감입니다. 그래서 보편성에 '성차'를 도입하려는 라캉의 시도에 주목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고요. 라캉은 오히려 주권이 모종의 '폭력'에 의해 혹은 어떤 '독점'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고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그러한 독점과 폭력을 깨는 것이 관건이라고는 더더욱 이야기하지 않지요. 오히려 그는 우리가 더욱 그 내부에 머물러 있어야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오히려 현실 자본주의 내부에만 그것을 지양할 계기가 있다고 말한 강막수와 같은 '근대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2009-06-20
09:41:07
  

 

일병 오학준 
  여담이지만 바깥 블로그는 조금 더 복잡해서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농담이라고 생각하세요. 흘흘.) 

저도 너무 간단하게 외부를 설정해놓고 지금을 이론적으로 부정해버리는 것이나, 내부를 절대화해서 비역사적인 실체로 고정하는 것이나 결국 지금에 대한 가장 보수적인 태도로 귀결되는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 점에서 현실 자본주의 내부에만 그것을 지양할 계기가 있다는 강막수의 태도는 오히려 지금 더 주목받아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입장을 가집니다. 라캉을 읽어보게 된다면 재미있을 것 같군요. 

그런데 문득 드는 생각인데, 묘하게 예찬님과 원익님의 강선생에 대한 해석이 갈라지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