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베스트-독서후기] 난외각주, 『사람의 아들』 (1)  
일병 오학준  [Homepage]  2009-06-10 13:49:35, 조회: 116, 추천:0 

참 오래간만에 한 자리에 진득하니 앉아서 책을 읽었습니다. 정신이 산만해 그동안 책과 글을 제대로 읽을 수 없었는데, 모처럼 집중을 할 수 있게 되니 기쁩니다. 물론 정제된 글을 쓰기에는 여전히 정신이 산만합니다. 조금은 산만하고 난삽한 글이어도 이해해 주세요. (제가 다시 읽어도 뭐라고 썼는지 모르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겠군요...) 사실 이 글은 『사람의 아들』에 대한 독서감상문이나 서평이라기보다는, 책을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들을 모은 '난외각주' 정도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1_ 원죄

"계율이 없는 곳에 어찌 죄만 홀로 있겠소?"
─ 이문열, 『사람의 아들』, 244쪽

  인간의 원죄를 규정하는 굴레는 속죄와 유죄의 무한한 순환이다. 계율은 현실의 삶이 언제나 위반할 수밖에 없는, 도달할 수 없는 이상으로서, 인간에게 도래하는 순간부터 인간을 죄인으로 만든다. 흔히 말하는 '무죄 추정의 원칙'은 지켜지지 않는다. 말하는 입을 먹는 입으로부터 분할하는 순간, 말하는 입이 이상적인 삶의 원칙으로 승격되는 동시에 먹는 입은 은폐되어야 하고 배제되어야 하는 추악한 삶이 된다. 질서와 체계, 인간의 원죄는 거대한 노모스 그 자체인 종교에서 반드시 전제되어야 하는 무엇이 된다. 불교에서 말하는 '괴로움'과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는 종교 자체를 유지하는, 핵심적인 무엇이다. 동시에 종교는 체계 내에서 '속죄'의 체제를 갖추고 있다. 그러나 속죄한다는 것은 유죄인 자가 자신의 죄를 시인하고 용서를 받는 것, '회개'한다는 것이지 '죄 없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분리될 수 없는 말하는 입과 먹는 입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인간의 삶, 그리고 말하는 입이 세우는 질서로서의 종교는 끊임없이 인간을 유죄로 기소할 수 있으며, 속죄하도록 강제할 수 있다.

"여전히 되풀이되는 것은 다만 책임없는 죄와 분별없는 처벌의 악순환일 뿐이었다."
─ 이문열, 『사람의 아들』, 288쪽

  그러나 『사람의 아들』에서 <위대한 지혜>가 "구원도 용서도 땅 위에서 구하라"고 말하여도, 그것이 이 유죄와 속죄의 굴레를 벗어던지는 해결책은 아니다. 우리의 '법'은 항상 잠재적으로 모든 이를 기소할 권한을 가지고 있고, 우리는 법 앞에서 '분할될 수 없는 자연적 삶'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항상 유죄로 추정될 여지를 떨칠 수 없다. 


2_ 주권

"다시 말하거니와 너희는 지음받는 그 순간에 이미 완성되었다. 우리는 몸소 분별해야 하는 번거로움 대신에 너희에게 선을 불어넣었고, 간섭하는 수고 대신에 지혜를 내렸다."
─ 이문열, 『사람의 아들』, 296쪽

  동시에 분할될 수 없는 자연적 삶이라는 조건은 그러한 법이 가장 강력하게 작용할 수 있는 취약점이자, 법 자체의 취약점이기도 하다. 체계는 언제나 비체계에 빚을 진다. 근대성의 원리가 그러하듯, 질서라는 말에는 항상 비질서라는 말이 은폐된 채 따라다닌다. '주체'라는 구성적인 개념이 개념을 통해 대상들을 질적으로 평준화시키고 수량적으로(시공간적으로) 재배치하는 것, 그렇게 하려는 무한한 의지가 근대성의 원리에 대한 단순한 설명이라면, 그것은 나누기 위한 대상을 언제나 필요로 한다. 아도르노가 요청한 개념적 '자연'이 바로 그것이 될 수 있다. 동시에 인간의 자연성 자체 - 인간의 원죄로 '추정'되는 - 가 바로 그러한 대상이 된다. 근대성의 원리를 이끌어가는 주체 자체가, 근대성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역설.

  주권은 바로 거기에 있다. 질서는 언제나 질서 바깥의 무언가에 의해 기초가 세워진다. 수학은 증명될 수 없는 자명한 공리에서 연역해 나가며, 사회적 질서는 질서 자체로는 창출될 수 없는 추동력, 즉 주권에 의해 세워진다. 주권이 '예외상태'라는 말은 사회적 질서를 창출하는 힘이면서도 질서 자체에는 귀속되지 않는 꼭지점이기 때문에 나타난다. 동시에 그 꼭지점이기 때문에 주권은 질서를 파괴할 권능을 가진다. 신이 신의 권능을 드러내는 방법이, 신이 창조한 질서의 파괴에 있다는 것 - 주권은, 슈미트에 의하면 세속화된 신의 권력이다. '세속화', 신의 권능이 인간에게로 옮겨지는 것은 완전하지 못하다. 인간은 스스로 주권을 발휘하는 동시에 그 주권에 의해 다스림을 받아야 하는 자연적-정치적 인간이기 때문이다.


3_ 구원

  구원은 '더 나은 삶을 위한 질서의 창출'이 아니라 '현재 삶을 이끌어가는 질서의 효력 상실'이다. 모든 사물들이 '강요된' 의미망에서 벗어나는 순간, 새로운 의미는 가능성으로 주어진다. 하나님의 나라, 천국 - 문제는 기독교의 종교적 구원이 '현세'라는 질서를 파괴하기보다는, 그 질서를 '죽음'으로서 도피한 이후의 인간들에게 부여된다는 점이다. "구원도 용서도 땅 위에서 구하라"는 것은 이러한 도피에 대한 세속화된 인간들의 반항이다. 분리될 수 없는 모순적인 '삶'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해탈'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구원이란 종교적으로 불가능한 것인가? 민요섭은 신으로 회귀하고, 조동팔은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다. 정치적인 메시아 - 발터 벤야민은 유대교의 메시아를 모든 이들의 메시아로 변화시키며, 종교 대신 정치를 문제삼는다. '정지'는 그러나 가능한 것인가? 사실 소설에서 이러한 대안을 발견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아니, '정지'라는 말 자체가, 그 이후의 어떤 계산 가능한 것들을 남겨두지 않는 말이다. 아도르노 식으로 말하자면 '열려있는 미래'를 열기 위해서는, 꾸준히 타락해가는 질서정연한 현재를 '정지'시켜야 한다는 역설. 그것이 사건이 되었든, 불화의 결과물이든, 메시아적인 혁명이든, 가상적 예술에의 희망이든, 아도르노로부터 현대의 해체 혹은 포스트모던한 학자들의 공통점은 구원의 순간 이후에 대해서 말을 아낀다는 점이다. 


4_ 화해

  구원에 대해 말을 아끼는 것. '비동일자'라는 것이 바로 그러한 질서정연한 구원에 대한 의문의 근거가 될 것이다. 예수와 아하스 페르츠, 위대한 선과 위대한 지혜라는 환원될 수 없는 '쌍' - 그럼에도 『사람의 아들』에서 이문열은 이 둘을 근본적으로 하나였고, 앞으로도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으로 그린다. 이것들이 분리불가능한 동전의 양면같은 것이자, 하나될 수 없는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지양이 아닌 구도(Konstellation), 환원될 수 없는 자연과 역사, 그리고 그것을 이어주는 가상으로서의 예술 - 아도르노의 경우 구원의 계기에 대해서 여기까지만 말했다 - 처럼, 화해는 통합될 수 없는 것들의 소통, 타자에 대한 이해이지 모든 것을 보편적으로 환원시키는 것, 최후의 동일자로 환원시키는 것이 아니다. 배제되어야 하고 버려져야 하는 특성의 집합으로서의 타자를, 보편자로 여기는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스스로의 동일성 신화에 의한 폭력임을 인정하는 것 자체에서 화해의 계기는 시작된다. 이문열의 콤플렉스가 사실은 여기 이 민요섭의 <쿠아란티아서>에서 유래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게 된다면, 이문열의 '단절'은 사실상 '없는 것'이다. 지금처럼, 그때에도 그에게는 화해에 대한 '몰지각'이 유지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 책마을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9-07-14 12:36)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8-24
15:57:27 



상병 진수유 
  잘 읽었습니다. <사람의 아들>을 읽은지 꽤 오래되었지만 오랜만에 당시에 느꼈던 감정과 생각들을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3_구원' 부분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이 있었는데, 지금은 '2_주권'에 대해 좀 더 관심이 가게 되네요. 

"주권은 바로 거기에 있다. 질서는 언제나 질서 바깥의 무언가에 의해 기초가 세워진다. 수학은 증명될 수 없는 자명한 공리에서 연역해 나가며, 사회적 질서는 질서 자체로는 창출될 수 없는 추동력, 즉 주권에 의해 세워진다. 주권이 '예외상태'라는 말은 사회적 질서를 창출하는 힘이면서도 질서 자체에는 귀속되지 않는 꼭지점이기 때문에 나타난다. 동시에 그 꼭지점이기 때문에 주권은 질서를 파괴할 권능을 가진다. 신이 신의 권능을 드러내는 방법이, 신이 창조한 질서의 파괴에 있다는 것 - 주권은, 슈미트에 의하면 세속화된 신의 권력이다. '세속화', 신의 권능이 인간에게로 옮겨지는 것은 완전하지 못하다. 인간은 스스로 주권을 발휘하는 동시에 그 주권에 의해 다스림을 받아야 하는 자연적-정치적 인간이기 때문이다." 

지난 달에 읽었던 에코의 <푸코의 진자>를 보면 1권 도입부에 에코가 말하고자 하는 '진자'의 의미가 얼추 나옵니다. 그것이 책 전체의 줄거리를 가장 근본에서부터 지배하고 있는 생각이기도 합니다만, 어쨌든 상당 부분이 맞닿아 있어 보이네요. 현재 수중에 텍스트가 없어서 인용을 못하고 있습니다. 기회가 되면 그 부분을 올려 드리겠습니다. 2009-06-12
09:33:21
  



일병 오학준 
  항상 읽어보려고 목록에 올려놓는 텍스트인데, 아직 읽어보지를 못했네요. 올려주실 부분과 함께 한번 전체를 다 읽어보겠습니다. 흥미로울 것 같네요. 






[re] [독서후기] 난외각주, 『사람의 아들』 (2)  
상병 김태완   2009-06-10 16:25:34, 조회: 60, 추천:0 

일단 전 독실한 종교인이라서 이러한 논리를 펼치는 것이 절대 아니란 것을 전제로 하며 위의 글에 대한 반박을 시작하겠습니다.


이건 난외각주 정도가 아닌걸요? 여태까지 책마을에서 논란이 되었던 근대성, 종교, 소통 등의 말들이 등장하는 걸로 봐서 지금까지 책마을에서 이야기 되어지고 있던 문제에 대해 다른 관점으로서의 해석을 추구하셨군요. 즉, 예수를 믿는 것을 예찬님과 같이 막수주의적 관점으로 다가가 '외부성'의 측면으로써 소통의 필요성을 피력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날 때부터 원죄가 있음을 전제하여 민요섭과 같은 보편적 환원에 대한 주장을 단지 죽음으로의 도피로 보고 이를 '폭력'으로 규정함으로써 종교를 믿고 전도하는 사람들을 모두 '몰지각'으로 밀어 넣으셨군요. 읽으면서 참 섬뜻섬뜻 했습니다. 명규님은 지금 이 순간이 삶을 이끌어가는 질서가 상실되어 이제는 기존의 것들이 모두 무너져야할 시기라고 생각하나요. 제가 보수주의적이라서 그런지 평화주의적이라서 그런지 전 기존의 것을 그렇게 현재를 정지시키면서까지 개혁되었으면 하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보편적 환원을 열렬하게 믿는 사람들의 행동을 보면 어느정도 폭력이라고 인정됩니다. 하지만 전세계 50%가 넘는 가톨릭과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을 폭력 행사의 피해자로 치부해야 하나요. 자기자신을 돌아보고 동일성 신화에 의한 폭력임을 인정하라는 것 자체 또한 폭력 아닌가요. 그리고 폭력으로 인정한다 쳐도 현재를 정지시키는 사건, 불화의 결과물. 메시아적인 혁명, 가상적 예술에서 얻어질 수 있는 희망 같은 것들이 과연 존재할까요. 회의적일 수 밖에 없군요. 너무 허상적이예요. 차라리 진보와 물질주의, 합리주의적 세태의 조류의 영향으로 내 안에서 신으로의 회귀나 신 지향적 사고가 받아들여지지 않아 차라리 주변의 모든 것들에 대해 감사하며 찬양하여 어떠한 유일신을 믿기보다 주변인과의 관계 즉, 소통을 더 중요시하게 생각하는 원불교를 믿어야 한다는 말이 더 진실적으로 다가오네요.

전 지금 믿고있는 유일신 종교들을 경전의 폭력성에 의해 파생된 것으로 규정하고 그 종교들에 대한 대안책으로 주위 사람과의 소통을 제시하며 이를 위대한 지혜라고 말하는 것 또한 폭력이라 판단합니다.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종교에 대한 믿음이 적어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시대는 이미 합리주의적 사고를 요하고 그 합리주의적 사고에 경전들의 복음은 배합되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합리주의적 사고는 근대성을 따라 소통의 중요성을 자연스레 인지시켜줄 것입니다. 정지에 의한 급작스런 변화가 아닌 자연에 의한 자연스러운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는거죠. 이런 화해가 진정한 화해라고 생각합니다. 어떠한 아이에 대해 자신의 생각과 맞지 않다고 딴지를 걸어 마구 싸우고나서 바로 화해를 청하여 그 아이의 생각을 돌리려는 시도를 하는 것보다 차라리 이미 바뀌고 있는 생각에 대해 딴지를 걸지않고 기다리는 것이 어떨까요. 그리고 폭력이라는 말을 씀으로써 내 생각과 맞지 않으므로 무조건적으로 배척한다는 식의 태도로 마음이 바뀌려 하다가도 오히려 반발심에 의해 미움을 사기보다 바뀌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태도를 취하며 그들의 생각을 인정해 주는 것이 어떨까요.

이 것은 논외 이야기입니다만 종교에 대한 저의 생각을 좀 더 덧붙이고자 하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신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믿음 때문에 종교를 가진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저 각박한 사회 안에서 소외되는 느낌을 받아 어딘가에 의지하고 싶은 마음에 종교를 가지는 것입니다. 즉, 소통이 그립고 사람이 그리워서 종교를 가지는 것입니다. 각박한 사회가 아닌 인간미 넘치는 곳에 소속되려 합니다. 현재 철저히 합리주의적이고 이기적인 사고가 박힌 청년들이 종교를 가지는 대부분의 이유는 이것입니다. 마음의 안식을 얻으려 종교를 가집니다. 사랑을 하기 위해 종교활동을 합니다. 소통을 위해 종교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종교를 통해 소통을 하려합니다. 종교가 없어지면 많은 사람들에게 정서적 안정을 줄 대안책이 딱히 없습니다. 사회에서 종교의 배제 또한 신추종자들의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배제와 마찬가지입니다. 히키코모리들의 소통의 돌파구로 작용하던 종교가 없어지면 소외로 가득한 이 사회는 결국 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소통의 장과 방법이 명시되지 않으면 자살이 급격하게 늘어날 것이고 범죄가 난무할 것입니다. 


근시안적으로 보았을 때 종교인들은 어찌보면 사이비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원시안적으로 보면 비로서 종교가 존재하는 참 의미를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 책마을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9-07-14 12:36) 



[re] [독서후기] 난외각주, 『사람의 아들』 (3)  
일병 오학준  [Homepage]  2009-06-10 22:45:38, 조회: 116, 추천:0 

길게 답변을 해주셔서 놀랐습니다. 제대로 답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저도 비종교인이 종교에 대해 무차별적으로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음을 전제로 해서 이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어처구니없게도, 저는 지금 종교행사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합리적인 사고 자체에 내재된 폭력을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에 대한 의견 차이, 종교라는 것을 즉각적으로 폐지하려는 것이냐는 의도의 내포에 대한 의견 차이 ─ 이게 저와 태완님이 가지고 있는 의견이 충돌하는 지점을 단순하게 표현한 것 같은데, 그 점에 대해서는 일단 이정도로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서 글이 난삽한 것, 역시 또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정리되지 않은 글이니, 또 한번 냉철하게 비판해주시는 것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글의 성격에 대해서 말씀드리자면, 이 글은 종교라는 것을 믿는 게 '몰지각'이라고 말하려는 글이 아닙니다. 오히려 체계와 질서를 세우는 폭력이라는 부분에 대해서 이것 저것 생각해보는 글입니다. 동시에 이 글은 폭력이라는 것이 나쁘기 때문에 없애야 한다는 글이 아니라, 질서를 세우기 위한 폭력이 질서 바깥에 있다는 사실, 즉 질서로 환원될 수 없는 비질서의 흔적이 질서의 힘에 내재되어 있고, 그 점에서 질서정연한 재배치의 기획인 근대성의 기획이 스스로의 한계에 놓여있지 않은가 라는 말을 해보려는 글입니다.

이 점에서 종교를 믿고 전도하는 사람들을 모두 '몰지각'으로 몰아넣었다고 말하는 것은, 법체계 속에서 법의 질서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을 제가 '몰지각'하다고 말했다는 것과 비슷한 논리적 비약일 것 같습니다. 저는, 종교인의 '한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적 논리의 한계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폭력의 무차별적 폐지가 아닌, 폭력의 구분 - 법 질서를 세우는 폭력과 법 질서를 유지하는 폭력, 그리고 법 자체를 파괴하는 폭력 등 - 을 좀 더 면밀하게 한다면 우리가 그 속에서 얻는 것이 있지 않겠는가 하는 입장입니다. 아래의 인용부분에서 제가 어느 정도 혐의를 벗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저도 글 쓰면서 섬뜻섬뜻합니다. '폭력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제가 폭력적'이라는 말을 하시는 태완님의 말을 들으면서 무섭다니, 뭔가 역설적이군 하면서 말이에요.

"그러나 『사람의 아들』에서 <위대한 지혜>가 "구원도 용서도 땅 위에서 구하라"고 말하여도, 그것이 이 유죄와 속죄의 굴레를 벗어던지는 해결책은 아니다. 우리의 '법'은 항상 잠재적으로 모든 이를 기소할 권한을 가지고 있고, 우리는 법 앞에서 '분할될 수 없는 자연적 삶'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항상 유죄로 추정될 여지를 떨칠 수 없다."

동시에 저는 모든 것이 무너지는 말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또한 개혁에 대한 의지로 글을 쓴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과정에 대한 하나의 생각입니다. 만약 이 질서가 내재적으로 가지는 모순 때문에 그 기획이 붕괴한다면, 새로운 기획은 어떻게 등장하게 될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변의 모색이지, 어떤 당위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회의적이고 허상적이라는 말은 진지하게 받아들입니다. '해체'라는 부분이 가지고 있는 취약점이 바로 '그게 지금 현실적인 말이냐'라는 것입니다. 저도 여기에 대해서는 의식의 탐구 이외에 어떤 말을 더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명료하게 답변드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조금 다른 맥락에서 이야기를 하자면, 저와는 달리 폭력이라는 말을 매우 부정적인 의미에서 사용하시는 듯합니다. 저와 태완님이 알아서 자연적으로 질서가 회복될 것이다라는 입장과 질서 자체는 하나의 폭력에 의해서 발생한다는 입장으로 나뉘어있다는 점에서 차이는 있지만, 저는 폭력 자체가 질서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요구되는 무엇이라는 점이, 마치 '야경국가'처럼 필요'악'이라는 말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폭력은 그것이 무엇에 의해서, 무엇을 위해서 발생하는가를 따져보는 것이 필요한 분야라는 점을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사용할 수도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쪽입니다. 게다가 무엇인가를 '폭력이라고 폭로하는 것을 폭력'이라고 말하는 것은, '말'은 되지만 사실상 순환하면서 의미를 가지지 못합니다. 만약 그러하다면 삶의 모든 것을 폭력이라고 말하는 꼴이 되어버리지 않습니까? 그것은 제가 앞에서 말했던 바와 같이, '법'마저도 폭력이기에 어겨도 된다라는 식으로 오해할 소지가 분명히 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그리고 지금도 '소통'이라는 측면을 매우 중요시하게 여겼던 '언론학도'입니다. 그러나 분명 우리의 소통은 어느 한 면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폭력이라고 하는 부분이 우리의 관계설정에 있어서 일부러 누락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금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 솔직하게 인정하지 못하면, 우리가 매우 폭력에 익숙한 존재라는 점을 인정하지 못하면 진정한 소통은 요원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불교는 종교이면서도, 인간의 행동 하나하나에 대해 그것이 가지고 있는 폭력성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을 굳이 언급하는 것도 제가 하려는 말이 종교에 대한 무자비한 비판이 아니라, 그러한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어떤 행동을 낳을 것인가에 대한 비판적인 글을 쓰기 위함이었음을 봐주셨으면 한다는 의미에서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자연, 환경, 그리고 주변의 인간들을, 질을 가진 특수자가 아니라, 고립된 개별자이거나 우글대는 보편자로만 보지 않았는지, 그렇게 보았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가 제 관심사이자, 글의 관심사에 가깝습니다. 왜 그것이 '종교를 폐지하자'는 식으로 제가 주장했다고 여겨질 수 있는지는 조금 더 설명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타자'에 대한 소통은, 가장 심원하게 종교적일 수도 있는 내용이니까요. 자이니치에 대한 일본인의 태도와, 유대인에 대한 독일인의 태도에서 보듯, 타자는 보편자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의 집합체이자 동시에 문제의 해결점이 놓여 있는 유일한 지점입니다. 동시에 그들은 죽어도 보편적인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해결책으로 남는 것은 그를 '타자'로 만드는 폭력에 대한 인정과, 동시에 그를 보편적인 인간으로 끌어안는 따뜻한 힘을 '우리는 같은 사람'이라는 '보편에 대한 인정이 아닌 긴장의 조건'이라고, 불안하면서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덧. 이문열에 대해서 '몰지각'이라는 말을 쓴 것이, 제가 생각해도 감정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가 민요섭의 입을 빌어 화해에 대해 말하는 와중에 타자에 대한 사고가 존재하지 않다는 점에서, 이후의 글에서 보여지듯 왼파-빨강이-전라도 라고 하는 낙인찍기로 나아가는 태도가 여기에도 어렴풋이 표현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문열이라는 사람이 어떤 단절이나 변화를 겪었다기 보다는 스스로의 사고의 일관성을 가지고 글을 다듬어나갔던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그런 표현을 쓰게 되었습니다. 조금 더 순화했다면 읽기에는 덜 거북했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책마을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9-07-14 12:36)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8-24
15:58:19 



상병 김태완 
  바로 피드백작용이 일어나다니. 답글을 썼던 것에 대해 보람을 느꼈습니다. 

제가 '폭력'과 '몰지각'이란 단어에 너무 민감했던 것 같습니다. 학준님이 말씀하신대로 전 폭력이란 단어가 가진 과격성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몰지각이란 단어로 글의 종결을 맺으신 것을 보고 님이 보편적 환원을 전제로 활동하는 사람들(대표적인 예로 종교인들)을 '몰지각한 x'이라고 비하하는 듯한 태도를 가지셨다고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글을 읽으며 님도 강압적으로 변혁을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을 그리 관철하고 계시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방관'과 '소통'을 좋아합니다. 방관은 어찌보면 무책임하게 보입니다. 하지만 한번뿐인 인생 간섭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살기 좋을까요. 다들 원죄를 가지고 태어났든 같은 인간이란 종족으로 태어났든 공통분모는 있을 수 있지만 날 때부터 이미 다르게 지어졌습니다. 뜻이 서로 가지각색이니 서로 충돌이 잦을 수 밖에 없습니다. 누가봐도 정말 어이가 없는 사고를 하는 곳처럼 보이는 사람도 그의 입장에서 보면 오히려 우리가 어이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불어 사는 세상 속에서 안하무인은 환영받지 못합니다. '소통'은 대부분의 비주류자들의 생각을 바꿀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그 곳으로 유도를 합니다. 그 길이 나쁜길인지 좋은길인지는 신만이 판단할 수 있습니다. 즉, 누구도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피해를 입는 범주에 속하는 행위는 제한되어야 합니다. 더불어가는 세상이니까요. 하지만 전 되도록이면 방관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전 난장이의 춤사위나 절름박이의 노래에서 보여지는 익살과 느껴지는 애절함을 느꼈거든요. 

참 각박한 세상입니다. 단면만 보고 판단하고 저지하려 합니다. 억압하려는 세상입니다. 보이지 않지만 조여져 오는게 느껴집니다. 세상에서 느껴지는 폭력과 보편자들이 행한다고 생각되는 폭력이 전혀 같은 의미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단어가 같음에 이내 억울한 감정이 듭니다. 2009-06-11
09:51:23
  



일병 오학준 
  그러나 누군가가 피해를 입는 범주에 속하는 행위는 제한되어야 합니다. 더불어가는 세상이니까요. 하지만 전 되도록이면 방관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전 난장이의 춤사위나 절름박이의 노래에서 보여지는 익살과 느껴지는 애절함을 느꼈거든요. 


이 부분이 충분히 논쟁적일 수 있는 사안이지 않은가 싶습니다. 분명한 것은 지금 누군가 질서 바깥으로 몰려 있는 존재로, 피해를 입고 있다는 사실이고 그것을 우리가 '은폐'하고 방관하는 대가로 (우리들만의) 더불어가는 세상을 꾸리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만이 간섭을 좋다, 나쁘다 판단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방관은 충분히 하나의 선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좋다, 나쁘다라는 판단 자체를 인간 안에서 찾으려고 한다면, 방관은 선택이 되기 어렵습니다. 변화에 대한 태도의 차이가 기인하는 것도 이런 데에서 연유를 하는 모양입니다. 다만 제가 생각할 때에도 무자비하게 너와의 소통을 원하는 나, 라는 존재는 분명 방관만큼이나 위험한 방식입니다. 그것들을 매개할 무언가를 찾아내는 것이 하나의 과제라면 과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방관이라는 변수를 조금 더 생각하게 만드는군요. 2009-06-11
11:35:03
  



상병 김태완 
  내가 피해를 입으면 그 피해에 대한 보상이나 피해자와 가해자 쌍반간의 해결점을 찾으려 노력합니다. 그러나 나 아닌 누군가가 피해를 입고 있는지 없는지는 직접적으로 느끼지 못할 뿐더러 더 좋지않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첫째, 둘이서 혹은 쌍방이 알아서 해결할 수 있던 일이었거나 자연스럽게 해결될 일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슈퍼맨이다는 식의 혹은 우리는 정의의 군단이다는 식의 제3자의 개입으로 인해 일이 더 수틀릴 수 있습니다. 종교적 믿음을 막스주의의 무작위적인 사용으로 신자들에게 회의감을 불러 일으키는 사례가 여기에 해당됩니다.(종교가 주안점이었고 종교 이외의 문제들은 여기서 언급하기 제한되므로 계속적으로 종교의 사례를 들겠습니다.) 둘째, 걸러지지 않고 들리는 것에만 의존해야 하기 때문에 오보를 사실로 믿고 개입하게 되는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습니다. 제가 한국인들의 냄비정신에 회의를 느끼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셋째,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우리가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그 생각이 옳은 생각이라고 보기엔 인간은 너무나 불완전 합니다. 내가 옳다는 식의 사고는 인간이 신이 되려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다양성이라는 개념이 도입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생각은 변명으로 들릴 수 있고 비겁자의 소리로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무언가를 변혁시키기 위해 자기 자신의 삶까지 희생하면서 인류전체를 위해 혹은 내 옆사람을 위해 발벗고 뛰어나갈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요. 거기에 대해 잠시의 고민만 할 뿐이지요. 

어떠한 일이 벌어지거나 잘못된 일들이 계속 묵인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내가 이렇게 가만히 있어도 되는가? 뭔가 해야되지 않나?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생각을 접고 천천히 고개를 돌립니다. 고개를 돌리는 순간 전장에서 들리는 포격소리와 고통에 몸부림치는 소리는 이미 소리없는 아우성으로 변합니다. 그러나 그 소리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합니다. 결국 개입을 시도 합니다. 나의 개입으로 인해 나온 결과는 씁슬하기만 합니다. 내가 느끼던 포격소리와 고통에 몸부림 치던 소리는 윙하고 날아다니는 모기에 물려 간지럽다고 소리치는 소리였습니다. 멋적은 마음에 모기무는 행위가 나쁜 것 맞지 않냐고 피력합니다. 
참 비약적인 예이지만 극대적으로 비유를 들고 싶어 이렇게 예를 들었습니다. 

마음껏 뜯어물어 주십시오. 2009-06-11
13:54:12
  



일병 오학준 
  사실은 어느 정도 서로의 입장차를 명백하게 확인하고 있지만 그게 좁혀지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단순하게 표현하면 무엇이 옳고 그르다는 가치판단을 떠나서, 보수와 진보가 서로를 설득시키지 못하는 동시에 마뜩찮게 보고 있다는 현실을 지금의 말들이 대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태완님께서는 계속해서 인위적 개입의 위험성과 자연스러운 방관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저는 인간인식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러움이 해결하지 못하는 현실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개입할 것인가에 대해 말하는 것. 서로 일장일단, 하나로 해결될 수 없는 질문들입니다. 동시에 둘 다 존재해야지만, 긴장으로 존재해야지만 지금 더 건강하게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만약 저도 극단적으로 비약하자면, 모기 소리인줄 알고 내버려뒀는데 알고 보니 핵폭탄 떨어지는 소리였다면 우리는 과연 자연스럽게 그가 죽어 나가는 모습을 보고 있어야 하는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마지막 비유는 정말 '비약'에 가깝습니다. 맞는 말이지만 전부 다 설명할 수는 없는 비유, 자기 입장에 충실한 비유이기 때문입니다. 그게 틀렸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분명히 마지막의 비유는 제가 '멋적은 마음'에 모기무는 행위가 나쁜 거 아니냐고 '피력'한다는 식으로 깎아내리는 측면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2009-06-11
15:13:20
  



일병 오학준 
  덧. 
"그래서 그 생각이 옳은 생각이라고 보기엔 인간은 너무나 불완전 합니다. 내가 옳다는 식의 사고는 인간이 신이 되려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다양성이라는 개념이 도입된 것입니다. " 

이 부분은, 맨 처음 제가 본문에서 말하는 바와 크게 다른 부분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근대적 인간의 기획이 가지는 모순 자체 때문에, 신과는 달리 인간은 '원죄'라는 개념 -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있다고 여겨진다거나, 혹은 원죄가 아닌 다른 말로 표현되든 - 으로서 자신의 모순을 표현합니다. '다양성'은 신이 될 수 없는 인간의 불가능성의 표현, 맞습니다. 그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타자를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는 말, 이 말들은 제가 이미 본문에서 언급했던 바가 아닙니까? 얼마나 다른지는 규명을 해주실 필요가 있습니다. 2009-06-11
15:19:21
  



상병 김태완 
  제가 저런말을 하게 된 계기가 학준님의 본문 처음에서 언급된 글임을 잘 집으셨군요. 원론적으로 여태까지 저도 학준님이 내세우신 '인간의 원죄'적 측면으로 해석했음을 언급하고 싶었습니다. 즉, 저와 님의 생각은 같은 개념 아래서 파생된 다른 생각이기에 둘의 다름은 규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사실은 어느 정도 서로의 입장차를 명백하게 확인하고 있지만 그게 좁혀지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라고 하심으로써 저희의 입장차이가 극명함을 인정하셨는데요. 저도 이미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서로는 이미 '소통'과 '다양성'을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저희는 '심각한 문제에는 강제성을 어느정도 띄고 개입을 해야한다.', '심각하게 피해가 가지 않는 범위 내의 문제에 대한 강제적 개입은 오히려 독이 된다.'는 어찌보면 같은 맥락으로 연결되는 문제를 가지고 왈가왈부 했을 던 것입니다. 모든것이 문제 인식에 대한 '심각성'이 개인기준의 차이에 따라 벌어진 현상이었습니다. 보편적 환원을 전제하는 활동의 강요적 태도는 심각해 보이므로 강제적 개입이 필요하단 입장과, 개입은 자체적으로 폭력성을 띈다는 생각과 함께 그러한 활동들은 강제적 개입이 들어갈 정도까지 심각해 보이진 않고 만약 강제적 개입이 있을시 오히려 그들에게 역으로 그것이 개입으로 여겨져 반작용이 일어날 수 있다는 입장이 관철되며 서로 상충한 것 뿐입니다. 
결론은 이렇게 서로 물고뜯을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각자 소신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면 되니까요. 

두머리달린 용의 머리 둘이 서로 물고 뜯으려는 장면이 상상되는군요. 싸우다 머리가 두개다 뜯기면 얼마나 흉측할까요. 2009-06-11
17:29:15
  



일병 오학준 
  같은개념 아래에서 파생된 다른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규명할 필요가 없는 것임을 떠받치는 근거가 될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저로서는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다만 지금처럼 된 것의 원인에는 누군가의 '오독'이 있었던 것 같군요... 2009-06-12
06:40:29
  



상병 김태완 
  시니컬 하시군요. 아차피 서로의 주관차이에서 생긴 간극이니 논의를 계속 해봤자 헛돌뿐이죠. 그런데 누군가의 오독이 무슨 말씀이시죠? 그냥 넘길 수 없는 말이군요. 여태까지의 논의가 '오독' 때문에 벌어진 것은 아닌 것 같은데요. 2009-06-12
07:23:27
  



상병 진수유 
  흠. 2009-06-12
09:15:03
  



일병 오학준 
  시니컬하기도 하지만 진심은 진심입니다. 제가 무슨말을 하고 있는지를 꽤 여러번의 글쓰기를 통해서 어느 정도 확정지을 수 있었다는 게 분명한 소득이고, 그것에 도움을 주신 부분이 태완님에게 있으니까요. 이거까지 시니컬하시다고 하면 조금 곤란할지도. 

오독이라고 말하는 부분은... 뭐랄까, '감정적'으로 논의가 흘러가게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지 않았나 싶은 겁니다. 시니컬한 반응이 시니컬한 반응을 낳는 것 아닙니까. 몰지각에 대한 반응이라든지, 모기소리에 대한 반응이라든지 - 한쪽이 일방적으로 오독했다기보다는, 서로 좀 시니컬하게 상대방에게 대한 것은 사실인 듯 싶습니다만. 그게 논의를 이끌어가는 핵심 동력은 아닐지라도, 답글을 쓰게 만드는 힘을 만드는 데 일조한 것 같은데요. 

흠... 제가 이런 식으로 논쟁이 싸움으로 번지는 데 일조를 하고 있군요. 아직 감정 조절이 미숙한지라. 쓰고 나서 후회가 되고 있습니다. 사전에 좀 가려서 말을 해야 하는데... 2009-06-12
09:35:24
  



상병 김태완 
  괜찮아요. 사실 미숙함으로 따지면 저를 따를자가 없죠. 
덕분에 저도 오랜 방관으로부터 벗어나 열정적 논의란 것을 하게 돼서 좋았습니다. 킥 2009-06-12
09:55:52
  



일병 오학준 
  시니컬한 부분을 빼고, 정신 차리고 말씀드릴게요. 일단 태완님과 제가 가지고 있는 차이, 특히 '합리성'에 대한 인식의 차이라는 점이 주관적이라면, 그 차이는 단순히 심리적인 부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근거들에 기대고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방관'이라는 것에 대해서, 방관은 일종의 '자연스러운 해결'을 요구합니다. 구태여 이성적으로 상대방에게 개입하지 않는 자연스러움. 이전에 태완님이 길게 답해주신 글에서 "그리고 합리주의적 사고는 근대성을 따라 소통의 중요성을 자연스레 인지시켜줄 것입니다. 정지에 의한 급작스런 변화가 아닌 자연에 의한 자연스러운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는거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부분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합리주의적 사고 혹은 근대성이라고 하는 부분이 어째서 자기의 한계지점에 도달해서는 자신의 원리를 버리고 '자연'으로 회귀하는 것입니까? 통상적으로 자연은, 인간의 이성이 작용하는 대상인 동시에, 여전히 객체로 환원되지 않는 복합적인 덩어리로 봅니다. 그런데 여기로 돌아간다는 것은 근대성의 원리 자체가 가지고 있는 한계를 스스로 인정하시는 것으로 봐야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합리성이 '미완'의 기획이라는 부분에 대해서 논리적으로는 납득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물론 그 부분에 있어서, 자연과 인간의 합일이라는 낭만주의적 회귀나, 자연에서 인간의 탈피를 돌아갈 수 없는 진보로 보는 입장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이 부분이 지금 저와 태완님이 이야기하는 차이의 핵심은 아닌 것 같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방관을 믿는 동시에 근대성의 기획에 자신감이 있을 수 있는가, 그것은 단순히 주관적인 차이라기 보다는 조금 더 논리적으로 규명해주셔야 할 부분입니다. 오히려 방관은, 합리성의 기획이 스스로를 파괴하는 것을 애초부터 포함하고 있다는 제 입장에서, 관조라는 말로 사용하는 게 더 적합하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다만 논리적인 귀결에도 불구하고 제가 관조라는 말을 쓰지 않은 것은, 아도르노와 같은 관조적 실천이라는 말이 얼마나 우리의 삶이 망가지는 것을 구원할 수 있느냐, 하는 소심한 질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답을 찾지 못했고, 그렇기 때문에 본문에서도 아도르노는 이렇게 말했다, 정도 까지만 언급할 뿐 구체적인 파괴의 형상을 제시하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벤야민이 이야기하는 방식, 슈미트가 이야기하는 방식이 어떤 해답이 될 수 있는가라는 생각에 '주권' 부분을 삽입한 것이구요. 

논리적으로 상충하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을 주관적인 차이로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그 근거들을 정렬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조금씩 그 차이를 해소하는 데, 여기에서 도움을 얻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태완님께도 저는 요청을 드립니다. 합리성에 대한 일종의 상반된 태도를, 어떻게 하나의 주장으로 묶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셨으면 합니다. 조금 더 생산적인 논의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주관성으로 다양성이 해소된다면, 우리는 여기에 모여 있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단지 자신의 주관을 심화-확대시킬 자료를 입맛대로 찾기 위해 있는 것이라면, 모든 투쟁은 힘의 대결로 귀결되지 않겠습니까...? 2009-06-12
10:03:23
  



일병 오학준 
  노파심에 덧붙이자면, 주관성 자체를 업신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이르는 과정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사실 마지막에서 두번째 부분은 제 주관이 뚜렷하게 개입하는 부분이니까요. 저도 태완님의 주장 자체에 대해서는 충분히 수긍을 하고 있습니다. 그저 저는 그 주장으로 이르는 근거들이 놓여있는 방식에 대해 마지막으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럼 좋은 의견 부탁드립니다. 2009-06-12
10:13:10
  



상병 김태완 
  곧 KTX 비슷한 것을 탈 것이니 준비하라 그래서 정신없이 바빴습니다. 
조금 답변이 늦은 감이 있군요.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2009-06-12
16:15:01
  



상병 김태완 
  무언가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투쟁을 해야 합니다. 무언가를 개혁하려면 기존의 것에 대항해야 합니다. 대항하려면 힘이 있어야 합니다. 전쟁에서 힘이 군대의 전투력이라면 논의에서의 힘은 다수나 지위에 의한 권력입니다. 혼자서 아무리 떠들어 대도 그가 파시즘의 제왕이 아닌 이상 그것이 공용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보수가 이기냐 진보가 이기느냐는 특정 사고나 사상이 타자들에게 잘 받아들여져 다수를 확보하여 마이너리티들에게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느냐 없느냐 성공 여부에 의해 결정되죠. 논의를 하는 것은 내 주관과 일치하는 그룹을 다수로 만들기 위한 노력입니다. 대다수의 입맛에 맞다면 그것은 우리 사회에서 '합리'로써 불리겠죠. 

애초에 방관자라 칭한 것은 근대성 기획에 자신감이 있어서 말씀드린 것이 아닙니다. 방관은 그 자체의 단어에서 풍기는 이미지에서 볼 수 있듯이 상당히 무책임한 태도입니다. 남이 죽어가고 있는 상태에서의 방관은 몹쓸 짓이지요. 하지만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든 상관없는 경우에는 그냥 알아서 진보하든 퇴보하든 내버려 두어도 상관없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전 모더니즘도 좋고 포스트 모더니즘도 좋다는 생각합니다. 왜냐면 지금은 다양화 시대이고 이것이 근대적 생각이니까요. 이러한 제 생각에서 알 수 있듯이 "정지에 의한 급작스런 변화가 아닌 자연에 의한 자연스러운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는거죠."라는 말의 의도는 자연으로의 회기가 아니라 모든 일들을 자연에 귀속되는 일로써 생각하고 자연이 알아서 사시사철 변하는 모습같이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문제도 결국 그와 같은 변화 즉, '합리'의 변화를 알아서 이루리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저 말엔 도자사상이 첨가되었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저희의 의견차이를 하나로 종속시킨 것은 '인간의 불완전성'이었습니다. 애초에 구원이라는 말 자체가 모순입니다. 신이 아닌 이상 인간의 간섭은 '구원'과 '강압' 상반된 개념을 모두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내가 아무리 합리적이라 생각한들 보편적 합리성을 띄고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전 분명히 '합리성'에 대한 생각의 상반됨이 아니라 일에 대한 '심각성'에 대해 느끼는 서로의 정도차이 때문에 논의가 일어났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심각성 인식에 대한 차이에 의한 논의는 그것이 상충되어 있기는 하나 서로 정반대선상에 있지 않기 때문에 투쟁적일 수 없습니다. 심각하다 싶으면 개입하면 되는 것입니다. 개입 안해도 상관없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는 것이지 개입을 하면 안된다는 입장이 아니므로 서로 충돌할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제 근거가 미약하다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전 남의 생각들을 선택적으로 인용하여 열거하는 것만이 올바를 주관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방식은 내 주관 확립에 도움을 줄 수 있지만 개성적 주관을 가지는데 방해가 될 수도 있다고 봅니다. 또한 남을 배려하는 태도라기보다 고차원의 지식을 뽐내려는 행동으로밖에 보여지지 않습니다. 아도르노를 모르고 벤야민을 모르고 슈미트를 모르면 논의에 낄 자격이 없는 것입니까. 전 이러한 가식을 싫어합니다. 주지주의자들의 권위주의적 태도를 그대로 답습하라 하시면 정중히 거절하겠습니다. 2009-06-12
16:20:14
  



일병 오학준 
  길게 리플을 써 놓고 지웠습니다. 

일단은 천천히 생각을 하면서 처음으로 거슬러 올라갔을 때, 태완님의 지적 - 서로 같은 것을 놓고 심각성의 차이로 논쟁하게 된 것 - 을 수긍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 여전히 저는 심각성의 차이가 아니라, '합리성'이라는 것을 무엇으로 인식하느냐에 대한 차이가 저와 태완님 사이에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만, 제 스스로 '합리성'이라는 것을 설정하는 데 있어 혼선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부분에서는 서로의 합리성에 대한 설명이 겹치면서도, 어떤 부분에서는 서로 다르게 나아가는 것이 제 스스로의, 스스로에 대한 오식이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점에서 조금 더 가다듬어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 태완님 덕분에 기회가 생긴 것 같아서 고맙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졌습니다. 

사실 주지주의자라는 말에 대해서 한번 더 불만을 제기하려다가, 그것이 그저 제 감정적인 미련일 것 같아서 지웠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삭이고 안으로 한번 더 생각하며 정리하다보니, 조금씩 명료해지는 바가 있더군요. 저는 주말이 지나고 잠시 바깥나들이를 다녀오게 되어서, 그 떠오른 바를 단시간에 설명하여 보여드리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바깥에서 다스리며 조금 더 생각을 정리하고 오겠습니다. 2009-06-12
19:47:01
  



상병 김태완 
  오. 바깥나들이를 다녀 오시는군요. 얼마나 심신을 수양하고 오실런지 모르겠군요. 왠지 절세무공을 익히고 돌아오실 것 같은 분위기가 풍깁니다그려. 잘 다녀오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