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베스트-독서후기] 예수의 부활을 위해, <예수전>(김규항)  
상병 홍명교   2009-06-03 15:43:06, 조회: 304, 추천:1 

책을 읽는 것보다 책에 대한 감상을 쓰는게 백배는 더 어렵다. 1년 넘게 미친듯이 책을 읽어대고 있는데, 무언가 진짜 나의 것으로 남기고 있는건 얼만큼인지 가끔씩 의심을 품게 되는 요즘이다. ex-libris라도 남기고 싶어서, 주요한 대목이나 인상깊은 구절마다 노트에 메모를 하며 읽느라 속도가 더디긴하지만, tv도 안보고 주말이나 상황근무 시간이면 내내 책만 읽는 통에 읽는만큼 나누지 못하는 아쉬움이란. 마르케스와 뒤라스 등 일군의 작가들을 기점으로 1년여에 걸친 고전문학 기행도 거의 끝나간다. 최근에는 쉬어가며 이런 저런 책들을 읽고 있다. 미술사나 건축에 대한 책들, 롤랑 바르뜨의 텍스트들, 기타 등등. 그러다가 얼마 전에는 <예수전>을 읽었다.(5월 27일~30일) 몇달전부터 벼르던 터였다.

이 책은 김규항씨가 수년만에 내놓은 단행본이다. 아마 <나는 왜 불온한가> 이후로 처음일 것이다. 열여덞살일때, 좋아하던 여자아이 J(지금은 신림동에서 몇년째 사시공부중이다.)가 있었는데 그때 J가 <B급 ㅈ파>라는 책을 추천해주었었다. 당시 유시민의 유수한 저작들로부터 자유주의자의 향기를 물씬 맡으며 영예로워하던 나로써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J같은 아이가 저 불온한 제목의 책을 읽다니!" 이런 느낌이었을까. J는 잘나가는 판사 아버지의 딸이었고, 부자집 딸이었으니까. 나는 뭔가 단계적으로 홍세화책을 다 읽고, 김규항의 그 책을 읽었다. 그는 내게 홍세화를 넘어서는 신선한 충격이었고, 내 태도나 스타일에도 너무 잘 맞았다. 직접행동을 강조하고, 한국사회의 모든 권위에 통렬한 조소와 비판을 가하는 그의 필체는 열혈같은 열아홉 소년에겐 너무나도 통쾌하게 다가온 것이다. 아마 그즈음부터 컴퓨터 게임에 대한 재미를 모두 잊어버린 것 같다. 김규항은 그 책에서 '어떤 대학생'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말한다. 안타까움이 가득한 통렬함으로.

이 책은 그후로는 처음이다. 애초에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서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의 예수"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예수만큼 이야기꺼리, 연구꺼리가 많은 소재는 없을 것이다. 이 엄청난 인물은 서양의 역사와 철학, 인문학, 예술 등 모든 것에 대한 일대변혁의 출발지점과도 같은 '모두의 고향'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포쓰를 지니고 있으니까. 이것은 기독교인이건, 아니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김규항의 신간 <예수전>은 예수를 온전히 "역사의 예수"로 돌려놓고서 바라본 책으로, 신약성경 중 우리가 흔히 '마가복음'이라고 부르는 <마르코 복음>을 강독 형식으로 읽으며 그의 삶을 되짚어가는 텍스트이다. 애시당초 저자의 계획은 오늘날의 기독교에 대한 강렬한 비판을 겨냥한 것으로 "원래 예수는 그렇지 않았다"는 방식의 논쟁적인 텍스트를 화두별로 작성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작업을 시작하면서 강독 형식으로 변화됐고, 한 사람의 독자인 나는 이 방식이 너무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밀히 따져 나는 종교가 없는 사람이다. 그것은 가족적인 분위기와 살면서 겪은 경험과 환경들의 영향일 것이다. 게다가 난 무언가를 맹렬하게 믿기에는 너무 권태롭고 시니컬한 인간이다.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는 고 문익환 목사와 비슷한 시기에 한신대학교 신학과를 나와 목사를 수십년하셨지만, 도중에 목사하기를 그만두시고 카톨릭으로 개종하신, 정말 만나기 힘든 스타일의 삶을 사신 분이었다. 용인의 어느 시골교회 목사를 하시던 할아버지의 개종의 변은 "한국의 장로교회는 너무 썩었다"는 것이었다. 그후로 종교와 신에 대한 갈등과 고민은 우리 가족의 뿌리깊은 토픽이다. 어린 시절엔 '프란치스코'라는 세례명까지 받은 천주교 신자였지만, 고교시절엔 친구들 따라서 동네의 유명한 장로교회에 2년가량 다니기도 했던 나는, 종교에 대핸 무한히 열려있으면서도 씨니컬하다. 한때는 누구말처럼 "아편"으로 여기기도 했는데, 지금은 그렇게 말하고 다녀선 안된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한국사회 교회의 모습은 의문꺼리만 가득 안겨준 실망스러운 모습 뿐이었다.(물론 때때로 훌륭한 목사나 신부를 만난 적도 있다. 요컨대, 생태운동에 모든걸 바치며 살아가는 문정현 신부같은 사람.) 내가 다니던 Y교회에는 김영삼의 아들 김현철(한때 소통령이라 불렸던, 당시의 그는 수천억 비자금 문제의 주역이었다.)이 다녔다. 그때도 열여덞살이었나?(생각해보니 열여덞에는 참 많은 일이 있었구나.) 어느날 목사가 김현철을 배웅나가며 교회밖 100미터앞까지 따라나오는 모습을 보자, 다시는 그 교회에 가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 모습이 내겐 너무 비겁해보였다. 이처럼 내가 만난 대다수 성직자들은, 예수가 전한 복음은 줄줄 외고 누구보다 자신있고 우렁차게 외치면서도, 사회적으로는 도무지 그것을 어떻게 실천해야하는지 전혀 생각치도 않을뿐만 아니라 무감각하기까지한, 현대판 바리새인과 같은 존재였다. 그것은 조용기 목사와 같은 이름 높으며 돈도 많으신 성직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는 (천주교 포함) 현실에 대해서는 지독하리만치 무감각하고 침묵으로 일관한다. 이는 예수가 이스라엘 땅에서 제자들과 함께 실천한 사회적 행동들과는 너무도 다르다. 예수는 철저히 가장 밑바닥에서 가장 고통받고 (성직자들로부터) 조롱받는 이들과 함께 했다. 그리고 항상 현실의 문제에 대해 말하며, 노동의 비유와 성경의 비유를 들었을 뿐이다. 현실에 대해 침묵하는 것이 마치 모두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지닌 사랑의 가장 차원높은 실천양태인냥 행동하는 현대의 성직자들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다. 

<예수전>은 16장으로 구성된 <마르코 복음>의 대목대목마다 읽고, 그에 따라 김규항이 강독하는 형식의 '다시 읽는 마르코복음'이라 부를 수 있는 책이다. 저자가 다른 복음이 아닌 마르코복음을 택한 것은 역사적으로나 사료적으로 그것이 가장 실제에 근접해있고, 또한 덧씌워지거나 지나치게 신화화된 군더더기가 적다고 판단됐기 때문이다. <마르코복음>이 쓰여진 시기는 AD 70년경인데, 3세기경에 덧붙여진 부분은 따로 표시해두는 섬세함까지 보태두었다. 마찬가지로 한신대 신학과 출신(아마도 '중퇴')인 저자의 오랜기간에 걸친 고민과 연구의 흔적이 책의 행간마다 묻어있다. 책의 종반부에 저자가 예수 부활의 의미론적 해석을 붙인 점은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말들 뿐이었다. 당시에 예수가 부활했다는 지점에 대해 지나치게 '실증적'이지도, 그렇다고해서 신화적으로도 해석하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그것이 실제냐 아니냐의 판단보다 더 중요한 부활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논한 것. 예수가 나타나기 전 유대인들은 오랜기간의 식민지 생활로 지치고 고통받아왔다. 그들에겐 고난의 시기에 '예언자'가 나타나는 예언자의 문화가 있었는데, 모세나 다윗이 그랬고, 이사야나 요셉이 그러했다. 예수의 등장은 당시에는 요셉과 같은 한 예언자의 등장과 다르지 않았다고 할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살면서 가장 밑바닥에서 가장 열정적인 복음을 전파했고, 권력과 지배계급에 대해서는 비타협적으로 맞섰다. 다른 누구보다 더 바리새인들과 격렬한 논쟁을 벌인 것은 율법주의자들인 그들의 위선적인 모습들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비타협적인 태도 때문에 죽음을 맞이하기도 했다. 그가 스스로의 죽음을 통해 보여준 진리는 저항과 삶의 태도와 같은 것이었다. 따라서 그가 부활했다는 말의 의미는 단순히 육신의 부활을 뜻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것이다. 종교적인 의미의 차원이 아니다. 성경이라는 텍스트가 로마로 전파되면서 일종의 자기완성적인 가르침을 완성하기 위해 그리 만들어내기라도 한 것처럼 '부활'이라는 맥락을 부여했다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이것은 해방의 텍스트로서 옳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종교적이고 체제안정화를 위한 '장치'로서 오도/왜곡되는 과정이 문제였던 것일 뿐. 저자는 이 지점에 대해 로마시기 이스라엘 민중에 대한 극악의 탄압을 근거로 든다. 예수의 죽음 이후 이스라엘의 가난한 피지배계급에게는 더 이상 희망이 보이기 어려운 상황이 닥친다. 그들은 역사적으로 더더욱 힘든 시기를 겪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의 부활은 어떤 의미로 받아질 것인가. 언젠가 다시 우리에게도 해방의 그날이 올 것이라는 믿음, 그리고 "삶의 태도로서의 죽음"이라는 은유! 그것이 살아돌아오는 예수의 모습일 것이다.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는 역사상 가장 고결하며 자기희생적이었던 혁명가였으며, 아이러니컬하게도 가장 반대쪽에 의해서 왜곡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 절망적인 세계에서도, 어떤 의미에서 예수는 지금도 계속 새로운 의미로 거듭나며 살아있다. 팔레스타인에서 거대한 탱크를 향해 돌맹이를 던지는 어린 아이에게서, 용산의 철거민들에게서, 폐쇄된 직장에서 출근날만 기다리는 어느 노동자들에게서.

<예수전>의 일독을 권하며.
* 책마을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9-07-14 12:37)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8-24
15:58:43 

 

상병 김예찬 
  몇 년을 기다려왔던 책인지.. 

언젠가 제 일생(?)을 돌아보며, '압도적으로 기독교적 세계관이 지배하는 가정 환경에서, 역으로 기독교를 돌파할 지적 권위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왔다고 쓴 적이 있습니다. 한창 고민하던 시기에 '김규항의 예수'를 만난 것은 예수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열어준 계기가 되었죠.. 2009-06-03
15:54:44
 

 

상병 진수유 
  잘 읽었는데 <예수전>을 읽지 못해서 비판적으로 접근하기는 어렵네요. 흥미롭습니다. 단순한 꺼리를 위한 글이 아님을 분명히 알고 있기에, 진심에 대한 희망을 품습니다. 꺼내 보고 싶은 이야기들도 꽤 많지만.. 미뤄야겠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한 번 읽어봐야겠네요. 2009-06-03
16:14:07
  

 

상병 김태완 
  예수의 부활에 대한 생각이 제 생각과 꼭 닮아 있군요. 다들 신성을 강조하는데 인성적으로 접근하면 충분히 저와 같은 생각을 할 수 있죠. 그러나 또 인성적으로만 접근하면 신앙생활을 통해 존재 인식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 마음의 안정을 얻으려고 믿는 종교가 종교로써의 기능을 잃을 수 있으므로 인성과 신성에 대한 인식의 적절한 조율이 필요하겠죠. 

잘 읽었습니다. 2009-06-04
11:02:25
  

 

상병 지민웅 
  멋진 후기군요. 한국의 장로교회는 썩었다는 말이 절절하게 들려옵니다. 최근 <한국 교회의 7가지 죄악>이라는 책도 나왔더랬죠. 2009-06-04
14:49:52
  

 

상병 이 원 
  허... 저랑 생각이 비슷하시네요 
뭐 책을 한번 읽어봐야겟다는 생각도 드는군요. 
하긴 교회를 다니면서도(사실은 그 이상의 목적이 있을지라도) 일관적인 교리로서 일관하는 닫힌 생각들 - 어쩌면 정말 그네들이 말하는 이단이 자신일수도 있을만큼- 이 얼마나 무섭게 다가오는지 알게하는것 같네요. 종교라는 것도 어쩌면 사람의 입술에서 시작되었는지 모를일이잖아요 큭큭 

후기 감사합니다. 책은 구해봐야겟어요. 연대에는 있을런지 후후 2009-07-28
01:59:06
  

 

병장 홍길동 
  질문이 있습니다. 
<B급 ㅈ파>의 저자와 책제목을 알 수 있습니까? ```